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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최고의 걸작 「난정집서(蘭亭集序)」, 신묘한 필법과 천하의 명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난정집서(蘭亭集序)」는 서예 역사상 최고의 걸작 「난정시집서(蘭亭詩集)」 서문(序文)이다. 이는 중국 진(晉)나라의 저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3~361)가 그의 나이 50세에, 난정(蘭亭)에서의 모임인 난정계회(蘭亭契會) 당시 지은 시를 묶은 문집의 서문에 쓴 글로, 모임의 성대한 모습을 묘사하면서 인생관을 피력한 서예 작품이다. 내용은 353년 3월 3일 난정에서 열린 시회에서 시를 짓고 서문(序文)을 쓴 일에 대한 이야기이며,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 불리며 28행 324자의 작품이다. 서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으로서도 가치가 높다. 현재까지 진본은 나타나지 않고 모두 임모본(臨模本)만 전한다.
근데 이 서문 문장이 너무나 명문(名文)이어서 1650여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는 일반 사람들도 똑같이 느끼는 ‘보편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문학적 자각 의식에 대한 지경을 넓힌 글로 평가된다.
「난정집서(蘭亭集序)」는 서법(書法)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천하의 명문이다. 대구(對句)와 반복이 조화롭고 리듬이 절묘하다. 또 고요한 서정성과 철학적 사유가 어우러져 동양의 미적 전형을 보여준다. 인생무상과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담겨있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감회와 자신의 감정을 살펴보면서 삶과 죽음, 존재와 시간이라는 인간 보편의 문제를 사유했다. 바로 죽음을 피할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지금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표현하는 듯하다. 정말로 “고개 숙이고 드는 사이에 한 세상(俯仰一世)”임을 알겠다. 이른바 ‘앙관(仰觀, 우러러 봄)’과 ‘부찰(俯察, 굽어 살핌)’은 심오한 진리를 깨닫기 위한 심미방법(審美方法)인 것이다.
○ 영화제 9년(서기 353년) 3월 3일, 당시 왕희지가 태수로 있던 회계군(오늘날 사오싱시, 저장성) 난정(蘭亭)에서 봄 정화 의식, 난정계회(蘭亭契會)가 열렸다. 이 행사 동안 42명의 문인들이 흐르는 시냇물 옆에 모여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를 열었다. 술잔을 물에 띄워 내려보내고, 술잔이 손님 앞에 멈출 때마다 시를 짓거나 아니면 술을 마셔야 했다. 그날 하루 동안 26명의 문인들이 총 37편의 시를 지었고, 왕희지는 그 자리에서 난정집서를 서문으로 삼아 완성했다. 원본 서문은 오래전에 소실되었지만, 먹으로 종이에 필사한 여러 복사본이나 석각본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한다.
왕희지의 서법(書法)은 평화롭고 자연스러우며 필세(筆勢)가 완곡하고 함축적이며 강건하고 수려하다. 또 세상 사람들이 “기러기처럼 사뿐하고 용처럼 맵시가 있고 가을 국화처럼 아름답고 봄 소나무처럼 무성하다. 마치 구름이 달을 가리는 것 같고 바람에 흩날리는 눈과 같다.”고 찬미했다. 고로 그의 「난정서(蘭亭序)」는 ‘행서(行書)의 용(龍)’이라 일컬어지는 천하의 명필이다.[여러 논평의 글을 인용함]
○ [최초의 곡수(曲水) 모임] 역사상 최초의 곡수(曲水) 모임 주최자는 왕희지로 353년 3월 3일 절강성 소흥(紹興, 회계)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그를 포함한 42명의 문사가 시회를 열었다. 이는 주나라 때부터의 오랜 풍습 수계(修禊)이다. 이날 난정에서 시를 두 수 지은이가 11명, 한 수는 15명, 시를 짓지 못한 이가 16명으로 이들은 벌주 석 잔을 마셨고, 좌장인 왕희지는 이 시를 모은 책의 서문을 썼다. 이 서문이 서예 사상 천하제일 행서로 칭하는 '난정서(蘭亭序)' 혹은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그 후 중국에 여러 개의 곡수가 건축되었고, 지붕을 얹어 그늘을 만들었기 때문에 정자[亭]란 이름을 얻었다. 현재 소흥의 난정에 가면 왕희지의 곡수 모임 흔적만 있고 곡수 주변에 자연석 돌로 앉는 자리만 배치되어 있어 원조가 무색한 실정이다.
◉ 「난정집서(蘭亭集序)」 내용 중에 "누군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에 감정을 기탁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아간다. 흥취와 애호는 천차만별이고, 성정의 고요함과 시끄러움도 각자 다르지만, 그들이 접한 사물로 기쁨을 얻었을 때는 잠시 우쭐함을 느낀다. 이에 기쁨과 만족을 얻으면 늙어가는 줄도 모른다." 감동적인 글귀다.
당 태종 이세민은 아들 고종에게 '천년 만년 후까지도 난정집서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여 태종이 사망할 때 함께 매장되었다. 또한 청나라 건륭제는 임모본(臨摸本)만을 모아서 '난정팔주첩'을 만들기도 했다. 단순히 글쓰기의 예술을 넘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아낸 난정집서는 동양 고전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난정집서는 왕희지의 글씨 중에 가장 유명하다.
마지막 글에 "비록 세상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겠지만, 감회를 일으키게 되는 이치는 한결같은 것이니, 후세에 이를 읽는 사람 또한 이 글에서 느끼는 바 있으리라.(雖世殊事异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于斯文)"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 글이 아니라, 삶과 죽음, 덧없음을 깨닫고 현재를 소중히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 [왕희지 약력] 왕희지(王羲之 303~361)는 산동성 임기 출신으로, 남북조 시절 북중국의 혼란 속에 남중국으로 피난 내려온 집안의 사람이었다. 자는 일소(逸少), 낭야(瑯邪)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린이현(臨沂縣) 사람이다. 아버지 왕광(王曠)은 동진 건국에 공을 세운 왕도(王導)의 사촌 동생이다. 그는 당시 현풍(玄風)의 영향을 받아 노장사상에 조예가 깊었으며, 도교적인 양생술(養生術)에 심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사답게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유람하며 산수자연(山水自然)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유유자적한 삶을 동경했다.
당시는 중국 삼국시대가 끝난 그런 때였다. 손권의 오나라,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가 사마씨의 서진(西晉)에 의해 다 무너졌지만 서진은 내부의 반란과 외부 5호의 침략으로 붕괴되어 북중국을 상실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황족 사마예가 317년 남경을 도읍으로 동진(東晉) 정권을 세운다. 동진 정권은 북에서 내려온 귀족들이 권력을 잡고 정권을 만들어 갔는데, 가장 대표적인 가문이 왕씨와 사씨 집안이었다. 이 집안을 동진 최고의 가문으로 만든 인물들이 바로 왕도와 사안이다. 바로 이 왕도 가문의 한 일원이 왕희지였던 것이다. 왕희지는 13세 무렵 난징으로 내려와 당시 동진 최고 권력자들이 거주하던 오의항(烏衣巷)에 머물며 풍족한 유년 생활을 보낸다.
그는 명문 출신이었으나 중앙정부의 관직을 구하지 않아, 351년(永和 7)에는 48세에 우군장군(右軍將軍)·회계내사(會稽內史)에 임명되어 회계군(會稽郡, 소흥) 산음현(山陰縣)으로 부임했다. 이 관직 이름에 의해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린다. 아무튼 부임 이듬해인 353년 3월 3일에 바로 그 유명한 난정계회(蘭亭契會)를 개회하여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쓴 것이다. 이후 산수를 유람하다가 절강성 승주시 금정에서 58세로 생을 마감한다.
● 다음 난정집(蘭亭集) 서문(序文) 「난정집서(蘭亭集序)」는 중국 동진 시대의 명필 서예가로 서성(書聖)이라 일컫는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작품으로, 문학적‧예술적‧철학적 완성도를 모두 갖춘 불후의 명문이다. 그는 왕람의 증손자로 우군장군(右軍將軍) 벼슬을 역임했다고 해서 '왕우군'으로도 불린다. 중국 역사에서도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는 고금의 으뜸으로 손꼽힌 사람이었고 후대에도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이 글은 대구와 반복이 조화롭고 리듬이 절묘하다. 대략 도입부, 전개부, 결말부 3단락(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또 고요한 서정성과 철학적 사유가 어우러져 동양의 미적 전형을 보여준다.
먼저 첫부분에선 난정(蘭亭)에서 계사(禊事)를 치른 봄날의 청명한 분위기와 자연경관을 사실적이면서 서정적으로 묘사했다.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서 인간의 기쁨과 평화를 찬미했다. 대표적 명구(名句)가 “하늘이 밝고 공기가 맑았으며 바람이 따뜻하여 화창하다(天朗氣清 惠風和暢)”이다.
두 번째 부분에선 인생무상과 인생의 유한함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즐거움에 잠시 만족할 뿐, 세월이 흘러가고 죽음이 다가옴을 자각하지 못한다. 대표적 명구(名句)가 “조금 전에 기뻐하던 것이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 한순간에, 이미 옛 자취가 되어버린다(向之所欣 俯仰之間 已爲陳跡)”이다.
세 번째 부분에선 과거의 감회와 자신의 감정을 살펴보면서 삶과 죽음, 존재와 시간이라는 인간 보편의 문제를 사유한다. 대표적 명구(名句)가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지금 우리가 옛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이다.
*「난정집서(蘭亭集序)」 한글 해석본*
영화 9년 계축년(353년) 늦은 봄 초순에 회계(會稽) 산음현(山陰縣, 現절강성 소흥현) 난정(蘭亭)에 모이니, 계사(禊事)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여러 어진 분이 모두 이르고 젊은이와 어른이 모두 모였다. 이곳은 높은 산, 큰 고개와 무성한 숲, 긴 대나무가 있고, 또 세차게 흐르는 맑은 여울물이 좌우를 비추며 띠처럼 둘러있어, 그 물을 끌어다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만들고 차례대로 벌여 앉으니, 비록 관악과 현악의 성대함은 없으나, 술 한 잔 들고 시 한 수 읊는 것이 그윽한 정서를 펴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날은 하늘이 맑고 공기가 청명하며 바람이 따뜻하여 화창하였다. 고개들어 광대한 우주를 우러러보고 성대한 삼라만상을 굽어살피며, 눈을 들어 마음껏 회포를 풀고 눈과 귀의 즐거움을 극진히 하기에 충분하니 참으로 즐겁도다.
무릇 사람이 서로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여러 정회(情懷, 정과 회포)를 가지고 방구석 안에서 말로 깨닫고 때론 자연에 몸을 맡기어 넓은 곳에서 자유롭게 방랑하네. 그래서 비록 나아가고 물러남이 만 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같지 않으나, 자신의 처지에 대해 즐거워 하고 잠시나마 스스로 기뻐하며 만족한다면 아마도 장차 늙음이 다가온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권태로워지게 되고 나서는 감정이 세상사에 따라 바뀌어 개탄스러운 마음이 이에 매이게 된다.
이에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 한순간에, 조금 전에 기뻐하던 것이 이미 옛 자취가 되어버리니 더더욱 이 때문에 감회가 일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장수하거나 단명하거나 간에 자연의 조화를 따라 끝내는 다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 또한 큰 문제이다.” 하였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는 언제나 옛사람들이 감회를 일으킨 이유를 살펴보면 아마도 모두 한 가지 마음인 것 같다. 여태까지 옛사람들의 글을 대하여 서글퍼하고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 이유를 내 자신도 모른다. 나는 진실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고 보는 것은 허망한 말이요, 팽조(彭祖)와 요절한 사람(彭殤)을 똑같다 한 것은 함부로 지어낸 말임을 알겠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지금 우리가 옛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으니, 슬프도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쓰고, 그들이 지은 시를 기록한다. 비록 시대가 다르고 달라졌다고 하지만, 감회를 일으키는 바는 아마 같을 것이다. 후세에 이것을 보는 사람도 이 글에 장차 감회가 있을 것이다.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 此地有崇山峻嶺 茂林脩竹 又有清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弦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敘幽情 是日也 天朗氣清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晤言一室之內 或因寄所托 放浪形骸之外 雖取捨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知老之將至 及其所之既倦 情隨事遷 感慨繫之矣 向之所欣 俯仰之間 已爲陳跡 猶不能不以之興懷 況脩短隨化 終期於盡 古人云 死生亦大矣 豈不痛哉 每覽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喩之於懷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殤爲妄作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悲夫!故列敘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주1] 계사(禊事) : 계제사, 곧 3월 3일 상사에 물가에서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구하는 행사
[주2] 유상곡수(流觴曲水) : 삼월 삼짇날,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는 놀이
[주3] 앙연(怏然) : 앙연하다. 마음에 차지 아니하거나 야속하다.
[주4] 팽상(彭殤) : 오래 삶과 일찍 죽음. 팽조(彭祖)와 상자(殤子). 팽조는 전설적으로 800세를 살았다는 장수한 인물이고, 상자는 어려서 죽은 아이를 의미한다.
◉◉◉ <중국 절강성 소흥(紹興, 회계)의 난정(蘭亭) 탐방>
○ [난정고적(蘭亭古跡)과 아지(鵞池)] 본격적으로 난정에 들어가면, ‘蘭亭古跡’이라는 편액이 적힌 대문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 대문에는 ‘후지시금 역유금지시석(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이라는 주련이 걸려있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지금 우리가 옛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다."라는 뜻으로 난정집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대문을 지나서 대나무가 펼쳐진 길을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면 아지(鵞池) 아지라는 연못을 만나게 된다. 거위 아자를 쓰는 연못이다. 왕희지는 거위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거위를 키우며 鵞 라는 글자는 많이 쓰면서 거위 서법을 매우 중시했다.
그리고 아지에는 ‘아지비(鵞池碑)’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鵞자는 왕희지의 글씨고 池는 아들 왕헌지의 글씨다. 왕희지가 아자를 써 놓았는데 그때 조정의 칙사가 와서 급히 떠났고 아들 헌지(8세)가 지자를 마저 써 놓았다. 해서 부자비라고도 불린다. 자세히 보면 아와 지가 필법이 다르다고 한다.
○ [곡수유상처(曲水流觴處)] 아지비(鵞池碑)를 지나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면 곡수유상처를 만난다. 근처에 1695년에 세워진 난정 비석이 하나 있는데, 청나라 강희 황제의 친필이다. 문혁 때 훼손된 것이 복구되어 있다. 곡수유상처는 꼬불꼬불한 물길에 술잔을 띄운다는 곳이다. 우리나라 경주의 포석정과 비슷한 구조물이다. 그 물길을 따라 문인들이 앉고 술잔이 멈추면 시를 한 수 짓는다.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한다. 353년 3월 3일 왕희지가 42명의 문인과 난정에서 계회를 열었던 곳이다. 1698년 청나라 때 곡수유상처는 복원되고 여러 차례 흥폐를 거듭하다 오늘에 이른 것이다. 매년 음력 3월 3일은 중국 난정 서법절로 정해 전국의 수많은 서예가들이 모여 행사를 연다. 곡수유상처 바로 앞에 '유상정(流觴亭)'이 있고 그 뒤에 '어비정(御碑亭)'이 있다. 유상정 오른쪽으로는 왕우군사(王右軍祠)라는 왕희지의 사당이 하나 있다. 또 안에는 묵지(墨池)와 묵화정(墨華亭)도 있다. 사당 정청 내 편액은 풍류를 마음껏 즐긴다는 진득풍류(盡得風流)로 1887년 유주가 썼다.
○ 「난정집서(蘭亭集序)」 원본은 왕희지 자신도 매우 아끼던 작품으로 가보로 전해졌다. 이 가보를 물려받은 7대손 왕지영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제자 변재 스님에게 이를 물려주었다. 변재스님은 이를 몰래 숨겨두고 자신만 보았다. 이 무렵 당 태종 이세민은 왕희지의 글씨를 매우 좋아해서 「난정서(蘭亭序)」를 온갖 수단을 동원해 변재에게서 결국 구했다. 태종은 아들 고종에게 '천년 만년 후까지도 「난정집서」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여 태종이 사망할 때 함께 매장되었다. 지금까지 총 117종의 임모본이 있고 청나라 건륭제는 임모본만을 모아서 '난정팔주첩'을 만들기도 했다.
○ [어비정(御碑亭)] 왕우군사에서 조금 뒷편에 어비정이 있다. 높이 6.86m, 넓이 2.64m의 거대한 비석인데, 앞면에는 청나라 강희제가 친필로 쓴 난정집서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1751년에 건륭제가 남긴 난정즉사(蘭亭卽事)가 있다. 뒷면에 있는 건륭제의 난정즉사는 다음과 같다. “전부터 산음(소흥) 땅 거울(물에 비친 모습) 속을 걷고 싶었는데 맑은 유람 좋은 경치, 한평생 유쾌한 일, 예부터 풍경이 좋다고 일컫는 곳, 곡상 유수 그 이름, 지금까지 장하도다. 짙은 대숲 봄 안개, 유난히 고요하고 계일보다 늦었지만(계일인 3월 3일보다 늦음) 꽃은 활짝 피어 있네. 물가에 왕희지의 글씨만 남았으니, 천년의 쟁송(난정집서 진본 행방 논쟁)을 평가하기 쉽지 않네(向慕山陰鏡裏行 清遊得勝愜平生 風華自昔稱佳地 觴咏于今紀盛名 竹重春煙偏澹蕩 花遲禊日台敷榮 臨池留得龍跳法 聚訟千秋不易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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