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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문 수다원 원문보기 글쓴이: 현문[아리야(Ariya)]
후불벽 뒷벽의 삼관음보살벽화. 수월관음을
중심으로 그 오른쪽에 백의관음, 왼쪽에 어람관음을 모셨다. 어람관음께선 왼손에 물고기 바구니를 들고 계신다. |
벽화의 향연을 갖춘 ‘작은 성보박물관’
수월관음·백의관음·어람관음 삼존벽화
맨
땅에 맨 발로 서계신 ‘어람관음보살’
법의에 베푼 문양, 세밀가귀의 아름다움
국내 유일의 삼관음벽화
법신불이 화현(化現)하여 보살의 모습을 하고 중생 속으로 나투시는 것을
‘수적(垂迹)’이라 한다.
‘드리울 수, 자취 적’이니 발자국을 드리우다는 뜻이다.
‘권화(權化)’도 같은 말이다.
특히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갖가지 응신(應身)으로 나타난다.
재상, 거사, 비구, 비구니, 소년, 소녀 등 다양한 몸으로 수적을 남기신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33응신으로,
〈능엄경〉에서는 32응신으로 나타난다.
중생의 처지에 따라 여러 변화신을 보이는 것을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한다.
그 모든 위난에 처했을 때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신력을 갖추신 분,
그 분이 관세음보살이다.
대웅전, 극락전 등의 후불벽 뒷면에 그 위신력을 갖춘 관음보살을 독존으로 그려
예경과 치성을 드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후불벽의 벽화 대부분은 수월관음벽화다.
무위사, 내소사, 관룡사, 양산 신흥사, 마곡사, 직지사, 여수 흥국사 등
전국에 10여 곳의 사찰에 수월관음벽화가 남아 있다.
그 중에서 양산 신흥사 대광전 후불벽 뒷면의 수월관음벽화는 특별한 주목을 끈다.
일반적인 독존형식이 아니라 국내 유일의 삼관음벽화(三觀音壁畵)다.
백의관음, 수월관음, 어람관음의 세 존상을 모셨다.
특히 어람관음의 존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국내 유일성으로 귀중한 성보의 가치를 더한다.
사찰벽화의 보고
양산 신흥사 대광전은 사찰벽화의 보고(寶庫)다.
통도사 영산전, 무위사 극락보전 벽화만큼이나 소재, 표현 등이 풍부하고 다양하다.
아미타여래삼존도, 약사여래삼존도, 팔상도 벽화, 삼관음벽화, 육대보살도 등
희소성과 예술성이 주목되는 성보들이다.
외부와 내부에 걸쳐 69개체의 도상이 베풀어져 있다.
벽화의 향연을 갖춘 작은 성보박물관에 가깝다.
벽화의 제작연도는 도상의 개채여부에 따라 대광전 건축의 절대연도인
1657년 무렵부터 19세기까지 편차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삼관음벽화는 후불벽 뒷면의
흙벽을 화폭으로 삼았다.
색채운영에서부터 다른 수월관음도와 확연히 다르다.
화면이 전체적으로 검다.
바탕을 묵으로 검게 마감하고, 흰 선으로 그린 독특한 백묘 벽화다.
직지사 대웅전 후불벽 수월관음도와 채색의 색감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지 직지사 벽화는 필선을 검은 먹선으로 운용하고 있어 차이가 난다.
신흥사 삼관음벽화는 검은 바탕에 흰 선의 필획으로 커다란 면을 채워나간 까닭에
문양 묘사력이 대단히 섬세하고 치밀해서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화면 전체에 정교함과 세밀함이 가득하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나전을 보고 말했다는
‘세밀가귀(細密可貴)-세밀함이 아주 귀하다’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소재의 희소성에 채색원리의 독특함까지 갖춰 희유의 성보예술품으로 빛난다.
어람관음께서 들고 있는 물고기 바구니 세부 |
삼관음벽화는 중앙에 수월관음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어람관음보살,
오른쪽에 백의관음을 배대했다.
무대는 파도가 일렁이는 보타낙가산의 바닷가다.
이 낭만적인 장면의 모티프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있다.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나서 28번째 찾아간 곳이 수월관음이 계신
보름달빛의 월인천강의 바다다.
수월관음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소재들,
곧 대나무 한 쌍,
정병에 꽂힌 버드나무 가지,
파랑새 등은 다 갖췄는데 선재동자만 쏙 빼버렸다.
예배자를 구도자의 자리에 남겨둔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수월관음의 광배는 좌우 두 관음보살의 광배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다.
광배이면서 동시에 만월의 보름달로 보인다.
하화중생의 대자대비의 공덕은 강물을 비추이는 달과 같다.
세조 때 간행된 〈월인석보〉의 서두에 그 글이 있다.
“부처께서 백 억 세계에 화신하셔서 중생을 교화하심은
마치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추는 것과 같다.”
‘월인천강’의 비유로 찬불경의 첫머리를 열고 있다.
그 때 달은 곧 부처다.
달빛으로 삼라만상의 뭇 생명에 자비의 빛을 뿌리며 현현하시니,
그 분이 수월관음보살이시다.
부드럽고 유려하며 소리 없이 미어지는 우아한 달빛의 부처님,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수월관음께선 달 밝은 보름날 바닷가에 오른발을 내린 유희좌로
길상초(吉祥草)에 편안히 앉아 계신다.
길상초는 석가모니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서 무상정등각을 깨쳤을 때 앉았던
성스러운 풀잎방석이다.
왼손으로 짚고 계신 긴 풀잎들이 길상초다.
수월관음벽화에 시문한 문양 세부 |
벽화는 검은 바탕에 백색 선묘
화면의 전체 색조는 검은 바탕에
백색선묘이지만,
찬찬히 들어다 보면 몇 몇 색채가 눈에 들어온다.
석간주 안료를 호분에 푼 육색의 피부,
회록색의 머리카락과 버드나무 가지,
붉은 진사의 입술색 등의 채색이 눈에 띈다.
대광전 뒤 창호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면
화면에 퇴적된 은은한 황금빛도 돋아나기도 한다.
백의관음과 어람관음 두 보살은 인물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비례대상의 법칙을
감안한 것인지 수월관음보다 화면비중을 작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서있는 모습이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서있는 자세가 밀로의 비너스 등 고대 그리스 조각상에 자주 보이는
소위 ‘콘트라포스트(contrapposto)’, 삼곡(三曲) 자세다.
삼곡 자세는 목, 허리, 다리 세 곳을 엇갈린 방향으로 틀어서
신체가 S자 굴곡을 유지하게 하는 자세다.
그럼으로써 포즈의 사실성과 자연스러움, 또 부드러움을 갖추게 한다.
신체비례에서도 8등신에 가까워 보이고, 다분히 여성적이다.
포즈는 대단히 우아하고 현대적이며, 늘씬하다.
착의한 옷차림마저 하늘거리는 쉬폰 스타일이라 보티첼리의 〈봄〉의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아무튼 형식과 배치에서 파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국내 유일의 어람관음벽화
삼존관음벽화에서 단연 주목을 끄는 분은 어람관음이시다.
어람관음께는 저잣거리의 생선냄새가 묻어난다.
벽화에서는 왼 손에 커다란 물고기가 든 바구니를 들고 계신다.
‘어람(魚籃)’이란 말 자체가 ‘물고기 바구니’라는 뜻이다.
중생들이 금강경, 법화경, 관음경을 스스로 읽게 해서 중생이 가진 심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세간의 저잣거리에 변화신으로 오신 분이다.
다른 두 관음께선 연꽃 위에 계신데 어람관음은 맨 땅에 맨 발로 서 계신다.
남루함을 의역할 수 있다.
어람관음벽화는 불국사 대웅전 후불벽에서도 적외선 촬영으로
그 존재가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흔적만 겨우 남아 있어
실상은 양산 신흥사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셈이다.
어람관음의 맞은편에는 백의관음이 계신다.
백의관음의 기원은 인도로 알려진다.
내소사 대웅보전, 마곡사 대광보전, 위봉사 보광명전의 후불벽 뒷면에도
하얀 두건과 장삼을 구족한 백의수월관음 벽화를 뵐 수 있다.
어람관음 옷자락에 시문한 문양 세부 |
보살 한 분마다 생명력 가득한 우주
삼관음벽화에서 가장 뛰어난 형식은 세
분의 의습에 시문한 치밀한 문양들이다.
관음보살은 보관에 사라를 쓰고 승각기와 군의 차림을 하고 있다.
그 법의의 옷자락마다 관념적이고
고도로 추상화한 기하문과 넝쿨문 등을 대단히 촘촘히 베풀었다.
수많은 씨줄과 날줄들이 결을 이루고, 결들은 물처럼 유유히 흘러 선율을 갖췄다.
바탕의 문양은 몇 개의 마름모 도형이 기하적인 꽃 모양을 이루는 소위
‘마엽문’이거나, 연속적인 일승법계 문양이다.
마엽문도 본질적으로는 생명의 꽃이다.
단지 패턴의 반복에 유용하도록 기하적인 추상형태로 변이되었을 뿐이다.
기하적 문양조차도 사실은 생명들의 무한한 연기법계로 구현한 구상세계다.
그 바탕에 질그릇의 빗살무늬,
고려불화의 생명력 넘치는 넝쿨연속무늬를 덧입혔다.
몇 몇 옷자락엔 조선시대 책 표지를 찍어낸 능화판의 사방연속무늬도 굽이친다.
종횡무진의 선과 선, 결과 결에서 인드라망의 그물을 발견한다.
보주와 영락의 알맹이들이 대지에 뿌려져 생명의 환희심으로 피어나고,
순환하는 힘들은 은하수처럼 길게 이어져 공간에 신성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보살 한 분 한 분이 생명력으로 충만한 우주다.
정말 대단하다.
판화가 에셔의 〈도마뱀〉 작품처럼 평면과 입체,
직선과 곡선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변주한다.
서로 상즉입한다.
사사무애의 경지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마치 현대수학의 수리적 놀이터 같다.
테셀레이션이나 프랙탈 도형을 보듯 자기유사성의 반복과 무한확산의 지향성의
의지가 고도로 집약되어 있다.
세 보살이 가지신 대자대비의 원력을 다양한 문양으로 강력히 표현하고 있다.
조형과 상징을 통해서 세 관음보살의 본원력과 대자대비의 원대함을 드러내고 있다.
치밀한 문양 하나하나가 무시무종의 자비심의 꽃이다.
대자대비의 법계우주에 보름달이 세 개나 차올라
금빛을 뿌리고 있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양산 신흥사 대광전 전경 |
노재학 불교전문사진작가 | noduc@hyunb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