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요8:1-11)
2019.4.7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예전에 어느 모임에서 아주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았다. 이 두 사람은 툭하면 둘이서만 식사하러 가고,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둘이서 속닥속닥 했다. 또 어떤 후보의 선거운동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중에 한 사람이 없는 사이에 나머지 한 사람과 여럿이서 식사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신랄하게 욕하는(까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의 이중성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스타일의 사람을 한 두 번씩은 경험했을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이처럼 이중적인 모습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이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요8:3). 이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사람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겠냐고 질문했다(요8:5). 이들은 겉으로는 자신들이 율법을 잘 준수하는 것처럼 행세했지만, 이 사람들의 진짜 의도는 이 여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 시험하기 위함이었다(요8:6).
그때 예수님께서는 잠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후에, 그들의 속을 꿰뚫어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이 말씀은 이 여인이 죄가 없거나, 행동거지를 잘했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척 했지만 뒤로는 율법을 수 없이 범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종교 장사꾼에 불과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다 돌아가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자기 속의 악한 인간의 본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다. 만약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삶을 찍어놓은 동영상이 있다면, 그 누구도 ‘나는 죄가 없다’고 큰소리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 떠나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예수님의 이 한 마디 속에 지금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과 삶의 무게에 지켜있는 모든 영혼들을 향한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과 이 시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바꿔 말하면, 다시는 너의 쾌락과 욕심과 썩어져가는 세상의 것을 위해 살지 말고, 오직 영원하신 주님을 위해서 살라는 말씀이다. 마지막 죽음의 벼랑까지 몰렸던 이 여인은 예수님 때문에 다시 인생의 이모작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사실 넘어지고 실수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을 의식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총(銃) 중에 가장 무서운 총이 ‘눈총’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방황한다.
그러나 실수가 항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실수 때문에 실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수한 이후에 행동에 때문에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 형틀은 죄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과 절망의 장소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절망의 장소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돌보다 더한 온갖 고난을 받으셨다. 왜? 바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길이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새 희망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20세기 최대의 기독교 변증가 중의 한 사람인 C. S 루이스 박사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의 모든 악을 다 모은다 해도 그것은 대양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잉크보다 작다” (C. S 루이스)
이 말은 아무리 우리가 무겁고 무서운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은혜에 바다에 나오면, 마치 대양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씻어진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농사일을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일모작 때는 실패한 땅이라 할지라도, 같은 땅에서 이모작 삼모작의 씨를 뿌릴 때에는 얼마든지 성공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비록 어떤 실수나 사고로 인해서 내 몸과 인생이 만신창이처럼 되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 앞에 나와서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예수님이 우리들의 최고의, 최대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것이 이 시간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모든 지치고 힘든 영혼들을 품는 곳이다. 과거에 우리들도 그랬었고, 어쩌면 어떤 사람은 지금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과 같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손이다. 교회는 마치 모든 물줄기들을 담아내는 바다와도 같고, 교회는 마치 영적인 목욕탕과도 같고, 삶의 에너지가 고갈된 사람들이 와서 새 힘을 얻는 영적인 주유소와도 같은 곳이다. 우리 안흥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지역과 이 시대의 방황하는 영혼들을 넉넉히 담아내고 품어내는 곳이 되자. 이것이 우리교회가 이 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엘리자 히윗(Eliza Edmunds Hewitt, 1851∼1920)라는 여선생님이 계셨다. 히윗은 펜실베니아교육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학교에서 어느 불량 학생을 지도하다가 그 학생이 던진 벽돌에 맞아서 등뼈가 부러지고 척추에 이상이 생겨서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인해서 결국 교직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그녀였지만 대소변까지 받아내는 오랜 투병생활로 인해서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매사에 짜증과 그 학생에 대한 증오심으로 견디기 어려운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보면서 비웃는 것 같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봄날 병실 청소를 하던 흑인 여성청소부가 흥얼거리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들 듣게 되었다. 그때 히윗은 그 청소부에게 버럭 화를 내었다.
"이봐요! 청소부 주제에 뭐가 그리 좋다고 생글거리는 거예요?"
그러자 흑인 청소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에게 닥친 모든 형편과 처지가 찬송으로 바뀔 수 있는 힘을 주님이 주셨으니 즐거울 수밖에 없지요!"
히윗은 그녀의 말을 들을 때,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동안 주님을 원망만 하던 자신의 믿음을 회개하고, 다시 십자가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 퇴원 후에는 그녀는 출석하는 교회에서 평생 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천했다. 그녀는 다시 주님을 만난 후에 그 감격을 주옥같은 찬송시로 남겼다. 그녀가 작사한 찬송가들이 현재 우리 찬송가에도 여러 곡이 있다(“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예수 앞에 나오면”,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등). 그녀가 병원에서 주님을 새롭게 만난 후에 지었던 찬송이 바로 유명한 “주 안에 있는 나에게”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이하 생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동네주민 여러분들이여,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다. 그러므로 지금 십자가 밑에 나아와 여러분의 모든 짐을 풀어놓으라. 다시 십자가 앞에 나아오라. 그래서 지금부터 주님과 함께 인생의 이모작을 시작하라. 주님이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