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지상주의 윤리가 꽃피었다는 사실은 식품 시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통 농업사회는 굶주림이라는 무시무시한 그늘 속에서 살았다.
오늘날의 풍요사회에서 건강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만인데,
그 패해는 가난한 서람이 (이들은 햄거버와 피자를 잔뜩 먹는다) 부자들보다 (이들은 유기농 샐러드와 과일 스무디를 먹는다)
훨씬 더 심각하게 입는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 (적게 먹으면 경제가 위축될 테니)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소비지상주의 윤리와 사업가의 자본주의 윤리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
후자에 따르면 이윤은 낭비되어서는 안 되고 생산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오늘날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는 노동의 분업이 존재한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갋비싼 사치품에 돈을 흥청망청 썼지만
농부들은 한 푼 한 푼을 아끼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오늘날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데 반해,
그만큰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자동차와 TV를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자본주의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다른 면에서도 혁명적이다.
이전 시기의 윤리 체계들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거래를 제시했다.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러려면 동정심과 관용을 키우고, 탐욕과 분노를 극복하며,
이기심을 억제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너무 어려운 조건이었다.
윤리의 역사는 아무도 그에 맞춰 살 수 없는 훌륭한 이상들로 점철된 슬픈 이야기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예수를 모방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불교도는 부처를 따르는데 실패했으며,
대부분의 유생들은 공자를 울화통 터지게 했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소비지상주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준수하며 살아간다.
새로운 윤리가 천국을 약속하는 대신 내놓은 조건은
부자는 계속 탐욕스러움을 유지한 채 더 많은 돈을 버는데 시간을 소비할 것,
그리고 대중은 갈망과 열정의 고삐를 풀어놓고 점점 더 많은 것을 구매할 것이다.
이것은 그 신자들이 요청받는 그대로를 실제로 행하는 역사상 최초의 종교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대가로 정말 천국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야 TV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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