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작성일: 2017-06-03 17:51:17
KBS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제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 KBS 역사스페셜 2009년 9월 5일 방송, 전문 기록 -
1908년, -중국 자금성- 중국 청(淸)나라 선통황제(宣統皇帝)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역사의 마지막 황제였다. 중국혁명 후 그는 친일 전범자로 법정에 선다.
[1959년 중국 푸순(撫順 무순) 전범 재판소,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末代皇帝)' 중에서]
"아이신줘러 푸이, 전범자 아이신줘러 푸이(愛新覺羅 애신각라 溥儀 부의), 나이 53세, 만주족 북경 출신...."
황제의 본명은 아이신줘러 푸이였다. 아이신 줘러, 아이신 줘러.....
"아이신줘러 즉 애신각라(愛新覺羅) , 이것은 청황실의 성씨(清皇室 姓氏)입니다. 성이 꽤 길죠. 그런데 이 아이신줘러에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 동북아를 꿰뚫는 역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골타와 누루하치, 이 이름들을 기억하십니까? 아골타(阿骨打)는 여진족으로 1115년 금(金)나라를 세운 금태조이고요, 누루하치( 努爾哈赤)는 또한 여진족으로 후금(後金) 그러니까 청(淸)나라를 세운 청태조입니다. 오늘 우린 그동안 북방 오랑캐 정도로만 여겨져 왔던 여진족 혹은 만주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비밀을 풀어내고자 합니다."
카이펑(開封 개봉)은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가 발달했던 송(宋)나라의 수도였다. 1100년대 카이펑은 인구 50만의 국제도시였다. 로마나 유럽의 도시들이 인구 4~5만에 불과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국제도시 카이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당대 최고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화려한 카이펑 시가를 그려 송황제 휘종(徽宗)에게 바친 중국의 보물이다. 넘치는 물산과 활기찬 수도 카이펑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있다. 광적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휘종황제의 후원 아래 문인, 예술가들은 절정의 중국 문화를 표현했다.
그러나 카이펑엔 치욕적인 한족(漢族)의 역사가 서려있다. 1100년대 중국 송나라는 북방민족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만주에 살던 여진족도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 중 거란족의 직접 지배를 받던 여진족을 숙여진(熟女眞)이라 하고, 송화강 동쪽에 거주하며 거란의 간접 통치를 받던 여진족을 생여진(生女眞)이라 했다. 중국 하얼빈(哈尔滨 哈爾濱 합이빈) 인근 송화강(松花江) 유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하던 완안 여진족(完顔 女眞族)도 거란의 간접지배를 받던 생여진 중 하나였다. 일찍부터 북방에선 '여진족이 1만명 뭉치면 대적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거란족은 철저히 여진족을 뭉치지 못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완안 여진족은 거란의 통제속에서도 서서히 힘을 결집하고 있었다.
1114년, -팔리성 전투- 1만의 여진족(女眞族)이 요(遼)나라 10만 대군을 하얼빈 인근 출하점(出河店)에서 대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하룻밤 새 만주의 질서는 뒤집어졌다. 출하점 전투의 주역은 바로 완안 여진의 지도자 아골타였다. 1115년, 아골타(阿骨打 金 初代皇帝 太祖)는 곧바로 금(金)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아골타는 한족의 북방 저지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바람처럼 남진한다. 금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황하를 건너 한족(漢族)의 나라인 송(宋)의 수도 카이펑(開封 개봉)으로 밀려들었다. 놀란 송황제 휘종은 화친을 제의하지만 끝내 수도 카이펑은 금군에 점령당한다. -1127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 함락-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의 심장부인 중원을 이민족에 내주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강지변(靖康之變)!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부자는 여진족에 포로가 되는 참담한 신세가 됐다. 이것이 한족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정강의 변이다.
[다롄(대련) 대학 왕우량 교수]
"1127년의 정강지변은 중국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북방민족, 즉 중국 동북지방의 여진족, 작은 민족이 요국을 멸망시킨 후 다시 중국역사상 강대한 왕조인 송 왕조를 멸망시킨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고 북방민족이 북경을 기초로 정치통치 중심이 되는 기반을 닦습니다."
한족의 심장부를 점령한 여진 추장 아골타, 아골타는 금을 건국한 후 황실 성을 완안씨로 정한다. 금태조 아골타(1068-1123)의 정식 이름은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다. 송을 정벌할 때 금나라 군부의 핵심인물은 아골타의 네째 아들 완안 올출(四太子 完顔 兀朮)이었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잡혀간 충격때문에 정강의 변은 중국에서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됐다. 완완 올출도 주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중국 드라마 '팔천리로의 雲月'중에서 남송의 악비(岳飛)가 금나라 완안 올출(完顔 兀朮)을 만나는 장면]
(八千里路雲和月 팔천리로운화월)
".... 金兀朮(김올출) ...."
그런데 아골타의 아들 완안 올출을 金兀朮(jīn wū zhú) 즉 우리말로 김올출로 부른다. 완안 올출을 왜 김올출이라 부를까. 금나라(金國) 왕자의 성(姓)이 완안이 아니고 왜 김씨(金氏)일까.
중국 서부 깊숙한 곳 「감숙성(甘肃省 甘肅省)의 경안현」엔 뜻밖에도 완안 성씨의 여진족들이 동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감숙성 경안현 완안마을-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직계 조상이 금태조 아골타의 네째 아들 완안올출 즉 김올출(金兀朮)이라 했다. 왜 금 황족의 후손들이 만주와 정반대의 땅인 이곳에 살고 있을까. 아직도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며 척박한 환경 때문에 밭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현대식 집을 짓긴 했지만 감숙지방의 전통적인 주거 형식인 토굴생활도 병행하고 있었다. 오지에 정체를 숨긴 채 5천 여명의 완안씨들은 씨족공동체를 이뤄 8백 여년 동안 이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1140년대에 김올출 즉 완안 올출의 아들이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자 이 곳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역대 금황실의 황제와 형제들을 그린 선인영(先人影 완안 종실 선인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완안 올출의 후손인 완안 청베이(44세)]
"김올출(金兀朮)은 금 희종(金 三代皇帝 熙宗)이 즉위하도록 돕고 해릉왕(金 四代皇帝 海陵王, 完顔亮 완안량 liàng)을 배척했습니다. 희종이 황제가 되었지만 해릉왕이 희종을 살해합니다. 해릉왕은 희종을 죽인 후 김올출의 후손을 죽이려합니다. 김올출의 아들 완안형(完顔亨 hēng)은 해릉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 顔 顏
자막 → "김올출은 금 희종이 즉위하도록 돕고 해령왕을 배척했습니다. 희종이 황제가 되었지만 해령왕이 희종을 살해합니다. 해령왕은 희종을 죽인 후 김올출의 후손을 죽이려합니다. 김올출의 아들 완안헝은 해령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 자막
후손들도 완안올출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김올출이라 부른다. 명절이면 전 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완안씨 사당엔 역대 황제와 자신들의 선조인 완안 올출의 비가 있다. 완안 올출(完顔 兀朮)의 비(碑)에도 역시 김올출(金兀朮)이라는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 太师(師) 都元帅(帥) 金兀术(朮) (태사 도원수 김올출)- 왜 자신들의 선조의 성을 완안씨라 하지 않고 김씨라 부를까?
[완안 올출의 후손인 완안 청베이(44세)]
"학술계에서는 아직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김올출의 성은 금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성은 김이고 이름이 올출입니다. "
후손들도 오래전부터 그냥 김올출이라 불러왔을 뿐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만주에서 감숙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기나긴 역사의 비밀이 쇠 금(金) 자에 담겨있다.
"金兀朮 즉 김올출, 중국 금나라의 왕자가 김씨 성이라고 하니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잘 아시는 것처럼 김씨 성은 우리나라에서야 가장 흔한 성씨입니다만 중국에선 대단히 드문 성입니다. 중국 대륙에는 워낙 많은 왕조들이 흥하고 망해서 상당히 헷갈리시죠. 잠시 중국과 만주의 역사를 정리해 볼까요.
668년 고구려(高句麗 즉 高麗)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그리고 30여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大祚榮)이 옛 고구려 땅에 발해(渤海)를 건국합니다. 그러다 926년 거란족(契丹族)이 발해를 멸망시키는데요, 거란족이 요즘 우리가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볼 수 있는 요(遼)나라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이 때 여진족(女眞族)은 요동에서 살고 있었는데요, 아골타(阿骨打)라는 영웅이 등장하면서 1115년 금(金)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금나라는 곧바로 한족(漢族)의 나라인 송(宋)을 침략해 중원대륙을 초토화시키는데요, 한족의 본거지인 중원대륙은 이때부터 북방 이민족들에 의해 농락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아골타의 선조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들입니다."
** (주) 여진, 금의 만주에서의 영역은 고려의 영역과 충돌합니다. 고려가 요하에서 선춘령까지 만주의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대두 되었습니다.
관련 링크 :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29&pn=1&num=7270 **
강화도 마니산(江華島 摩尼山), 이곳엔 오래전부터 우리민족의 뿌리와 정기를 숭상하는 사람이 모여들곤 했다. -커발한 개천각(開天閣)- 이 개천각은 민족운동가였던 이유립(李裕岦 1907~1986) 선생이 설립해 스물 네 분의 우리나라 위인을 모시고 있다. 환웅천제, 치우천황,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桓雄天帝 蚩尤天皇 檀君王儉 高朱蒙 大祚榮 ...) 등을 모시고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엔 금태조 아골타가 모셔져 있다. 여진족인 아골타가 왜 우리나라의 위인들과 나란히 모셔져 있을까? - 大金帝國 太祖 大聖武元皇帝 阿骨打 (대금제국 태조 대성무원황제 아골타) -
구한말(舊韓末) 역사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선생은 금태조 아골타를 꿈에서 만났다는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란 글을 남겼다. 그런데 그는 이글에서 '대금국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 사람(大金國太祖皇帝는 我平州人)…'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주) 고종황제는 옛 조선(古 朝鮮)이 한(韓)으로도 불렸기에 국명을 한국(韓國)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한국(韓國)과 대비하여 구한(舊韓)이라 표현하는 것.*
중국 하얼빈(哈尔滨 哈爾濱 합이빈, 흑룡강성) 근교의 아청(阿城 아성)시는 금나라 수도인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가 있던 곳이다. 제국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여진족 아골타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청엔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滿洲族)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의 전통가옥이 눈에 익다. 짚을 섞어 쌓은 흙벽과 가로지른 석가래는 우리나라 옛 시골집의 구조를 닮았다. 한 켠엔 볏집으로 이은 행랑채와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텃밭도 있다. 한족들의 가옥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구조다. 집 내부는 우리와 같이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가 시간이면 모여서 전통방식의 겨루기를 즐긴다. 그것은 씨름이었다. 경기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우리 씨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 또한 한족에게선 찾아 볼 수 없는 놀이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말도 문자도 잃어 버리고 이젠 만족(滿族)이라 불리는 여진족의 후예들, 이들의 조상인 금태조 아골타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베이징(북경)의 수도 도서관(首都 圖書館)은 중국 최대의 도서관이다. 특히 이곳에 고문헌 자료실엔 각종 고서들이 보관돼 있다. 그런데 사서중에 금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이란 책을 볼 수 있었다. 여진족 금나라에 쫒기던 송은 양자강 건너 항저우(杭州 항주)로 피신한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간 황제의 귀환을 위해 1129년 금에 홍호를 파견했다. 송막기문은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10년 동안 금나라에 머물며 기록한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런데 송의 사신 홍호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송막기문(松漠紀聞)》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다. 호(號)는 완안(完顔)씨로 (여진에서의) 완안이란 한자말에서는 왕(王)과 같다.
女眞酋長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女眞之主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 欽定四庫全書 松漠紀聞 *眞(진. 번체) = 真(진. 간체)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 뿐만이 아니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엔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형 아고내는 고려에 남고 둘째인 금의 시조와 동생 보활리는 여진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였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금사(金史)》본기 -
金之始祖諱函普,(금나라 시조는 함보라 불리웠는데)
初從高麗來,(처음에 고려에서 왔을 때)
年已六十餘矣。 (이미 60여세 정도였다.)
兄阿古乃好佛, (형은 아고내인데 불교를 좋아하여)
留高麗不肯從,(따라 오지 않고 고려에 머무르면서)
曰:(말하기를)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후세 자손은 반드시 서로 모여 살 자가 있을 것이니)
吾不能去也。(나는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獨與弟保活裡俱。(홀로 아우 보활리와 함께 왔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吉迺好佛,留高麗不肯從,曰: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
신라와 고려인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서 모두 금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했다. 아골타는 1068년생이다. 8대조 함보로 거슬러 가면 대략 900년대 초반이 된다.
[다롄(대련) 대학 왕우량 교수]
"한푸(函普 함보)는 고려(高麗)에서 왔다고 말하거나 고려 전의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말해도 무관할 것 같습니다. 왕건이 이미 고려을 세웠고 신라는 멸망한 시기로 조선반도는 동란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왜 함보가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록으로 봐서 한 사람만 왔을 리 없습니다. 분명히 가족 또는 자신의 씨족이나 부락을 데리고 왔을 겁니다. 이것은 민족의 이동이었습니다. "
신라말 고려초의 격동하는 정세 속에 한 무리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만주(滿洲)로 이동한 것이다. 그뿐 아니다. 중국 수도 도서관 고문헌실에선 금나라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들을 속속 확인할 수 있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1600년대 초반 여진족이 세운 또 하나의 나라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다. 이 책엔 금의 국호에 대한 설명이 있다. '금은 신라 김씨에서 유래 했고 국호도 이를 딴 것이며 그 외 주장은 근거 없다'고 단호하게 정리했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청(清)나라 국편 공식 역사서.
'사서를 보니 신라왕실인 김씨가 수십세를 이어왔고 금이 신라로부터 온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금나라 국호 또한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
'....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欽定滿洲源流考 卷七 :::::
金之始祖諱哈富 (舊作函普。) 初從高麗來, (按: 《通考》及《大金國志》皆云本自新羅來, 姓完顔氏。考新羅與高麗, 舊地相錯, 《遼、金史》中, 往往二國互稱, 不爲分別, 以史傳按之,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 亦應取此。 ....) 居完顔部布爾噶 (....) 水之涯。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지금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이미 900여년 전에 정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반도에서 넘어갔다는 데 대해 가지고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주장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와서 이다 아니다 이런 논란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여진의 영웅 아골타, 그의 8대조는 고려초에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천 년 넘는 역사의 저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엄연히 중국 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겠죠. 이 내용은 앞서 본 송막기문(松漠紀聞), 금사(金史),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뿐 아니라 금지(金誌), 삼조북맹회록(三朝北盟會編-편-) 등에도 줄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민족으론 최초로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들의 선조는 한반도로부터 왔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다. 어떠습니까? 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는데요,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 그는 과연 누굴까요?"
신라의 왕릉은 모두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김부 金傅)의 무덤만이 이곳 경기도 연천에 있다.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 왜 신라 왕릉이 경기도에 있을까? 후삼국 말기 고려의 압박에 경순왕은 신라 천 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기로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는 천 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경순왕 9년 -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皆骨山 겨울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그렇게 신라 천 년 사직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다물. 다물(多勿)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한다. 이곳 강원도에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것일까?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의문을 품게하는 유적들이 이곳 인제에 있다. -麻衣太子遺蹟址碑(마의태자유적지비)- 왜 마의태자 유적비가 여기에 있을까?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엔 수백 년 된 대왕각이란 사당이 있다. 매년 김부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대왕각엔 마의태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인제 인근 곳곳에 남아있는 마의태자 관련 유적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천 년이나 되는 신라가 아무 저항 없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의태자가 반대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해 가지고 신라의 저항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인제 유적들이 있죠. "
고려에 항전하던 일단의 반 고려 세력들, 그들과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 김함보는 어떤 관계일까? 고려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金克守)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고려사(高麗史)》예종 10년,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金克守)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
그런데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1636년 김세렴이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해사록》이란 책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신라 고도 경주에 들린 감회를 쓴 대목이다.
《해사록(海槎錄)》- 김세렴(金世濂)의 일본 여행기
'완안 아골타는 경순왕의 외손이자 권행(김행)의 후손이다.'
金傅雖降而麗王幷 其外孫完顔阿骨打卽權幸之後 乃宰割中國傳世百年 豈非所謂神明之後者耶
「김부(金傅 경순왕)가 비록 항복하여 려왕(麗王 고려왕)에 병합되었지만 그 외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 곧 권행(權幸, 金行)의 후예가 중국을 분할하여 다스려 백 년의 대를 이었으니 어찌 신명(神明)의 후예라 일컫지 않겠는가. 」
조선 유학자가 여진족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자 안동 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이라 했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金幸)인데 왜 권행(權幸)의 후손이라 했을까? 서기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안동 병산에서 대혈투를 벌인다. 이때 안동의 권행과 김선평 ,장장필 세사람이 왕건을 도움으로써 고려군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삼태사 묘(廟), 경북 안동시 북문동- 왕건은 이 세사람에게 태사(太師)의 직위를 내리고 김행에겐 권씨를 하사했다. 이로써 김행(金幸)은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권행(太師公 權幸)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의 김행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권행은 본래 경주 김씨(新羅 慶州 金氏)였다. 그런데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권행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100년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신라에 대한 충성심, 후백제의 공격을 막고 어디까지나 신라를 위해서 싸운 것이지 왕건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그가 왕건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죠. "
김함보가 누군지는 명확치 않지만 그는 김씨 출신의 신라 광복군으로 추정되며 그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임은 명확해졌다.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명예교수]
"김함보(金函普)는 신라 왕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반고려 세력들이 동해안을 거쳐서 두만강을 건너가지고 여진지역에 옮겨간 걸로 추론이 됩니다. "
격동의 시기 망국의 한을 품고 북으로 올라간 김함보와 그의 무리들, 그들에겐 새로운 땅 드넓은 만주벌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 '신라인 김함보의 후손들이 만주를 통일하고 나아가 한족의 본거지인 중국대륙을 장악했다.' 북방민족인 만주에 중국이 흡수된 형국이로군요. 우리역사에서 여진족은 읍루, 말갈, 물길, 숙신, 주신, 여직, 여진 그리고 만주족으로 등장합니다.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주요한 구성원들이었고 우리 역사의 한 축을 이루던 사람들이 바로 여진족입니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김함보(金函普)가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갈 당시 여진의 각 부족 사이에서는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함보가 우마변상법(牛馬辨償法)이라고 하는 일종의 성문법을 제정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그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죠. 이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완안 여진 뿐만 아니라 전체 여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7세손에 이르러서는 영토가 간도에까지 확대 되죠. 그리고 1102년엔 고려로 사신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골타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기 직전 고려와 대충돌이 일어납니다."
1107년(고려 예종 2년) 12월 윤관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 17만명은 여진을 정벌에 나선다. 고려군의 상대는 김함보의 후손들이었다.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된 지 150여 년 후 팽창하던 여진족은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벌인다.
-북관유적도(北關遺蹟圖) 척경입비(拓境立碑) 고려지경(高麗之境)-
이 그림은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이다. 윤관 장군은 이 전쟁에서 동북9성을 확보하고 최북단인 공험진에 국경비를 세웠다.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었을까? 일제 강점기때부터 공험진의 위치는 함경남도 일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윤관(尹瓘)이 국경비를 세운 공험진(公嶮鎭)은 함경도 종성(鐘城)에서 북으로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다.
擊逐女眞 拓地 新築六城 置咸福雄英州吉 及公嶮鎭 遂立碑于先春嶺 以爲界
嶺今在鐘城直北七百里 碑面有書 爲胡人剝去後(?凌) 有人掘其根 有高麗之境四字.
...공험진까지 이르렀고 선춘령에 비를 세워 이로써 경계를 삼았다. 령은 지금의 종성에서 북쪽 700리에 있다...
-조선국회도(朝鮮國繪圖)-
세종때 실측한 이 지도를 보더라도 공험진은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이고 두만강 너머에 있었던 것이 명확해진다.
공험진비는 이곳 옌지시(延吉市 길림성 연길시) 인근에서 발견됐다는 기록만 전해져 올 뿐 행방은 알 수 없다. 조선국회도와 북관유적도 등을 종합해 볼 때 공험진은 이곳으로 추정된다. 여진은 자신들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던 간도지방을 고려에 뺏긴 것이다. 다급해진 여진은 고려에 동북 9성을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낸다. 당시 여진 추장은 아골타(阿骨打)의 형 오아속(烏雅束)이었다. '일찍이 우리 선조가 대방 즉 고려로부터 나왔으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예종 4년,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則我等告天爲誓, 至于世世子孫, 恪修世貢, 亦不敢以瓦礫, 投於境上."
* “옛날 우리 태사(太師)인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길, 우리 조상이 큰 나라(고려)로부터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태사인 오아속(烏雅束) 역시 대방(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하늘에 맹세코 자손대대로 조공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귀국의 영토에 던지지 않겠나이다." *
1115년 금황제가 된 아골타도 여진과 고려는 형제지간이고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했다.
《고려사(高麗史)》예종 12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겨왔고…
... 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 ...'
금나라에게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였던 것이다.
[다롄(대련) 대학 왕우량 교수]
"동일한 언어,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共同的语言 共同的地域 共同的文化)가 있습니다. 이 각도에서 보면 고려와 여진 사이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을 겁니다. 물론 전쟁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만 그들은 거란이나 몽고와 다릅니다. 거란과 몽고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민족 공동체입니다. 그들에게는 혈연상, 역사상의 유대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여진인(女真人)과 조선반도의 신라인(新罗人) 나중의 고려인(高丽人)은 민족공동체(民族共同体)가 되었습니다."
금(金)나라 5경중 하나인 동경성(東京城)이 있었던 요양(遼陽), 이곳에서 1985년 우연히 한 점의 비가 발견되었다. -동경 승엄사 선사 탑명(東京 勝嚴寺 禪師 塔銘)- 비명은 덕망 높았던 한 스님의 일대기였다. 비가 제작된 것은 1190년 - 명창원년(明昌元年)-, 스님의 성은 고(高)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이 발해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東京 遼陽縣 渤海人也(동경요양현발해인야)- 1190년이면 발해가 망한지 무려 260년이 지난 시점인데 아직도 발해인이다.
여진과 발해는 어떤 사이였을까?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는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했고 발해인은 집단으로 거란의 동경과 상경 등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300만 발해인들은 끈질긴 광복운동을 벌였다. 거란의 수도 인근에서 발생한 발해인의 반란이 2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발해인과 여진족 사이엔 반거란이란 연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금사(金史)》
女直、渤海本同一家。 (여직, 발해본동일가)
女眞渤海本同一家 (여진발해본동일가)
여진인과 발해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
* 女直(여직)은 요나라 흥종(興宗)의 이름이 종진(宗眞)이어서 女眞(여진)에서 眞자 대신에 直자를 쓴 것이라 한다.*
* 女眞渤海同本一家 ←방송화면 *
여진과 발해인은 원래 한 집안이다. 아골타는 거란에 맞서 봉기할 때 여진과 발해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로 한 집안임을 주장해 발해 유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발해 여진 동일가라는 그런 말이 먹혀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여진과 발해 사람들 사이에는 우리는 민족적으로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쉽게 먹어들어 갔다 이런 얘기입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 북경), 베이징은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족에겐 변방에 불과했다. 여진족은 중원을 장악한 후 이곳에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었다. 북경은 이후 중국의 중심지가 됐다. -요금 성곽 박물관- 이 박물관의 지하엔 금나라 때 건설한 대규모 수로 시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나무로 수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베이징의 명소인 북해공원(北海公園)도 이때 완성된 인공 정원이다. 당시 베이징 건설의 총책임자는 장호(張浩)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4대에 걸쳐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발해 유민이었다.
《금사(金史)》
장호(張浩)는 요양 발해인(渤海人)이다.
본래 성은 고(高)씨로 동명왕의 후손이다.
(張浩遼陽渤海人 本性高氏東明王之後)
장호 뿐 아니라 수 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했다. 대제국을 운영했던 발해인들에 대한 금나라의 신뢰는 단순히 혈연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성호, 동양사학회/금사 연구]
"대제국을 건설 운영해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금이 건국을 하고 국가체제를 확장, 그리고 반석 위에 올려 놓는데 그들의 경험이 상당히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금은 이러한 발해인들을 중용해서 국가건설에 중요한 그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활용했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요양 박물관- 요양은 금나라 5대 도시였기 때문에 수 많은 금나라 시대의 금석문이 남아 있다. 요양 박물관 별관에 늘어선 금대의 비들 속엔 특별한 비가 한 점 있다. 통혜원명대사 탑명(通慧圓明大師塔銘)으로 불리는 이 비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李侯)의 딸로 역시 발해인(遼陽 渤海人)이었다. 남편은 아골타(阿骨打)의 셋째 아들인 허왕(三子 許王)이다.
《통혜원명대사 탑명》
관찰사 이후의 따님이시며
태조황제 셋째 아들 허왕의 아내이고
동경유수 정국공의 어머니다.
《通慧圓明大師塔銘》
師名洪願, 世爲遼陽大族, 觀察使李侯之女. 太祖皇帝第三子許王之室, 崇進東京留守鄭國公之母, 師在家, 以孝友聰明 爲父母所偏愛, 得所歸, 能輔佐君子, 內助之功爲多. ***** 金 世宗 完顔雍의 어머니, 추존 貞懿皇后 李洪願 ... 愿(간체)
그녀의 아들 정국공(鄭國公)은 나중에 금황제가 되는데 이가 바로 금(金)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황제(金 五代皇帝 世宗)였다. 4대 황제 해릉왕(金 四代皇帝 海陵王)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추존 慈憲皇后 大氏)였다. 금나라 건국 후 많은 발해의 여인들은 금황실로 시집을 갔다. 이로써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고위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 잡았다. 금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족 연합정권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따라서 금나라라 그런 것은 발해의 후손의 왕비족과 신라 후예인 왕족 이게 합해져서 금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낳았다. 따라는 이것은 우리 역사의 한 자리매김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금나라는 발해와 신라 후손들이 세운나라- -금사는 우리 역사와 같은 맥락-
금황실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었고 국가의 지배층은 발해유민, 그리고 고려와의 우호적 관계, 여진족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주의 역사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후예와 발해 유민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가 되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와는 상충되고 우리의 역사와는 그 맥락이 이어지는군요. 이렇게 만주와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또 다른 북방민족인 몽골족(Mongol 族)의 원(元)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만주로 사라집니다. 북방민족인 금나라와 원나라의 300년 지배를 받았던 한족이 1368년 명(明)나라를 건국해서 중국대륙을 지배함으로써 한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는듯 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여진족이 1616년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나라입니다."
제작진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관련된 뜻밖의 사람을 북경에서 만날 수 있었다. 북경 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청 건륭황제(乾隆皇帝)의 7대손이라고 소개했다. 집안엔 증조부의 사진을 비롯해 건륭제 후손들의 글씨 등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는 60여년 동안이나 재위(在位)한 황제로 유명하다. 건륭제는 티벳(Tibet)과 신장 위구르(Uighur) 지역까지 장악했다. 지금의 중국 영역은 청 건륭황제가 이룬 것이다. 한족의 나라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만주족이 세운 청황실의 성은 아이신줘러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성이 김(金)씨라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김괄(金适)이었다.
[김괄(金适), 청 건륭제 7대손]
"제 할아버지 성함은 헝쉬입니다. 아이신 줘러(愛新覺羅) 헝쉬요. 헝 항렬입니다. 그는 당시에 직업을 구하거나 학교를 다닐 때 김광평(金光平)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김계종(金启孮)이고 우리는 그걸 따랐습니다. 저는 김(金)씨입니다. "
누루하치는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후 랴오녕성((遼寧省 요녕성 료녕성) 심양을 수도로 정한다. 이곳 심양 광장엔 청태조 누루하치부터 마지막 황제 푸이(부의)까지 역대 청조황제 열 두 사람의 좌상이 놓여 있다. 청태조의 이름은 애신각라 노이합적(愛新覺羅 努爾哈赤) 즉 아이신줘러 누루하치, 청황실의 성은 한자로 애신각라(愛新覺羅)다.
그런데 왜 청황실의 후손인 김괄 교수는 자신의 성을 김(金)씨로 알까? 청나라의 역사서인 《만주실록 滿洲實錄》엔 청황실과 만주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자신들은 하늘의 딸인 불고륜의 후손들이며 성(姓)은 애신(愛新 ài xīn) 즉 만주어로 아이신(Aisin)이라는 것이다. 아이신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애신이 됐고 만주어 아이신의 원래 뜻은 금(金)이다. (天女佛庫倫所生 姓 愛新, 漢語 金). 각라(覺羅 jué luó)는 만주어 줘러(Gioro)를 한자로 차음표기한 것이다. 뜻은 겨레, 성, 씨족 등과 같고 성씨에 붙는다(覺羅姓也).
[김괄(金适), 청 건륭제 7대손]
"황족 안에서 우리 성은 아이신 줘러(애신각라)입니다. 아이신 줘러는 만주어이고 한어로 바꾸면 금이 됩니다. "
청황실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 즉 아이신줘러는 금부족들, 김씨들 또는 김씨집안을 뜻한다. 금(金)을 성(姓)으로 삼는 여진족의 후예 만주족들, -영화 '마지막 황제' 중에서- 아이신줘러 푸이(溥儀)는 김부의(金溥儀)다.
-금궤도(金櫃圖)- 경주 김씨 시조인 김(금)알지(金閼智)의 탄생 설화를 보자.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금궤짝이 매달린 나무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탈해 이사금 9년-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금궤짝이 매달린 나무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궤 속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성을 김(금)씨로 하였다.'
주1)*****《金櫃圖, 朝鮮》 御製 '此新羅敬順王金傅始祖 金櫃中得之 仍姓金氏者 金櫃揭于樹上 其下白鷄鳴 故見而取來 金櫃中有男子 繼昔氏爲新羅君也 其孫敬順王入高麗 嘉其來順謚敬順' 歲乙亥翌年春 命圖見三國史*****
주2)*****《三國史記》 (*昔)脫解[吐解]尼師今 立 ..... 九年(*AD 서기 65년*) 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 掛樹枝 白鷄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 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
신라 왕성(新羅王姓)인 경주 김씨(慶州 金氏)와 신라인의 후예 금황실(金皇室), 그 금나라의 후신인 청황실(清皇室), 그들은 금(金)을 뜻하는 김씨(金氏)들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과 함께 청나라는 무너지고 맙니다. 이 때 중국인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멸만흥한(滅滿興漢), 그러니까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나라를 타도하고 한족(漢族)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얘기입니다. 결국 이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족들은 만주와 중국이 혈연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중국은 수천 년의 한족 중심의 사관을 버리고 다민족 통일국가론이라는 사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즉 중국 역사는 한족이 이민족에 항쟁한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민족이 중국이라는 통일된 국가를 이루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이는 만주와 우리 역사에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이름으로 나타났는데요, 이민족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그리고 금나라와의 전쟁도 모두 중국 내부의 갈등에 불과하단 겁니다.
오늘 우리가 여진족의 역사를 돌아본 것은 단순히 신라인의 후예가 금제국을 건설했다는 민족적 우월감을 확인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역사전쟁 즉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역사관인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항저우(杭州 항주)의 명소인 악왕묘(岳王廟), 관우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충장으로 불리는 악비(岳飛, 1103~1141)의 사당이다. 송 멸망 후 양자강 너머에 들어선 남송, 그러나 금나라 군의 공격은 매서웠고 남송은 위기에 빠진다. 이때 금군을 막아선 사람이 악비장군이었다.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고 곳곳에서 금군을 저지했다. 그래서 산은 흔들어도 악가군은 흔들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비는 한족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았다. 항저우의 송성가무쇼는 상해서커스와 함께 중국인들이 꼭 보고 싶어하는 양대 공연이다. 이 송성가무쇼의 하이라이트는 악비장군의 무용담 장면이다. 900년 가까이 악비는 민족지광(民族之光)으로 불리며 한족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악비의 무덤엔 무덤보다 더 사람이 몰리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발가벗겨져 무릎이 꿇린 진회 부부의 동상앞이다. 진회는 남송의 대신으로 부인과 함께 악비장군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람객들은 이들에게 침을 뱉고 때리는 것으로 악비의 한을 달랜다.
[예 샤오타오, 관람객]
"송나라 이후부터 중국인은 이름에 회(檜) 자를 쓰지 않습니다. 진회(秦檜), 진회 그자를 이제 쓰지 않습니다. 그 글자를 쓰면 이름에 쓰면 진회가 생각나니까요."
중국인들은 아침 식사용으로 유자궈(油炸果)라는 음식을 즐겨 먹는다. 그런데 이 유자궈에도 악비의 원혼을 달래는 전설이 담겨 있다. 유자궈는 밀가루 반죽을 한 다음 두 개를 꼬아 기름에 튀겨 만드는 간단한 음식이다. 그런데 이 유자궈가 악비를 독살한 진회 부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악비에 대한 한족들의 사랑은 이처럼 크고 깊다.
**참고** 油炸檜(유작회, yóu zhà huì, yóu zhà guì)桧 진회에 보복 의미로 사람 모양으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단순하게 길쭉한 가지(條) 모양으로 만들게 되어 油條(유조, yóu tiáo)条라 함.→ 油炸果(유작과, yóu zhà guǒ, 튀김 과자) ****
그런데 2002년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시작하면서 악비가 더이상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는 고등중학교 역사대강(高中历史大纲 ... 歷史大綱)을 발표한다. (2002.12.09)
『베이징(북경) 청년보(北京靑年报 ... 報)』2002년 12월 10일자.
악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岳飞到底是什么人)
현행 교과서 '악비는 금에 대항한 장군' (现行高中历史教材中称:岳飞是抗金将领)
악비는 민족영웅이라 부를 수 없다 (岳飞不能称为民族英雄 ..... 岳飞不是民族英雄)
민족영웅의 정의를 바꾼다면 민족의 변절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如果改变民族英雄的定义 那么民族败类怎么办)
왜 중국 당국은 민족의 영웅 악비를 갑자기 격하시키려는 것일까?
[중국 다롄(대련) 대학 왕우량 교수]
"우리는 과거에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만을 강조했습니다. 소수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민족영웅 부분이요. 우리가 악비를 민족영웅이라고 한다면 김올출 즉 여진족의 영웅은 영웅이 아니라 변변치 못한 인간이 되는 거죠. 아니면 침략자거나. 그렇게 되면 모순이 생기는 거죠."
시안(西安 서안)을 중심으로한 황하문명권에서 일어난 한족(漢族)들은 전통적으로 한족 외의 민족들은 오랑캐인 이민족으로 생각했다.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 그런데 만주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의 역사관에서는 민족의 영웅 악비가 중국 통일의 장애물이다. 어제의 민중 영웅이 오늘은 반통일 인물로 전락한 것이다. *(주) 夷에는 오랑캐라는 훈이 없다*
[한국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여태까지 적국으로 보던 이 북방계 나라들, 이걸 자기 국사로 이렇게 포괄하다 보니까 거기에 딜레마가 생긴 겁니다. 자기네 민족의 영웅으로 받들던 악비를, 금나라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려다 보니까 할 수 없어서 부득이 수천 년 내려오던 영웅을 추락시키고 그렇게 까지 하면서 금나라 역사를 자기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그 궁색한 걸 보면은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명백히 알 수 있는 겁니다. "
중원을 빼앗기고 황제가 포로가 되는 치욕을 한족들에게 안겨준 이민족의 나라 금나라, 더구나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가 신라 후손이라는 것은 중국의 야심찬 동북공정 역사관을 근본부터 흔드는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 버려진 역사, 만주! 그곳은 이제 치열한 역사전쟁으로 부활하고 있다.
"왜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명확하게 역사에 나와 있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어쩌면 우리 의식속에 한족은 우수하고 흉노,여진 등은 북방 오랑캐라는 소중화 사상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역사는 흥미롭고 놀라운 과거지만, 옛날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나친 아전인수격의 역사 해석은 역사를 민족 간의 갈등요인으로 만듭니다. 반면,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히 우리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