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탐방코스 : (11-1구간)감동마을~섬바위~(11구간)가족테마공원~용담댐물문화관~구곡마을~장등마을~도라마을~중배실마을~하배실마을~망향의동산~안천소운동장(17.1km)
금강물길 탐방코스 : 가족테마공원~용담댐물문화관~구곡마을~장등마을~도라마을~중배실마을~하배실마을~망향의동산~안천소운동장(13.4km)
구곡마을을 지나면서 고원길은 13번 국도(안용로)를 버리고 두 시 방향의 좁은 길로 내려선다
우회하는 길로 내려가지 않고 그냥 직진하더라도 잠시 후 다시 고원길 탐방로와 만나게 된다
갈림길에서 2백여 미터를 내려오니 탐방로를 굳이 우회시킨 이유를 알겠다.
이곳은 오늘 걷는 구간 중 수면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용담호를 볼 수 있는 장소다
만수위가 되면 바로 발아래까지 호숫물이 찰랑이겠다
우횟길로 5~6백여 미터를 걸으면 고원길은 다시 13번 국도와 연결된다
13번 국도를 따라 장등마을 방향으로 이동한다
용담호를 따라 이어지는 13번 국도변의 가로수는 우리나라 토종 단풍나무로 조성되어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한다
구곡마을회관에서 15분쯤 걸으면 장등마을이 나온다. 거리로는 대략 1km 남짓 되는 듯하다
지도상에는 이곳이 '성황당재'로 표시되어 있으나 성황당은 보이지 않는다
장등마을 버스정류장
버스정류장 뒤쪽으로 국도에서 벗어나 장등마을 안쪽으로 진입하는 좁은 길이 있어 내려가려다 되돌아와 이정표를 다시 확인해 보니 그냥 국도를 따라 직진하란다
장등(長燈) 마을은 도로 아래쪽에 위치한다
원래의 장등마을은 용담댐 건설로 인하여 모두 수몰되고 현재의 마을은 이주민들이 새로 조성한 마을이다
수몰 전 마을 뒤로 산 등성이가 길게 뻗어 있어 '긴등' 또는 '진등'이라 하였다가 길 장(長) 자를 써서 장등(長燈)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진등에 있는 마을이다는 의미일 게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고향에서도 기다란 언덕을 '진등재'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국도를 따라가다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용담호
아래 지도를 참고하면 호수가 안쪽으로 들어온 지점이 수몰 전 장등마을이 있던 자리일 것으로 추정된다
수몰 전 장등마을 위치도
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난 호수의 모습은 황량함도 있지만 곡선의 아름다운 풍경을 맛볼 수도 있다
장등마을 버스정류장에서 3백여 미터를 걸으니 고원길 이정표는 국도를 벗어나 왼쪽길로 들어가라 안내한다
13번 국도를 벗어나 왼쪽 좁은 길로...... '도라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무심코 걷다가 탐방로를 벗어나 직진할 수도 있겠지만 13번 국도는 잠시 후 도라마을~중리마을~하리마을을 거쳐 돌아온 고원길과 다시 만나게 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쇠말봉(철마봉)
도라마을에 가는 길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쇠말봉'이다
지도에는 쇄마리봉으로 표기되었다
<쇠말봉 전설>
쇠말봉 정상에는 3개의 쇠로 만든 말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말머리가 마을을 향하고 있으면 1년 내내 재앙이 든다고 믿었다.
그래서 섣달 그믐날 밤에 쇠말봉 꼭대기에 올라가 말머리가 자기 마을을 향하지 않도록 돌려놓곤 했는데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말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입구에서 백화리 도라마을까지 2.1km 거리를 특별한 조망 없이 완만한 오름길로 계속 이어지는데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구간이다
입구에서 약 1km 정도를 올라오니 좌측에 축사와 민가 한 두 채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서나 나올 법한 야생의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다시 2~3백 미터를 더 올라오면 이런 풍경도 있다.
옛날 같으면 '주막'이 있어야 할 자리 아닌가?^^
꽃벵이 농장
청춘을 회복시켜 준다고 부연 설명까지 해놓았는데 '꽃벵이'가 무엇일까?
궁금하여 검색해 보니 꽃벵이는 '흰 점박이 꽃무지 애벌레'를 말하는데 우리가 흔히 '굼벵이'라고 부르는 애벌레란다
동양 최고의 의서 중 하나인 '동의보감' 탕액 편에 '흰점박이 꽃무지 굼벵이'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성질은 약간 차고 맛이 짜며 독이 있는 약재로 주로 악혈(惡血), 어혈(瘀血), 비기(痺氣), 눈의 군살, 눈을 뜨고도 못 보는 증세, 백막(白膜), 뼈가 부스러지거나 삔 부상, 쇠에 다쳐 속이 막힌 증세 등을 치료하며 유즙(乳汁)도 잘 나오게 한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오던 길을 뒤돌아 보니 또 하나의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망바우봉(475.4m)이라고 한다
13번 국도를 벗어나 안천면 삼락리와 백화리를 잇는 '백삼로'를 30여 분 걸어 올라오니 마을이 보인다
안천면 백화리 도라마을이다
도라마을 삼거리
도라마을은 지장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쌍교봉 능선에 에워싸인 분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쌍교봉 능선을 경계로 하여 능선 너머는 무주군 부남면에 속한다
도라마을 버스정류장
삼거리에서 고원길은 좌측길로 안내한다
고원길 진행 방향(도라길)
고원길은 산재되어 있는 도라마을을 빠짐없이 둘러보고 가게끔 이어진다
마을로 진입하였던 길(백삼로)은 버스정류장이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져 올라간다
이 길로 약 3백여 미터 올라가다 보면 도라마을을 돌아온 고원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도라(桃羅) 마을은 마을 주위가 전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풍수지리상 복숭아를 늘어놓은 형국이라 해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거리에서 좌측길로 1백여 미터를 진행하면 도라마을 회관이 나온다
이제 시골길에서 마을회관은 이방인들이 낯선 길에서 방향을 잡는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오지의 시골마을에도 신선처럼 풍류를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집 앞에 작은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조립식 정자를 들어앉혔다. 옆에는 물레방아까지 있고...
모양새가 조금 초라하면 어떠랴. 세상 걱정 다 덜어놓고 탁주라도 한잔 하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면 되는 게지~
근데 한 여름 뙤약볕에는 그늘이 없어 좀 덥겠다.ㅎ
고원길은 '특별히 볼거리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나?'고 투덜댈 정도로 마을 끝까지 돌려 놓았다
마을 끝 돌담 삼거리에서 고원길은 거의 U턴에 가깝게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왼쪽으로 진입하면 과거 도요지가 있었다는 '옹골'을 지나 무주군 부남면과 경계를 이루는 지장산~쌍교봉 능선을 만날 것이다
선답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도라마을 외곽으로 이어지는 이 길 주변에 동네 이름에 걸맞게 주렁주렁 매달린 복숭아와 뽕나무 오디가 풍성하였다고 하던데 지금은 삭막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라마을의 겨울 풍경은 다소 황량해 보이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멋스러움이 있다
건너편 산 아래로 조금 전 지나온 마을길(고원길)이 보인다
눈 쌓인 밭 너머로 보이는 봉우리는 조금전 도라마을로 진입하면서 보았던 '망바우봉'일 것이다
길 왼쪽으로는 대형 양계장(도원축산)이 자리 잡고 있다
고원길을 걸으면서 맨땅이 훤히 드려다 보이는 민둥산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산불 때문일까? 수종 개량이나 개발을 위한 벌목 때문일까?
도라마을로 진입했던 골짜기 방향으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봉우리는 '구봉산'으로 짐작된다
15분 정도 걸려 '도라길'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니 조금전 마을 앞 삼거리에서 갈라졌던 2차선 '백삼로'와 마주친다
이제 종착지인 '안천소운동장'까지는 3.9km가 남았고, 고원길은 '백삼로'를 따라 좌측 방향으로 이어간다
백화리 도라마을에서 중리(중배실) 마을까지 가는 길은 2차선 내리막 길로 이어진다
고원길은 도라마을을 벗어나 아스팔트 포장 내리막길로 8백여 미터를 내려오다 왼쪽 방향으로 꺾여 '중배실길'로 진입한다
중배실(중리) 마을로 진입하면서 하배실(하리) 마을 방향으로 펼쳐진 풍경이 시원스럽다
멀리 하얗게 눈 덮인 능선은 방향으로 봐서 진안군 상전면의 고산(좌, 875.8m)과 대덕산(우, 593.4m)을 잇는 마루금이 아닐까 싶은데 확실치는 않다
중리(中梨) 마을
중리마을이 속한 백화리(白華里)에는 이화낙지(梨花落地, 배꽃이 땅에 떨어짐) 형국의 명당이 있다 하며, 배꽃이 희므로 흰 백(白) 자를 써서 백화리(白華里, 華는 花와 통함)라 하였다고 전하는데
이화낙지(梨花落地)의 형국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중리(中梨)라 불린다고 한다
중리마을 고샅길
중리마을에는 토담집과 같은 오래된 집들이 많이 남아 있어 잊혀 가는 추억 속의 시골마을에 와 있는 듯하다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집도 눈에 띈다
슬레이트 지붕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지붕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으로 기억된다
요즘에야 1급 발암 물질인 석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 정부에서 보조금까지 지원하며 철거를 권장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초가지붕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의 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의 대표적인 본보기 사업이었다
그때는 깨진 슬레이트 조각에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 기름기가 쏙 빠져 맛있다며 석면 슬레이트 불판에 구운 고기를 즐겨 먹었는데도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걸 보면 세상사가 원리원칙대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보는 토석담도 정겹다
행랑채에 달린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금방이라도 삐~익 소리가 날 것만 같다
독거노인 행복방
지금까지 시골길을 걸으면서 마을회관이나 노인당이 아닌 독거노인을 위해 마련된 별도의 건물은 처음 본 것 같다
고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노인문제는 농어촌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고샅길을 빠져나오면 마을 어귀에 반듯한 건물의 마을회관(경로당)이 자리 잡고 있고...
마을회관을 지나면 맞은편에는 이화정(梨華亭)이란 현판을 단 정자가 서 있다
고원길 탐방로는 정자 앞으로 흐르는 개울의 둑방길을 따라 '하리마을'로 이어지지만 선답자들의 기록에 탐방로 벗어나 정자 뒤편으로 7~80 미터만 더 가면 진안군 향토문화유산인 '화산서원'이 있다는 정보가 있어 들렀다 가기로 한다
정자를 지나 낮으막한 언덕을 넘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멋진 노송 옆에 자리한 '효자 황민찬 정려각( 孝子 黃玟燦 旌閭閣)'이다
정려각은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세워 놓은 붉은 칠을 한 누각으로, 황민찬 정려각은 효자각(孝子閣)이다
황민찬(1876-1905)은 현령 황동규(黃東奎)의 아들로, 품성이 순하고 후덕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 우애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자신의 손가락을 상하게 하여 피를 내고, 이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었는데, 이에 하늘이 감동하여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이후 황민찬이 요절(夭折)하게 되자 고을에서 애석하게 여겼고, 이에 용담향교 유림들이 청원하여 1905년 정려가 내려졌으며, 동몽교관에 추증되었다
'화산서원'은 황민찬 정려각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의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담장 주변을 돌면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한다.ㅠ
화산서원(華山書院)
화산서원은 장수 황 씨 문중의 사당이다. 조선 전기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黃喜, 1363~1452)의 영정을 안치하고, 그의 차남 황보신(黃保身)과 5대손 황징(黃澄) 등을 배향하고 있다.
1922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970년에 중수되었으며 현재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앞쪽 3칸은 마루, 뒤쪽 3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정면에 '화산서원(華山書院)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고, 방에는 지방유형 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된 황희의 영정과 위패, 황보신과 황징의 위패 등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황희의 영정(퍼온 사진)
지방유형 문화재 제129호
서원 안에서 가장 낡게 보이는 건물은 서원의 필수 시설인 강당이라고 한다
밭을 사이에 두고 화산서원 맞은편에는 ‘열부 옥천육씨 정려(열녀각, 烈婦 沃川陸氏 旌閭)’가 있다.
육씨(陸氏) 부인은 임진왜란 때 남편 황대성(黃大成)이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자 몸종인 천개(天介)와 함께 상배실 앞 구례마을로 피난했으나, 왜군에 잡혀 욕을 당하게 되자 적을 꾸짖으며 몸종과 함께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1699년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본래 하배실 앞동산에 있었으나 1980년쯤 농로를 내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참고로 남편인 통정대부(通政大夫) 황대성은 임진왜란 때 수백 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군과 싸웠던 의병장으로, 일본에 포로로 압송된 뒤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부인 옥천 육씨가 순절한 것을 알고 뒤따라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화산서원과 효자각, 열녀각을 둘러본 후 다시 마을 앞 정자로 돌아와 고원길 탐방로를 따라 '하리(하배실) 마을'로 향한다
'하리마을' 가는 길
'하리마을'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천사(華川祠)의 강당건물인 학륜당(學倫堂)이다
학륜당은 낙안 김씨들이 덕망 있는 학자를 초빙하여 인재를 양성하던 곳으로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전면 4칸, 측면 2칸으로 마루 벽에는 화천사 중수기와 종친회 임원록 등의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화천사(華川祠)는 낙안 김씨 종중의 8대손 김빈길의 충의와 공덕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화천사에서 몇 발짝 내려가면 커다란 노거수가 보이고 맞은편에 하리마을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하리마을에는 버드나무 보호수가 있다고 하였다
멀리서 봤을 때는 앞에 있는 나무가 버드나무 보호수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버드나무가 아니다
보호수로 지정된 버드나무는 뒤에 초라하게 보이는 나무다
버드나무 보호수
진안군에 있는 54수의 보호수 중 유일한 버드나무라고 한다
한돌쇠라는 하인이 마을의 수호목으로 심었다고 한다
안내석에는 수령 152년(1982년 보호수 지정 시), 수고 20m, 둘레 4.5m라고 적혀 있다
하리마을회관
고원길은 하리마을에서 2백여 미터 지점에서 13번 국도를 건너 이어지다 다시 다리를 건너 오른쪽 방향으로 진행한다
오랜만에 다시 일행과 조우하고... 개울을 따라 이어가던 탐방로는 갑자기 숲 속길로 들어선다
탐방로는 숲길로 5분여를 들어가 숲 속에 있는 주택의 앞마당으로 이어지는데 지나가는 게 민망할 정도로 개가 사납게 짖어댄다
주택을 뒤로하고 '오얏고개'로 올라선다
오얏고개
'오얏'은 '자두'를 말함인데 주변에 자두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길 옆에 심어진 묘목이 자두나무인가?
오얏고개 정상에는 11구간 두 번째 인증 지점임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오얏고개 정상에 올라서니 오늘 탐방의 종착지이며 안천면의 행정 중심지인 안천면 노성리 보한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얏고개를 내려오다 뒤돌아 본 모습
오얏고개를 내려서니 오른쪽으로 용담호가 보인다
망향의 동산으로 오르다 뒤돌아 본 오얏고개 방향
노송 옆에 있는 비석은 수몰 실향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알았으나 내용을 보니 앞에 보이는 보한마을에 청주한씨 집성촌이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란다
망향의 동산에서 보는 보한(輔韓) 마을
보한마을은 청주 한씨가 텃자리를 잡은 곳인데 마을 이름인 보한(輔韓)도 한(韓)씨를 보필한다는 뜻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망향의 동산은 2001년 용담댐이 건설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수몰 실향민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용담댐 건설에 따른 수몰 현황 : 11개 마을, 498세대, 2,270명, 375,709평
망향탑
전망대
전망대 위에서 본 용담호.
아쉽게도 웃자란 주변 나무들로 인하여 용담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전망대 위에서 보는 보한마을
전망대 위에서 보는 망향탑
망향탑 뒤에는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비석군이 있다
망향의 동산에는 수몰지역인 안천면 삼락리 구곡마을에서 옮겨왔다는 지석묘(支石墓)도 있다
14시 52분 종착지인 안천소운동장에 도착하며 탐방을 종료한다.
5시간 50분 소요
첫댓글 황금폭포가는길 걸을때는 천지 삐까리가 황금이 들어가더니...ㅎㅎ
언제나 열공인 모습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게요.
7구간은 황금밭이더니 이번 구간에는 龍 사육장에라도 들어간 기분이었네요.ㅎ
수고하셨습니다
기억이 새록새록~~
감사합니다
저도 사진을 올리며 걸어 온 길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본답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앵글과 세세한 설명의 트레킹후기 조용한 아침 음악과 함께 다시 한번 길을 걸었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사진을 너무 늦게 올려 그날의 감흥은 많이 줄어들었네요.ㅎ
토담집과 슬레이트 지붕이 인상적이었지요~~~
요즘엔 토담집과 슬레이트 지붕은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데 중리마을에서 보고 옛 시골마을에 와 있는 느낌이었네요.^^
감사합니다. 토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