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말복으로 대지로 내려오려던 가을의 선선한 기운이 여름의 더운 기운에 굴복한다는 삼복(三伏)이 모두 지났지만 더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오갑산 산행을 위해 친구 M과 판교역 만나 KTX-이음 열차를 타고 충북 음성군 감곡면 감곡장호원역으로 향했다.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속담처럼 만사가 귀찮아 꼼짝도 하기 싫은 삼복더위에 산으로 나서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의아하기만 하다.
KTX-이음은 2021.1.5일, 중앙선 청량리 ~ 안동 구간을 시작으로 2023년 말 기준 경강선 행신~강릉, 영동선 청량리~동해, 중부내륙선 충주~판교 등 네 가지 계통으로 확대 운행 중이라고 한다. 좌석 열마다 창문이 하나씩이고 좌석 간 거리도 여유로운 이 열차는 좌석마다 핸드폰 무선 충전기도 달려 있는 등 기존 고속열차보다 쾌적하고 편리한 사양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이 열차는 대도시 간을 운행하는 기존 고속열차와 달리 서울 외곽과 지방 주요 거점 도시를 연결하고 있어 승객이 많지 않고 한적한 것이 좋은 점이다.
판교역에서 예정된 08:29 정시에 출발한 열차는 이천 부발, 여주 가남역을 거쳐 09:15 감곡장호원역에 도착했다. 널찍한 역사 플랫폼에 내리는 승객은 우리를 포함해서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 역사 부근에 시골스런 주변 풍경 속에 극동대학교와 강동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어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동남쪽 1km지점 소담한 매산 자락에 자리한 감곡성당(甘谷聖堂)도 눈에 들어온다. 1896년 프랑스인 부이용 가밀로(C. Bouillon, 任加彌) 신부가 세운 이 성당은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으로 전국에서 18번째, 충청북도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현재 건물은 프랑스인 시잘레(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설계한 것으로 1930년에 신축되었다고 한다. 내부 성모상에는 6.25전쟁 중에 생긴 7발의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역사를 빠져나와 여주공영버스 929번을 타고 서너 정거장 거리의 여주시 점동면 관한2리 관한교 부근에서 내렸다. 등산코스 지도 등을 참고하여 관한2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고 원부저수지 가장자리를 따라 산행 들머리인 밀고개 쪽으로 향했다. 복날의 무더운 날씨가 벼를 빨리 자라게 한다고 했으니 저수지 아래 너른 논은 머지않아 풍년의 황금빛 물결로 넘실댈 것이다. 저수지 가장자리 수면에는 어리연이 무성하다. 곳곳에 설치된 낚시터 데크에는 낚시줄을 던져 놓고 입질을 기다리는 몇몇 강태공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오갑산 주 능선은 여주시 점동면 관한리 등을 디귿자(ㄷ) 처럼 감싸 안으며 음성군 감곡면, 여주시 점동면, 충주시 앙성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따가운 햇빛이 내리는 관한리 마을에는 주민 몇몇이 눈에 띌뿐 고요하기만 하다. 오갑산 산자락 끝에 자리한 광산 김씨 묘역으로 난 길 입구에 촌로(村老) 아낙 몇몇이 땅바닥에 앉아 복숭아 포장 작업을 하고 있다.
순박하고 인심 좋은 어낙들은 M과 나에게 복숭아 한 개씩을 맛보라고 내밀며 등로가 시작된다는 밀고개 방향을 알려 준다. M과 나는 복숭아 몇 개라도 사드렸으면 했으나 손에 현금이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능선이 내려 앉는 끝자락에 있다는 확신으로 우리는 여인네들의 친절에 고마움을 표하고 묘역쪽으로 길을 잡았다.
등로인듯 아닌듯 잡목이 막아서는 급경사를 따라 한참 동안 기어오르듯 발을 옮겨 주 능선으로 올라섰다. 어느새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하고 셔츠는 땀에 흥건히 젖었다. 솔가지 참나무가지 등 땔감이 지천으로 깔린 길은 사람들이 다닌 지 오래되었는지 희미하고 곳곳을 멧돼지가 헤집어 놓았다. 손을 휘휘 저어 물리쳐 보지만 귓가에서 잉잉거리며 성가시게 달려드는 날벌레들은 아랑곳하질 않는다. 잔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꺾어 양쪽 모자 밑에 끼워 귀를 덮으니 윙윙대는 소리가 조금 잠잠해졌다.
등로 한켠에 앉아 아낙들이 준 복숭아 하나를 꺼내어 칼로 깎아서 M과 함께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감곡과 접한 여주 농가에서 생산된 것일 복숭아는 '풍부한 햇살을 받고 탐스럽게 영근 음성 복숭아’를 의미하는 브랜드 이름 그대로 달콤하기 그지없다. 음성군 감곡면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시작으로 현재 부근 670여 농가가 793ha에서 '음성 햇사레복숭아'를 재배한다고 한다.
감곡면은 동북향이 막히고 남서향이 청미천 등 여러 줄기 하천 주위로 완만한 경사지를 이룬 배수가 잘되는 사양토로 복숭아 재배의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골짜기'라는 뜻의 지명에 걸맛는 복숭아를 생산하려 노심초사 공을 들인 감곡(甘谷) 농민들의 노고가 깃들어 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온갖 종류 매미들이 목청껏 내뽑는 떼창이 빽빽한 숲을 빈틈 없이 채운다. 개금골삼거리를 지나고 여전히 가파르고 초목이 앞을 가로막는 등로를 헤치며 산행 2시간 여 만에 옥녀봉에 올라섰다.
잠시 휴식을 한 후에 옥녀봉에서 안부로 내려와서 등로를 뒤덮고 있는 칡넝쿨 덤불을 헤치며 지났다. 다시 가파른 비탈과 한참을 씨름하다 보니 오봇하게 솟은 능선에 삼형제 바위가 나타나며 남쪽으로 트인 조망을 펼친다. 능선 아래쪽에는 새로이 골프장이 만들어지고 있고 중부내륙고속도로는 국망산과 매방채산 사이로 사라져 간다.
산행 2시간 반만에 해발 609.4m 오갑산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에는 100여 미터 거리를 두고 같은 높이 봉우리에 여주시와 음성군에서 세운 정상 표지석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오동나무가 많았다는 오갑산(梧甲山)이 임진봉(任辰峰)으로도 불히는 것은 임진왜란 때 적을 방어하는 진지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오갑산 정상에서 국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등로는 한결 편하고 반듯하게 정비되어 있다. 그 중간 쯤에 '진터' 라는 이정표가 자리한다. 진터에서 국수봉까지 300미터 거리 등로 주변 능선은 텃밭을 일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편평하다. 등로 주변에서 간간이 눈에 띄던 깨어진 기왓장이 국수봉 턱밑에서는 무더기로 보인다. 예전 어느 때인가 기와까지 얹은 군사 진지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국수봉에는 무릎 높이에서 가지가 세 갈래로 갈라진 노송을 배경으로 충주시 앙성면에서 세운 작은 정상 표지석이 자리한다. 세 개 지자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라 그럴만도 하겠다 싶지만 같은 높이의 세 봉우리에 각기 하나씩 정상 표지석이 놓여 있는 것은 매우 드물고 특이한 일이다.
북쪽 방향 능선을 따라 차츰 고도를 낮추어 가다가 오사고개에서 왼편 서쪽으로 내려서는 노루목 고개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 든다. 산행 중 원추리, 자주조희풀, 대화익모초, 작은며느리밥풀 등 눈에 띄었던 몇 그루 들꽃도 그 이름을 머리속에 담아 보았다.
그 끝에 두둠이산을 치켜 세운 산줄기를 따라 뇌곡리를 향하는 하산길에 물이 거의 동이 났다. 여름 산행 때는 물을 충분히 챙겨가야 하지만 비교적 높지 않고 길지도 않아 네댓 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 산행을 너무 쉽게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구름고개에서 뇌곡리로 빠져나오며 산행을 마무리했다.
감곡장호원역에서 탑승하려 예매했던 KTX-이음 열차편 차표는 산행이 길어지는 바람에 취소를 했다. 뇌곡리에서 버스로 여주역으로 이동하여 전철로 판교역까지 돌아가기로 계획을 바꾸었던 것이다. 산행에 지쳐서 아무런 생각없이 버스 정류소를 향해 가는데, 앞장 서서 걷던 M이 때마침 마을에서 도로로 나서는 승용차를 불러 세웠다.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만 신세를 지려던 차에 50대 중반 여성 운전자는 행선지가 성남이라며 흔쾌히 성남까지 태워주겠다고 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안도감이 밀려들며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베푸는 그녀의 호의가 가상하기 그지 없다.
성남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다가 마침 식전이라는 그녀와 셋이서 여주 외곽 식당에서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씩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30년 만에 친구의 부모님을 찾아뵐 겸 고향에 다녀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녀 차량 내부의 대시보드에 놓인 연꽃 한 송이와 룸미러에 달려 흔들리는 묵주가 인상적이다. 모란역에서 차를 내리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M과도 다음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했다.
제79회 광복절을 맞은 오늘, 광복절 경축식이 사상 초유로 반쪽짜리로 치뤄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역대급으로 지속되고 있는 무더위와 함께 국민을 편가르며 권력 쥐기에 혈안인 정치판의 이전투구나가 짜증을 더한다.
그럼에도 일상 속에서 간간이 접하는 사람들의 작은 친절이나 호의는 세상 살아가는 참맛이 무엇인지 되새겨 준다. 정류소에서 버스 운행정보를 알려주시던 아주머니, 복숭아를 건네 주던 아낙, 낯선 객에게 빈 좌석을 내어주던 여성 등 오늘 산행에서는 그런 천사들을 곳곳에서 만난 특별한 날이었다.
24-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