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출신의 맥그린치 신부가 25세에 사제서품을 받고 선교사로 처음 발령이 난 곳은
전쟁이 한창인 1953년의 한국이었다. 이름조차 낯선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그는 다시 제주도로
보내졌다. 배를 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지독한 뱃멀미로 녹초가 된 맥그린치 신부의 눈에 제주도는
그야말로 환상의 섬이었다. 하지만 제주도에 발을 붙이자마자 그 환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제주의 중산간 지대에 있는 부임지 ‘한림’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처음부터 성당이란 것은 없었다.
지난 1년간 목포, 순천, 소록도, 보성, 벌교 등지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신앙의 힘을 전하는 게 사제의 소명이었지만 제주는 사정이 달랐다. 6·25 전쟁과 4·3 사건을
거치며 가난과 고난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주민들에게 선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제주 사람들 진짜 가난하게 살았어요. 그토록 가난하게 살면서도 나에게 보리밥도 가져오고
달걀도 갖다 줬어요.”
맥그린치 신부는 외부인에게 퉁명스러운 제주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았고 그 어느 지역에서 만난
이들보다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자신감이 생긴 신부는 고국의 가족과 친지,
교회, 독일 천주교 주교단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고 그들이 보내준 돈으로 우선 땅과 돼지를
사서 길렀다. 돼지가 불어나자 1959년 4H 클럽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양돈기술을 가르치고
돼지를 분양했다. 1년 뒤 2배수의 종돈(種豚)으로 갚는 조건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돼지 신부님'이라 불렀다.
신부는 또, 사방에 놀고 있는 땅을 활용할 방법을 찾았다. 목축이었다. 이렇게 좋은 땅이 많은데
왜 소를 바닷가에서 키우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일본사람들이 다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목초를 심어 소를 키우는 것도 일본 사람들이 다 실패했으니 안 된다는 말뿐이었다.
그가 본 제주도는 영국의 지배에 시달렸던 조국 아일랜드와 많이 닮아 있었다. 자신의 조국이
독립 후 축산업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해 성공한 사례는 제주도에서도 가능해 보였다. 그는 사제복을
걷어붙이고 농민들과 함께 버려진 풀밭을 개간한 뒤 소와 양을 키웠다. 유명한 수의사였던
아버지와 집에서 경영한 목장에서 배운 기술이 큰 도움이 됐다. 1961년 11월, 제주 이시돌
목장은 그렇게 출발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주민들이 기른 돼지가 1만 마리를 넘어서자 직접
일본, 홍콩 등지로 나가 발로 뛰며 수출길을 열었다. 주민들이 마음 놓고 가축 생산에 집중하려면
판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도에는 이미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만든 국립목장이 있었다. 지금의 송당목장이다.
식량 자급과 농가소득 증대사업으로 축산에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 국립목장의
관리 실태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1966년 뉴질랜드를 방문한 기회에 겨울에도 소들이 목초를
뜯고 있는 것을 목격한 박 대통령은 귀국하자마자 농림수산부 장관에게 목초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1966년부터 68년까지 정부에서 조성한 초지 대부분은 실패작이었다. 정부는
1969년부터 9월 5일을 ‘목초의 날’로 정해 온 국민에게 초지 개발의 중요성을 알리고
각 시도에는 초지 조성 시행을 지시하는 등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972년 2월 11일 제주도 도정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만일 축산이
안 되면 앞으로 고기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할 형편”이라면서 축산 장려를 강도높게 촉구했다.
그때까지도 대통령은 이시돌 목장의 성공을 알지 못했다.
1972년 6월 5일 맥그린치 신부에게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월간 경제동향 보고회에서
신부가 목초개량사업의 경험담을 보고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제주도에 갈 적마다 목초를
가꾸어야만 제주도의 축산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왔는데 우리 기술자, 학자들은 목초재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하고 “앞으로 도내의 농고, 농대생들은 1년에 한 번씩
방학을 이용해서 의무적으로 이시돌 목장에서 실습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맥그린치 신부의 공로를 인정해 석탑산업훈장을 수여하고 이시돌 목장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시돌 목장의 수익금으로 양로원, 요양원, 병원, 호스피스 복지원과
어린이집, 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주민들에게 영농과 축산기술을 가르치고 목축업을 장려해 한국 최대의 목축지를 만들어 제주도의
기틀을 세운 맥그린치 신부는 한국 축산업의 중추역할을 하며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의 조국
아일랜드는 한국에서 반세기 넘게 선교와 사회사업을 펼친 그에게 2014년 10월 30일 아일랜드
대통령상을 수여했다.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의 "대통령의 특별한 만남">
- [출처] [재한외국인의 삶]
- 받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