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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을 세우라
(신명기 22:8)
신명기를 보면 우리 삶의 세세한 규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십계명에 대한 구
체적인 적용입니다. 신명기 22장 8절은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제 6계명을 구체화
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농사도 짓고 자기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설계한 자기 집을 지어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
데 하나님께서는 집 한 채를 건축하더라도 제 멋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서 사람이 떨어져 다치
는 일이 없게 하고, 만약 자기 집 지붕에 난간이 없어서 사람이 떨어져서 다치거나 목
숨을 잃게 된다면 그 피 흘린 죄는 실수해서 떨어진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난간
을 만들지 않은 집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붕은 한국의 기와지붕이나 초가지붕처럼 곡선이 있는 지붕이 아니라 평
평한 지붕입니다. 지붕이 평평하기 때문에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중요한 생활공간이
됩니다. 낮에는 지붕에 올라가서 모임도 갖고, 때로는 아이들이 지붕에 올라가서 운동
도 합니다. 또 밤에는 지붕에 올라가서 별을 바라보며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삶의 일부인 지붕에 난간이 없다면 아이들이 놀다가 떨어질 수도 있고, 어른들이
라도 발을 헛디뎌서 큰 사고를 당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집을 지을 때에는 거실
이나 침실, 부엌과 같은 안전한 곳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언제나 위험요소를 안고 있
는 지붕에 더 큰 신경을 쓰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붕에 난간이 없다면 마
음이 매우 불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압 평야에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세
심한 규례를 미리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준비성이 많으시며 미리미리 교육하시는 자상
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인류는 마치 어
머니가 없는 존재인 양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아버지 같은 엄
격함과 동시에 어머니 같은 자상함과 세심함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
다. 신명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버지 같은 하나님보다는 자상하시고 세심하게 돌보
시며 걱정하시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에 살다가 슬픔과 고통
을 겪고 방황하게 되면 보통 우리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여
러분의 마음에 슬픔과 외로움과 고통이 있으시다면 어머니 품 같은 하나님의 품에 안
겨서 기도하시고 위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규례에 나타난 세 원리
본문의 규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분명한 세 가지 원리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
명은 고귀하고 신성합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이 지붕에 올
라갔다가 난간이 없어서 고귀한 생명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
의 생명이 고귀하지 않다면 굳이 지붕에 난간을 만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께서는 제 6계명을 제정하셔서 사람의 생명을 신성하고 존귀한 것으로 여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비인간적인 이기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집을 건축하
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내 돈 가지고 내 집 건축하는
데 누가 참견할 수 있어? 난간은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만들기 싫으면 관두는 것도
내 맘이지. 난간 만들 돈이 있으면 지붕을 더 아름답게 꾸며서 식사도 하고 쉴 수도
있는 공간으로 활용 하는 것이 낫지. 나는 지붕에 올라가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
이니 상관없어. 또 친구나 이웃을 초청할 일도 없고 혹 저희가 와서 떨어져도 자기 책
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거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 살 생각으로 집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집을 짓
고 어떻게 자기 혼자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죽거나 집을 팔면 다른 사람들이 그
집에 살게 될 것이고, 만약에 이웃을 초청하면 이웃과 함께 집을 사용하는 셈이 될 것
입니다. 이와 같이 집은 내가 지을지라도 공공성을 가집니다.
우리 성도들은 비인간적인 이기심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먹어도 나 혼자 먹
고, 살아도 나 혼자 살고, 놀아도 나 혼자 논다’는 고립주의적 이기심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
지라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만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안고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집 지붕에 올라갔다가 난간이 없어서 떨어져 죽으면 피 흘
린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에 책
임을 지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아폴로 눈병
에 걸렸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사람이 눈을 비빈 손으로 아무거나 만져서 다른 사람에
게 아폴로 눈병을 퍼뜨린다면 이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자신에게 남의 생명에 대한 책
임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건강관리를 하고 병을 옮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내 생명이나 남의 생명이나 모두 신성하고 존귀한 것이며, 인간은 자기 생명
만 귀중히 여겨서는 안 되고 무한 책임은 질 수 없지만 남의 생명에 대해서도 어느 정
도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난간 규례의 원리입니다. 폭탄으로 비행기
를 테러해서 그 비행기에 탄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모두 죽여 버리겠다는 테러범들은
하나님의 난간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려는 사람들입니다. 몸에 해로운 첨가물을 음식
에 넣어서 판매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난간을 무너뜨리고 6계명
을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간의 사행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사행심이 많
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게임이 고스톱이라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
습니다. 이와 같은 사행심이 지붕 안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난간을
넘어서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바다이야기’까지 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
니다. 바다이야기는 국가가 국민의 사행심을 조장해서 결국 난간을 넘어버리고 만 경
우입니다. 바다이야기를 통해 많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바다이야기로 도박을 하다가 빚이 일억이 되자 이 일로 부부싸움을 하는 중에 그만 홧
김에 아내를 살해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지붕에 난간을 세우지 않아서 이런 결과
를 초래한 것입니다. 정부는 약간의 행정실수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난간을 만들지 않
은 이 사회는 결국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붕을 만들면
반드시 난간을 세우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속에 새겨서 그 성품을 이루
어가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 영혼의 생명을 위한 난간
사람의 생명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비오스(bios)라고 하는 육체의 생명은
70년, 혹은 80년 정도 지속됩니다. 그러나 80년이 넘어가면 누구나 준비를 해야 합니
다. 육체의 생명은 반드시 끝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육체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혼의 생명도 있습니다. 영혼의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zoe)라고 합니다. 영혼의 생명은 영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
람은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 두 가지 모두를 가지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
지 않는 사람은 육체의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영혼의 생명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것
이 신자와 불신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이유는 단지 윤리적으로 바르고 착하게 살라는 교훈 이상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인 영혼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귀한 육
체의 생명을 위해 난간을 세우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생명도 고귀하
기 때문에 영혼을 위한 여러 가지 난간도 세워주셨습니다.
첫째로 기독교 교리를 공부할 때에 우리는 갖가지 떨어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예
를 들어서 ‘예정론’을 생각해봅시다. 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받을 영
혼들을 미리 사랑하시고 택하여 예정하셨고, 미리 예정하신 영혼들에게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주셨다는 교리입니다. 비이성적인 신비
한 교리 같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교리입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
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정론을 믿되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 예정되었으니 전도할 필
요도 없고 선교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침례교 선교사인 윌리엄
캐리가 1792년에 영국에서 인도 선교사로 파송될 때에 지방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
습니다. 캐리는 인도에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으니 우리가 가서 전도해야 된다고 말씀
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어떤 나이 드신 목사님이 유명한 말씀을 남겼
습니다. 이 목사님은 윌리엄 캐리를 향해 “Young man! Sit down!(젊은이. 앉게)”이
라고 소리치고는 “인도에 하나님께서 택한 영혼이 있다면 자네가 가지 않아도 저절
로 믿게 될 걸세”라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고등칼빈주의’라는 잘못된 신학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예정론에서 사람들이 엉뚱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을 세워두셨습
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씀하셨고,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
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정된 사람은 전도라
는 미련한 방편을 통해서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정이 되어 있다
고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부지런히 전도하고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
님의 난간입니다.
또 ‘성도의 견인(堅忍)’을 생각해봅시다. ‘성도의 견인’이란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잃어버릴 수 없다’는 교리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지미 스웨거트 목사
가 설교하는 패밀리 워십 센터의 예배에 자주 참석을 했는데, 이 목사님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적나라하게 공격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옳은 것
이지 그 목사님의 말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요, 한
번 얻은 영생은 영원한 영생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옳은 교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는 천국 갈 티켓을 따 놨으니 이제부터는 아무렇게나 살아
도 천국은 내 것이다’라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혼의 난간을
잃어버리고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
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
고 구원 받은 사람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난간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
해 세워두셨습니다.
또한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호리라도 있는 죄인은 천
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의인만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이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을까요? 의롭게 산다고 해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행위로 의인이 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죄 값을 갚아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는 덮인바 되고 아무리 죄
많은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교리가 바로 이신득
의의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
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선행이
나 윤리적인 고결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
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행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는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
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
은 집을 세우고 야고보는 난간을 세웠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그
결과로서 의로운 선행을 하며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선행이라
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어떤 고귀
한 교리를 공부할지라도 추락하지 않도록 난간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공부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난간과 함께 공부해서 떨어지는 일이 없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큰 영적인 체험을 하거나 영적인 능력을 얻은 사람이라도 난간을 세워야 합니
다. 영계(靈界)의 거성(巨星)이 난간을 세우지 않아서 떨어지는 경우가 한국에도, 미
국에도 허다합니다. 역사상 사도 바울만큼 큰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
입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2장 2절을 통해 자신이 셋째 하늘로 이끌려가서 몸 안에 있
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스스로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고백하였습니
다. 사람이 기도하다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영혼이 쑥 올라가는 경우가 많습니
다. 교만이 시작돼서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얼마
나 우쭐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난간을 세워주셨습니다. 바울의 육신에 사단
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고후 12:7). 바울이 교만해지려고 하면 가시가 콕콕 찔러서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겸손해지게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은 난간 때문에 바울의 영혼
은 지붕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체험
을 했을지라도 난간을 세워서 교만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굳건히 세워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큰 물질을 얻어서 부유해져도 난간을 세우지 않으면 지붕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릇도 차면 넘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잔에 물이 조금밖에 없으
면 흔들어도 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득하면 조금 마셔야 합니다. 흐를 염려가 있
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목회하는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생 땅 가지고 농
사 밖에 지을 줄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행정도시가 들어서게 되어서 땅 값이 올라 졸
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걸음이 일자에서 팔자로 바뀌었습니다. 걸음만 바뀐 것
이 아니라 조강지처가 못생겨 보이기 시작하니 동네 다방의 아가씨들에게 대우받고 즐
기다가 그만 꽃뱀들을 만나서 망신을 당하고 죄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에는 마약을 먹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먹고 살만하니까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마약이 만연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가난할 때는 죄 지으려고 해
도 돈이 없어서 짓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난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돈이 생겼을 때 난
간이 없다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에게도 난간을 세워주셨습니다. 신명기 8
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부자가 되면 “이 능력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잃
어버리지 말고 기억 해야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장 17-18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
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물질이 많아졌다면 선한 사업에 부하시고 나눠주기
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힘으로 번 건데 왜 내 돈을 그런 곳
에 쓰라고 하느냐”고 따지지 마십시오. 그것은 난간에서 떨어지는 일입니다. 선한 사
업을 통해 부유해지고 그리고 그것을 나눠주기를 즐기면 그것이 난간이 되어서 그 물
질로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책임의 한계
말씀을 마치기 전에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의 책임을 지되 무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라고 명하신 난간은 기대도 쓰러지지 않을 정도
의 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난간을 세우라고 하셨지 지붕에 텐트 치고 침실을 만들어
서 이웃이 오면 거기서 아예 먹고 쉬고 놀 수 있는 위락시설을 갖추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생명에 우리가 책임을 지기는 하되 무한 책임으로 확
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너는 내 이웃이고 내 형제며 예수 믿는
사람이니 네가 내 인생 전체를 책임지라”고 강요받을 수는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무한대로 책임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책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난간만 세우면 되지 그 이상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습니다. 인생은 각각 책임지는 것입
니다. 피를 나눈 형제라도 서로에게 인생을 책임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집주인이 난
간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난간을 뛰어넘어 자살했다면 이는 집주인의 책
임이 아닙니다. 사람의 책임은 난간까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
나님은 난간 규례를 두어서 이웃뿐만 아니라 집주인도 보호하십니다
결 론
삶의 모든 영역에는 난간이 존재합니다. 넘지 못하도록 막기도 하고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도 하는 난간입니다.
가정생활에도 난간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난간을 세워야 합니다. “주일
에는 어떤일이 있어도 예배를 드려라. 십일조 생활은 온 가족이 모두 해야 한다. 하루
에 30분 이상은 온 가족이 모두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언제나 가지고 다니면서 하루
에 세장 이상은 읽어야 한다.” 이것이 가정을 유지시키는 난간입니다. 가정에 영적
인 난간이 없으면 자녀들의 신앙이 엉망이 되어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생활에도 난간을 세워서 교만한 마음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
다. 사회생활에도 난간을 세워서 지켜야 할 마지노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세워야 할 난간을 넘어가면 남도 다치고 나에게도 죄가 오게 됩니다. 영어로 죄를 표
현할 때는 ‘sin’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trespass’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trespass’는 ‘경계선을 넘어버렸다. 세워놓은 난간을 넘어버렸다’는 의
미입니다. 난간을 넘어가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생활, 사회생활과 신
앙생활의 난간을 다시 한 번 점검하시고 든든하게 세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피영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