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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55)/경고
제목 : 안일한 여인들에게 주시는 경고
성경 : 사 32:9~20
찬송 : 182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208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32:9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 32:10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
사 32:11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사 32:12 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사 32:13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사 32:14 대저 궁전이 폐한 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오벨과 망대가 영원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 떼의 초장이 되려니와
사 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 32:16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8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사 32:19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사 32:20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이사야 32:1~8절은 구원의 새 시대를 예고한 말씀입니다. 9절 이하 오늘 본문에서는 ‘안일한 여인들’, ‘염려 없는 딸들’이라는 새 인물들의 등장과 함께 심판의 경고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9절을 새 단락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 단락과 전혀 동떨어진 예언은 아닙니다. “안일한 여인들”은 6~7절에 언급되었던 악한 기득권자들의 여인들로 보입니다. 남편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압제하며 자신들의 이득을 취할 때, 그들의 아내들도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일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제 그들에게 닥칠 재난을 경고합니다.
√안일한 여인들아
√사 32:9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안일한’이란 단어는 ‘사아난’이라고 하는데 ‘편안하다’ 혹은 ‘안전하다’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염려 없는’은 ‘베타흐’라고 하는데 원래는 ‘신뢰하다’라는 뜻으로서 신뢰의 결과로 ‘확신하다’ 혹은 ‘안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일한 여인들은 지금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부인들을 뜻합니다. 이 여인들의 남편은 예루살렘에서 수입이 보장되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또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어서 쫓겨날 염려도 없으며, 무엇보다 자기 땅에다 포도 농사를 짓는 잘사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같은 예루살렘에 사는 여인이라 하더라도 남편이 직업이 없거나 혹은 자기 밭이 없어서 고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없으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주 힘들고 미래에 대하여 아무런 계획을 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가정에 정기적인 수입이 없을 때에는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것조차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예루살렘에서 경제적으로 아무 걱정이 없이 사는 여인들을 향해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믿기에 ‘염려 없는 딸들’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상은 경제적으로 걱정거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영적인 문제에도 아무 관심이 없게 된 유다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생활의 안정도 중요하고 물질적으로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지금 영적으로 살아 있는지,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폭포수처럼 콸콸 부어지고 있는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늘 가난하고 겸손하게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안일한 여인들은 세상에서 잘사는 것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여겨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고 나니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도 없고 세상의 유행과 사치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잘사는 사람 중 많은 이가 자신들이 대담히 우월하며 모든 것에 다 앞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외모가 뛰어나야 하고, 아이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며, 크고 유명한 교회에 출석해야 하고, 절대로 남에게 지고는 못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려면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맛을 경험하여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결코 거기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시한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곳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기간이 일 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사 32:10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불과 일 년 남짓 지나면 그들의 수입이 딱 끊어진다고 경고합니다. 그때는 포도 농사로 들어오는 수입과 다른 수입도 없어져서 경제적으로 다른 가난한 여자들과 똑같아진다고 합니다. 도대체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예루살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예루살렘에 경제가 옛날과는 분명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예루살렘이 적에게 포위되는 상황입니다. 적이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포도 열매를 뻔히 보면서도 거두지 못할 것이며, 적이 따 먹든지 말이 따 먹든지, 아니면 관리가 되지 않아 저절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정부로부터 받던 밀이나 곡식도 전시에는 배급제로 바뀌기 때문에 부자라고 해서 더 많은 곡식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시작한지 일 년이 지났는데 그 불똥이 우리에게 튀어 난방비, 전기료 폭탄을 맞고 있지 않습니까? 물가가 폭등하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우려해야 할 일은 이것이 고난의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전체를 뒤집어엎으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 전체를 포로로 만들어서 먼 데로 잡혀가게 하고, 예루살렘은 황폐한 채로 내버려 둘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예루살렘에서 농사를 짓던 유다 백성의 권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들의 권리는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면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살 권리가 없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갈수록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소리와 달콤한 소리에 귀를 열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둔감하게 합니다. 편안할수록 영적 안일함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집중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날이 이르러 이 모든 것을 빼앗으실 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안일한 여인들아 떨지어다
√사 32:11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사 32:12 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계속해서 선지자는 안일하고 염려 없는 여자들에게 명령합니다. 앞에서는 ‘들으라’는 명령과 함께 그들에게 닥칠 재난을 경고했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게 ‘떨며 당황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재난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이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이는 것은 죽음이나 전쟁으로 포로로 잡혀 가는 것 같은 비극에 대해 애곡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자기 땅의 밭들이 얼마나 기름진 곳이었는지, 얼마나 열매가 많았는지를 생각하며 가슴을 치고 원통해 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부자 여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일까요?
여자들이라도 예루살렘의 미래를 분명히 보아 남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라는 뜻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큰 위기를 맞은 것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즉 이 여인들의 남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유다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장이 속아서 이익도 없는 일에 투자하여 회사를 망하게 하는 길로 이끄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이 상황을 여자들이 먼저 내다볼 수 있다면 절대로 투자하지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 수 있는 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이를 실천하지 못한다 해도 여자들이 미래를 볼 수만 있으면 남자들이 바르게 결단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사 32:13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사 32:14 대저 궁전이 폐한 바 되며 인구 많던 성읍이 적막하며 오벨과 망대가 영원히 굴혈이 되며 들나귀가 즐기는 곳과 양 떼의 초장이 되려니와
9~12절은 밭의 황폐함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13~14절은 재난이 그들이 살고 있는 집과 성읍과 궁전에까지 미치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가시와 찔레는 황폐한 땅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사 5: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사 7:23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사 7:24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사 7:25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
사 55: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런 가시와 찔레가 과거에 즐거움이 넘쳐 났던 성읍과 기쁨이 가득했던 집들에까지 날 것입니다.
14절은 접속사 ‘키’(왜냐하면)로 시작하며, 13절에 묘사된바 가시와 찔레가 온 땅에 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궁전’에 해당하는 ‘아르몬’은 꼭 왕이 사는 궁궐이 아니라도 높은 성채나 요새를 의미합니다. ‘폐한바’(나다쉬)는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궁전이나 성채는 꼭 사수되어야 할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버려질 것입니다. 이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을 암시합니다.
‘인구 많던’(하몬)은 원래 ‘큰 소리’ 혹은 ‘포효’라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무리가 내는 큰 소음을 의미합니다. ‘적막하며’(아지브)는 ‘버리다’라는 뜻으로, 병행하는 앞 구절의 ‘버리다’(나타쉬)와 동의어입니다. 이 구절의 본문을 직역하면 ‘성읍의 소음이 그치며’가 됩니다. ‘오벨’은 개역개정에 고유명사로 번역되었으나 ‘언덕’ 혹은 요새를 만들이 위해 흙으로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것으로서, 뒤에 오는 ‘망대’와 짝을 이룹니다. ‘오벨’은 특히 부자들이 많이 사는 언덕이었습니다. ‘망대’도 부자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철저하게 황무지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 나귀가 쉬는 곳이 되고 양 떼가 와서 눕는 곳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인적이 드문 버려진 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효력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다시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일한 삶, 염려 없는 자들은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한 그들은 떨고 당황하고 가슴을 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때문입니다. 무사안일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되는 성읍
하나님은 어떻게 새 예루살렘을 세우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사 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회복시킨다는 것은 돈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을 위에서부터 소낙비처럼 부어 주셔서 다시 축복하시고 세우시는 것입니다. 마치 몇 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완전히 황폐한 땅에 억수 같은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성령에 대한 계시가 신약처럼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사야는 새 시대가 도래할 때 하나님의 영의 역할을 종종 언급합니다.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 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 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바로 앞 절까지 선지자는 땅이 황폐하여 열매를 거두는 일이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영을 부으시기 전까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 때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에 억압당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높임을 받고, 안일하게 지내던 높은 자들은 낮아지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 29:17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사 32:16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첫째, 정의와 공의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백성들, 즉 가난하고 천하며 무시당하는 자들과 부유하고 유식하며 존경을 받는 자들에게 다 같이 사물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정당한 원칙과 선과 악에 대한 확고한 자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어지는 의로움은 우리에게 화평과 평안과 안전을 주며 나아가 영원한 세계를 향한 영적 소망이 됩니다.
둘째, 화평과 평안이 깃들 것입니다.
이것은 ‘최후의 온전한 때’, 즉 그리스도가 통치하실 때 임할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궁극적인 행복은 언제나 안식과 평안의 상태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에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은 그 자취를 감추일 것이며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성품과 인격에 의한 통치가 실현될 것입니다.
√사 32:18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고 정의와 공의가 회복된 결과로 평안과 안전이 이룩된 다음에는 ‘내 백성’이 그 안에서 평안하고 안전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내(하나님의)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날 것’이라는 심판의 선언(13절)이 역전된 것입니다. 또한 안일하고 염려 없는 자들이 두려워 떨게 되는 것(9~12절)과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에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 32:19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하나님의 미래 계획은 아름답지만 지금 예루살렘은 우박과 전쟁으로 파괴되기 직전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골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당장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받아야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입원은 바벨론에게 지는 것이고, 수술은 예루살렘이 멸망해서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서 다시 시작됩니다. 요즘 우리나라 교회는 중병에 걸려 썩은 고름이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유명해지고 높아지는 것이 그렇게ㅐ 무서운 독배인 줄도 모르고 마셨다가 이제는 썩은 고름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누구도 치료 방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 32:20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모든 물가’는 여호와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서 씨를 뿌리면 복을 받습니다. 또 ‘소와 나귀’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몰고 가면 다시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고 거기에 인생을 투자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온 세상을 주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능력이 있고 영혼을 살리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되는 것은 결국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능력이 있는 쪽으로 우리의 소와 나귀를 몰고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세상이 주는 풍요와 물질에만 관심을 가진 유다 백성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은지 돌이켜 봅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보다 세상에 소망을 두며 안일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십시오. 안일한 삶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늘 살피고 회개 하십시오. 말씀으로 충만하여 광야와 같은 인생을 아름다운 밭으로 만드는 복을 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