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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그룹
<사진설명>월정사 불사에 큰 공헌을 한 한진그룹
탄허스님이 비문을 썼다.
월정사 불사는 지난해 작고한 한진그룹
그 시작은 월정사 중건주 만화스님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만화스님은 적광전
불사를 계획해놓고도 자금이 없어 몇 년을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은 서울로
화주를 떠났다. 딱히 아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부자가 많이 사는 서울에 가면 무슨
길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무작정 떠났다.
조계사에서 밤을 지낸 만화스님은 다음날 새벽 일찍부터 탁발을 돌다가 한 부잣집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집이었다. 바로
회사 사정은 아직 어렵고 규모도 크지 않아 고민이 많았던 당시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한 스님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할 것인데 시주를 하면 좋은 일이 있
을 것이라고 했다. 예사로 여기며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있는데 밖에서 염불소리가
났다.
집주인이 나가자 그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 사는데 불사를 하기위해 탁발을 왔다”며
시주를 청했다. 꿈에서 본 그 스님 얼굴이었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월정사가 6.25때
불타 대웅전을 지어 부처님을 모셔야하는데 돈이 없다”.
“시주하면 좋은 일 생길 것”
꿈에 본 스님 다음날 나타나
불사 시작된 뒤 사업 번창
아무리 꿈에서 보았다고 하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조 사장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아침 밥을 차려 먹고는 곧바로 월정사로 갔다. 사실이었다. 집주인은 돈이 얼마가 드냐고
물었다. 조그만 기업체 사장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하지만 “되든 안되든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했다. 불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꿈의 영험인지 불사가 시작되면서 조 회장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졌고 갈수록 시주금액도
늘어났다. 이제 고인이 된 조회장은 계속해서 월정사와 인연을 맺어 적광전 불사 뿐만
아니라 월정사 범종, 박물관 등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만화스님의 상좌로 은사스님의
뒤를 이어 조회장과 인연을 맺은 현해스님은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꼼꼼하며 검소했던
조회장이지만 월정사 불사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해스님은 “적광전 단청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견적을 3곳에서 받아오라는 거야. 1억
5000만원 가량 드는 불사였는데 내가 비싼 걸로 하겠다 하자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그래서 싼 것은 공해 물질일 뿐만 아니라 곧 빛이 바랠 것이라고 하자 돈을 직접 주더라고”
일주문 근처에 조회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가 서있다.
[불교신문 2302호/ 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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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 고뇌의 강을 건너
닙바나, 저 이지의 나라에 가라
진흙속의연꽃 2007.04.24 12:02
월정사 (下) 중흥 계기 마련한 적광전 불사
스님.신도.주민 합심 ‘大佛事’ 이뤄
인부 노임 체불…불법 벌목 경찰서 신세 ‘최악 조건’
<사진설명> 월정사 탑 주위를 적광전.서별당.동별당이 감싸고 있다.
현재 구도는 만화스님 당시 모두 갖춰졌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운데서도 인법당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시고 공부를 중단하지 않았던
월정사 대중들은 정화가 끝난 뒤 본격적인 불사에 들어갔다. 그 때가 1964년 일이다. 월정사
본전인 적광전을 다시 건립하는데 대중들은 매달렸다. 하지만 불사금이 문제였다. 직업이 없어
놀고 있는 평창군내의 주민들과 산속의 재질이 좋은 목재가 있다 해도 기와나 다른 목재 등은
돈을 주고 사와야 했다. 주민들 노임 역시 돈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 몇 년을 고민하던
만화스님은 우연히 만난 한진그룹 조회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불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화재 전 적광전은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고 했다. 규모도 작았다. 만화스님은 새로 짓는 법당을
최대 규모로 짓겠다고 했다. 관음암 선덕 인보스님은 “이왕 짓는 것 최고로 짓겠다며 만화스님이
전국의 법당을 돌며 관찰하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적광전 배치를 감안해 설계했다”고 말했다.
설계도가 나오자 공사는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우선 목재를 고르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좋은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오대산에서도 상원사 계곡 주변의 나무가 특히 우수했다. 건축을 지휘하는
도편수가 산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점찍고 이어 인부들이 몰려가서 베었다.
인보스님은 “나무는 가을에 베었다. 여름 나무는 물이 많아 무르기 때문에 쓸수가 없다. 반면
가을 나무는 단단하고 벌레가 슬지 않아 좋은 재목이 된다. 나무를 베어놓고 겨울 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끌고 내려오기 좋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스님 신도 인부 등이 모두 달라붙어
운반하지만 큰 나무는 며칠 씩 걸렸다고 한다.
당시 산감을 했던
가공하기도 하고 월정사 경내에 마련된 공사장에서 다듬기도 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기둥은
주로 상원사 보궁 근처 계곡이나, 병내리 현재 매표소 근처 등에서 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당시 인부는 마을 주민이 90%였다. 장씨는 “먹을 것도 할 일도 없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월정사
불사는 유일한 일거리 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노임 체불이 예사였다.
3년 동안 한푼도 지급 못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인보스님도 “노임을 주지 못했지만 추석이나
설이 되면 그래도 제수용품이라도 줘야하니 만화스님이 강릉 등지를 다니며 화주를 했다.
그걸로 쌀 등을 팔아 나눠줬다”고 했다.
불사금 고민하던 만화스님 무작정 서울로
‘기이한 인연’ 한진그룹
“이왕이면 최고로” 규모 늘려 1968년 완공
월정사 인근 사하촌 주민들은 주로 월정사 토지를 경작하며 도제를 지불한다. 그 전통은 지금도
내려온다.
장씨는 “노임도 줄 곡식도 없으면 도제에서 제했다”며 “그렇게 어렵게 불사를 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먹지 못하고 일하다 보니 오전 오후 울력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리면 도망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오랫동안 월정사를 지키고 있는
하는데 한번은 보리쌀과 감자로 싸준 점심 도시락에서 쉰내가 나 데모를 벌인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산에 나무를 베는 것은 불법이다 보니 툭하면 영림서에 잡혀갔다.
스님이나 공사를 책임진 사람이 잡혀가면 불사가 차질을 빚다 보니 책임지는 사람을 아예 정해
놓았다.
있으면 월정사와 친분이 있는 검사 판사 등을 통해 ‘내 산 나무로 내 절 짓는데 왜 잡아가느냐’며
따지면 즉시 보내주었다”고 했다.
적광전 불사는 이처럼 최악의 조건 속에서 스님.신도.마을 주민이 합심이 돼 만든 대작이었다.
이렇게 해서 공사 착수 4년만인 1968년 적광전이 완공됐다. 월정사측은 “적광전 외부기둥 18개중
16개가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고 공식기록하고 있다. 인보스님은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는데 불사를
하면서 하나씩 배워갔다”고 말했다.
적광전 공사가 끝나고 1970년대부터 불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0년대말 뜻하지 않게 월정사 수입이 늘어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9년 폭설로 인해 월정사
주변 소나무가 모두 주저앉는 대 참사가 벌어졌다. 이는 정부에서 기름을 조달한다는 이유로 송진
채취허가를 내줘 나무가 힘이 없어 발생한 것이다. 어쨌든 월정사는 그 소나무들을 팔아 재정이
한결 나아졌다. 동별당 공사부터는 월정사 나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사오는 여유가 생겼다.
동별당에 이어 용검루 서별당 등의 공사가 연이어졌다. 인보스님은 “대중울력을 통해 밥을 먹고
나면 곧바로 공사에 들어가는 일상이 계속됐다”고 말했다.
땅바닥에 주저 앉아 먹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인보스님은 “서별당 공사까지 끝나자 소문이
나서 신도들이 찾아오는등 형편이 많이 나아져 그 뒤부터는 불사 방식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월정사는 잠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불사도 자연 주춤해졌다. 하지만 큰 틀은
만화스님대에 대부분 갖춰졌다. 이후 불사는 주로 월정사를 더 세밀하게 다듬는데로 옮아갔다.
현해스님이 주지를 맡은 90년대 이후 불사는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현해스님은 “내 재임 중에
140억 불사를 했는데 그중 45%가 국가 예산이었다. 20%가 신도 화주, 나머지는 절 살림을 아껴
모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월정사 박물관 공사를 시작하고는 1년에 50~60회 가령 법문을 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고 서울 출장가면 명동 칼국수 먹는 것이 최고 비싼 음식일 정도로 출장비를 아껴 모아 불사금을
조달했다”고 한다.
불사에 정부 지원금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불사 양식도 많이 달라진다. 90년대 이후 시작된 불사가
대부분 그 유형을 따랐다. 하지만 월정사 초기 불사는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새겨야할 모습이다.
그래서 인보스님은 “당시는 스님이 모두 하나가 되어 불사에 헌신했고 마을사람들도 내일처럼
도왔다. 목수들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석으로 공부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자만 집을 짓는다. 자연히 하자도 많이 생긴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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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 2017,6,26
평창 동계 올림픽 전임 추진위원장의 한진그룹 회장님과 선대 조중훈 회장님의 평창인연이 우연만은 아닌 듯
합니다.
이정도 인연이면 하늘도 감사를 표 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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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번 월정사 글에 게제한 일부이며 만허스님은 장만허 스님이고 탄허스님 모시고 마크 화이브
검정 세단이 진다방 앞에 끽하고 정차하면 저는 얼릉 길 건너 다방 옆 자리에서 탄허스님은 무슨말 하는가
몇 번 보았는데 당시 칡차인가 홀쩍 마시곤 아무 이야기도 없더군요.
하기사 그런 곳에서 설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때 스님이 주창하신 정역이란 무엇인지 물어나볼걸,,,
(운두령 전투에 한,미군은 승리하게 되는 오대산 전투 )
월정사는 칠불보전과 당우등 21채가 6,25때 전소 되었다.
언젠가 월정사 이야기에 쓰다 말은 내용중에 1,4후퇴 이전에 인천상륙작적에 이어 9,28 서울 수복후 즉시
반격하여 평양을 접수하고 수풍댐 확보라는 계획으로 김소월의 영변의 약산 하던 詩의 영변, 운천을 지나자
이미 중공군은 매복되어 있었다.
그들의 무기는 보잘것 없지만 총알 하나에 머리 하나 맞대결이라는 인해전술로 국군은 다시 후퇴하는 12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월정사 소각 명령을 내리고, 이어서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소각 명령을 내렸다.
워커 장군은 2차대전당시 패튼 대전차 군단의 1군단장으로 독일군의 파리 함락시 파리를 불 태우지 않았던
사실도 잘 기억하고 있으리라..
당시 전쟁의 방법엔 스탈린은 소련으로 진입하는 인근 60km내의 소련인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민간인도
무수히 많게 죽이는 전쟁방법에서...
그레서 나치는 600만 유대인을 죽였지만 스탈린은 2,500만명 죽였다 하며, 몇삼전년 시진핑은 일본 쪽바리들이
중국인을 세게에 제일 많이 죽였다 한다.
아마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워커 장군은 한국의 역사는 잘 모르나 인천 상륙작전 후 9,28 서울 수복시
인천 시내에 "해광사" 라는 사찰이 인민군들의 주 지휘소가 된 것을 상기하면서 강원 중부권 산속의 월정사가
인민군들의 손에 떨어지면그들의 요새가 되리란 판단 때문이었슬 것이다.
이러한 결정적 요인과 그보다는 6,25발발의 배경엔 남로당이 인민 유격대를 결성하여 대대적인
지역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해 편성한 유격대는 사령관 이호재를의 오대산 지구 제1병단, 비롯하여
지리산 지구 제2병단(사령관 이현상) 태백산 지구 제3병단, 사령관 김달삼등 총 3병단이 남파되었다.
그중에서 제 1병단 이호재 부대는 당시 이승엽의 지시에 따라 강동정치학원 출신 약 360여명을 편성하여
남파하였고 남파 당시 북측의 조국 전선에서의 지령 중엔 각 지역별로 1.2개 지역도당을 확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바로 이 지령에 '결정적 시기(한국전)가 다가온다'란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한다.
다음해인 50년 6월 25일 한국전이 발발 합니다. 채 3일도 안되어 북한의 무장 세력들은 남로당의 유격대와
합작하는 방식으로 서울을 점령하고 이어 김일성은 서울시 임시 인민 위원장에 남파 사건의 주력인 이승엽을
임명한다.
당시 이승엽은 박헌영의 지시를 받으면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당재건을 비롯한 모든 사업을 총지휘하기
시작 합니다. 그 이후 계속 남하한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전선을 확장 시켰고 각 지역별로 인민 위원회 위원장을
두게 됩니다.
이승엽이 직접 창설한 유격 제 1 2 3 여단을 주축으로 김응빈을 지대장, 박승원을 정치부 지대장으로 임명하고
50년 1월 무렵에 강원도 오대산지구로 들어와 활동합니다.. 그러나 군, 경 합동의 토벌작전에 의해 오대산 지구
전투에서 대패한 이승엽은 다시 월북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책에 이러한 월정사 전소 이유의 글은 없지만 나는 워커장군의 이러한 "해광사"의 전철을 밟을까 전소
명령을 내렸지 않았슬까 추정해 봅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전소명령에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명령도 있었지만 현지 군인들은 월정사 소각
명령에 반대 입장이었는데, 민간인 3명에 의해 전소되었다.
당시 월정사 앞에는 지금보다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산판의 인부들로 280여호 살았다 합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시애 '계림회사"라는 일인(쪽바리덜,,,) 목재회사가 있었으며 박달나무는 왕자 축자로 다
나간다는 1930년대 유행되던 평창아리랑으로 보아도 당시의 오대산 겅기를 읽을 수 있다
정선 아라리의 뗏목아라리가 있다면 진부를 휘어 돌아 조양강까지 흐르는 오대천의 땟목들에 벌채 아라리는
왜 채집이 않돼는지 모르겠습니다.
벌목 아라리는 원래 없었던 것일까요??
이 민간인들이 주도로 월정사 당우 21채를 전부 소각하였고 석재의 8각9층 석탑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이 소각명령을 내리고 워커 장군은 동두천에서 대대장을 하는 자기의 아들이 중공군과 처음으로 접전하여
큰승리를 하자 미 본국에서 훈장이 수여되자 워커장군은 직접 아들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기 위해 동두천
가는 길에 의정부의 폭이 좁은길(일전 미군탱크의 여중생들이 사망사고 지점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워커장군은 2차대전의 패튼장군의 일번 주자였듯이 패튼처럼 스케일 크고 직선적인 성격에 차도 전 속력으로
달리는 성격이었답니다
(이 부분들이 안터냇엔 그저 자기 판단만의 글로 무척이나 오류가 많기에 자세히 합니다)
( 그리고 그의 아들 샘 워커는 4성장군당시 땅콩농부 지에미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반기를 들어 강제
퇴역하게 됩니다. 당시 그는 육군 참모총장은 따 놓은 상태였는데...)
또한 김백일 장군은 전소명령 3개월만에 대관령을 넘다 악천후에 추락사라 하는데,,,
그래서 월정사에 위패까지 모시고 하는 인터넷 글들의 수많은 복사글들,,, 모두 오류 입니다.
3개월 후가 아닌 다음해 5월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중공군 역공 후 빼앗긴 수도 서울을 다시 수복하기 위해
여주 강가에 사령관의 야전 진지를 구축, 여기서 지휘관 작전회의를 마치고 강릉 1군단으로 돌아가던중
대관령에서 악천후에 그가 탄 경비행기는 추락 사망한 것입니다.
( 김백일 장군은 6,26에 백선엽 장군 다음으로 공훈자이며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의 흥남부두 철수시
난민 10만명을 구출한 장본인이다.
미국 2군단장 아몬드 장군을 설득하는데 당시 아몬드 장군의 통역병으로 현봉학 박사는 ( 이는 미국 유학중
한국전에 자진 참가) 아몬드와 같은 지역에 유학으로 사투리도 통역할 수 있는,,, 그래서 아몬드 설득에,,,
영의정보다 내시들이 임금님 행동에 더 효과를 주듯, 통역관 현봉학 박사의 역활도 중요하였으리라.
후일 아몬드 준장은 웰링턴에 모셔지고 지금 정치임 문제인은 거제 포로 수용소 그곳에서 출생합니다.
또한 아몬드 장군의 2군단은 워커장군의 8군단 소속이 아닌 당시 6,25에 미국의 유엔군 참여엔 2분할적인
모습도))
참고로 리지웨이는 공수출신의 용장이지만 현명한 지장 입니다.
그는 재 서울 수복시 서울로 곧바로 진격 아니라 여주 이포에서 지제, 양평등으로 서울 주변의 외곽으로
올라오며 또 한편은 김포로 공격하며 서울을 사이에 두고 양 외곽으로 공격하며 올라가는 시소작전으로
따라서 서울은 직접 공격하지 않아도 인민군들이 후퇴하리란 추정.
이것이 주효하여 서울은 다시 진공상태이고 이때, 한강에 올라온 미군 장군들 앞에서 누구의 명령도 없이
당연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이 맨 먼저 한강을 도하 서울 재 수복 하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평리 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자유대한민국은 보장이 않될수잇는 경우의 수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
주한 미 8군 사령관으로 초대 사령관 워커, 2대 리지웨이, 3대 밴플리트로 이어지며 6,25동란을 치렀다.
위 3명의 장군은 각자 자기 칼라가 특유했으면서도 한국엔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세사람 모두 한국과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는 위대한 장군이다.
차라리 맥아더 장군은 한국보다는 자기 인기와 명성을 주 칼라로 잡았던듯 하다.
하지만 워커장군의 아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넘어서려고 6,25동란에 중대장으로 참여 하게 됩니다.
또한, 벤플리트 장군의 그의 독자아들은 아버지를 도우려 6,25 동란에 참여하였고 공군 중위로 북한지역
야간 공습에 행불되었고. 노르망디 작전에 혁혁한 공로자 아이젠하워 원수는 퇴역후 미국 대통령에 당선,
취임하기전 한국을 방문한다.
그의 아들이 대대장으로 6,25 동란에 참전하고 있었는데 만약 포로가 된다면 아이젠 하워는 대통령직 수행에
큰 차질을 초래할까봐 아들에게 포로가 되면 자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후세백작 본인의 생각으로는 그의 아들 샘이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진 자기의 돌파구를 찾기위해 죽음도
마다않고 6,25 전쟁에 뛰어들었건만 아이젠하워는 유사시 그에게 자결을 요구하다니...
대통령 하겠다고 이러한 아들의 인권을 침해해서야,,,인질이 되면 아들도 괜스레 유명한 아비를 잘못만나
불행을 감수하는데...대통령직을 그만 두어야 할게 아닌가 합니다.
이로서 월정사 전소후 이에 명령권자 워커와 김백일 장군은 모두 전사하게 되엇습니다.두 장군이 서거하는
불행과 김백일 장군의 위패는 월정사에 모셔져 있습니다.
언젠가 오대산 전투를 쓰던 글을 완료하여 올리겠습니다.
그것은 중공군 6차 공세의 허로 방태산에서 내려 밀리는 전사 이야기 입니다.
당시 춘계 6차 공세는 수도권일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팽덕회는 동부 산간지역의 허를 찔렀던 것입니다.
당시 중공군 6차 춘계 공세로 수도권, 서울이 공격당할 것이라는 예측이 빗나가며 국군 3사단의 진부까지의
후퇴보다는 패주와 전멸에서 당시 밴플리트 사령관은 횡계에 내려와 3사단의 폐지와 한국군의 작전권을
환수하는것이 미국 군사 작전권 이양의 문제로 다음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이 알맞게 작전을 해 달라는
서류에 싸인을 한 것이 한, 미 작전권의 실질적 이양이었다.
( 한, 미 군사작전권은 여기서 부터 출발하여 오늘날까지 문제시 되고있다)
이것은, 이때까지는 한국군이 각 전선에서 알맞게 대응하여 작전을 주도하였던 것의 회수이다
그것이 아직도 유효하고 이로 인해 북괴가 도발시엔 미군의 인계철선 방식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되는
이야기 속에 오대산 전투가 담겨 있습니다.
(* 여기서 오대산 전투는 저의 임의적으로 그려보는 용어입니다)
다음에 부분별 평창 역사의 정확한 기록을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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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화 하나는 횡계의 대관령에서 작전회의를 주도한 벤플리트 장군은 비행장에 먼저 온 장교들앞에
벤플리트 장군이 타고온 머스탱기는 연료통에 사격을 받아 휜 연기를 뿜으며 그는 내리고 있었다 한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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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는 특히 여, 야 모든 정치인들과 힘있다 하는 자들과 그의 아들들은 병신도 아니면서 군역을
기피한다. 군역의 모든 국민의 의무인데 조금 힘있고 유식하면 이 핑계 저 핑계인듯 하다.
하지만 미국사회는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진 자기의 인생을 회복하기 위해 죽음을 무릎쓰고 필사적으로
참전하는 그들,,,
맥아더 유엔 사령관 후임의 클라크 장군의 아들은 대위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적의 총알에 중상을 입고
회복하자 다시 전투에 나서서 부상당하고 그는 이 부상등의 휴유증으로 사망하였다 한다.
이러한 그들의 피나는 노력이 오늘의 미국을 가능케 한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후광에 병역사항엔 병신이 되도 괜찬으니 군대 안 가고픈 후광들,,,
차라리 누구네 처럼 방아쇠 당기는 손가락을 잘라버리면...
엇그제 타계하신 나의 친구 장인어른,,, 아니 고교 대 선배님은 6,25때 손가락 자르고 학도병에 불참하는...
늙으신 부모님 봉양의 외아들이라 당시로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학병으로 출병한 친구들은 몬땅 전사하였다니 손가락자른 댓가도 만만치 않은...
그러한 상해로 군대않간 나의 후배로 어느 좌꼴 정치인,,
술잔을 받으면 바로 상대방 정면에 부러진 손가락이 징그러이...
그래서 궁금하길래 칭구덜에게 그 후배, 술잔 어떻게 받냐하니 물어보니,,,,왼손으로,,,에라이...
난 그렇게 하면서까지 술을 대작하고싶진않네 그랴...
나는 다음 선거 투표시 그의 약력사항에서 병역필 이상의 정치인에게 투표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젠 앞으로 모든 정치인들은 약력 사항에 병력사항에 대해서 꼭 기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유행병으로 만들어지길 희망하면서...
또한 6,25 동족상잔을 한국전쟁이라고 쫘똥들 따라 하진 않습니다.
6,25가 어디 국가대 국가의 전쟁이었습니까?? 국가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것은 통일로
가기엔 애매한 점도 있슬 것이라는 느낌이다.
삼국지 광신자들 친구덜,,,삼국지에선 결과적으로 주뎅이만 놀리는 논리구사만 배울텐데,,
그럼 어디~~ 6,25 전사는 알고들 있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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