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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길벗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폴리
역사적 한이 서려있는 천반산&죽도 원정산행 =3050알파산악회 주관(우리대장 리딩)=
1, 출발장소 : 2013년 8월 3일 (토요일) 06:00, 일산 백석역 1번 출구 오모리 찌개앞 06:30, 홀트복지회, (합정역 8번출구에서 양화대교방면) 07:00, 사당역 10번출구 07:20, 죽전 07:40, 신갈
2, 산행지 : 천반산 & 죽전 (전북 진안군 동향면 성산리,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
3, 산행코스 : 섬티교 - 동쪽능선 - 천반산 - 전망바위 - 성터 - 뜀바위 - 죽도 - 장전마을 ※ 산행거리 10km, (3시간30분 + 물놀이 1시간)
4, 참가비 : 30,000 (차량대여료/찬조금/여유분 뒷풀이흡수/부족분 n/1)
5, 준비물 : 중식, 간식, 식수, 스틱, 선글라스, 여벌
6, 산행리딩 : 3050알파산악회 우리대장, (서울길벗님은 최폴리 리딩)
7, 참고사항 : 본 산행에 참가하고자 하는님은 3050알파산악회에 직접 산행신청 또는 국민은행 748702-04-007635 최성호, 계좌에 참가비 입금하면 그즉시 가입신청(대리)하겠습니다. -현재 입금신청및 좌석지정하고 있으므로 만석시 신청 마감하겠습니다,
정여립(鄭汝立)과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 (1544-1589)은 전북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서 전주의 명문으로 꼽히는 동래정씨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22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의 학유, 예조좌랑, 홍문관수찬 등 벼슬을 지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 이이를 비판한 것이 선조의 진노를 사 관복을 벗은 것으로 돼있다. 결국 낙향한 정여립이 처음에 터를 잡은 곳은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이다. 이곳은 미륵신앙의 본거지 금산사가 근처에 있고 증산교의 본부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강증산이 도를 깨쳤다는 대나무 숲터 이야기도 전해진다. 30대 중반의 정여립은 이 일대에서 이름난 명당 제비산 자락에 집을 짓는다. 관직을 떠났지만 정여립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멀리서 선비들이 찾아오고 인근 관리들도 그를 방문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천문학과 풍수지리학 등의 책을 읽고 토론하기도 했다. 그는 또 시국을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했다고 전해진다.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이 말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위험한 반체제적인 발언이었다. 정여립은 그 뒤 산속의 섬으로 불리는 진안군 죽도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서당을 짓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죽도선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또 이곳에서 무예를 가르치고 600여 명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한다. 1587년 정해왜변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대동계를 모아 왜구를 격퇴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대동계원을 모아 치밀하게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탄로나고 조정에서는 즉시 체포령을 내린다. 정여립은 죽도로 도망쳐 그곳에서 자결했다>고 기록됐다. 이 사건이 바로 선조 22년 (1589)에 일어난 기축옥사다. 기축옥사는 조선조 최대의 옥사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사형당한 사람은 천 명이 넘는다. 조선의 4대 사화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이름 높은 학자에서부터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알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도 고문을 받고 숨졌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같은 유명한 승려들도 연루돼 곤욕을 치렀다. 주모자 정여립의 시신은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된다. 그 부모와 자식들도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 조선 전체가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광풍을 몰고 왔다. 날조된 유언비어에 희생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연루자들을 고문했던 의금부는 비명소리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고 한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상상을 초월한 갖은 고문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17세기에 씌어진 당쟁에 관한 책 <동소만록>에는 정여립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다고 되어있다. 누군가 치밀한 사전 각본을 만들어 정여립을 죽이고 역모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여립의 역모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다. 왜구가 전주에 쳐들어 왔을 때 지방관의 요청에 의해 왜구를 물리쳤다면 대동계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공개된 조직이었다는 애기다. 또한 대부분의 연루자들이 후대에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던 점도 지적된다. 진짜 역모를 했다면 명예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 정국은 동인의 주도하에 있었다. 정여립이나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동인에 속한 인사들이다. 이들은 역모에 가담할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동인의 유력 인사들이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돼 화를 입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기록에 의하면 정여립 역모 조작설에는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송강 정철과 송익필이 관계됐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따라서 정여립의 역모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동래정씨 집안은 고향에서 쫓겨나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조상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정여립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그가 속한 문중 전체가 수백 년 동안 족보에서 사라졌다. 정여립이 능지처참된 후 조정에서는 그의 집터를 송두리째 파내고 그것도 모자라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었다. 풀 한 포기라도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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