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1] 윤준식(尹俊植) - 만세 반석 열린 곳에 1. 큰 뜻을 위한 연단의 과정 - 1
1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다 발휘하고 죽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답게 죽어야 한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듣게 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지는 참으로 깨닫기 어려운 일이다.
2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천만다행하게도 십 대에 바른 뜻을 찾았고 또 스승을 만나 젊은 시절을 가치있게 살아온 셈이다. 그 결과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행적을 남겼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보다 더 진실하게, 보다 가치 있게 살아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3 나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 362번지에서 1938년 11월 25일 5남 3녀 중 막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농촌에서는 제법 잘 산다는 평을 들으며 불편 없이 자랄 수 있었다. 또 부모님은 유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명절이나 대보름이면 떡과 과일을 차려 놓고 제사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4 그러나 나는 곱게 자라지 못했다. 어릴 적에는 ‘장난꾼’, ‘싸움꾼’으로 통했으며 얼마나 짓궂게 자랐는지 학교에서도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으례히 문제의 장본인은 나였다. 하루도 싸워보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의 개구쟁이어서 때리지 않으면 맞는 것이 보통이었다.
5 고등학교 일학년 때의 일이다. 교내에는 불량학생 그룹이 몇 개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자기 그룹에 끌어넣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내가 말을 듣지 않자 수원 북문 꼭대기로 끌고 가서 돌림 매질을 가했다. 나는 여러 놈에게 당할 힘이 없어 무참히 얻어맞고 산을 내려왔다.
6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역전 잡상 깡패들이 화물 차고에 끌고 들어가 또 린치를 가하지 않는가! 나는 분통이 터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다섯 놈에게 덤벼들었다. 일 대 오의 대결인지라 나 역시 많이 맞았지만 결국 다섯 놈을 화물차 철판 위에 때려눕히었다.
7 그때 통쾌했던 감정은 마치 부모의 원수라도 갚은 기분이었다. 또 한 번은 학교에서 가장 악질인 깡패 한 놈과 승부를 가리기로 하고 도시락을 싸 든 채 수원 팔각 산정으로 올라갔었다.
8 나는 “싸움에서 지는 놈이 깨끗이 항복하는 거다” 하는 그의 제의를 받아 주기로 했다. 얼마 동안을 치고받고 싸웠을까, 나중에는 거품을 품고 뒹굴었으나 나는 놈을 보기 좋게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이제 항복해, 이놈아!”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뒤에 숨겨 두었던 짱돌로 내 이마를 사정 없이 내려찍었다. “아이쿠—” 나는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9 구멍이 난 이마에서는 선지피가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나는 피범벅이 된 채 그를 때려눕히고 말았지만 그때의 상처는 내 이마에 까만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그만큼 나는 거칠었고 무서운 것을 모르고 살았다. 인생을 생각한다거나 고민을 하는 따위는 내 생리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운동하고 싸우고 노는 것만이 전부였다.
10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새로운 인간이 되도록 깨닫는 기간을 주셨으니 그것은 무전여행을 통해 얻은 수확이었다. 모친께서는 항시 고생을 해야 인생의 맛을 안다고 강조하셨기 때문에 방학을 이용하여 고생을 해보겠다고 각오하고 같은 학년의 송지섭 군과 무전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11 첫날은 수원에서 출발하여 천안, 공주를 거쳐 논산에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깡패들을 만나 모진 매를 맞았다. “고생은 매 맞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구나” 당장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아니면 품속에 있는 칼로 휘둘러 버릴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경험이거니 하고 참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