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전공하신다는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하도 '의미(주제)를 강조하시길래 내가 수필의 재미론을 주장했다. 교수님은 재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표현하는 뜻으로, ‘재미가 뭔대?라고 반문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 재미는 즉각적인 ‘즐거움의 경험’이다.
그러나 재미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따라서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재미가 일어나는 조건을 많이 따진다고 하였다. 이러이러 할 때 재미있더라는 식으로 말한다.
재미는 특정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조건에 맞추어 일어난다. 마주하는 사람이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라는 말과 같다. 즉 사회생활을 하면서 재미를 주는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를 주로 말한다.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재미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어렵게 말해봅시다.
상호작용 중인 사람들이 사회적 환경을 의식적으로 재구조화 하고,(재구조화란 도덕같은 사회 구조망을 삐딱헤 말하고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것이 재미이고, 재미를 통해서 정서적으로 보상받는다(이 말은 만족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학술적으로 재미는 아직 미개척 분양이다. 그러나 깊고, 강렬하게 그리고 산발적으로 느껴지는 만족감이라고 말한다.
그라지아는 1962년에 이렇게 말했다.
재미있는 순간애 자유를 느낀다. 재미는 도덕이나, 정치관념과는 무관하다. 자유란 도덕적으로, 사회관념상으로 억툴려 있던 것에서 벗어날 때임으로 자유와 재미는 거의 동의어이다.
(*우리가 재미가 있어서 깔깔깔 웃을 때는 전혀 구속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 재미는 外向的이고
즐거움은 內向的이다.
재미와 즐거움은 사회적 유대 속에서 형성됨으로, 상호 관계할 때 권력이나 불평등의 차이가 없어질 때 나타난다.
재미를 경험할 때는 긴장이 풀어진다.(이완된다.)
재미는 기분전환 정도이고, 진지하지는 않다. 즐거움을 느낄 때는 몰두한다.
--> 재미는 진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즐거움에는 몰두가 있고, 몰두는 사람을 빠져들개 하며, 몰두하는 것은 개인의 의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필에서 주제를 강조 할 때는 재미보다 즐거움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특정한 형식은 없다.(수필을 이런 형식으로 써야 재미를 준단든지---
재미는 위반할 때 온다. 위반이란 특정 형식의 틀을 깨는 것이다. 즉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통상적인 형식을 깨뜨릴 때에 재미를 느낀다.(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더 재미가 있다하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탈이고, 위반이다
예측과 회상은 상상력이 작용한다. --상상력이 작용하며 일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온갖 환상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규칙에서 벗어난 상상을 ‘개방성’이라고 한다.
재미는 나 혼자 만이 아닌(몰두가 아닌), 함께 즐기는데서 온다.
재미에는 사화적 공명이 있다는 말도, 나 혼자가 아닌 ‘사회가 함께’라는 뜻이고, 사회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뜻이므로, 공명이 있다고 하였다.(내가 즐거우면 다른 사람도 즐거움을 느낀다.)
(*수필에서 재미를 느꼈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공명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혼자만이 즐겁다’라고 할 때는 재미+행복+즐거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 양상이 복잡해진다. 이론을 세우기가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재미의 이론화는 아직까지 연구 단계임으로, 확립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재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