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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연 시집 {페달링의 원리} 출간
백소연 시인은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미국 CalifoRnia Union University음악대학 종교음악과(피아노 전공) 졸업 및 Viola 대학 연수과정을 수료했으며, 광주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피아노 전공)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정읍사문화제 운문부 장원을 수상하고, 2002년 계간 {현대시문학}에 [바다를 낚는 여자], [홍어]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월간아동문학신인상 수상을 비롯해 [대한민국아동문학상]본상 수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바다를 낚는 여자}가 있고 2017년도에 시나리오 [궁 안의 연꽃]을 집필하여 무대에 올렸다.
백소연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페달링의 원리}는 일상적 삶과 미학적 원리 사이에서 빚어진 기대효과를 극대화시킨다. 반전과 역설의 블래홀 즉, 백소연 시인은 이제까지 이룩된 기성의 가치체계를 전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백소연 시인의 시들이 재미있는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해석이라는 틀을 내려놓고 텍스트 그 자체를 탐미하고 싶다는 충동에 자주 사로잡힌다는 점이다. 마치 롤랑 바르트가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행한 일련의 주이상스처럼, 혹은 쇼팽의 즉흥환상곡에 표현된 유리한 변주처럼, 백소연 시인의 『페달링의 원리』를 향락하고 소비하며 일체의 해석에 반하는 태도를 취한 채 자유자재로 말과 말 사이를 유려하게 흘러 내려가고 싶다.
햇살 한줌 기이다란 그림자 들어 올린다
비탈에 선 사람주나무
동파에 찢긴 겨드랑이 사이로
텃새 한 마리 푸두둥 날아돈다
한 번의 비행 위해 수백 수천 날갯짓 번뜩인다
온몸 밀어 올린 목안에 잠긴 말
바람 찬 칼날 에워싼다
우연은 필연의 연속적 주제이어서
홍안에 싸인 문장 건너다보면 공중 부양하는
질깃한 활화산 온통 적멸보궁이다
늑골 가득 광풍 지나간 흔적 역력한 능선
나도 한때 한 폭 걸음 미끌려 계곡 깊었을까
셈이 급한 중량 그늘 아래 우뚝우뚝 멈춰 선다
저마다 행선지 알 수 없는 휘우듬한 깃
캄캄한 잠 찢는 뿌리 깊은
우듬지, 부활을 꿈꾼다
― 「나무, 연어를 꿈꾸다」 전문
문제는 주름진 존재의 문양이 그림자로 탄화되는 과정 중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심연”과 “적요”(「물 밖과 물안」) 사이를 가로지르는 생에의 여율을 가늠해본다. 그리고 “천 개의 물음과 만 개의 질문”(「감전」) 사이를 배회하다 결국 미궁에 당도해 시간에 속한 모든 것을 적멸의 공간으로 되돌려 보낸다. “지상의 무게”(「천체 괸측」)는 여전히 무거운가. 삶의 “격랑(「다국적 모임」)은 아직도 떠밀린 채 표류하고 있는가. 도저히 실현 가능하지 않은 꿈을 꾸며 환상의 어디쯤에 당도해 화려한 ”부활“의 ”날개 짓”을 소망해 본다. 이를테면 「나무, 연어를 꿈꾸다」는 『페달링의 원리』 전체를 알레고리로 표현한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로 해당하는 작품인데, 어쩌면 그것은 관계성의 숙명과 마주선 시인 자신의 모습을 새로운 쳬제로 페달링하는 자기 변신의 전언인지도 모른다.
“나무”가 전하는 꿈의 전언 혹은 “우연”과 “필연” 사이에 매개된 생명의 신비. 그것은 여전히 속도의 선율이 만든 불가능한 서사일 개연성이 높다. 아니 “연어”가 되기를 꿈꾸는 나무는 연목구어일 뿐만 아니라, 너 또는 나를 “행선지”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는 “비탈”로 데려가 타자의 욕망을 만족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연어는 제 한 몸 온전히 살신하는 모성성을 드러내며 새생명을 부활시키는 투지를 보여준다. 주검처럼 고요해도 겨울이 지나고 나면 나무는 새생명을 틔우게 되는 바로 그 정경이다. 그로 인해 “목안에 잠긴 말”을 내뱉고 또 “홍안”에 싸인 “문장”을 발화시키는 계기로 적용하겠지만, 따라서 일련의 시말운동이 불가능한 그 무엇과 마주선 일상의 기호를 “사람주나무”의 전언으로 육화시킨 것이지만, 어쨌튼 백소연 시인의 그것들은 의미의 구성법을 전혀 다른 질감의 터치로 소묘하는 낯선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때론 아주 섬세한 안단테 칸타빌레, 즉 아주 느릿느릿 서정적으로 노래하듯 흐르는 선율을 포착해 생의 기호를 유려하게 그려내면서, 때론 알레그로와 비바체 사이에 매개된 격정적인 삶의 “활화산”을 시말로 안치시키면서, 시인은 자기 고유의 페르소나를 구축해가고 있다. 관계 속에 가닿는 그곳에 남아있는 흔적을 퍼즐형식으로 산종시키는 방식으로 시말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것은 존재하는 방식이거나 시인이 포착한 시간에 관한 의식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페달링의 원리가 시말의 표현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라면, 일련의 의식은 새로운 시창작 방법을 추구하게 되는 내적 원리라 하겠다. 그러나 여전히 관계는 너 또는 나를 “바람 찬 칼날” 어디쯤으로 데려가 생에 속한 모든 것을 슬픔의 눈물로 기화시킨다. 속절없이 흘러 우리를 미명에 닿게 만들어버린다. 연어가 제 생명을 온전히 산화시켜 생명을 출산하듯 봄볕이 찾아오면 나무도 부활을 잉태한다.
물의 나라 통째 게워낼 때까지 나는
보이는 것과 보여 지는 간극에 서 있었다
― 「물고기 다녀가셨다」 부분
의식과 무의식 경계 오고 간다
― 「구멍, 살처분」 부분
대체 몇 억만 번의 폭설과 몇 수수곡절 폭우
저들을 건너가고 건너온 것일까
― 「또 다른 생」 부분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양질의 속내 뒤집힌 바삭한 상처의 뒷말 이웃들은 어떻게 건너갔을까요? 먼 동심원 물살로 요동치는 손, 다시 시간을 구워냅니다.
― 「산화酸化」 부분
기억을 잃는다는 것
기억을 잡아먹는다는 것
기억을 잘근잘근 씹어 삼킨다는 것
기억 때문에 기억 속에서 기억에 말려 기억을 가둔다는 것
― 「쟈클린의 눈물」 부분
관계와 관계의 퍼즐은 오직 한곳으로 흐르는 반복의 운동이다. 보는 눈에 따라 “시간은 고양이”(「탁자 날다」)고 삶은 “악몽과 사기”(「섬진강가」) 사이 어디쯤에서 배회하다 생에 관한 “허방”(「너도바람꽃」) 쪽으로 몰고 간다는 것도 익히 잘 안다. 더 나아가 “푸른 시로 여는 나·무”(「구멍, 비움과 채움」)의 꿈과 같은 전언으로 탈구되어 너 또는 나를 슬픔의 언어에 친숙해지게 만든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비명”소리가 들린다. 더불어 “찬란한 고통”이 매만져진다. 대저 생이 육화시킨 저 노래는 어떤 여율과 공명하는 “간극”의 극단적 형식인가. 혹은 서정인가. 역시 노래는 파국으로 치닫는 레퀴엠의 어디쯤으로 데려가 너와 내가 욕망했던 모든 것을 “파문”의 “무늬”로 기록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왜냐하면 “비늘 선명한 목숨”(「그 푸르고 붉은」)을 “심해”(「거꾸로 세운 우산」)에 이끌려 죽음을 욕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페달링의 원리』는 극적인 절정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라벨의 『볼레로』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기입된 모든 차안이 아닌 “피안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광시곡인지도 모른다. 물론 시인이 기록한 페달은 인간중심의 일상을 가감 없이 그려낸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된다. 까닭은 삶의 페달링의 원리와 재봉틀의 페달링의 원리 사이에 놓인 균형을 봉합하는 것이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는 쇼팽과 리스트 사이에 기입된 모든 연주기법이고 페달링의 원리는 일상과 예술 사이 속도와 거리를 동일한 삶의 원리로 공명, 승화시켜 도달하기를 요청하는 미학의 원리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에도 불구하고 생의 공간은 여전히 “아우슈비츠”의 그것처럼 “수렁”에 빠진 채 “살처분”을 강요받을 뿐만 아니라, 너 또는 나를 “울음소리”나는 곳으로 데려가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맺게 만든다. “몇 억만 번의 폭설과 몇 수수곡절 폭우”를 견디며 가열된 오늘을 견디지만, 그 역시 “산화”의 징후 일뿐, 더는 역류시키지 못한다. 물론 하루하루를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처럼 감미롭고 달콤하게 향유하는 것으로 삶의 목적을 완벽하게 탈구시킬 수 있겠지만, 어찌 그것이 달성 가능한 승화의 형식일 수 있겠는가. 세월의 속도 앞에 인간학이 제시한 모든 기획물은 그저 연목구어 아닌가. 물론 백소연 시인의 그것은 “다시 시간을 구워” 인간학에 속한 모든 것을 네겐트로피로 재귀시키기를 열망하고 있다.
“시간은 빛이고 강물”(너는 빈센트 반 고흐)이었다가 이내 “눈물”이라는 기호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선율로 변주되는 “기억”의 저쪽, 즉 오펜바흐의 서사적 전신일 것이다. 의미의 공식 일체가 탈구된 채 생에 속했던 심연이나 적요의 공간으로 이월시켜 비존재의 욕망과 극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사라져 소멸하는 것만이, 혹은 “레테”의 강을 건넌 자만이 시간의 정확한 목적을 알 뿐, 더 이상 의미의 진실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시 「자클린의 눈물」에 묘파된 일련의 서사적 지형도는 “운명”에 순응하는 더 나아가 거스를 수 없는 타자의 애달픈 존재론적 양태를 오펜바흐 첼로 선율로 그려낸 것인데, 어쩌면 그것이 이 세상을 해독한 시의 기호이자, 적요와 심연으로 흐르는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엄마, 안녕!” 시간이 망각으로 흐른다. 설령 시인의 그것이 미처 전하지 못했던 사연을 사랑의 이름으로 공명시켜 인간학에 관한 일체를 눈물로 여울지게 만들지만, 이는 므네모시네의 작용이 만든 숭고한 리듬이 아니다. 사라져 소멸하는 적멸의 가열된 운동이 만든 비극적 생애의 형식과 기억의 양식으로 고양시킨 페달링의 원리이다. 때론 역동적으로 자신에게 속했던 모든 “달”과 “별”의 문양으로 기록하면서, “욥” 즉, “피”의 제의가 만든 시련의 가혹한 시련의 어디쯤 배회하다 생을 죽음의 양식으로 변이시키는 것으로 인간학적 서사 종말에 이르게 된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안녕”이라는 단 한 마디를 남긴 채 이 세계와 이별하게 된다.
한쪽 발 엄지손가락만 기억하던
P씨, 품위 갈아입고 후진기어 넣는다
수심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허리 쥐어틀던 속사정 따윈 별 것 아님이
분명해 보인 흐린 날 오후
제 속 들여다보는 깊은 반사의 반사
단추 하나, 밑단 몇mm 차이인 것 거울은 눈치챘을까
―거울아 거울아 헌옷 줄게 날개 줄래?
― 「페달링의 원리 1」 부분
단추 하나 밑단 몇mm
바늘구멍 속 낙타 들여다본다
부표처럼 떠돌던 일상 얼마나 치밀한 수심인가
길을 묻는다
서너 평 남짓한 방 땀땀이 시절 기운
외가닥, 터진 옆구리 몽땅 짜깁는 안경 너머
거리는 천천 무늬다
― 「페달링의 원리 2」 부분
자그마한 “차이”, 즉 일상과 미학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대저 시란 어떤 의미의 공식을 만족시킬 때 삶의 모든 것을 진실과 마주 세울 수 있는가. “낯선 암호”(「녹색 화원」)와 미지의 기호에 포획된다. 도대체 저 일상이라는 시공간은 어떤 의미로 체계를 세울 때, 아포리아라는 마물과 조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말하자면 금번 상재한 백소연 시인의 『페달링의 원리』는 심연이나 적요로 명명된 저 인간학적 아포리아를 시간의 형식으로 묻고 답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회등선”을 꿈꾸는 삶의 페달링 기법이라 하겠다. 설령 익명의 P씨에게 속한 일상의 하루가 “흐린날 오후”로 질주하는 불안한 일상이라해도 페달링의 원리가 일상과 미적 진실 사이에 매개된 삶 그 자체의 원리를 시인 특유의 화법으로 알레고리화한 것이다. 이는 시 세계에 산종된 다양한 암호와 기호들을 해독하는 시인의 독특한 기법이라 하겠다. “흐름과 멈춤” 사이에 혹은 직선운동과 원운동 사이에 “한 올의 절벽”이 있고 ,“실족”이 있으며 또 “시간 밖 수당과 물질 안 십일조”가 존재하는 한, 시인이 표현한 일련의 페달링 기법은 각자 자신만의 생사 방식을 운용하는 존재의 가열된 몸짓이라고 간주해야할 듯 하다. “수심”은 깊고, 심연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해 그녀들의 삶에 기입된 세세한 “속사정”을 알 길 없지만, “한쪽 발”과 “후진 기어” 사이에 매개된 일련의 흔적들을 삶의 언어로 복원하는 행위다. 어쩌면 영원히 그 퍼즐을 맞추지 못한 채 너 또는 나를 적요의 공간으로 데려가 미망과 맞닿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런 행위들이 “반사의 반사”, 즉 자기를 성찰하는 존재론적 행위이기는 하지만, 페달링의 원리는 각자 자신만의 방식을 구상하는 생의 원리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이는 “날실과 씨줄”을 상호 직조해 가는 일상의 선율, 즉 “생의 오랏줄”이자, 너 또는 내가 차이를 생각하는 가열된 존재의 장소이기도 하다. “가속 회전” 페달을 밟으며 세월 저쪽으로 당도해 “신셰계”가 펼쳐지기를 염원하지만, 시간은 우리를 “노령부부”가 되게 만들어 종국에 낡고 늙어 소멸에 이르게 만든다. 페달링을 하지 않거나 페달을 밟지 않고, 넋 놓고 그냥 풀썩 주저앉아 “부활”을 꿈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일상은 소리 없이 유유히 흘러 미망에 가닿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안단테 몰토 모소, 즉 느리고 매우 생동감이 있게 탄주되는 관계의 공식을 만족시키더라도, 미망의 장소로 데려가 “남루한 의복”을 입은 채 대타자의 목적에 부응하게 한다. 대자연의 귀의해 페달링을 멈춘 채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들으며 황홀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마침내 의미를 깨닫게 된다.
유품처럼 받아온
파란 녹이 슨 반상기를 닦는다
전신 에워 싼 푸른 멍
오래된 시간 몰래 훔쳐 먹었던 걸까
시간은 거울인데
유년을 담은 밥사발 유독 커 보인 하루
뒷마루에 앉아 매매 놋그릇 닦던
어머니의 바쁜 손길 기와가루로 묻어 나온다
짚수세미 둥글게 말아 푸르뎅뎅한
안팎 닦아내던 녹이 슨 시간
정성 깃들지 않으면
제 내면도 돌이끼 낀다고
거울 닦듯 한생 닦고 또 닦아내
어머니, 백발 된 노정 느즈막이
내가 닦아 올린다
― 「청동 거울」 전문
“길들여진 현상 거부한 암실”(「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에 은거하며 “잘려나간 생의 축”(「새에 대한 기록서」)에 관한 명상에 잠긴다. 제3의 관계에 대한 시선의 각과 “어머니”가 견디어온 생의 시간은 어떤 의미의 구성물로 채워져 있을까. “아흔 아홉 뼈 마디마디 서린 천명”(「명자꽃 그늘」)이 매만져진다. 더불어 어머니의 생애 전체가 “전신 에워 싼 푸른 멍”으로 가득 채워진 채 오늘에 이르렀음을 직감하게 된다.
역시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청동 거울”을 닦으며 그것에 속한 삶을 성찰해야 한다. 손때 묻은 “파란 녹이 슨 반상기”를 닦으며, 혹은 “뒷마루”에 앉아 어머니를 추억하며 백소연 시인은 자신에게 부과된 여율을 정갈하게 소묘하데 된다. “유년”으로 회귀하는 일련의 여정은 타자화된 속성을 주체화하는 과정 중에 깨달은 진실이다. “내면”을 들여다본다. 물론 이쪽 저쪽에 마음의 “안팎 닦아내던 녹이 슨 시간”들이 흔적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그러나 시간의 반복이라는 저 오묘한 구성법을 통해 심연에 도달하는 것을 무한히 지연시키겠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더 나은 생을 직조한다거나 전혀 다른 차원의 삶-시간-세계를 체재화하는 것이 가능치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차이를 생산했던 모든 삶도 종국에 동일한 것으로 회귀해 대타자의 운명에 순응하도록 페달의 제계가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는 자는 저와 같고, 오는 자는 이와 같다. 말하자면 백소연 시인이 탐구한 페달링의 원리는 동일한 것이 차이를 생산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볼 때 새로운 시미학의 설계도를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 차이도 지워져 “한 생”이 또 다른 생으로 대체 반복하는 형국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 「청동거울」에 묘파된 어머니의 서사가 이 땅 위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성의 삶과 그렇게 크게 차이를 만들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동일한 것에 구속된 채 심연에 당도하고 있다.
능소화 왼발바닥에 깨진 유리 글자 꽉 박혀 산다 ‘손대지 마시오’ 벽보아래 누구의 도살인가 도화살인가 아직 피지 못한 꽃몽 대롱대롱 매달려 種은 울리고 鐘은 울린다
잘 익은 시간은, 채도와 명도 통째 저장된 빛의 보색 대비 프로방스의 야경내지 스누피의 미소였을까 맺혔다 풀어짐도 내내 꽃 피우는 것만 아니어서 십자 생 초초 뜬눈 같은 곡절 여러 갈래 길을 낸다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제 삼시에서 제 구시까지 등 뒤 음양, 예수는 끝끝내 천지간 휘장 찢어 마침내 조종弔鐘을 울렸을까 십자 생은 종국에 씨앗 된 사랑이므로 다 이루었다, 마침내 어둠 뚫고 나온 천천 눈 만만 촉! 시간은 추鰍를 초월한다
― 「시간은 추鰍를 초월한다」 전문
“수다 만찬 칼질의 조용조용한 닿소리” (「페르소나 1 」) 내리는 저녁 어디쯤에 당도했으며, 마침내 저 지고한 진리의 말씀 한복판을 추상하게 된다. 도대체 페달이란 무엇인가. 한때 “자존의 하이힐 고집하는/ K 기억”(「바오밥나무」)에 응고된 채 편견에 사로잡힌 적도 있다. 물론 그것 역시 관계의 의미를 페달링하는 삶의 구성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현상에 구속되거나 가열된 삶의 파편이다. 대저 “세상 복사하지 않는 방법론”. 즉 “우주를 낳는 녹색 자화상”(「페르소나 2」)과 “십자 생”사이의 거리를 얼마만큼 유지할 때 관계의 진리에 당도할 수 있는가. 시간의 등뼈(「떨림」)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좀체 존재의 본질과 상면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모든 生은 단단하지 않고 (「그 골목에 들어서다」),” 어린 꿈(「그림자 1」)은 너무도 쉽게 깨어지고 해체된다. 어떠한 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어떤 생을 살아낼 때, 그것을 “잘 익은 시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 엄밀하게 말해서 백소연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존재론적 시간의 무늬에 기입된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산종시킨 것이다. 하면 그것은 어떤 시간의 관계성과 조우한 진리의 전언인가. 시 (「시간은 추를 초월한다」)는 “능소화” “꽃몽”에 얽힌 사연과 “예수” 사이의 거리를 미꾸라지로 정의한 것인데, 그것은 어떤 의미의 “초월”을 지칭한가. 앙리 베르그송에게 시간은 창조적 생애의 역동성이 구현되는 지속이었다면, 보르헤스는 시간에게 속한 것들을 환상에 응고시켰다. 그렇다면 백소연 시인에게 시간은 “고양이”였다고, 鰍, 즉 미꾸라지로 그 양태를 변모시키게 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만족시키는가. “도살”과 “도화살”사이로 미끄러져 흔적조차 없이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을 만족시키는 영원성의 의미가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라는 처절한 예수의 절규 속에 내재된 채 페달링의 의미를 초월의 영역에 위치시키지만, 시인이 그것은 種과 鐘 사이의 울림을 “씨앗된 사랑”으로 공명시켜 이 세계를 반복의 형식으로 재귀시키는 현전의 공식임에 틀림없다. 여전히 지구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페달링하듯 “조종”이 울리는 절망의 심연에서 아직 희망을 꿈꿀 “사과나무”(「빈 집」)의 싹을 키워 이 세계가 사랑의 전언으로 울려 퍼지기를 염원한다. 다시 말해서 초월은 현전으로 되돌아와 시간의 구성법을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유하는 곳에서 생성된 깨달음의 진리이다.
나는 너 너는 나, 나와 너는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달라
― 「긍정이 부정문에게」 부분
네 발 달린 풍상風霜
바다, 비늘 선명한 비음 쓸어안는다
― 「여자만汝自灣」 부분
밖으로 에돈 천천만만 바람의 혀
남의 생 휘어감은 채 저물도록 사설 중이다
― 「내장산 ―길과 나무 사이」 부분
나는 나의 나를 찾기 위해 당신을 노크하죠.
선택은 택하는 자가 주인될까요?
― 「희 미용실」 부분
의미를 끌고 올 수 없는 짧고도 무거운 진술 각각 앓아누웠다
― 「유리 컵」 부분
“푸른 속살 벤 아픔” (「숲, 뿌리 깊은 나무」)을 매만지다 바흐와 모차르트 사이 어디쯤에서 “정신 병동 벽에 통째 생을 저당”잡힌(「너는 빈센트 반 고흐」) 한 예술가의 “본향”(「페르소나 4 」)은 어디인가. 고난으로 점철된 “풍상”의 어디쯤인가. “비늘 선명한 비음”의 내밀한 공간인가. 아마 시인이 말한 것처럼 심연과 적요로만 흐른 채 퍼즐 전체는 여전히 아포리아에 당도해 인간학 전체를 미궁으로 묘사하고 있을 게다. 그러나 설령 그와 같은 방식으로 관계의 체제가 구조를 이루고 있더라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페달링을 지속하면서 시간의 저쪽으로 근접해 가는 중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말의 육질 곱씹는 해 그물”(「너는 빈센트 반고흐」)에 포획된 “뜨거운 생”이거나 “맛깔스런 일상”(「그 집, 소문난 백숙」)을 향유하다 “한 시대 비명 내지르는 기호(「서서 우는 나무」)를 받아 적는 “생가시” (「어머니」)의 삶일 것이다. 마치 행복을 꿈꾸지만, “불행”으로 점철된 바로 그 지대에 너와 나 사이의 의미론적 거리가 존재하겠지만, 존재론적 관계를 조율하는 페달링의 원리도 결국에는 어떠한 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들뢰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의 오묘한 “균형”이 만든 동일성의 원리라 하겠다. 결국 삶의 본질은 태도의 문제, 즉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빚어지는 세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지 그 이상의 무엇일 수 없다. 길의 저쪽에 언제나 동일한 것, 즉 심연이나 적요와 같은 미망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인간의 의식의 한계를 초과하는 그 무엇으로 그 체계를 구성한 동일성으로 항상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의 혀”로 “남의 생”을 허두로 말하듯 “사설”만을 늘어놓은 채 자기 한계를 자인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때론 “귀와 길 사이”에 놓인 미지의 기호로 인해 존재의 길을 잃기도 하면서 때론 “부러진 기억”의 파편들을 애절하게 위무하면서 백소연 시인은 자신에게 놓인 존재의 길 전체를 선택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 마치 깨진 “유리컵”의 “파편”들처럼 관계의 진리들이 산종되어 있듯, “조각난 눈”을 통해서만 진리의 그것의 구성물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아도르노가 『부정의 변증법』에 언술한 형이상학을 구멍 틈으로 바라다보는 바로 그와 같은 방식이 인간학에 허여된 인식의 한계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결코 시간의 퍼즐을 정확하게 끼워 맞출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얼기설기 미봉책으로 얽어 너와 나 사이를 매개시킨 채 유유히 흘러내릴 뿐, 더는 진실을 추궁할 수 없다. “선택”이라는 상황만 모두에게 제시되었을 뿐, 무엇이 진실이고 진리인지 전혀 말할 수 없다.
그가 확실하게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중심에 놓인 가온음이다
틈틈이 흐름에 몸 맡겨 솎아 올린 울림은
12음계 비구성 불협화음이다 일순
헛디딘 통로 반음 낮췄을 뿐인데
음양의 언어 전이된다
계류된 가락, 속 깊은 울림 퍼 올리려 일생
거친 마음 가지 쳐내야 한다는 사실 눈치챘을까
매번 반음씩 앞질러 건너다 율격 깨트리는
심연, 어깨 힘 다 빠져나간 후
짚어낸 비음의 화성 햇살로 터져나온다
수심 깊은 전언 계단 사이로 넌출거린다
층층 통과한 명징한 울음
― 「페르소나 5」 부분
노란 리본 검은 구두 저벅저벅 계단을 오른다
나비도 아닌 것 꽃같이 꽃으로 나무 위를 걸었을까
고단함을 멈춘 쉼표와 세 옥타브 속 선율
정전된 눈물 찔끔거리는
구두 안경 신발 일제히 화엄華嚴에 묻힌 오후
그래, 초콜릿은 아니었어!
사방팔방 펑펑 허공은 깊다
― 「페르소나 6 ―검은 액체」 부분
페달링의 원리는 결국 가면의 원리가 표현되는 너무도 가열된 삶의 원리이다. 차라리 그것은 진리나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너 또는 내가 직면한 생존의 원리이다. “일생 피비린내 가득한 좌판 위”(「어머니」)의 삶, 즉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고 또 “생사 입자”(「페르소나 3 ─」)가 분열하는 첨예한 경쟁의 장소를 떠올린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쯤 닿”(「페르소나 3 」)는 미망의 존재인가. “물어뜯긴 주검”과 “고름진 사유”(「레일, 동물들의 시육」)가 열린다. “기억의 빚장”(「곡선의 방식」)어딘가에 켜켜이 쌓여있던 “바스라진 생의 자락”(「희 미용실」)을 반추하며 자신 앞에 놓여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게 되는데, 어쩌면 그것이 바로 생이 도달하는 궁극적 목적인지도 모른다. 가면의 저쪽은 혹은 죽음에의 의지. “길의 길”(「활주, 사운드 트랙」)은 어디 있는가. 오늘도 백소연 시인은 “자전과 공전” 혹은 “흐름과 멈춤”(「페달링의 원리 2」)이 반복되는 생의 욕망을 페달링한다. 하지만 그것이 부질없는 욕망임을 깨닫고 있다. 다시 말해서 총 6편에 달하는 「페르소나」 연작은 인간의 존재론적 관계에 색인된 “암호”를 죽음의 본능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페달링하면서, 자신의 미학적 현주소를 심문한다. 그것은 심연과 적요로 흐르는 시간의 퍼즐을 존재의 언어로 육화시켜 미학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가면을 벗어야 한다. 아니 항상 “가온음”의 실체를 놓치며 살아온 삶을 반성하며 “음양의 언어로 전이”되는 순간 시간의 오묘한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 여전히 가면의 삶은 “3.3평방미터 쪽방촌”(「불안이 불러낸 바닥」) 어디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뒷목 쭈뼛해진 말의 동사”(「기차는 11시에 질주한다 」)와 극적으로 조우하는 진기한 체험들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이 전개한 시말운동이 “애수의 장단”과 호흡하는 너무도 가열된 존재의 몸짓인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시 승화 지양 극복되어야 할 가면의 언어임을 모르겠는가? “검은 액체”가 흐르고 “화엄”의 장관이 연출된다. 이를테면 백소연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시간의 저쪽에 기입된 의미의 공식을 도출하는 페달링, 즉 열역학 제2법칙을 확인하는 존재의 허망한 운동이라 하겠다. 달도 차면 기울 듯 생은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적멸의 공간에 당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가온음이 존재하는 진리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늘 “반음”을 놓치거나 앞질러간 생이었다가 시의 적절하지 못한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불협화음”으로 탄주되는 경우 비일비재하다. 백소연 시인의 시들이 조금은 접근하기 쉽지 않고 또 쉽게 해체되기를 거부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단단한 말과 물렁한 낱말” 사이를 시간의 형식으로 유려하게 흘러내렸기 때문이리라. 물론 시의 “배경 뒤 배경”(「눈에 대한 관찰 」)은 “우울의 뿌리”(「월요일에 대한 담론」)로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시말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페달링하는 원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까지 이 역시 관계와 관계의 “비밀의 통로”(「소리의 생존법」)에 이르는 지난한 존재의 여정임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시간은 우리를 가면의 저쪽으로 데려가 자기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게 된다.
초대 받은 날부터 혁명은 시작되었다
망인과 여자의 손발은 닮아 있다
生을 거꾸로 처박아 뒤틀고 헤집어 덧낸 그녀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전갈이다, ▽은
수포와 고름으로 얼룩진 엇박을 즐긴다
심지 없는 볼펜인가 도무지 친숙하지 못했단 이유로
불균형 곁눈질 끌어내기 성급한 손발 끝끝내
막판 끝수로 몰릴 때
모람모람 뒤에 숨은 충돌 치명적 사이렌을 울린다
가면 뒤 가면, 밑바닥 대명사란 증거만으로도 전갈은
오래 자란 슈퍼박테리아라고 수수곡절 눈동자와 손가락
속죄하듯 입을 모았다
올빼미와 전갈 닮은 ▽은 회전문 넘나들며
제 생각 닿지 않는 ○를 안으로 걸어 잠궜다
길은 끝내 살아남은 자의 몫이었을까
피터지게 휘저어 칼집 무성한 생사 연고, 출상 날
등껍데기만 남은 ○ 머즌일 그림자 보며 알았다
식어버린 죽사발이 얼마나 뜨거운 목울음을 불러오는지
유혼 에둘러 선 혹한의 도끼날 번뜩인다
보임과 본다는 차이와 차별은 어디에서 몰려 온
완곡한 우주 뒷발길질일까
칠성판 메고 우는 듯 웃는
▽ 어깨 위 전갈, 제 뼈와 살 파먹는다
불온한 족적 뒤밟는 능선 한 발 투욱 내려닿는 길
― 「야곱의 단팥죽」 전문
백소연 시집, {페달링의 원리}, 도서출판 지혜, 값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