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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진정한 마이다스 손/막 1:40-45
○ 문둥병을 고치심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레14:3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눅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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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
여러분들 가운데,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원래 '마이더스의 손'이란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Midas)라는 왕에 대한 전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미다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부자(富者)로 이름난 프리지아의 왕의 이름입니다. 어느 날 디오니소스 신이 매우 아끼는 실레노스가 길을 잃었을 때, 미다스는 그를 잘 돌보아주었습니다. 디오니소스신은 미다스에게 너무 고마워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만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하자, 미다스는 자기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침내 미다스의 소원이 이루어져, 미다스가 손대는 것마다 모조로 금으로 변해갔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기쁘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먹으려고 손을 대는 음식까지도 황금으로 변하는 바람에 난처해진 미다스는 신에게 자기의 소원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라는 이름을 영어식으로 말하면 마이더스라고 발음하는데, 여기에서 '마이더스의 손'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손만 대면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사람, 즉 어떤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는 일마다 많은 수익을 창출해내는 사람을 빗대어 금융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하고, 최고의 인기가수를 줄줄이 배출해 낸 사람을 가요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하고, 출연한 영화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배우를 가리켜 영화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하고, 선수들을 대신해서 고액의 연봉을 받아내는 일에 능한 사람을 에이전트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흥행에 능한 사람, 사업적 수완이 있는 사람,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 등, 어떤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에서 아무리 유능한 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세상에서 인정받는 '마이더스의 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한복음 10장 29절을 보면,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붙들고 계시면 아무도 해할 자가 없습니다.
또 사도행전 11장 21절에서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기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임하면 교회가 부흥하게 됩니다.
또 다윗은 시편 37편 24절에서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야훼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앞길에 놓여있는 장애물에 걸려 혹은 우리의 실수로 인해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 때문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붙드시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4장 40절에서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의 손이 임하면 어떠한 병에 걸린 사람도 다 낫게 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터치하시니 병이 나았습니다.
소경의 눈에 흙을 이겨 바른 후,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세상의 그 어떠한 손보다도 가장 위대한 능력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손이 진정한 '마이더스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진정한 '마이더스의 손'이신 주님의 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같이 본문 40절을 보겠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개역성경에서는 ‘문둥병자’라고 번역해 놓은 반면,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나병환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나병은 한센균에 의해서 발생하는 전염병으로서, 의학적으로는 ‘한센병’이라고 부릅니다. 나병에 걸리면 신경이 손상되기 때문에 신체 부위에 감각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뜨거운 물을 부어도 뜨거운 줄 모르고, 뜨거운 모닥불에 자기 발이나 손이 타 들어가는데도,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매년 5월5일 어린이날에는 CCC라는 선교단체 회원으로 다른 회원들과 함께 여수 애양원을 방문하곤 했는데, 나병 환자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눈이 충혈되어 있고 항상 술 취한 사람 사람처럼 눈의 초점이 맞지 않습니다. 또 음성도 명확하지 못하고 굳어진 악기처럼 아주 험한 소리를 냅니다. 또한 나병환자 들 중에는 손가락, 발가락 뿐 아니라, 눈썹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눈 코, 입 등이 사라져 버려, 얼굴에는 뻥 뚫린 다섯 개의 구멍만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의학이 발전하여 나병 치료가 과거에 비해서 쉬워졌지만, 옛날에는 달랐습니다. 이 나병은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서, 피부와 핏줄을 통하여 전염이 되기 때문에 구약 성경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병' 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으로부터 나병이라고 진단받은 사람들은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무조건 마을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마을 밖에서 살다가 다른 사람이 가까이 접근해오면 윗입술을 가리운 다음,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가까이 접근해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나병에 걸린 사람이 만졌던 물건까지도 부정하다고 해서, 불에 태우거나 물로 씻지 않으면 전혀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살던 집까지도 부정한 집으로 규정하여 집을 헐어버려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 나병은 가장 무서운 병으로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본문 40절을 보면,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온 것입니다. 사실 그의 이 행동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자칫하면 이 나병환자는 마을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는지 모릅니다. 나병환자가 마을에 들어온다는 것은 아예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 앞에 나오게 했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용기 있게 만드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에는 환경을 뛰어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목사님이 32세 때 북미 파송 선교사로 임명되어 220톤의 시몬즈호를 타고 8주 동안 대서양 횡단할 때의 일입니다. 그 배에는 26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항해 도중 큰 폭풍이 몰아닥쳤습니다. 웨슬레는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 휩싸였으나 독일 모라비안 교도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 중 한사람이 공포 속에 떨고 있는 웨슬레를 향하여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나는 그리스도를 신뢰합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 마음속에는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배 안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의 믿음과 용기에 도전을 받고, 나중에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조그만 일에도 놀랍니다. 갑자기 벽에 걸린 액자만 떨어져도 “아이구, 내 심장 멎는 줄 알았네.”하며 놀랍니다. 열어놓은 창문이 바람에 ‘꽝’하고 닫혀도 “아이구, 깜짝이야”하며 놀랍니다. 천둥과 번개만 쳐도 믿음 없는 사람은 “아이구, 무서워“하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릅니다. 믿음의 사람은 폭풍 부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돌에 맞아 죽을 것 같은 위기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병환자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예수님이 자신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간청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나는 언제든지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쳐주신다면, 제 병은 곧바로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이 간청을 통해 우리는 그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나병으로 인해 살은 썩어져 있고, 손가락은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문드러져 있고, 얼굴에는 여러 가지 반점들로 얼룩이 져서 지금은 망가진 모습이지만, 예수님이 자신을 치료해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정한 자신을 깨끗케 해주실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병환자의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다같이 41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여기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은 개역성경에서는 ’민망히 여기셨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긍휼히 여기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NIV 영어성경에는 똑같이 ‘compassio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래 이 ‘compassion’은 서로, 함께 라는 의미가 있는 ’com’이라는 단어와 고통, 수난이라는 의미가 있는 ‘passion’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compassion’이라는 단어에는 '고통과 괴로움에 함께 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재산을 다 날리고 돌아온 탕자를 향해 아버지는 ”그것 참 고소하다. 그래 내가 뭐라고 하더냐? 너는 더 고생을 해야 한다. 너는 내 집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집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를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주었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에 함께 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고난도 알아주시며 함께 아파해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을 볼 때 민망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나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음으로만 불쌍히 여기고 그냥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다같이 4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그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주님의 이 행동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나병에 전염될 수도 있고, 설령 나병에 전염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병환자와 접촉만 해도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주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셨을까요?
무슨 이유로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기위해 안수하셨다"고 주장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단순하게 병만 낫게 하실 목적이었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굳이 손을 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손대지 않은 채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경우가 등장합니다. 주님에게는 손을 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나병환자의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나병환자가 주님의 몸에 손을 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그의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도 치유해 주고 싶으셔서 사랑으로 터치해주신 것입니다. 그 동안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사람들과 접촉이 차단된 채,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흉칙한 외모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거절감 때문에 그의 마음의 상처는 더욱 깊어 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나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사람은 나병으로 인한 육신적인 질병보다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은 마음의 병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터치해주셨습니다. 여기 ‘사랑의 터치’를 다른 말로 하면 ‘스킨 쉽’이라고 하는데, 학자들에 의하면 이 ‘스킨 쉽’에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육아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사랑의 터치, 즉 아기를 만져주고 안아주는 따스한 손길에는 아기를 달래주고 곤히 잠들게 도와주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또 정서적으로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도와주며, 육신적으로도 아기의 소화기능을 도와 건강한 아기로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아기에게 사랑으로 마사지해주면 아기의 체중도 증가하여, 미숙아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터치를 해주지 않은 아기보다 터치해준 아기가 47%이상의 체중증가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또한 스트레스 호르몬의 수준이 감소되어 아기의 감성과 사회성이 증가하며, 면역기능을 강화시켜 주며, 아기에게 유익한 뇌파인 베타파가 증가하고 아기의 정서적 발달과 엄마, 아빠와의 유대감을 강화시켜 주어 두뇌 발달에도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터치(Touch)의 힘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배탈이 나면 우리 어머니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손 끝마디를 실로 묶고 바늘로 손끝을 땁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에 누인 후, 손으로 배를 천천히 문지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엄마 손은 약손, 엄마 손은 약손.” 그러면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듭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잠이 깨고 나면 배가 아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세요? 어머니의 손이 갑자기 요술을 부린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다해 만져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이 놀라운 치유의 효과를 보여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터치(Touch)의 힘입니다. 사랑의 터치에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외면당해왔던 그를,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아 고독과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그를,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그를, 사랑으로 만져 주신 것입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가까이 오려고 하는 그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터치 대신에 말로 그를 고쳐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흉칙한 모습을 한 그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이 자리에 여러 가지 문제와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병환자처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병환자처럼 버림받은 사람들과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회복시키시는데 명수이신 주님께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자동차를 가장 잘 아는 것처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함을 치료해주시고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의 육체적인 질병 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도 치료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버림 당하고 외면당하는 사람까지도 우리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재활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42절을 보면 나병환자가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청을 하자, 주님은 불쌍히 여기사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같이 42절을 보겠습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 진지라.“
할렐루야! 주님은 나병으로 인해 겪은 육신적인 고통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받은 마음의 상처까지도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44절)
사실 주님 곁에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병환자가 고침 받은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른 사람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당시 나병의 완치 여부는 제사장의 진단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제사장에게 몸을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마5:17).
그러나 그는 자기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그 사실이 널리 퍼지게 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더 이상 그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 밖에서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잘못된 열심이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충성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기준대로 충성하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순종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전에 몇 차례 소개한 적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거리 한 모퉁이에서 한 거지가 낡고 고장 난 바이올린을 켜면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장 난 바이올린에서는 음산하고 구슬픈 불협화음의 거북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는 자 없이 그 거기는 계속해서 음산한 노래를 연주했습니다. 이 때 한 노신사가 지나가다가 그 거지에게 바이올린을 달라고 하더니, 여기저기 만지고 나서 연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 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외쳤습니다. “파가니니다!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낡고 녹슬고 고장 난 바이올린과 같은 사람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내는 멋진 인생으로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세상의 그 어떠한 손보다도 가장 위대한 능력의 손입니다. 주님의 손이 진정한 '마이더스의 손' 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주님의 손에 가면 다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손 안에서 죄인이 의인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손 안에서 가난한 자가 부요해지고, 병든 자가 강건해지고, 작은 자가 큰 자가 되고, 낙심한 자가 소망을 얻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손이 닿으면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고도 12바구니나 거두었던 것과 같은 기적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 육체와 심령을 터치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과 교회를 터치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능력의 손길, 치유의 손길, 회복의 손길, 소망의 손길, 기적의 손길이 되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부요하심과 풍성하심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진정한 '마이더스의 손'이신 주님의 손을 사모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의 손을 의지하기보다, 주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