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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의 지천(필동천)을 따라서(7)
◇ 필동천(筆洞川) : 남산~필동 2~충무로역~세운상가~청계천
- 남산에서 흘러내려 한옥마을, 필동 2가, 세운상가를 거쳐 청계천으로 흐르는 지천
필동천(筆洞川)은 남산 북사면에서 발원해서 남산골 한옥마을, 필동2가, 충무로역을 지나 세운상가를 거쳐 중구 산림동에서 청계천에 합류하는 물줄기이다. 이 물줄기가 흐르는 지역은 조선시대 부동(部洞) 또는 붓골(筆洞)이라 하던 지역을 흘러 내려가므로 필동천이라고 하였다.
필동천은 ‘부동천(部洞川)’이나 ‘암이문동천(暗里門洞川)’으로도 불렸는데 현재는 완전히 복개되어 볼 수가 없다.
필동천은 현재 충무로역 부근의 필동교를 거쳐 영풍교로 이어지는데 지천(支川)의 교량은 대개가 나무다리였다. 이 다리의 대부분은 조선 초의 태종~세종년 간에 가설된 것으로 보인다.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에는 필동천 상류를 모티프(motif ; 동기)로 한 인공 물길·냇가가 조성되어, 지난 날의 계곡과 물길 풍경을 상징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 금위영의 분영, 남별영(南別營) 터 : 중구 필동 2가 103번지
- 조선시대 서울 수비를 위한 금위영의 분영(分營)
남별영 터는 남산 아래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고 했으므로 그 위치는 현재 ‘한국의 집’ 남쪽에 해당하며 금위영의 분영(分營)으로 군사 주둔지였다.
금위영은 훈련도감, 어영청 등과 함께 궁성의 금위(禁衛)는 물론, 서울 수비를 위한 군영으로 경기 이남 수비병의 본영이었다.
남별영 남쪽에는 남창(南倉)이 있었는데 101칸이었고, 북쪽에는 하남창(下南倉) 104칸, 남창 서쪽 기슭에는 17칸 되는 화약고가 있었다.
또한 남별영 계곡에 ‘아계(丫溪)’라고 새긴 바위벽 아래에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있는 정자 천우각(泉雨閣)은 남산 계곡 깊숙한 곳에 있는 까닭에 피서지로 알려져, 여름이면 장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 남산골 한옥마을 : 중구 필동 2가 84-1번지
-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한 곳을 서울시가 민속자료로 지정된 한옥 5개 동을 이전, 복원
남산골 한옥마을 일대는 일제 강점기 때 헌병사령부와 헌병 분대가 있었고, 인근의 필동 2가 80번지에는 정무총감 관저가 있었다. 조선군사령부는 처음에 조선 주차군 사령부로, 1908년 10월 1일 용산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왔고, 1914년에 조선군 사령부로 개칭되었다가 광복 후에 미군이 주둔했다.
한국군 창설 후 이곳은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 잡았다가 1991년 3월에 이전해 가자, 서울시에서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오랜 세월 동안 훼손된 24,180평의 대지를 지형 복원하고, 전통 정원으로 꾸미면서 서울 각처의 민속자료로 지정된 한옥 5개 동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여, 1998년에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이곳에 이전된 한옥은 종로구 관훈동 박영효 가와 삼청동 김춘영가, 옥인동 윤비 친가(복원), 중구 삼각동 이승업가, 동대문구 제기동 윤택영가이다. 이들 한옥은 이전하면서 그간 노후화하여 멸실(滅失)된 부분까지도 모두 복원함으로써 서울 지역의 서민 생활로부터 사대부 신분에 걸맞은 가옥의 양식과 생활방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이 한옥촌은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을 수시로 감상할 수 있는 음악 공원으로도 조성되며, 프로그램에 의해 진행되는 우리의 연극, 놀이, 춤 등이 공연되어 우리의 옛 문화와 만나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한지 생활 공예전, 장 담그기(강좌, 시연, 실습), 민속주 제작, 민화장, 오죽장, 체장, 송절주, 침선장, 초고장, 나전칠기 등 전통공예와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실연으로 한문 강독, 사군자, 서예 등 다채로운 행사가 실제로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남산골 전통 정원 위쪽 광장에는 1994년 6월 21일, 서울시가 ‘서울 600년 사업’으로 400년 뒤에 후손들이 보게 될 타임캡슐을 매설하는 「서울 1천 년 타임캡슐 광장」 조성 사업을 기공하여 11월 29일에 마무리하였다.
이 타임캡슐 안에는 서울시청의 각종 공문서와 현대 문물 등 600점이 들어 있으며, 이 캡슐은 매설 후 400년이 지난 2394년에 후손들의 손에 의하여 발굴하게 된다.
◇ 한국의 집 : 중구 필동 2가 81번지
- 코리아하우스 대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생활 문화를 한자리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시설
이곳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생활 문화를 한자리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집’이 세워져 있다.
1979년 문공부에서 옛 코리아하우스를 헐고, 그 자리에 20억 원을 들여 공사에 착공한 지 2년 만인 1981년 2월 20일에 문을 열었다.
이 집은 한국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살려 지었다. 관람석 100석의 민속극장이 있어서 매일 오후에 우리 고유의 춤과 음악을 연주하고, 마당은 전통혼례식을 올리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 남부학당(南部學堂) 터 : 중구 필동 1가 30번지(남학당)
- 조선시대 5부 학당 중의 남쪽에 있는 중등교육기관
이곳에는 조선시대 서울 5부(五部)마다 설치된 중등교육기관의 하나인 남부학당(南部學堂)이 있었다.
남부학당, 즉 남학당은 태종 11년(1411) 6월에 예조참의 허조의 건의로 이곳에 독립된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9월에 완성하였다. 남학당은 5부학당 중에서는 처음으로 독립적인 학당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세종 1년(1419)에는 개성에서 폐사(廢寺)의 목재와 기와를 옮겨와 남학당의 동, 서재(東西齋)를 증축하였다.
세종 27년(1445) 이후 북부학당이 폐지됨으로써 5부 학당이란 표현 대신 4부 학당이란 이름이 나타나며, 4부 학당은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토지·노비 및 어장(漁場)의 수입을 하사받아 교육비용에 충당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남학당은 소실되어 광해군 2년(1610) 이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말 고종 31년(1894)까지 존속되었다. 이 터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남아 있어 깨진 기왓조각이나 주춧돌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39년 「퇴계로」전신인 「소화통(昭和通)」이 개설되면서 일대가 정비되었고, 6․25전쟁 중에 충무로 · 명동 일대의 폭격으로 인해 폐허가 되고, 1952년에 「퇴계로」가 확장되면서 남학당 터는 찾기 어렵게 되었다.
◇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 집 터 : 중구 필동2가 80-2 일대(한국의 집 정문)
- 조선 초 사육신의 한 사람인 형조판서 박팽년 살던 곳
충무로 4가의 생만(生民) 골에는 조선 초 사육신의 한 사람인 취금헌 박팽년(朴彭年)이 살았다.
동국여지비고에 보면 「박팽년의 집이 낙선방 생민동에 있는데 반송(盤松) 한 그루가 있어서 ‘육신송(六臣松)’이라 했으나 지금은 고사(枯死)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곧 취금헌 박팽년이 살던 집안 뜰에 있던 소나무는 그 자신이 사육신의 한 사람을 상징하였으므로 ‘6신 송’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박팽년은 세종 16년(1434)에 알성문과에 을과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 20년(1438)에는 성삼문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는 경학(經學), 문장, 필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여 모인 학사들이 그를 ‘집대성’이라 불렀다.
어느 날 박팽년이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에 입직할 때 세종께서 친히 거둥하여 내린 술에 취해서 눕자, 세종은 남의(藍衣)를 벗어 손수 덮어 주기도 하였다. 그는 광주(廣州)에 얼마간의 논밭이 있었으나 어느 친구가 “그대는 녹봉만으로도 족한데 하물며 땅은 가져서 무엇 하겠는가?” 하자 즉시 토지를 팔아버린 일이 있다.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 재임 시에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 거사를 추진하다가 김질(金礩)의 밀고로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껴 회유했으나 대꾸하지 않고, 처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 류성룡 집 터 : 중구 충무로 60-1번지
- 조선 중기에,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징비록』 등을 저술한 문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154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의성에서 태어나 현재 중구 인현동 1가와 묵정동 지역인 남부 낙선방(樂善坊) 묵정동계(墨井洞契)에서 살았다.
그는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여 친분이 두터웠다.
1566년(명종 21)에 문과에 급제한 후 도승지·예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왕을 평양까지 호송하였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전란을 대비하여 권율을 의주 목사, 정읍 현감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게 천거하였다.
류성룡은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하고, 영의정으로서 4도(四道)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이어서 의주에서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을 설치하도록 요청하여 1594년에 이 군사 기구가 설치되자 그 책임자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류성룡은 도학(道學)·문장·덕행·글씨로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의 저서 중에서 징비록(懲毖錄)과 서애집(西厓集)은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류성룡을 모신 안동 하회(河回)마을의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 중구 인현동 1가 31-2번지(신도빌딩)
- 조선시대 정읍 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수군을 지휘하여 왜군을 격파한 명장.
(1) 충무공 이순신의 탄생지, 고증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보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조선 초 인종 1년(1545) 4월 28일(음 3월 8일)에 한성부 남부 마른 내골[乾川洞]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마른 내골은 인현동 1가 30번지 부근의 마을이다. 현재 필동천인 마른 내[乾川]는 모두 복개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남산1호터널~남산 한옥촌~매일경제신문 사옥~충무로역~인현동 1가를 가로질러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지천이다.
마른 내는 말 그대로 비가 오지 않은 날은 바닥이 말라 붙어서 도로로 사용되지만 조금이라도 비가 내리면 금세 냇가로 변했다. 선조 때 허균(許筠)의 형 허봉(許篈)은 성소복부고(性所覆瓿稿) 권 24에서 이 지역은 국조(國祖) 이래로 명인(名人)이 많이 탄생한 곳이라 하였다.
마른 내 근처에서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麟趾)와 두만강 호랑이라 일컫던 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한 이계동(李季仝),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면서 놓지 않았던 양성지(梁誠之), 청빈한 대학자 김수온(金守溫)을 비롯하여 이병정(李秉正)이 살았다.
이곳에는 중종 때 유순정(柳順汀), 권민수(權民手), 유담년(柳聃年), 선조 때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 허봉(許篈) 오누이와 임진왜란 때 해전을 이끈 원균(元均) 등이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충무공의 탄생지나 성장한 곳이 충남 아산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아산의 현충사가 성역화된 데에서 기인한다. 충무공은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1956년 12월 5일에 한글학회와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가 공동으로 충무공의 탄생지를 답사하여 중구 인현동 1가 40번지(현재는 지적 변동으로 인현동 1가 31-2번지)로 고증하였다.
이 당시 충무공의 탄생지 고증은 문헌 기록과 고지도를 대조하고, 지형지물, 고로(古老)의 증언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68년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동명연혁고』는 향토 사학자 고 김용국(金龍國) 선생이 집필하였는데 그는 이 글에서 충무공의 탄생지를 인현동 1가 40번지로 고증한 것을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분(李芬)의 충무공 행록(行錄)에 「····공 생우한성건천동가(公 生又漢城乾川洞家)」라고 하여 충무공은 건천동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18세기에 그려진 「도성대지도」에 보면 건천동은 인현동 지역으로 나타나고, 선조(宣祖) 때 허균의 형으로 이조 좌랑을 지낸 허봉(許篈)의 『성소이봉고(惺所履瓿稿)』에는 청녕공주(靑寧公主) 저택 뒤편~본방교에 이르는 부근 건천동에는 양성지, 유순정, 충무공 등의 유명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기록하였음을 볼 때 충무공이 건천동, 즉 현재 인현동 1가 부근에서 탄생한 것으로 고증하였다.
충무공의 탄생지는 현재 지하철 2호선 을지로4가역의 삼풍상가 부근의 「인현길」로 들어서면 속칭 ‘충무로 인쇄골목’인 규모가 작은 인쇄소·스티커·금박·지업사 외에 식당들이 밀집되어 있어 복잡하다.
이 길에서 명보극장 방향으로 80여 미터 가다가 삼풍상가로 나가는 인현1길 모퉁이에 세워진 4층의 신도빌딩(중구 인현동 1가 31번지 1호, 2호) 자리가 충무공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충무공 이순신은 21세에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무공의 선대는 한양에서 5대에 걸쳐 거주하였는데 대제학을 지낸 고조부 이변(李邊)은 84세까지 이곳에서 거주하고,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후부터 문관이 아닌 무관 집안이 되었다고 전한다.
충무공과 같은 마을에 살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고 하였다.
충무공은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전쟁에서는 물러섬이 없는 용장(勇將), 전략 전술에 밝은 지장(智將), 부하들에게는 믿고 따를 덕장(德將), 가족에게는 다정다감한 자식으로, 남편으로, 부모로 전사하는 순간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성웅(聖雄)이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7일 자에 사관(史官)이 쓴 이순신의 졸기(卒記)를 보면,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丁酉年)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이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이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 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이순신이 명나라 장수 진인(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명나라 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창 혈전을 하던 중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이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丙申年)과 정유년 간의 통제사에서 체질(遞職)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
이 기록을 보아 충무공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 수 있다.
1985년에 서울특별시에서 세운 충무공 탄생지 표석(標石)은 명보극장 앞(중구 인현동1가 2번지)에 세워져 있다. 원래 이 표석은 충무공 생가터인 인현동 1가 31-2번지에 세워 놓아야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곳에 설치하기로 한 원칙에 따라 이곳에 설치된 것이다. 현재 세워진 표석 문안을 보면
『충무공 이순신생가지(忠武公 李舜臣生家址)』
「이순신(1545~1598)은 조선 중기의 명장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옥포·한산포 등에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었다.
선조 31년(1598) 노량에서 전사하였으며, 글씨도 능하여 《난중일기》를 비롯하여 시조와 한시 등을 많이 남겼다.」
라고 되어있다.
(2) 충무공의 일생과 구국 정신
마른 내동[乾川洞]에서 조선 초 명종 때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21세에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수 이씨 종친회 이재신 회장에 의하면 충무공의 선대는 한양에서 5대에 걸쳐 거주하였는데 고조부 이변(李邊)은 성종 때 대제학을 지낸 분으로 84세까지 이곳에서 거주하고,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후부터 문관이 아닌 무관 집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충무공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다. 아버지는 정(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수림(守琳)의 딸이다. 증조부 거(綱)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조부 백록(百祿)은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부친 정(貞)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충무공이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 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 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충무공은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충무공이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 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32세 선조 9년(1576)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사복시 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충무공은 첫 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있을 때 류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전년도인 47세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거북선 등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이 거느린 함대는 5월에 옥포 · 합포의 해전, 계속해서 6월에 당포, 당항포의 해전에서 승리하고, 7월에 한산도에서 왜선 40여 척을 격파하는 등 대첩을 거두었다. 이어서 안골포, 부산, 마산의 왜군을 궤멸시켜 남해안 일대의 왜군을 소탕하자 충무공은 10월에 3도 수군통제사를 겸하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는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조선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충무공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 영의정 류성룡을 몰아내려고 하는 반대파가 충무공은 류성룡이 전라 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므로 이를 구실로 먼저 충무공이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도 이순신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이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충무공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체포, 압송하고 원균이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류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 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충무공은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이때,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충무공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라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충무공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 번째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의 수군이 1597년 7월에 왜군의 유인 전술에 빠져 거제에서 전멸함에 따라 충무공은 다시 통제사로 기용되어 8월 15일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과 맞서 31척을 격파하는 명량(울돌목)대첩을 거두었다.
이듬해 1598년 11월, 노량(鷺梁)에서 퇴각하는 왜선 500여 척을 공격하다가 왜군의 유탄(流彈)에 맞아 전사하였다. 충무공은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충무공의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哭)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충무공이 전사한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다. 충무공이 전사한 사실을 알게 된 모든 군사는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라며 외쳤다. 충무공의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이 애통해하였다.
충무공은 해전의 승리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의 국가 사직(社稷)을 지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란 중에는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써서 남겼고, 우국충절(憂國忠節)의 시를 여러 편 남겨 놓았으므로 겨레의 성웅(聖雄)으로 추앙되어 세종로 네거리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東平館) 터 : 중구 인현동 2가 192번지
- 조선시대 서울에 들어온 일본 사신이 유숙하던 숙소
인현동 2가에는 조선시대에 일본 사신의 유숙소인 동평관(東平館)이 있었다.
이 부근은 왕자의 저택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내왕하였고, 일제 때는 일본인의 거리로 변했지만 아직도 옛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이곳은 남산자락에서 뻗어온 자락이 청계천과 합류되어 풍수지리상으로도 명당이 되고, 물이 모이므로 우물이 많았다.
동평관은 이곳에 있었으므로 이 일대를 왜관동(倭館洞)이라 하였다. 조선 초부터 일본과 왕래가 있어서 그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 주었는데, 세종 2년(1420)에는 일본인들이 법을 어기므로 이곳에 감호관(監護官)을 두고 감시케 하는 한편 동평관 주위에는 울타리까지 둘렀다.
세종 27년(1445)에는 일본인들이 담을 넘어서 민가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자 의금부에서 이들을 체포하여 구금한 일도 있었으며, 이 동평관에서는 무역도 이루어졌다. 동평관에는 관사와 창고를 설치하여 그릇과 미곡을 저장하고, 일본 사신과 객인(客人)을 접대하였다.
그 뒤 삼포왜란(1510) 때에도 의금부에서 일본인 10여 명을 감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등 동평관에 묵은 일본인들이 일으킨 폐단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에 동평관이 소실된 이후에는 조정에서 일본 사신의 상경을 허가하지 않았으므로 일본인 유숙소는 자연 폐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