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첫 인천상륙작전, 지중해국 우뚝 [한민족 시원, 만주] 고구려,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1)
삼국시대 오나라와 군사동맹 맺고 맞상대
철과 무역 국력 바탕, 동아시아 최후 승자
해륙사관으로 본 고구려사의 재인식
우리 역사를 보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 흔히 사관이라고 부른다. 우선 일본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하려는 반도사관이 있었다. 이런 개념이 인식을 규정하고 인식이 실천을 낳아 반도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 사대주의다. 일본인들이 만든 철저히 잘못된 사관이다. 최근에는 반도사관을 뛰어 넘는 사관, 즉 대륙지향 사관이 활발하다.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를 한반도를 넘어 만주 일대까지 확장하려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삼면이 바다인 우리가 어떻게 대륙의 영향만 받았겠는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 해양 활동이 언급이 되어야 한다. 일본 하면 제국주의와 ‘왜구’가 떠오른다. 왜구는 해적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면 왜구보다 먼저 등장한 것이 ‘신라구’다. 신라해적인데,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해양활동이 그만큼 활발했고, 역사가 깊다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삼국시대에 우리 민족과 일본, 중국과의 교역과 교섭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를 통해 주로 이뤄졌다. 고구려도 육지보다는 바다를 통해 중국과 거래했고, 일본과는 ‘고구려 루트’라는 것도 있었다. 한반도 주변 지역을 ‘동아시아 지중해’라고 명명할 만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바다의 역할이 중요했다. 동아시아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육지와 해양을 동시에 활용했다. 동아시아 지중해에서 중심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해 번창한 나라가 고구려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륙사관도 아니고 해양사관도 아닌, 제3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해륙사관이다.
한강 하구를 장악하면 한반도의 반을 장악하는 것
» 중국 환인시 오녀산성.
오녀산성은 삼면이 천길 낭떠러지인 천혜의 방어진지로 주몽은 여기에 첫수도인 졸본을 세워 고구려를 일으켰다. 조현 기자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인천상륙작전의 원조는 누구일까? 물론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맥아더 장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인천상륙작전은 없었나?
한반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 경기만 일대다. 한강 하구를 장악하면 한반도의 반을 장악하는 것이다. 한반도 중심인 서울, 개성을 장악하려면 인천상륙작전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한강 하구, 특히 강화도가 중요했을 것이다. 거기를 목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신라로부터 강화도를 점령한 뒤 그 지역을 ‘혈구군’이라고 불렀다. 구멍 ‘혈(穴)’에 입 ‘구(口)’ 자를 썼다.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취한 뒤에는 ‘해구(海口)’라고 했다. 바다의 입구라는 뜻이다. 오늘날로 보면 코어(core)이고, 허브(hub), 아이시(IC)의 구실을 하는 곳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중국지역과 북방족, 일본 열도와 신라, 백제 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런 국제 질서가 완벽한 변동을 가져온 사건이 그 시대엔 무엇이었을까?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에는 396년에 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率水軍討利殘國軍·솔수군토이잔국군)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3개의 공격로를 이용했다. 첫 번째 공격로가 ‘한강수로직공작전’이었다. 강화도를 통해 한강 하구로 들어와 지금의 자유로, 강변북로를 타고 (백제의 근거지인) 천호동과 하남시 일대까지 공격했을 것이다.
»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글자와 광개토태왕비문의 모습. 조현 기자
두 번째 공격로가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396년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온다. 인천의 옛 이름은 미추홀이다. 미추성은 바로 지금의 문학산성이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광개토태왕은 오늘날의 부평, 신월동, 목동단지, 영등포를 통해 지금의 천호동, 풍납토성까지 진격했다. 다른 한 공격로가 남양반도, 즉 화성을 거쳐 지금의 동탄지구, 판교지구, 분당, 광주를 넘어 풍납토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백제군이 지켰던 곳에 오늘날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놓였고, 부동산이 급등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군 진지 가운데) 아직 다리가 놓이지 않은 곳이 있다면, 앞으로 다리가 놓이니까 그런 곳에 투자를 해야 하는 거다. (웃음) 광개토태왕이 공격하면서 거점으로 삼았던 대부분 지역도 소위 말하면 ‘뜨는 지역’이다.
» 인천에 있는 문학산성.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396년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온다.
인천의 옛 이름이 미추홀이고 미추성은 지금의 문학산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부동산 투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이 역사적 실상이고 상상력이다. 역사는 추상화되면 안 되고, 구체화하고, 실제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역사는 지나치게 추상화되고, 다 잘라버리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늘 역사 이야기는 피부에 닿지 않고 관념적이었다.
위·촉·오만 있었다?…그런 엉터리 역사가 어디 있나
요즘 아이들은 삼국지를 많이 읽는다. 그래서 황춘, 하후돈 등의 장군은 다 아는데, 정작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 장군이라는 것은 모른다. 삼국지를 보면 그 당시 동아시아에는 위·촉·오 3국만 있고, 모든 영웅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삼국지가 배경이 되는 시대는 3세기 전반, 중반 시기인데, 그 시기에 고구려는 없었나? 고구려는 원시 상태에 있고, 위·촉·오는 제갈공명을 비롯해 엄청난 지략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런 엉터리 역사가 어디에 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만에 중화가 장악한 명나라 시절, 한족이 쓴 한족 중심의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보고 마치 중국이 자신의 모국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결코, 그렇치 않다. 그 시대 고구려가 있었다. 당시 고구려 동천왕이 오나라 손권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사신과 군수물자가 오고 가다가 동천왕이 손권이 보낸 사신의 목을 치고, 손권이 화가 나서 요동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은 모른다.
장수왕 때인 439년, 말 800필을 실은 대규모 선단이 남포항을 출항해 상하이를 거쳐 수도인 남경으로 간 기록도 있다. 당시 말 800필은 오늘날 미사일과 전투기와 맞먹는 군수물자다. 중국은 통일된 시기보다 분열된 기간이 많았고, 비한족인 북방 유목족이 통치하는 시대가 더 길었다. 북방 유목족의 주력은 우리 민족과 가까운 선비족이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을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 역사 바꿔 온 유목세력의 동쪽 끝 큰 나라
» 고구려 강역도. 진하게 칠해진 직접 통치지역 외에도 몽궐지역까지 세력권이 넓게 분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방송 ‘느낌표’ 고구려 지도.
고구려는 큰 나라였다. 고구려 땅은 특별한 땅이었다. 관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으로 보면 그렇다. 문명이 전파하고, 교류한 두 가지 길이 실크로드와 초원의 길이다. 실크로드 위에 초원의 길이 있다. 실크로도는 일본인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띄우다 보니 동서양을 잇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막강하고 위력적인 길이 초원의 길이다. 그 길은 정치의 길, 문화의 길, 군사의 길이었다.
이 길에서 활동하던 세력들은 분열돼 있었지만, 특별한 계기를 만나면 통일을 하게 된다. 그러면 세계 역사가 바뀐다. 흉노족부터 돌궐족, 몽궐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초원의 길을 평정했을 때 동서양의 역사가 바뀌었다. 칭기스칸도 마찬가지였다. 칭기즈칸이 동몽궐 출신인데, 최근에 몽골 학자를 중심으로 발해계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렇게 세계 역사를 바꿔 온 유목세력의 가장 동쪽이 어디인가? 고구려다.
고구려는 그 초원의 길, 동쪽 끝에서 700년을 영유했다. 유목종족과 중원의 한족과 경쟁하고 전쟁하며 그들의 핵우산 아래에서 조공을 바친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면서 700년을 버텼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 때 수 양재는 정병만 113만 3500명을 동원했다. 삼국지보다 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인류 역사상 1, 2차 세계대전을 빼고 가장 큰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고구려가 이겼다. 그 사이 수없이 많은 나라가 명멸을 했다. 그래서 동아시아 지역 최후의 승자는 고구려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최대의 에너지원 틀어쥐고 영향력 행사
» 중국 집안시 국내성의 옛 성터 모습.
국내성은 고구려의 2번째 수도로 아파트가 지어진 도심 곳곳에 성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조현 기자
고구려가 막강한 힘, 즉 국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중국 사람들이 고구려를 평가하는 문장이 여럿 전해져 내려온다. ‘고구려 호전적이고 흉포하다. 고구려 사람은 교만하고 방자하다. 고구려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평지도 산길 달리듯 한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인들의 기록이다. 아마도 그 반대가 고구려인들의 성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구려 사람들은 독특한 사람들이다.
국력이 사람의 기상이 뛰어나다고 저절로 키워지는 것은 아니다. 테크놀로지(기술)와 자원이 필요하다.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자원은 철이었다. 당시 최고의 철 생산지는 요동지방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철 생산지인 안산 제철소가 만주에 있다. 고구려의 안시성도 원래 철 생산지이다. 요나라 때는 철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는 당대 최대의 에너지원을 틀어쥐고 있었다. 오늘날 중동 산유국이 석유 자원을 틀어쥐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구려는 앞선 제련기술로 산업과 군사력에서 앞설 수 있었다.
고구려는 철로 여러 제품을 만들어 무역도 활발하게 벌였다. 고구려가 약탈 경제로 성장했다고 배웠는데, 약탈 경제로 어떻게 700년간 버티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뤄낼 수 있었겠는가? 장수왕 시절 대규모 선단을 운영한 것처럼, 북쪽에 철을 팔고 모피와 말을 사와 그것을 배에 싣고 다시 중원에 파는 중계무역을 벌였다. 이런 전통은 발해로 이어졌다. 발해도 일본에 호피, 표피, 웅피 등을 수출했다.
동아지중해론, 21세기 생존전략과 맞닿아
» 중국 등탑시 고구려 백암산성. 백암산성은 요동일대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성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고구려 산성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다. 조현 기자
고구려 역사에서 우린 무엇을 배워야 하나? 역사학자로서 지금 시대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기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도 세계사적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우리가 좋든 싫든 동아시아는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동아시아 공동체 연방이 탄생할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기된 지 20년이 넘었다. 동아지중해론도 제기되었다. 동아시아 각국들은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와 군도에 둘러싸인 황해, 남해, 동해, 동중국해를 포함하고 있어 완전한 형태의 지중해는 아니지만 다국간 지중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해양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는 동아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이런 지리적 위치를 잘 이용해 700년 동안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해양 활동이 활발하였고, 해양을 장악함으로써 주변국들의 외교망을 통제할 수 있었다. 국제정치에서 해양력(sea-power)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고구려의 해양 전략은 역사상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감행한 광개토태왕 시절 본격적인 국제전략으로 채택하였고, 그 결과 고구려는 지중해적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 해양을 한 틀 속에 넣고 조정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완전한 중핵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21세기도 마찬가지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기사등록 : 2010-02-25 오후 04:05:00 기사수정 : 2010-02-27 오전 03: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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