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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마 11:16-24)
신약에 나오는 가장 불쌍한 사람을 든다면 두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가룟유다입니다. 천국의 기둥처럼 쓰임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함께 동거동락하면서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 수많은 천국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자기속에 자기가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습니다.
늘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고집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돈받고 팝니다. 그러나 곧 후회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통곡합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돈을 성소에 던져 버리고 목을 메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천국의 문턱까지 갔다가 지옥의 구렁텅이로 추락한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유다는 제 길로 가버렸다고 평가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입니다. 그는 훌륭한 부모의 가르침으로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잘 지켰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할 정도로 영생에 관심이 많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니까 이 청년은 돈을 너무 사랑하는 부자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고 초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년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참으로 불행한 청년입니다. 세상의 물질때문에 하늘의 보화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물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생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그렇게 돈 때문에, 또 그 무엇때문에 눈앞에 있는 영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16-17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외쳐도 말씀에 대해서 반응이 없고 무감각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악의에 찬 세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한 세대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대 전체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세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살고 있던 그 시대를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나라의 어린이들은 부모를 따라 시장에 가서 부모가 물건을 사고 팔고 사람을 만나는 동안 장터에서 놀이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결혼식과 장례식을 흉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놀이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뭐 특별한 오락기구가 없으니까 어른들이 하는 것을 흉내내는 정도였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특별한 놀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자치기나 팽이치기, 연날리기, 땅따먹기, 등이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이 시장에서 흔히 하는 놀이는 바로 결혼식과 장례식을 흉내내는 놀이였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배역을 정하고 결혼식을 흉내 냅니다. 신랑을 정하고 신부를 정하고 피리를 불면 춤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틀렸는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습니다. 또 장례식 놀이를 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고 가슴을 치며 장례식 흉내를 내면서 노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혼식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것입니다. 또 장례식에서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화가 나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시대가 이것과 똑같다고 예수님이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좋은 일이 있어도 함께 기뻐할 줄 모르고 슬픈 일이 있어도 함께 울 줄 모르는 무감각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가 왜 이처럼 무반응의 시대요 무감각의 시대가 됐습니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1)관심의 차이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들의 기대와는 관심의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고라신과 벳세다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전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으나 저들은 기적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의 말씀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저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증거하시는데 저들은 오직 이 땅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사는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기자신만 국한해서 말입니다. 이처럼 자기자신만 사랑하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자기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한 천국복음과는 관계없는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자기 우상입니다. 자기자신이 주인된 세상, 그것이 바로 타락한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나라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게 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내 맘대로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롬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육신의 소욕을 죽여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그러므로 내 마음을 온전하다고 믿지 마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만 믿어요. 내 자신이 가장 선하고 깨끗하고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예수님과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예수님과 통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이렇게 뜻이 다를 때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갈등이 있습니까? 통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하는 것은 생각만해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너와의 관계가 육신의 정욕 때문에 자기 사랑 때문에 다 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에 있는데 우리의 관심이 땅에 있으면 초점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관심에 일치하기 위해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자만심 때문입니다. 자만이란 뜻은 "스스로 자랑하며 뽐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로를 부인했습니다. 즉 그들도 똑같이 죄인 취급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들이 처음에는 예수님께 대하여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생각과 다르자 예수님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떡과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금욕 생활을 하니까 저들은 귀신이 들렸다며 미치광이 취급을 하고,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죄인들과 친하다 하여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면서 아주 세속주의자로 몰아 버리는 것으로 비난하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여, 금욕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슨 종교 생활이 저 모양이며 무슨 메시야의 생활이 저러느냐는 것이지요 게다가 좀 구별되고 깨끗하게 지내야지 세리와 창기,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지낸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법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저들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이 모두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욕적인 것도, 먹고 마시는 교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니까 영광스럽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없는 사람에게는 이래도 나쁘고 저래도 나쁘니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면이든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이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다 귀한 것이 되지만 믿음없이 거절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오해가 되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이러한 무반응과 불신의 세대를 비판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문제는 한마디로 그들의 불신앙에서 나온 자만심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자신들만이 잘 나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만하게 되고 그 자만은 올바른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당에 나와도 말씀을 들어도 통하지 않습니다. 무엇때문일까요? 그 알량한 자만심때문입니다. 조용히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저 다 동의하고 얼마나 순종하며 살았는가? 정말 나는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려 보았는가? 자만하지 맙시다.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 보십시다.
3)양심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감동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양심이 성령님이 이용하시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양심이 움직이고 양심이 거리낄 때 우리는 반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저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완전히 무감각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시는 피리소리를 들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의 양심은 어떠합니까? 양심의 소리가 우리들을 찔러댈 때에 금방이라도 회개를 하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양심이 밤낮없이 찔러 댐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시편 32편 3절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성찰하며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시편 103편 12절 말씀을 보면 회개한 자에게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청결한 양심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린이의 놀이를 예를 들어주시면서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함께 거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마음이 하나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깨우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8-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사람들은 먼저 세례 요한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비판하였습니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마치 귀신들린 것과 똑같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이다"하고 욕을 하였습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험한 음식을 먹고 험한 옷을 입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는 말은 그런 경건한 생활을 비꼬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들처럼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지 않았습니다. 석청과 메뚜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거친 약대 털옷을 입고 동물의 가죽으로 띠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으로는 듣기 싫은 소리만 계속하였습니다.
이런 세례요한에 대해 그들은 화가 나 있는 것입니다. 부정 부패를 꾀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과 달리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같이 도둑질해야 좋은데 도둑질을 안 합니다. 그래서 싫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화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신경질이 나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꽉 막힌 담벼락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그들이 똑같은 문제로 예수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다릅니다. 세례요한은 아주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보통 사람처럼 삽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즐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또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먹기를 탐한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먹지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은 잡수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만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위한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의 이야기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너무나 바쁜 시절에 뉴욕의 전철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조용히 묵상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한 정거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탔어요. 마침 스티븐 코비의 옆자리가 비어서 그들이 앉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들어올 때부터 징징거리더니 막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옷을 잡아당기며 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아이를 전혀 달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스티븐 코비가 너무나 화가 났어요.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스티븐 코비가 꾸짖듯이 얘기합니다. "여보시오, 선생님! 당신 아이가 이렇게 징징대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까? 전철 안에서 다들 조용히 있는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하고 그를 심하게 꾸짖었어요.
그러자 이 아버지가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이 아이가 보채는 것을 이제 막 발견했다는 듯이 "아! 미안합니다." 양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방금 병원에서 나오는 길인데, 이 아이의 엄마가 1시간 전에 죽었습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나갔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얘길 들은 스티븐 코비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2,30분을 더 가며 아이가 우는 그 소리가 자기를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미워지면 잘해도 밉고 못해도 밉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였느냐가 아니라 미워하는 그 마음입니다. 혹시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미워하고 있는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다 좋게 해석되고 모든 것이 다 좋게 받아들여집니다.
심지어 자기를 비판하고 욕을 하여도 신이 납니다. 밉지가 않습니다. 손해를 끼쳐도 섭섭하게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보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사람처럼 온통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욕을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만 상대한다, 만나는 사람을 보면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욕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영적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구주이신 예수님앞에 나온 것입니다.
(마 9: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고 비판하는 사람들, 바로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없이는 우리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만이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정작 불쌍한 사람은 비판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미움받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미움을 받거나 비판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분노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스데반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는 모습을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을 들어 치는 자들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독과 악을 다 가진 표정, 금방이라도 살인할 것같은 표정, 그것이 바로 분노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평화와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소망과 은혜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만사가 귀찮고 신경이 날카로운 데다 모든 게 다 불만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무감각하고 무반응적인 사람, 아니 자기 고집대로 제 길을 가는 사람들, 이들을 복음을 거부하는 한 시대의 표징입니다.
여기 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불신앙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20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기적과 권능을 가장 많이 받은 고을들이 역설적으로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적을 베풀어도 믿지 않고 보여 주어도 믿지 않는 것,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가장 큰 은혜를 받았지만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데 그 첫번째가 죄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믿지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여주시고 생명을 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믿지않습니다.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믿어야 할 내용들입니다. 이해되는 것 과연 얼마나 됩니까? 다 믿어야 합니다. 가장 큰 사랑을 받았지만 믿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은혜를 받았지만 믿지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죄중의 죄인 것입니다 .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자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언제나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데 어찌 기적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성경을 믿으십니까? 믿음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의심없이 믿습니까? 믿는 사람에게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21절에서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심방을 하고 심혈을 기울여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해 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불신앙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나 맘이 상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공을 들이고 애정을 쏟아 기도해 주었는데 몇 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하고 평범하게 대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는 부스러기를 먹고도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공을 들였는데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스러기를 먹고도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22-24절에서 해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먼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먼저 깨닫지 못하면 보지 못한 자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기적과 권능을 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봉사하고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이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변화입니다. 다른 말로 성화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의 마음과 통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들려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주님입니까? 우리 자신입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만심을 버리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왜 못 엎드립니까? 무엇이 부족해서 엎드리지 못합니까? 강퍅한 교만 때문입니다. 그것이 깨트려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점점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며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시간 참석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