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안과 밖 강연시리즈] 2017 계승과 변화를 거듭해온 인류 지성사에 대한 성찰>과학/과학철학/허준과 동아시아 의학의 집성 ☞ 강연자: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신동원 교수는 『동의보감』이라는 의학 텍스트를 둘러싸고 여러 궁금증이 생겨나는 게 당연하다며 “조선과 중국, 더 나아가 일본까지 펼쳐졌던 역사적 현상으로서 『동의보감』 유행의 실체”와 요인은 무엇인지,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또 세계 의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등을 질문한다. 물론 간단히 답할 일은 아니지만 “의학만이 아니라 조선의 그 어떤 사상이나 문물이 대륙 전체로 널리 발신한 사례는 유례가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못박는다. 그러면서 그것의 빛나는 성취는 양생(養生)과 의학 내용의 종합을 필두로 “여러 명(明) 대 종합 의서의 내용을 다시 일통”한 거대 종합에 이르기까지, 즉 (한)의학 체제라는 커다란 전범을 만들어낸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하며 “비록 담기는 내용은 모두 이전부터 있었던 재료지만, 담는 그릇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열린연단 강연 (패러다임 12강) –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신동원 : 따로 사대(事大)로서 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천문학에서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감히 넘고자 하지 않았던 영역, 제약이 의학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실력만 되면, 수준만 되면 의학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열려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바로 세종 대의 『의방유취(醫方類聚)』부터 시작해서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까지 이뤄지는 1477년에서 1613년까지 의학 부분에서는 금기나 제약을 두지 않는 성취가 이뤄졌는데요. 그 성취를 이 강연의 제목 ‘동아시아 의학의 집성’이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는 거죠. (…) 『동의보감』에 대한 세계 각국의 반응을 보인 깊이와 크기입니다. 평가가 어마어마해요. 아마 한국, 조선에서 생산된 그 어떤 책도 이만한 평가를 받은 건 없다고 봅니다. 심지어는 그 유명한 퇴계(退溪)의 저작까지를 포함해서요. 어마어마한 표현들을 살펴봤을 때 이게 진짜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느낄 만하죠.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일본에 있는 과학사학자, 또 웬만한 교양인들이 『동의보감』 다 압니다. 진짜로 다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만 다 아는 게 아니라 중국의 많은 사람들도 『동의보감』을 알아요. 이것들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어온 것이기도 하죠.
열린연단 토론 (패러다임 12강) – 이기복 한의사 · 한양대 강사
김우창(사회) : 비교할 때 단지 지금까지 있던 것을 어떻게 종합하느냐, 이것만이 아니라 경험적인 사실과 이론적인 사실을 종합해서 평가해야 하는데 너무 주자학의 테두리 속에 있게 되면 그것이 어렵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러니까 여기서 서양하고 비교한다는 것은 단지 동양하고 서양을 비교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험과 경험과 이론, 이 세 가지가 다 합쳐져 있는 보편적 과학의 입장에서 검토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동서양의 비교로만 생각하면 곤란할 것 같아요. 임상적 체험을 축적해서 그것을 의학에 참조하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이기복 : 동의(東醫) 관념에 대한 역설과 그 문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조금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동의보감』 자체는, 텍스트로서의 『동의보감』은 분명히 보편성을 지향했지만 오히려 지역성을 담고 있는 ‘동의’라는 것을 내세우거나 표지에 썼다는 거죠. 그래서 상당히 모순적인 내용이거든요. (…) ‘동의’라는 것이 조선의 독자성을 내세운 게 아니라 보편성을 내세웠다고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뒤집어보면 결국 중국 것을 따라 하려는 게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혹자는 또는 어떤 사람이든 『동의보감』이 조선의 독자적인 의학을 추구한 게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고대 저작을 지향한 것이었다고 반문하거든요. 실제로 외국 학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여전히 한국에서 의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이런 비슷한 질문을 많이 합니다. (…) 저는 이런 것이 제대로 해소가 안 되었다고 보는데 (…) 선생님이 코멘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연자 소개
-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소장
- 카이스트 한국과학문명사연구소 소장
-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
-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보건관리학 석사
- 서울대학교 농화학과 학사
- 네이버 인물정보
토론자 이기복 / 한의사 · 한양대학교 강사서울대 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 과정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런던에 소재한 웨스트민스터 대학 리서치 펠로우를 지냈으며 현재는 한양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공저한 책으로 [역시만필(歷試漫筆): 조선 어의 이수귀의 동의보감 실전기]가 있다. 인물정보 더 보기
강연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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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과 동아시아 의학의 집성
1. 『동의보감』은 어떤 책인가?
본격 강의에 앞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어떤 책인지 그간의 연구 결과를 간단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근의 연구 성과인 김호의 『허준의 동의보감연구』(2000)와 신동원의 『조선사람 허준』(2001)을 반영해 항목을 새로 서술했다. 가장 적절한 요약이라 생각하기에 여기에 소개한다.(주1) 『동의보감』은 1596년에 편찬이 시작되어 1610년에 집필이 완료되었으며, 1613년에 내의원에서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 목활자로 발간되었다. 1596년 책의 편찬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태의(太醫) 허준이 왕명을 받아 유의(儒醫)인 정작(鄭碏)과 태의 이명원(李命源)ㆍ양예수(楊禮壽)ㆍ김응탁(金應鐸)ㆍ정예남(鄭禮男) 등 6인이 참여했다. 임금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수의(首醫)인 허준에게 편찬을 맡겼던 것이며, 그는 왕명을 받아 당시의 뛰어난 의원을 망라해 의서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어의인 양예수ㆍ이명원ㆍ김응탁ㆍ정예남 등 4인과 민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유의 정작이 그들이다. 양예수는 허준보다 선배 세대의 어의로 신의(神醫)로 평가받은 인물이고, 정작은 어의는 아니지만 민간에서 형 정렴(鄭磏)과 함께 도교적 양생술의 대가로서 의학에 밝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이명원은 침술에 밝았으며, 김응탁ㆍ정예남은 신예 어의였다. 이렇게 많은 의관(醫官)과 의원(醫員)들이 모여서 의서 편찬에 투입된 사례는 세종 때 10인이 참여한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밖에 없었다. 이처럼 『동의보감』의 편찬 사업은 처음부터 국가의 지대한 관심에 따라 대규모로 기획되었다. 그렇지만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편찬 팀이 해체되었으며, 이후 허준이 단독 편찬을 맡아 1610년에 집필을 완료했다. 이 책의 재료는 중국의 한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는 200여 종의 문헌과 『의방유취』ㆍ『향약집성방』ㆍ『의림촬요(醫林撮要)』와 같은 수 종의 조선 의서 등이었다.
1613년에 인쇄되어 나온 책은 전체 25권 25책으로 목차 2권, 의학 내용이 23권이었다. 의학 내용 23권은 다시 「내경편(內景篇)」(4권)ㆍ「외형편(外形篇)」(4권)ㆍ「잡병편(雜病篇)」(11권)ㆍ「탕액편(湯液篇)」(3권)ㆍ「침구편(鍼灸篇)」(1권)으로 나누어 배분되었는데, 이 같은 편제는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동의보감』은 신체에 관한 내용을 안팎으로 나누어 신체 내부와 관련된 내용을 「내경편」에, 신체 외부와 관련된 내용을 「외형편」에 두었다. 신체 관련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병 이론과 구체적인 병 내용은 「잡병편」에 묶였다. 「탕액편」은 가장 주요한 치료 수단인 약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인 약물에 관한 각종 지식을 실었고, 「침구편」은 또 하나의 치료 수단인 침ㆍ뜸의 이론과 실재를 다뤘다. 『동의보감』의 주요 서지 사항을 보면, 한국 간본으로는 내의원 훈련도감활자 초간본(1611∼1613), 호남관찰영 전주장본(全州藏本), 영남관찰영 대구장본, 갑술 내의원 교정 영영개간본(嶺營改刊本, 순조14, 1814), 갑술 내의원 교정 완영중간본(完營重刊本) 등이 있다.(주2) 일본 간본으로는 『동의보감』(梱井藤兵衛, 京都書林, 1724년 초간본), 『동의보감』(미나모토노 모토토루[源元通], 大阪書林, 1799년 훈점[訓點] 재간본)이 있다. 중국 간본으로는 『동의보감』(1763년 초간본), 『동의보감』(江寧 敦化堂, 1796년 재간본), 『동의보감』(1890년 복간본)과 민국상해석인본(民國上海石印本)ㆍ대만(臺灣) 영인본 등이 있다. 이들 인본 가운데 1890년의 광서복간본(光緖覆刊本)은 건륭판(乾隆版)이나 가경판(嘉慶版)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본 간본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동의보감』이 20세기 이후에도 계속 출판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 『동의보감』,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과학사, 중국 과학사, 어느 관점에서도 『동의보감』은 매우 드문 예외에 속한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명과 한국 문명의 관계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문물이 조선에 유입되어 큰 효과를 일으킨 것이 대부분이었고, 반대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동의보감』은 의학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 또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이 드문 ‘반대’의 사례에 해당된다. 그래서 여러 궁금증이 생겨난다. 조선과 중국, 더 나아가 일본까지 펼쳐졌던 역사적 현상으로서 『동의보감』 유행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런 현상이 일어난 요인은 무엇인가? 『동의보감』의 저술 과정과 발간 배경은 어떠했는가? 『동의보감』의 의학적 내용은 무엇이고 어떤 성취를 담은 것인가? 이런 의서를 편찬해낸 조선 의학계와 사상계의 잠재력은? 대표 저자인 허준(許浚, 1539~1615)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다른 공동 저자의 지적, 의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사에서, 또 세계 의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등등이 쉽게 떠오르는 질문들이다.
1) 『동의보감』의 국내외적 명성
허준 자신은 아마도 『동의보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엄청난 대접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중화 문명의 동쪽 구석에 위치한 조선의 의자(醫者)로서 허준은 자신의 책이 오랫동안 중원(中原)에서 대단한 독자를 얻게 되리라는 사실은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성취를 당대 대가로 칭송받는 이고(李杲, 호: 東垣, 흔히 이동원[李東垣]이라 부름)의 북의(北醫), 주진형(朱震亨, 호: 丹溪, 흔히 주단계[朱丹溪]라고 함)의 남의(南醫)에 견주어 동의(東醫)의 확립을 장담했지만, 의학만이 아니라 조선의 그 어떤 사상이나 문물이 대륙 전체로 널리 발신한 사례는 유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학자 량윙쉬안(梁永宣)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49년까지 27종이, 이후 현재까지 8종의 『동의보감』이 중국에서 찍혀 나왔다. 가장 최신본은 2013년도 판이다. 타이완에서도 12종이 찍혀 나왔다고 한다.(주3) 일본에서는 19세기까지 두 번 인쇄되었으며 현대에도 여러 차례 인간되었다. 의학 수요의 급증, 출판 산업의 발달, 국내외 유통 시스템의 확장이라는 조류와 맞물려 『동의보감』은 허준의 시대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국제적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중국 의서로는 『동의보감』 수준의 인기를 누린 책이 몇 가지 있지만, 조선이나 일본 의서로서 이만큼 널리 읽히는 책은 단연코 없다. 동아시아 의학 저작으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내용이 독창적이고 오늘날에도 실용성을 가진 중요한 기록유산으로 평가받았다. 현대 서양 의학 이전에 동아시아인 보건에 도움이 됐고, 서양 의학보다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는 분야도 있다는 것이 선정 취지였다.
세계기록유산이나 중국에서 누린 인기에 관계없이, 이 책은 출간 이후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의서로 자리 잡아서 한국 역사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 국내에서 조선 후기에 『동의보감』이 대여섯 차례 공식적으로 인쇄, 발간되었음이 확인되며, 후대 조선 의학계에서 『동의보감』이 끼친 영향력은 이 책을 존숭하여 계승한 후학들의 의서를 통해 더욱 짙게 나타난다. 의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린 사실은 『동의보감』을 조선 의학사라는 일국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 의학사의 관점에서 볼 것을 요구한다. 『동의보감』이 국내에서 명성을 굳히게 된 결정적 계기도 중국에서 누린 인기에 있다. 여러 연행사가 감격한 것과 같이, 당시 중국에서 출판 상황을 보면, 1747년, 1763년 2종, 1766년까지 4종의 판본이 찍혀 나왔다. 게다가 1724년 일본에서 찍은 판본까지 중국에 널리 퍼졌고, 사신들이 품어 간 조선 판본 2종(1613년, 1634년 본)까지 소중하게 취급되었다.(주4) 중국에서 판을 거듭할수록 국내에서도 『동의보감』에 대한 자긍심은 더욱 커졌다.
2) 거대 프로젝트의 대상으로서 『동의보감』 연구
한국 의학사에서 『동의보감』이 가장 대표적인 책인 만큼 이에 대한 연구는 무수히 많이 나와 있다. 2014년 현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제공하는 학술정보서비스 사이트(RISS)에서 『동의보감』을 검색해보면, 이를 키워드로 삼은 것으로 석ㆍ박사 학위 논문 357건, 국내 학술지 논문 422건이 검색된다. 이는 다른 저명한 의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등과 견줄 때 10배 이상의 성과물이다. 이런 여러 연구 덕택에 『동의보감』의 역사적, 학술적 의미에 대한 이해는 넓어지고 깊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인에게 은연히 존재하는, 『동의보감』이 ‘우리 것이기에 대단하다는 민족주의적 편견’을 거두어내는 동시에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동어반복적 해석을 지양한 졸저 『동의보감과 동아시아의학사』(2015)가 출간되었다. 사실 『동의보감』은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 진행되는 여러 대형 연구와 같은, 또는 그 이상의 세계적 지평을 지닌 책이다. 중국의 경우 절대적인 의학 경전으로 평가되는 『황제내경(黃帝內經)』 연구 프로젝트, 한(漢) 대의 명의 장중경(張仲景)이 열어젖힌 상한론(傷寒論)에 관한 프로젝트, 이른바 금ㆍ원(金ㆍ元) 대에 출현한 네 명의 대가인 금원사대가의 연구에 관한 프로젝트, 명(明) 말 의사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 청(淸) 대에 두드러진 발전을 본 전염병에 관한 학문인 온병학(溫病學)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 등에 대해 집중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에도 시기 의학을 대표하는 고방파(古方派) 또는 상한파(傷寒派)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 등 굵직한 연구 분야가 형성되어 있다. 『동의보감』 연구도 그와 같은 궤도에 곧 올라 한국 의학사 발전을 제대로 읽어낼 돌파구가 될 것을 기대한다.
3. 『동의보감』은 왜 동아시아 의학계에서 주목했는가?
1) 조선에서
『동의보감』은 출현 이후 수십 년 안에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의학서가 되었다. 1603년부터 1842년까지 강릉 지역 약계가 참고한 의서에서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동의보감』(1613년) 출현 이전 강릉 약계에서 참고한 책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의과(醫科)와 취재(取才) 과목으로 들어 있는 중국 송(宋) 대~명(明) 대 의서인 『본초(本草)』(大觀經史證類備急本草, 송 대~명 초 증보), 『화제국방(和劑局方)』(송 대 혜민국 편찬), 『의학정전(醫學正傳)』(명 초인 1515년 우단이 지음) 등이었다. 그런데 1648년 강릉 약계의 운영 조항을 기록한 「범례」중 22조가 『동의보감』 대출을 금지시킨 내용이다. 위반할 때에는 유사(有司)가 엄중하게 처벌토록 했다.(주5) 이런 조치는 『동의보감』이 옛 의서들을 완전히 대체하여 지방의 임상 참고 서적으로 거의 절대적인 지위를 누렸음을 방증한다.
18세기 말에는 이런 인식이 바뀌어 있었다. 정조(1777~1800년 재위)는 “고금의 의서(醫書) 중에서 진실로 우리나라에서 쓰기에 알맞은 책을 찾자면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이 지은 『동의보감』만 한 것이 없다.”(주7)라고 극찬했다. 그가 이 책이 “병리(病理)를 논한 것과 처방(處方)을 논한 것이 서로 뒤섞여서 체례가 정연하지 못한 것이 흠”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정조의 인식은 당시의 식자층이 공유하던 인식이었다. 연경사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등도 중국에서 『동의보감』이 받는 대접을 기행문에 실었다. 1765년 사신 일행에 낀 홍대용은 “중국에서 의업을 하는 사람이 『동의보감』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이미 간행한 지 오래되었다.”고 적었으며, 1780년에 다녀온 박지원은 “우리나라 서적으로서 중국에서 간행된 것이 드물었고, 다만 『동의보감』 25권이 성행(盛行)했을 뿐이었는데 판본이 정묘하기 짝이 없었다”, “내 집에는 좋은 의서가 없어서 매양 병이 나면 사방 이웃에 돌아다니며 빌려 보았더니, 이제 이 책을 보고서 몹시 사 갖고자 했으나, 은 닷 냥을 낼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왔다는 섭섭함을 적었다.(주8)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자신의 독서록 의학 분야의 책 가운데에서 25종의 중국 의서(주9)와 함께 조선의 의서로는 유일하게 허준의 『동의보감』을 꼽았다. 선정 이유로는 “문(門)과 유(類)를 이미 갖추고, 조목으로 나열함이 자못 상세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집에 한 부씩 두고 사서삼경과 함께 아울러 소중하게 소장할 만하다. 중국의 선비도 또한 왕왕 이를 전습하고 있다.”(주10)라고 하여, 이 책의 소장 가치를 사서삼경과 나란히 평가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한 술 더 떠서 조선에서 가장 좋은 세 가지 책 가운데 하나로 이이(李珥)의 『성학집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과 함께 『동의보감』을 꼽았다.(주11) 『동의보감』이 조선에서 명성을 굳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 책이 의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끈 사실이었다. 그것이 피드백되어 국내에서 일종의 ‘신화’처럼 굳어지게 되었다. 국내에서 조선 후기에 『동의보감』은 대여섯 차례 공식적으로 목판본으로 인쇄, 발간되었음이 확인된다. 1613년 초판이 나온 이후 53년이 지난 후인 1659년 충청감영에서 다시 발간되었고, 이후 1754년에 경상감영에서, 1814년에 경상감영과 전라감영에서 거듭 발간되었다. 수다한 필사본의 존재까지 고려해볼 때 실제로 『동의보감』이 읽힌 범위가 더욱 넓었다고 할 수 있다.
2) 일본과 중국에서
1613년 『동의보감』의 출현 이후 이 책은 후대 조선과 일본, 중국에서 후한 평가를 받았다. 조선에서는 경전이 되었고, 일본에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누렸고, 중국에서는 매우 경쟁력 있는 의서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학자와 의가들은 『동의보감』을 극히 존숭했다. 1766년 중국판 서문에서 링위(凌魚)는 “천하의 보배는 온 천하의 사람이 같이 나눌 일”이라면서 “아무리 조선이 먼 구석에 있어도 그것이 천하에 결코 감춰지지 않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이에 앞서 18세기 초반 일본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는 정부 주도로 『동의보감』을 찍었다. 1724년 일본판 서문에서 미나모토노 모토토루(源元通)는 “의학이 난립하여 질서를 잃었기 때문에 의학의 표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 이유로 꼽았다. 이처럼 동아시아 3국에서 의서 『동의보감』의 높은 경쟁력을 지니게 된 것은 그 책이 의학의 범위와 계통을 밝힌 ‘의학의 표준화’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학, 영국과학, 일본과학을 특별히 따로 구별하지 않고 전체로서 ‘과학’을 먼저 논의하는 오늘날의 보편 과학 체제와 성격이 비슷하다. 허준의 시대에도 중국의학, 조선의학, 일본의학이라는 ‘지역적’ 특성보다 우선시 하는 ‘의학’이 기본으로 존재했다. 그것 전체와 씨름하여 낸 성취물이기 때문에 『동의보감』의 시간적, 지역적, 분야별 독자층이 그만큼 넓었던 것이다.
4. 『동의보감』, 중국과 조선의 의학 전통의 종합
조선은 건국 이후 경학, 역사, 예법, 천문학, 지리학, 수학, 문학, 음악 등 제 분야와 함께 의학 능력의 배양에 힘썼다. 세종 때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으로 15세기까지 중국과 한국의 의학을 총정리해낸 경험을 축적했으며, 그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중국의 선진적인 의학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구급 의학, 태산(胎産) 의학, 두창에 관한 의학, 역병에 관한 간편 의학을 추려 민간에 널리 보급했다. 같은 시기에 조선의 사대부는 주자학을 깊이 탐구하여 높은 수준에 도달했는데, 거기에는 자연관과 신체관, 양생술과 의학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와 허준은 이런 의학적, 지적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그것은 이들에게 중국 의학의 문제점을 거시적인 수준에서 파악토록 하는 안목을 갖게 했으며, 더 나아가 실제로 이런 안목에 입각한 의학 체계의 건설을 가능토록 하는 능력을 제공했다. 고대 중국에서 『황제내경(黃帝內經)』이 양생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신체와 병증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시도하고 침과 뜸을 이용한 치료법을 제시했지만, 그것이 일목요연한 체제를 이뤘던 것은 아니다. 후대의 의학자들은 『황제내경』이 제시한 체제를 밀고 나가는 대신에 병인(病因), 진단법, 병증 파악, 방제학, 본초, 침구, 부인과와 소아과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의론(醫論)을 확충하고 의술 경험을 축적해나갔다. 특히 금ㆍ원대 이후 여러 학자들이 병의 원인을 특정 의학 이론에 입각하여 병증을 해석하고 치료법을 제시하는 경향이 심해졌고 이는 의학상의 큰 혼란 요인이 되었다. 우단(虞摶), 이천(李梴), 공신(龔信)ㆍ공정현(龔廷賢) 부자 등 명대의 여러 의학자들도 이런 문제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나름대로 통일된 의학 체계의 마련과 처방의 취사선택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우단의 『의학정전(醫學正傳)』(1515), 이천의 『의학입문(醫學入門)』(1575), 공신ㆍ공정현 부자의 『고금의감(古今醫鑑)』(1576)과 『만병회춘(萬病回春)』(1587) 등의 종합성 의서가 나왔다. 그럼에도 선조 임금은 이런 결과물로 의학의 혼란이 극복되기보다는 혼란이 가중된 것으로 인식하여 제대로 된 새 의서 편찬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규모는 잘 되었으나, 다만 늘어놓기만 많이 하고 뜻은 소략하므로 사람들이 또한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듣건대, 중국 사신[北使]이 와서 이 책을 많이 싸 가지고 간다 한다.”(주6)라는 이익(李瀷, 1681~1763)의 언급을 보면, 18세기 전후 조선에서 이 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 또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동의보감』은 “옛것을 기술하되 새로이 짓지는 않는다.”는 ‘술이부작’의 서술 방침에 따라, 거의 전체 내용을 200여종 기존의 의서에서 취사선택했다. 이렇게 취사선택한 것은 다섯 가지 주요 전통을 종합, 절충한 용광로라고 부를 만하다. 첫째, 양생과 의학 내용을 종합했다. 『황제내경』 이후 양생학과 의학은 별개의 전통으로 나뉘어 진전되었는데, 양생학의 일부 내용만을 취한 기존의 의서와 달리 신체와 질병, 약물학과 침구학 등 전면적인 차원에서 양자를 종합했다. 둘째, 고금의 의학 내용을 종합했다. 고대로부터 중국 송 대 사이의 고방과 금ㆍ원 시대 이후 신방의 종합이 그것이다. 특히 허준은 1477년 시점까지 나온 중국 의서 120여 종의 중복을 제외한 전체 내용을 하나로 정리한 성과인 『의방유취』의 열람과 참고가 가능했기에 고방과 금ㆍ원 대 신방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하는 것이 가능했다. 셋째, 기존 의학의 혼란상 극복과 의학의 통일을 주장하고 나선 여러 명대 종합 의서의 내용을 다시 일통하여 거대 종합을 이끌어냈다. 넷째, 의학의 영역을 이루는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본초학, 침구학 등 전문 영역의 내용을 종합했다.
다섯째, 조선 의학 전통의 종합이다. 여기에는 고려 중엽부터 성장해온 국산 약재를 위주로 병을 치료하는 향약 의학의 전통을 수렴한 것 이외에도 15~16세기 민간에 널리 보급한 대민 의학, 즉 아이를 낳고 신생아를 돌보는 태산학(胎産學), 구급 의학, 두창의 예방과 치료에 관한 의학, 역병에 대응하는 의학, 기근을 이겨내기 위한 구황(救荒) 의학을 종합했다. 이런 제반 종합은 “종합의 종합”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이러한 『동의보감』의 성취는 동아시아 의학사상 칭찬 받을만한 점이 여럿 있다. 사실 『황제내경』에서 강조한 양생(養生)을 앞세우고 치료술을 그에 종속시킨 의학 체계를 제시한 것은 『동의보감』이 최초다. 이런 생각에 입각해서 질병의 치료보다도 몸을 앞에 내세워 질병을 하위로 종속시킨 의학 체계도 『동의보감』이 최초다. 이후 청 대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서 이 비슷한 체제를 채택했다. 오늘날 한의학을 이해하는 데 첫머리로 제시되는 정(精)ㆍ기(氣)ㆍ신(神)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내세워 의학 책을 시작하는 서술 방식도 『동의보감』이 최초다. 이런 시도는 진단, 치료, 본초, 침구 등 의학의 모든 영역에서 다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것은 기존 의학을 정리하는 후대인의 특권을 철저히 잘 활용한 결과다. 또 바로 앞서서 비슷한 길을 잘 닦아준 명 대 의학자 이천이나 공정현(龔廷賢, 1522~1619) 같은 의학자를 둔 행운도 크게 누렸다.
5. 동아시아 의학의 전범을 확립한 『동의보감』
수십 년간 의학에 종사하면서 허준은 남이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았다. 그 세계란 단지 병을 잘 고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 인간의 몸과 질병, 병과 치료술을 꿰뚫는 그러한 세계였다. 허준은 자신이 본 세계를 『동의보감』을 짜는 데 적용했다. 비록 담기는 내용은 모두 이전부터 있었던 재료지만, 담는 그릇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는 몸의 기본을 다룬 몸 안의 세계, 몸의 겉을 다룬 외형(外形)의 세계, 병의 근원과 종류를 다룬 「잡병」의 세계, 약을 제공하는 자연 세계의 질서를 새로 그렸다. 그리고 경락과 혈과 관련된 침구법을 덧붙였다. 또 각각의 편에는 왜 그 문이 거기에 있는지 파악이 가능할 정도의 논리에 따른 105문이 설정되었다. 또 105문 안에는 2,781의 세목을 두었고, 그 아래 4,747개의 처방을 실었다. 이 세목들은 2만여 개의 단락으로 증상이면 증상, 진단이면 진단, 치료법이면 치료법 등의 모든 측면을 일목요연하게 망라했다.
1) 대범주_ 105개 문 체제의 특색
『동의보감』은 107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분량 때문에 상ㆍ하로 나뉜 한(寒)문과 초(草)를 합치면 범주상으로는 105개 문이다. 이 글에서는 독립된 범주를 기준으로 105개문으로 본다. 105개 문으로 이루어진 『동의보감』 체제의 특색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비슷한 성격의 의서와 비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의 구성에서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의서는 병증을 중심으로 분문 편찬한 『의방유취』(92문)와 『만병회춘(萬病回春)』(97문)이다. 각각의 병을 다룬 방식에 많은 곳에서 공통점이 보이며, 또한 적지 않은 곳에서 차이도 보인다. 그것을 표로 제시한다. 『동의보감』에 많이 인용된 『의학입문』, 『의학강목』, 『득효방(得效方)』 등은 편찬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동의보감』과의 평면 비교는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의학입문』과 『의학강목』, 『증류본초』의 편제 중 『동의보감』의 편제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이 표에 포함시킨다. 표1.『동의보감』을 비롯한 주요 의서의 편제 비교
위의 표를 보면, 『동의보감』은 그 어떤 의서보다도 포괄하는 의학의 범위가 넓으며, 범주가 정연하다. 이런 특징은 여기에 제시되지 않은 다른 의서를 비교할 때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동의보감』 105문의 편제는 『의방유취』나 『증류본초』처럼 기존의 병증을 정리하는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만병회춘』 같은 신(新) 의서의 몇몇 범주를 받아들이는 한편, 옥과 석같이 기존 범주를 둘로 나누거나 제상, 제창의 경우처럼 기존의 범주를 통폐합하기도 했으며, 신형문, 신문, 변증문, 수부문, 토부문 등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기도 한 결과물로서 이전 의학을 충실하게 종합해냈다. 이 105문은 개념적으로는 독립적인 범주이지만, 각 문의 분량은 가지각색이다. 한문(寒門)과 초부문(草部門)은 분량이 많아 2권으로 나눈 반면, 조문(燥門)과 옥부문(玉部門)은 고작 네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것 때문에 『증류본초』에서는 이를 따로 1문으로 치기보다는 옥석류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허준은 분량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립성을 중시하여 독립적인 문을 신설했다. 그것은 자신이 파악한 의학의 개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2) 소분류_ 세밀한 2807개 세목 설정
명대에 나온 동종 성격의 의서들과 비교할 때, 『동의보감』이 형식적으로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세목을 많이 두었다는 점이다. 『동의보감』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이전의 종합 의서인 『의학입문』, 『단계심법(丹溪心法)』, 『득효방』, 『의학강목』, 『의학정전(醫學正傳)』, 『만병회춘』, 『고금의감(古今醫鑑)』, 『직지방(直指方)』과 비교할 때 이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 예로 여기서는 비교적 후대에 하나의 독립된 병으로 설정되기 시작한, 이동원(李東垣)이 중시한 ‘내상(內傷)’ 문을 들어 이 점을 살피도록 한다. 『동의보감』에서는 내상문에 대해 식약요병(食藥療病) 등 53개의 세목을 두었으나, 『의학입문』은 12개, 『의학강목』은 1개, 『의학정전』은 4개, 『고금의감』은 10개의 세목에 지나지 않는다. 『의학정전』에는 논(論), 맥법, 방법, 의안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고금의감』에는 내상의 맥, 증, 치, 방, 식상의 맥, 증, 치, 방, 상주(傷酒)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학입문』의 경우 내외상변, 내상변신찬, 비위허실전변론, 내상기포노권총방, 보익, 조리, 승산, 분소내습, 부인, 소아, 외과, 내상음식적체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과 달리 『동의보감』의 구성은 한결 다양한데, 무려 53개 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금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본다는 의미에서 여기에 제시한다.
표2.『동의보감』의 내상문 세목 여기서 병의 원인, 맥법, 병의 증상, 병의 치료법, 처방 등으로 구성된 점에서는 이전 의서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그것을 훨씬 세분해서 다룬 점은 기존의 의서와 다르다. 세목만 훑어보아도 관련 내용이 즉자적으로 파악된다. 그것을 조목별로 살피도록 한다. ① 내상을 치료하는 가장 큰 원칙: 음식과 약을 써 병을 고치는 것에 대해 말한 데 이어, 음식이 생명을 유지하는 근본으로서 그 정미로운 것이 음기와 양기가 되어 몸을 지키지만 음식에 상하거나 피로에 상하게 되면 내상이 됨을 말한다. ② 내상을 진단하는 법 ③ 내상의 하나인 식상의 증상과 두 가지 치료법(食傷消導之劑과 食傷補益之劑): 식상 중의 한 형태인 주상(酒傷)을 자세히 살피면서 음주 금기와 주독이 잘못되어 온갖 병을 일으키는 위험을 말하고, 술병을 고치는 방법과 술에 취하지 않도록 하는 처방을 밝힌다. 식상에 이어 노권상(勞倦傷)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이 내상으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인지 외감으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인지 구별해야 함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어서 오한, 오풍(惡風), 발열, 신통(身痛), 한열(寒熱), 기력, 수심(手心), 번갈煩渴), 구미(口味), 비식(鼻息), 언어(言語), 맥후(脉候) 등을 구별해야 함을 말한다. 다음으로 노권상을 고치는 방법을 서술한다. ④ 내상과 비위(脾胃) 사이의 관련성: 내상은 비위(脾胃)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內傷病脾胃虛實, 內傷脾胃則不思食不嗜食). ⑤ 기타 내상의 여러 증상: 식후의 피곤한 증상, 음식을 먹지 않아서 원기가 손상되는 증상, 내상이 초기에는 열이 심하나 나중에는 추워하는 증상에 대해 말한다. ⑥ 내상이 심해져 생기는 병증: 탄산토산(呑酸吐酸), 조잡(嘈雜), 오뇌(懊憹), 트림[噫氣], 열격(噎膈)과 반위(反胃) 등의 증상 등이 있다. ⑦ 내상 치료법: 마음을 안정시키고 비위의 기운을 잘 조절해야 한다. 그것을 조리하는 각종 방법이 있다. ⑧ 내상과 함께 생각해야 할 병: ‘오미가 지나쳐서 병이 된 것[五味過傷爲病]’, ‘기후와 풍토에 익숙하지 않아 생긴 증상[不伏水土病與內傷同]’, 식궐(食厥), 식적류상한(食積類傷寒) 등이 있다. ⑨ 내상을 조리하는 각종 방법: 보약과 내상을 치료하기 위한 토(吐)법과 하(下)법 등이 있고, 각종 금기와 한 가지 약으로 고치는 방법[單方]과 침구법도 있다. 여기서 병의 원인, 맥법, 병의 증상, 병의 치료법, 처방 등으로 구성된 점에서는 이전 의서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그것을 훨씬 세분해서 다룬 점은 기존의 의서와 다르다. 세목만 훑어보아도 관련 내용이 즉자적으로 파악된다. 세목 설정의 관건은 증상과 치료법 등을 세밀하게 파악하여 핵심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세분화해서 파악한 것은 적절한 구절로 표현되어 즉각적으로 그 내용 파악이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내상병에 대해 쓴 표현을 보면, ‘음식과 약으로 병을 고친다[食藥療病]’, ‘음식이 목숨을 기르는 근본이 된다[水穀爲養命之本]’, ‘음식의 정미로운 부분이 음의 영혈과 양의 위기가 된다[水穀之精化陰陽行榮衛]’, ‘내상병의 비위가 허하고 실한 것[內傷病脾胃虛實]’, ‘식적 증상이 상한병과 비슷한 경우[食積類傷寒]’, ‘음식으로 내상이 생겼을 때 설사를 시켜야 하는 경우[內傷飮食宜下]’ 등 소제목만 봐도 내용 파악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총 53개로 된 세목이 각각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그것을 연결해서 보면 내상문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세밀한 세목 표현 방식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일단 『의방유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0종 문헌을 모은 『의방유취』의 세목은 2781개다. 제풍문(諸風門)을 예로 들면, 『의방유취』에서는 총 12권에 걸쳐 풍병에 관한 내용을 실었는데, 중복을 제외한 세목은 246개 항목으로서 『동의보감』의 59개보다 네 배 많은 내용이다. 그렇지만 『동의보감』이 『의방유취』의 표제를 빌려온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둘 사이에 차이가 크다. 『의방유취』의 경우, 세목이 따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분문 유취의 대상이 되는 책의 목차 수를 단순히 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의보감』의 방식은 거꾸로다. 세목으로 항목을 세분화한 후 거기에 인용 대상이 되는 문헌의 해당 내용을 찾아 모아놓았다. 물론 『동의보감』이 『의방유취』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 부분도 있다. 도인법, 침구법, 식치(食治)라는 세목이 그러하다. 『의방유취』처럼 『동의보감』도 이 세 표제를 채택하여 많은 문(門)에서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의방유취』로부터 죽을 증상과 살 증상, 난치와 불치에 대한 세목도 받아들여 쓰고 있다. 단, 제풍문 진맥법의 경우는 『의방유취』에 없던 기준인데, 『의학강목』 등의 명대 의서에서 제시한 방법을 『동의보감』에서도 채택한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이런 방식으로 세목 2,807개가 105개문에 나뉘어 배열되어 있다. 각 세목을 이루는 내용 배치는 다음과 같은 일관된 원칙을 보인다.(주12) 1) 해당 문이 다루는 병의 원인에 대한 논의를 제시한다. 2) 각종 증상과 원인을 말한다. 3) 맥의 특성을 밝힌다. 4) 각 증상에 따른 구체적인 치료법과 처방을 제시한다. 5) 또 재발을 막기 위한 방법과 환자의 식이를 제시한다. 6) 해당 병 전부를 통치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한다. 7) 고칠 수 있는 증상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린다. 8) 후유증을 밝힌다. 9) 해당 병증에 대한 단방과 도인법, 침구법, 기양법, 금기 등을 제시한다. 모든 세목이 위 사항을 다 담는 것은 아니고, 병증의 성격에 따라 출입이 약간씩 다르다. 이렇듯 일관된 계통성에 따라 상세한 세목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어느 한 문에 속한 세목을 훑는 것으로 그 문의 내용을 대강 파악할 수 있다.그것이 한데 모인 서목(書目)을 일람하면 『동의보감』이 다루는 내용 전반에 대해 일목요연한 파악이 가능하다. 거꾸로 환자는 자신이 앓는 병증에 가장 가깝게 해당하는 내용을 세목을 검토하면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점은 『동의보감』이 이전까지 나온 의서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이다. 실제로 『동의보감』은 목차를 2권씩이나 두어 이 점이 잘 드러나게 편집되어 세상에 나왔다. 허준도 자신의 작업을 꽤 만족스러워 했다. 『동의보감』 집례에서 “이제 이 책을 펼쳐보기만 하면 길흉과 경중이 거울에 하얗게 드러날 것이므로 『동의보감』이라고 이름을 붙인다.”고 했다.(주13) 동아시아 의학 역사의 유장한 흐름에서 볼 때, 『동의보감』은 일찍이 그 어떤 의서에도 보이지 않던 위와 같은 통일된 의학의 모습을 갖췄다. 후대의 일본과 중국의 의학계에서도 이 점을 높이 칭송했듯, 그가 (한)의학 체제이라는 거대한 의학의 전범을 제시한 것이다.
3) 일목요연한 책의 형식
『동의보감』은 책의 형식적인 체제도 매우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 편, 문, 세목, 의학 이론과 처방 등으로 구성된 내용이 효과적으로 읽히기 위해서는 책의 면 구성과 목차 제시를 신중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동의보감』의 면 구성을 서지학적 전문 용어로 표현한다면, 판식(板式)은 네 테두리가 2줄로 되어 있으며[사주쌍변], 테두리 반쪽[반곽]의 길이가 세로 26.5㎝, 가로 16.6㎝이다. 본문과 본문 사이에는 선이 그려져 있으며[유계], 한 페이지는 10개의 칸[항]으로 구성되며 각 행은 두 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단에는 최대 21자가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책 가운데 위, 아래에는 세 개의 잎사귀 무늬를 가진 어미[내향삼엽화문어미]가 있고, 어미 상단에는 책제목인 『동의보감』과 「편명』과 권수가 적혀 있으며, 어미 하단 쪽에는 장(張)수가 적혀 있다. 이처럼 『동의보감』은 글자를 많이 넣을 수 있도록 책자를 크게 만들었다. 1면에 최대 글자 수는 360자 수만큼 들어간다. 초간본 『향약집성방』은 최대 270자이며 조선판 『증보만병회춘』은 최대 242자, 『의학입문』은 최대 360자다.(주14) 1칸에 조그만 활자 2행을 배치할 때에는 활자를 작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판을 짤 때 어려움이 발생한다. 대신에 종이를 크게 절약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밖에 『동의보감』 책자 형식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다음 네 가지 편집 방식을 구사했다. 첫째, 대·중·소 3종의 활자를 써서 표제, 의학 이론과 처방, 인용서를 구별했다. 대활자는 편명, 저자, 문명(門名), 세목 표시에, 대활자의 2분의 1 크기의 중활자는 본문 서술에, 중활자의 2분의 1 크기의 소활자는 인용문헌 표시에 사용했다. 둘째, 글자 들여쓰기 방식을 통해서 편명, 저자, 문명, 세목, 부분표제, 처방, 본문 등을 구별했다. 편명, 저자는 들여쓰기 없이, 문명과 세목은 두 글자, 세목에 속한 부분 표제와 처방은 한 글자, 본문 설명은 두 글자를 들여 썼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목, 처방명, 의학이론과 처방 구성물, 인용문헌 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조선 인쇄술의 뛰어난 편집기술을 발휘한 것이다. 셋째, 목차 부분에서도 들여쓰기 방식을 통해 편명, 문명, 세목, 부분표제,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구별토록 했다. 편명과 문명은 대활자로 썼지만, 세목과 처방은 중활자를 쓰면서 상·하단 양쪽에 배치하면서 부분 표제와 처방은 두 글자를 내려 썼다. 넷째, 향약은 한글 활자를 써서 구별했다. 「탕액편」의 경우에는 본초의 부분인 경우에는 한 글자만 내려 써서 표시했으며, 향약재인 경우 본문 활자와 같은 크기의 한글 활자를 써서 약 이름을 표기하여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했다. 한글로 본초명을 표시한 책은 『동의보감』이 최초다. 반면에 당약이 경우에는 테두리 밖 위쪽에 ‘당(唐)’이라고 새겨 해당 약재가 중국 수입품임을 분명히 했다.
6. 사족(蛇足)
이런 의학 체계는 의학의 임상 능력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의학을 메타적인 시각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고도의 자연관과 생명관이 뒷받침되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허준은 비단 의학 내용뿐만 아니라 도가와 유가의 저작을 섭렵함으로써 이러한 혜안을 얻었고, 그것을 토대로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엮어냈다. 『동의보감』이 다른 의서와 달리 사상서의 느낌을 풍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의학을 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으며, 그 새로움은 한 차원 높은 데서 거시적으로 의학을 정리할 수 있는 허준의 사상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준의 의학적, 사상적 능력은 그의 자질이 총명하고 출중한 데 일차 기인하겠지만, 15세기 세종대 이후 본격화한 의학 능력 배양과 16세기 조선 사상계의 난숙함이 그 배경으로 깔려 있다. 허준의 문장력을 언급 안 할 수가 없다. 문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허준은 과감하게 축약 정리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책이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서술되는 특징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동의보감』 서문에서 이정구(李廷龜)가 “이 책은 고금의 서적을 포괄하고 제가(諸家)의 의술을 절충하여 본원(本源)을 깊이 궁구(窮究)하고 요긴한 강령을 제시하여, 그 내용이 상세하되 지만(支蔓)한 데 이르지 않고 간약(簡約)하되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주15)라고 칭찬한 구절이 이를 나타낸 것이다. 원 인용처의 글과 비교할 때, 적어도 읽는 맛으로 볼 때에는 『동의보감』이 더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동의보감』에 보이는 이런 과감한 취사선택의 방식은 유학 분야에서 이황이 주자학을 절요(切要)한 방식과 매우 흡사한 측면이 있다.(주16) 당시 조선 학자들의 유력한 치학(治學) 방법을 허준도 공유했으며 그것을 『동의보감』의 저술로 표현해낸 것으로 추정코자 한다. 아쉽지만,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허준에게까지 이르는 조선 의학계, 사상계의 동향과 허준의 삶과 의술 내용은 오늘 발표에서 포함시키지 못했으며(주17) 이 부분은 토론 시간을 기약한다.
주석
주1『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의보감」 항목(온라인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이 강의 내용은 졸저, 『동의보감과 동아시아의학사』, 들녘, 2015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주2 1991년에 보존 상태가 뛰어난 『동의보감』 초간본 3종(국립도서관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서울대 규장각 소장품)을 보물(1085, 1085-1, 1085-2)로 지정했다가, 2008년에 각각 보물 제1085-1호, 보물 제1085-2, 1085-3으로 변경했다. 이 3종은 2015년 6월 문화재적 가치와 세계적 위상을 고려하여 국보(국보 제319-1호, 제319-2호, 제319-3호)로 승격되었다. 주3 梁永宣ㆍ黃英華, “中國對『東醫寶鑑』的認識和硏究”,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살펴본 동아시아 의과학 문명 전개에 대한 비교 연구 콘퍼런스 발표집, 2012.11, 103쪽. 이후 20세기 이전까지 10여 판본이 더 나왔고, 현재까지 30여 종의 『동의보감』이 중국에서 찍혀 나왔다. 위의 자료집 103~104쪽을 볼 것. 단, 타이완의 경우에는 허준의 『동의보감』과 함께 신재용의 『동의보감』 등 현대 저작 다수가 포함된 것이다. 주4 梁永宣ㆍ黃英華, “中國對『東醫寶鑑』的認識和硏究”,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살펴본 동아시아 의과학 문명 전개에 대한 비교 연구 콘퍼런스 발표집, 2012.11, 103쪽. 주5 방동인, 『향토사연구자료총서』 1, 한강사, 1994, 247쪽. 주6 이익, 『성호사설』 제28권, 시문문(詩文門), 무경과 경전(武經經傳).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 원문 27b~28a. 주7 정조, 『홍재전서』 제179권, 군서표기(羣書標記) 1, ○ 어정(御定) 1 수민묘전(壽民妙詮) 9권. 민족문화추진회,『한국문집총간』 267, 2001, 494b. 주8 박지원, 『연암집』 권15, 「별집」, 열하일기, 구외이문(口外異聞).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252, 2000, 296a~296b. 주9 홍석주 원저/리상용 역주, 『역주 홍씨독서록』, 아세아문화사, 2006, 218~230쪽. 주10 홍석주 원저/리상용 역주, 『역주 홍씨독서록』, 아세아문화사, 2006, 231쪽. 주11 이덕무, 『국역 청장관전서』 4, 민족문화추진회, 1997, 192쪽. 주12 신동원, 『조선사람 허준』, 205~206쪽 참조. 주13 허준, 『동의보감』 권3, 「내경편」 권1, 「집례」, 1b. 주14『만병회춘』은 1면에 최대 11행 21자(빈칸 1자 제외) 해서 242자, 『동의보감』은 20행 18자(빈칸 2자 제외)로 360자, 초간본 『향약집성방』의 경우 15행 18자로 270자다. 『동의보감』과 『의학입문』는 대활자의 절반 크기인 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1면에 들어가는 정보량이 증가한다. 단, 『동의보감』의 경우 계산하지 않은 여백에 약간의 대활자가 배치되기 때문에 글자 수가 다소 추가되며, 『의학입문』의 경우에는 중요한 의학이론 부분에는 대활자를 써서 2행이 아니라 1행으로 구성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활자 수가 약간 감소한다. 주15 허준, 『동의보감』 권1, 『동의보감서』, 2b. 주16 2014년 8월 14일 대구에서 열린 한 국제 세미나에서 『동의보감』에 관한 내용을 한형조 교수와 나눈 대화이다. 주17 이에 대해서는 졸저, 『동의보감과 동아시아의학사』, 들녘, 2015, 35~154쪽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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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표1]과 [표2]의 '바로가기'를 바로 잡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