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산 천년고찰 선암사 일주문
백양산 천년고찰 선암사 연력
|
대웅전은 거룩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란 뜻이다. 자연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봉안의 주 대상이 된다. 한편으로는 사바세계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 여러 불보살들이 함께 모셔지기도 하는데 그 모시는 상징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염화시중의 미소로 대변되는 가섭과 다문제일의 제자인 아난이 각각 선법과 교법을 상징하며 봉안된다.
둘째, 부처님의 반야지(般若智)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왼쪽에서, 수행과 행원이 원대함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오른쪽에서 모시고 모든 구도자들이 지혜와 행원에 의지하여 해탈의 길로 나가야함을 보여준다.
셋째, 과거의 연등불인 제화갈라보살, 현세의 석가모니부처님, 미래의 미륵보살이 봉안되어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통하여 시간을 달리하면서 교화함을 나타낸다.
넷째,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에 조상의 극락왕생과 내생의 행복이 직결되는 아미타불과 고통받는 병자나 가난한 사람을구원하는 자비의 약사여래를 모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문수보살 대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또는 대세지보살의 협시보살로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 [ 대웅전 벽화 ]
|
|
1) 심우(尋牛) : 소를 찾아 나서다. 처음에 사람이 들에서 소를 찾는 모습으로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춰진 원성(圓成)인 심우(尋牛)를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는 것.
망망발초거추심(茫茫發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水활山謠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但聞楓樹晩蟬吟)도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 물은 넓고 산은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피로해 소 찾을 길은 없는데, 오로지 저녁 나뭇가지 매미 울음만이 들리네. |
|
|
|
2) 견적(見積) :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소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
수변림하적편다(水변林下跡偏多) 방초리피견야마(芳草離被見也마) 종시심산갱심처(慫是深山更深處) 요천비공즘장타(療天비孔즘藏他)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럽게 많으니, 방초를 헤치고서 그대는 보는가 못보는가? 가령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등창코를 어찌 숨기랴! |
|
|
|
3) 견우(牽牛) : 소를 보다. 수행자가 멀리서 소의견모습을 어렵풋이 본 것을 묘사한 그림으로 문법수학 (聞法修學)의 공(空)에 의해 마음의 소를 발견한 것을 상징화하는 불화
황앵지상일성성(黃鶯枝上一聲聲) 일난풍화안유청(日暖風和岸柳靑) 지차갱무회피처(只此更無回避處) 삼삼두각화난성(森森頭角畵難成)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사하고 바람은 서늘한데 언덕의 버들은 푸르기만 하다. 더 이상 빠져나아 갈 곳이 다시 없나니,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
|
|
|
4) 득우(득우) : 소를 얻다. 동자가 소를 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아직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므로 더욱더 열심히 수행 정진해야 함을 표현한 것.
갈진정신획득거(竭盡情神獲得渠) 심강력장졸난제(心强力將卒難除) 유시재도고원상(有時裁到高原上) 우입연운심처거(又入煙雲深處居)
온 정신을 다하여 이 놈을 잡았으나, 힘 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땐 고원 위에 올랐다가도,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에 들어가 머무누나. |
|
|
|
5) 목우(牧牛) : 소를 기르다. 소에 고삐를 물리고 돌아오는 모습으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보임)의 단계, 즉 깨달음 뒤에 오는 방심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책한 것.
편삭시시불리신(鞭索時時不理身) 공이종보입애진(恐伊縱步入埃塵) 상장목득순화야(相將牧得純和也) 기쇄무구자축인(기쇄無拘自逐人)
채찍과 고삐를 늘 몸에서 떼지 말라. 두렵도다, 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에 들어갈까봐.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고삐를 잡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을 따를 것이다. |
|
|
|
6)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다. 동자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으로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들었음으로 피안의 세계에 나아가게 된다는 것.
기우이리욕환가(騎牛이리欲環家) 강적성성송만하(강笛聲聲送晩霞) 일박일가무한의(日拍一歌無限意) 지음하필고순아(知音何必鼓脣牙)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오랑캐 피리소리가 저녁 놀에 실려간다.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곡조 아는 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
|
|
|
7) 망우존인(忘牛存人) : 소를 잊고 사람만 있다. 집에 돌아왔지만 소는 간데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있음을 묘사, 즉 본각무의(본각무위)로 돌아왔으나 쉬지 않고 수련해야 한다는 뜻.
기우이득도가산(騎牛已得到家山) 우야공혜인야한(牛也空兮人也閑) 홍일삼간유작몽(紅日三竿猶作夢) 편승공돈초당간(鞭繩空頓草堂間) |
|
|
|
8) 인우구망(인우구망) : 사람도 소도 다 잊다.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텅 빈 원만상, 주객분리 이전 상태로 정(정)을 잊고 세상의 물(물)을 버려 공(공)의 세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 것.
편삭인우진속공(鞭索人牛盡屬空) 벽천요활신난통(壁天療闊信難通) 홍로염상쟁용설(紅爐焰上爭容雪) 도차방능합조종(到此方能合祖宗)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는 다 비어 있나니, 푸른 허공만이 가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도다.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라. |
|
|
|
9) 반본환원(返本還元) : 근원으로 돌아가다. 티끌 하나도 없는 수록산청(수록산청)의 광경으로 사람의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보게 된 것.
반본환원이비공(返本還元已費功) 쟁여직하약맹롱(爭如直下若盲聾) 암중불견암전물(庵中不見庵前物) 수자망망화자홍(水自茫茫花自紅)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 보니 온갖 노력을 기울였구나!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장님 같은 것을,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인지하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
|
|
|
10) 입전수수(입전수수) :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 중생들에게 복과 덕을 베풀어 불교의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
료흉선족입전래(료胸跣足入廛來) 말토도회소만시(抹土途恢笑滿시) 불용신선진비결(不用神仙眞秘訣) 직교고목방화개(直敎枯木放花開)
맨 가슴 맨 발로 저자에 들어오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위를 쓰지 않아도, 당장에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게 하누나! | |
|
명부전안에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지옥계의 심판관인 시왕(市王)을 봉안하기때문에 시왕전(市王殿)이라고도 한다. 시왕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의 왕으로 진광왕, 초강왕, 송제왕,오관왕, 염라왕, 변성왕, 태산왕, 평등왕, 도시왕, 오도전륜왕을 말한다. 왼쪽에는 오명존자가, 오른쪽에는 무독귀왕이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
시왕(市王) 진광대왕(秦廣大王) : 1·7일의 심판을 맡은 왕으로 도산지옥을 다스린다. 초강대왕(初江大王) : 2·7일의 심판을 맡은 왕으로 화탕지옥을 다스린다. 송재대왕(宋宰大王) : 3·7일의 심판을 맡은 왕으로 한빙지옥 혹은 태산지옥을 다스린다. 오관대왕(五官大王) : 4·7일의 심판을 맡은 왕으로 봉인지옥을 다스린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5·7일의 심판을 맡은 왕으로 말을 함부로 내뱉는 자를 응징하는 발설지옥을 다스린다. 변성대왕(變成大王) : 6·7일의 심판을 맡은 왕으로 독사지옥을 다스린다. 태산대왕(泰山大王) : 7·7일, 즉 사후 49일째 되는 날 심판을 맡은 왕으로 톱으로 죄인을 썰어서 토막내는 거해지옥을 다스린다.
평등대왕(平等大王) : 죽은 넋이 100일째 되는 날 심판을 담당하여 무수한 칼날이 바람처럼 휘몰아쳐 사지를 갈갈이 찢어 절단하는 풍도지옥을 다스린다.
도시대왕(都市大王) : 죽은지 1년째 되는 날 심판을 맡은 왕으로 죄인을 뜨거운 철로 된 상에서 고통을 주는 철상지옥을 다스린다.
오도전륜대왕(吾道轉輪大王) : 3년째 되는 날 마지막으로 열 번째 심판을 맡은 왕으로 죄인을 암흑 속으로 몰아넣는 흑암지옥을 다스린다. 망자는 이 왕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생전의 행위에 따라 육도윤회의 길을 다시 나서게 된다. | [명부전 벽화]
|
|
19칙 구직화상의 한 손가락 법문 “손가락 하나에 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있다” 〈벽암록〉 제 19칙에는 구지 화상이 한 손가락을 세워 부럽을 선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구지 화상은 누구라도 불법에 대하며 질문하면, 단지 한 손가락만을 세우기만 했다.
일지선은 화엄과 유마와 동일한 세계 지혜 체득없이 손가락만 세우면 망상 조사들의 행장을 모아놓은 〈조당집〉 19권‘구지화상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구지 하상은 천룡(天龍)의 법을 이었고 경안주(敬安州)에 살았다. 그 밖의 행적은 알 수가 없어 기록하지 못한다. 선사가 암자에 살고 있을 때에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와서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선사의 선상을 세 바퀴 돌고는 주장자를 우뚝 선사 앞에 세우고 서서 말했다. ‘화상께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삿갓을 벗겠습니다.’ 선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니 비구니는 그냥 떠나려고 했다. 이에 선사는 말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하루 저녁 묵어가도록 하시오’ 비구니가 말했다. ‘제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묵어가겠지만 대답을 못하시면 이대로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떠나 가버렸다.
이때 선사는 혼자 탄식 하였다. ‘나는 명색이 사문이라고 하면서 비구니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외람되이 장부의 형상은 갖추었으나 장부의 작용이 없구나! 이 산을 떠나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리라.’ 그리고 조용히 선정에 드니 갑자기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삼(三), 오(五)일 안에 큰 보살이 오셔서 화상께 설법해 드릴 것이요’ 그런지 열흘이 지나지 않아 천룡 화상이 왔거늘 선사는 뛰어나가 말에 절을 하고 맞아들여 모시고 서서 앞에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한 즉 천룡 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니 즉시에 환히 불법을 깨달았다.
선사는 그 뒤로 대중에게 말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룡 화상에게 일지선(一指禪) 을 얻은 뒤로 평생 동안 사용해도 다 사용하지 못했다.' 구지 화상은 항상 구지관음다라니를 외우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마조도일의 제자 법상(法常: 752~839)의 법을 이는 천룡 화상의 제자이다. 천룡 화상의 전기도 잘 알 수가 없다. 구지 화상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불법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을 할지라도 단지 한손가락만을 세웠다고 한다. 원오도 ‘평창’에 “만약 손가락을 가지고 이렇쿵 저렇쿵 말한다면 구지화상을 법문을 저버린 것”이라고 주의하고 있다. 손가락을 보는 자는 경계에 떨어진 중생이다.
선어록은 선승들의 대화와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 언행록이다. 말은 행위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행위는 말보다도 한층 더 깊이 있는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원오도 ‘수시’에 “한 티끌이 일어나니 온 대지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송이 피니 그 속에 세계가 열린다”라고 한 말은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난다는 〈기신론〉의 말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티끌이 일어나기 전에, 꽃 한 송이가 피기 전의 지혜작용이 오직 이 구지 화상의 한 손가락에 현성(現成)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도 같은 뜻이다. 즉, 번뇌 망념이 일어나기 이전, 언어 문자의 방편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불법의 근본을 구지 화상이 한 손가락을 세워서 제시하고 있는 법문을 파악해야한다. 그것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를 한 손가락으로 제시한 것이다. 마치 세존이 영산에서 많은 대중들에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가섭이 미소로 대답한 것과 같은 법문이다.
선불교에서 하나(一)는 불법의 근본인 진실을 표현하는 불립문자의 경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또, 둘(二)은 언어 문자로서 진실을 체득하는 방편법문이다. 선문답에서 행동으로 제시한 불법의 근본은 만법의 근원인 일심(一心)의 법문이다. 불법은 마음으로 만병의 진실을 깨닫고 지혜를 체득하는 심법(心法)이다. 달마가 일심(一心)의 불법을 전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심(一心)의 법문인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말한다.
선에서 제시한 일심(一心)의 법문은 〈화엄경〉에서 설하는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나 ’만법유심(萬法唯心)‘ 그리고 ’하나가 곧 많은‘ ’하나가 곧 일체‘라는 법계의 연기를 사상적인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이 모든 법은 하나(一心)로 되돌아간다고 주장하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의 법문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조당집〉제 7권 설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산이 앙산에게 질문했다. ’그대가 밤새도록 불법을 사유하고 궁리하여 이룬 것이 무엇인가?‘ 앙산이 선뜻 한 획(불법의 대의)을 그어 보이니 위산이 말했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대의 경지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 어떤 사람이 장경에게 물었다.’앙산이 한 획을 그은 뜻은 무엇입니까?‘장경이 손가락을 하나 세워 일으켜 보였다. 또 순덕에게 질문하니 순덕도 역시 손가락을 하나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불법은 불가사의하여 천성(天聖)이 같은 길을 달린다.”
원오는 ‘수시’에서 “한 티끌이 일어나면 온 대지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 송이 피어나니 그 속에 세계가 열린다.”라고 했다. ‘평창’에서는 “한 티끌이 일자마자 대지는 전부 그 속에 들어가고, 꽃 한송이 피어나니 온 세계가 열린다. 사자의 한 터럭에 백억 마리의 사자가 나타난다.”라고 했다. 이는 낙보원안(834~898)의 말을 인용하여 일즉다(日卽多)의 융통과 대소(大小)가 무애자재한 불법의 불가사의한 경지를 설한 것이다.
〈유마경〉에 ‘한 터럭 속에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포용 한다’고 하여, 〈소부사의경(小不思議經)〉이라고 하였고, 〈화염경〉에 ‘일심(一心)에 를 포용한다’고 하여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이라고 한다. 〈능엄경〉에서 ‘한 터럭에 두루 모두 시방국토를 포용한다’ 고 하는 불법의 정신을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세운 법문으로 전개하고 있다. 구지의 일지선(一指禪)은 불법의 일심법계(一心法界) 정신에 〈장자〉 ‘제물론편’에서 “천지(天地)는 한손가락이며, 만물은 한 마리의 말(一馬)이다.” “천지(天地)는 같은 뿌리요, 만물(萬物)은 일체(一體)”라는 사상을 수용하여 철학과 이론으로 이해하는 불법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직접 불법을 정신을 현실에서 체득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행위의 법문이다. 〈무문관〉에는 구지 화상의 일지선(一指禪) 법문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구지 화상을 시봉하는 동자가 한명 있었는데, 구지 화상이 외출하였을 때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구지 화상께서는 어떤 법문을 설하는가?’라고 묻자, 그 동자 역시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후에 구지 화상은 이처럼 동자가 자기의 불법을 흉내 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어느 날 하루는 드디어 칼로서 동자의 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 동자는 아픔을 참지 못해 통곡하여 달아나고 있을 땡 구지화상은 동자를 불렀다. 동자는 머리를 돌려 화상을 쳐다보았다. 그 때에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때 동자는 홀연히 깨달았다.”
무문 선사는 “구지 화상과 동자의 깨달음이 손가락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잘 파악하여 깨달음을 체득했다면 천룡과 구지, 동자와 이 공안을 읽고 있는 그대가 하나의 꿰미에 꿰어 놓은 것처럼, 똑같은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라고 평하고 있다. 원오도 ‘평창’에서 “구지 화상이 손가락을 세우는 법문은 참구하기는 쉽지만 깨닫기는 어렵다. 요즘 사람들은 질문을 하면 손가락을 세우고 주먹을 불끈 드는데, 이것은 망상 분별일 뿐 반드시 뼛속에 사무친 투철한 견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설두 화상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게송을 읊고 있다. “구지 화상은 누구에게나 손가락 하나만 세워 언어 문자를 초월한 법문으로 학인을 지도한 선풍(禪風)을 좋아한다. 손가락 하나로 전 우주를 텅 비워버리고, 들어 올려 이러한 법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칭찬했다.
|
|
용파수상행(龍坡水上行)
유적지종류: 사찰 관련사찰: 내원암(內院庵) 설화종류: 사찰전설 시대:통일신라 〈요약〉 내원암의 유래 〈내용〉 542호 7면 전설 남대문에 이상한 물장수가 나타났다. 허름한 민가 한 켠,버려졌던 움막에 새 주인이 들어오고 그 주인은 양민들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우물물을 길어다 주는 일로 하루 세 끼니를 채웠는데 가족도 없고 만나는 사람도 특별히 없는 외톨박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산중의 승려였음에도 저자 거리에서 물장수를 하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물장수 생활이 한 달 두 달을 넘어 한 해 두 해를 지나면서 그 특별한 사람에 대한 관심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은 무슨 일이든 잊기를 좋아 하기에 새로운 일에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 새벽에 일어나 염불을 하고 참선을 한 후 물지게를 지고 저자거리로 나서는 그 고단한 생활. 물장수는 남대문 저자 거리에 몸을 두고 있을지라도 마음은 늘 팔공산 파계사 법당과 저 구중궁궐에 계시는 임금에게 가 있었다. 그의 법명은 용파(龍坡). 팔공산 파계사 호적한 도량에서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억불숭유의 정치적 기류와 그 기류를 타고 불교를 핍박하는 지방 사대부들의 탐심이 못내 가슴 아프고 더러 화나기도 하는 현실을 그냥 지켜 볼 수 만은 없었다. “내 한양으로 가리라. 임금을 만나 뵙고 이 중생계의 악업을 끊도록 진언 하리라.” 그러나 그의 뜻은 쉬 이루어 질수 없었다. 한양 땅에는 올라 왔으나 승려의 신분으로는 도성을 출입할 수도 없는 실정법이 가장 먼저 가로막고 섰던 것. “할 수 없는 일이지. 국법이 그렇다면 그른 법도 법이니 어기면서까지 내 주장을 할 수야 없는 노릇. 내 주장이 그르지 않은 바에야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 그래서 남대문 밖 움막 하나를 주선해 기거하며 물장수 생활을 시작 한 것이었다. 어지간 하면 다음 기회를 생각하거나 다른 방도를 연구하기 위해 다시 절로 돌아 갈만도 하건만 3년의 세월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물지게를 지도 다녔으니 스님의 성정도 여간 굳센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의 감화를 입게 되었다. 지성이면 가피가 없을 수 없음을 반증이라도 하듯 물장수 용파 스님의 뜻이 이뤄질 인연이 무르익은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로다.” 임금(정조)의 꿈이었다. 한줄기 상서로운 기운이 한양 하늘에서 내리 뻗더니 궁궐이 아닌 남대문 밖 어느 곳으로 장대하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마구 달려서 그 서기가 떨어진 곳으로 가 보았는데 뜻밖에도 허름한 움막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속에는 조용히 좌선삼매 든 승려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승려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잠이 깨 버린 것인데, 잠이 깬 후에도 그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눈앞에 다시 꿈의 내용들이 시현되는 지경이었다. 임금은 신하를 불러 남대문 밖으로 나아가 이런이런 곳이 있는지 알아보라 일렀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꼭 그러한 곳이 남대문 밖에 있었고 움막에는 몇 년 전부터 승려 한 사람이 와서 물장사를 하며 살고 있다 하옵니다.” 신하의 보고에 임금은 등골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그 승려가 할 말이 있음이다. 이리로 데려 오도록.” 그렇게 용파 스님의 소원은 이뤄지게 되었다. 3년의 기다림 끝에 왕을 친견하게 되었고 지방 토호세력과 사대부들이 자아내는 억불의 실상을 낱낱이 고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저희 같은 승려가 잘 살자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옵고 불교를 핍박함은 이 나라의 정신을 억누르는 일이며 여러 산과 계곡의 절과 암자가 피폐하는 것은 민심의 피폐임에 조정과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시기 위해서라도 일방적이고 터무니 없는 탄압은 삼가 하도록 하명이 계셔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임금은 “내 진작 그런 사정을 세세히 몰랐음이니 향후 일체 그런 일이 없도록 하리라”는 약속을 했다. 그렇게 임금을 알현하고 물러나려는 순간 임금이 그윽한 목소리로 스님을 다시 불렀다. “화상, 나는 하늘로부터 화상과의 만남을 언약 받은 일이 예삿일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소. 화상이 간청한 일도 참으로 나라를 위해 갸륵한 일이 아닐수 없고 내 그 청을 들어 주기로 약조도 했소. 그런데 나를 위해 화상의 특출한 법력을 발휘해 줄 수는 없겠소.” 다름이 아니라 임금의 후사 문제였다. 중전이 다산을 하지 못하고 한 명의 왕자를 생산 했을 뿐인 정황에서 느끼는 그 은근한 조바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미력한 힘이나마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용파 스님은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를 찾았다. 농산(聾山) 스님과 더불어 기도를 하기 위함이었다. 나라에서는 특별히 기도처를 물색하라는 전갈이 있었고 용파 스님은 북한산의 금선사와 수락산의 명당 터를 골라 기도에 들어갔다. 수락산의 그 터는 이미 신라 적부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나라에서는 그 곳에 당우를 지어 주었다. 두 스님이 기도를 시작한 이후 임금은 불심을 발해 두 스님의 기도를 도왔다. 어느날 용파 스님이 북한산으로 찾아갔다. 농산 스님이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대사의 기도가 날로 성성함인지 이 나라에 좋은 소식이 깃들 것 같소이다.” “화상의 기도 덕분이겠지요.” “대사, 이제 몸을 바꾸심이 어떨런지.” 농산은 용파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두 스님은 어느 때 보다 정성스런 기도를 했다. “제불보살이여, 이 나라에 감응하사 천년 국운을 융성케 하옵고....” 두 스님은 밤늦도록 기도를 했다. 산을 뒤 흔드는 목탁 소리에 두 스님의 염불소리가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장엄한 기도였다. 이윽고 농산 스님은 눈짓으로 융파스님에게 자리를 피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용파는 농산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3배를 올렸다. 용파 스님이 어두운 산길을 헤치고 하산 할 즈음 농산 스님은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산바람 한 모급을 들이 마시는 순간 그대로 적멸의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원적(圓寂). 스님의 죽음은 이 세상을 영영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받아 다시 오기 위한 하나의 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의 적적한 자리로의 회귀였고 다시 인연을 따라 세상으로 나투는 성스러운 반전이었다. 북한산에서 기도를 하던 농산 스님이 입적 했다는 소식은 다음날 날 밝기 무섭게 조정으로 알려졌다. “용파 화상. 이 어찌된 일이요. 어제까지 기도에 정성을 쏟던 스님이 갑자기 입적하다니...” 황급히 찾아 온 한 대신의 놀라움에 비해 용파 스님의 마음은 조용하고 여유롭기까지 했다. “전하께 상고 하시오. 이제 우리 두 사람의 기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그리고 기도는 성취되어 조정에 경사가 있을 것임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궐한 대신은 용파 스님의 말을 임금에게 전했고 임금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궁금증은 풀어졌다. 수빈 박씨에게 태기가 섰던 것이다. 임금은 농산 스님이 왕자의 몸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고자 짐짓 입적을 한 것임을 알수 있었고 그 일을 도모한 두 스님의 정진력과 부처님의 감화에 거듭거듭 감읍할 뿐이었다. “두 화상께서 나라에 이토록 경사스런 인연을 지었음이로다. 수락산 기도터에 절을 크게 짓도록 하라.” 임금의 명으로 용파 스님이 기도하던 곳은 신라 이래 폐찰이 된 불운으로부터 벗어 날수 있었고 농산스님이 몸을 바꿔 나툰 왕자는 훗날 보위에 올랐다. 임금의 둘때 아들로 태어나 10살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1살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임금, 조선의 제 23대 왕 순조(純祖)였다. |
|
희운선사 수도팔계(修道八戒) 억천만겁토록 생사를 헤매다가, 어려운 일 가운데도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꼬.’ 철석같은 의지,서릿발 같은 결심으로, 혼자서 만 사람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듯,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나지 않는다는 각오가 서야만 한다. 오직 영원한 해탈, 즉 ‘성불(成佛)을 위하여 일체를 희생 한다.’ 는 굳은 결의로써 정진하면 결정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1.절속(絶俗) 세속은 윤회의 길이요, 출가는 해탈의 길이니, 해탈을 위하여 세속을 단연히 끊어버려야 한다. 부모의 깊은 은혜는 출가수도로써 보답한다. 만약 부모의 은혜에 끌리게 되면 이는 부모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니, 부모를 길 위의 행인과 같이 대하여야 한다. 황벽 희운선사가 수천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황벽산(黃蘗山)에 주석하였다. 그때 노모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아들을 찾아갔다. 희운선사가 그 말을 듣고는 대중들에게 명령을 내려 물 한 모금도 주지 못하게 하였다. 노모는 하도 기가 막혀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가다가, 대의강(大義江)가에 가서 배가 고파 엎어져 죽었다. 그리의 그날밤 희운선사에게 현몽하여 ‘내가 너에게서 물 한 모금이라도 얻어먹었던들, 다생(多生)으로 내려오던 모자의 정을 끊어져서, 그 공덕으로 죽어 천상으로 가게되니, 너의 은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절하고 갔다 한다. 부처님은 사해군왕(四海郡王)의 높은 지위도 헌신짝같이 벗어 던져버렸으니, 이는 수도인의 만세모범(萬世模範)이다. 그러므로 한 때의 환몽(幻夢)인 부모처자와 부귀영화 등 일체를 희생하여, 전혀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수도에만 전력하여야 한다. 또 수도에는 인정이 원수다. 인정이 두터우면 애욕이 아니더라도 그 인정에 끄달리어 공부를 못하게 된다. 아무리 동성끼리라도 서로 인정이 많으면 공부에는 원수인 줄 알아야 한다. 서로 도우고 서로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이 것이 생사윤회의 출발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서로 싸운 사람같이 지내라’고 고인도 말씀하였다. 일체의 선인악업(善因惡業)을 다 버리고, 영원의 자유와 더불어 독행독보(獨行獨步)해야 한다. 일반에 있어서 일대 낙오자가 되어 참으로 고독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무상대도(無上大道)는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니 일반인과는 삼팔선을 그어놓고 살아야 한다. 삼팔선을 터놓고 일반인과 더불어 타협할 때 벌써 엄벙덩벙 허송세월 하다가 아주 죽어버리는 때를 보내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2.금욕(禁慾) 욕심 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이 색욕(色慾)이다. 색욕 때문에 나라도 망치고 집안도 망치고 자기도 망친다. 이 색욕 때문에 나라를 다 망쳐도 뉘우칠 줄 모르는 것이 중생이다. 그러므로 수도하는데도 이것이 제일 방해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것이 하나뿐이기 다행이지, 만약 색욕같은 것이 둘만 되었던들 천하에 수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색욕이란 무서운 것이니, 이 색욕에 끄달리게 되면 수도는 그만두고라도 지옥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으니, 도를 성취하고 실패하는 것은 색욕을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데 달렸다 하더라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무서운 색욕을 근본적으로 끊으려면 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안된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네 마음도 믿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색욕을 끊지 않아도 수도하는데 관계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자기가 색욕에 끄달리어 남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는 큰 악마인 줄 깊이 알고 그 말에 절대로 속지 않아야 한다. 영가(永嘉)스님 같은 큰 도인도 항상 경계하였으니 ‘차라리 독사에게 물려 죽을지언정 색(色)은 가까이 하지 말아라. 독사에게 물리면 한 번 죽고 말지마는 색에 끄달리면 세세생생 천만겁토록 애욕의 쇠사슬에 얽매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니 피하고 또 멀리 하라.’하였다. 이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만약 이것을 끊지 못하면 항상 애욕만 머리에 가득 차서 도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한한 고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다. ‘색욕을 끊지 못하고 도를 닦으려 한다는 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이다’고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예부터 참으로 수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버릴지언정 색을 범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니,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로서로 멀리하여야 한다. 만약 가깝게 하면 결국은 서로 죽고 마는 것이니, 서로서로 범과 같이 무서워하고 독사같이 피하여야 한다. 어떠한 인격자라도 이성(異性)을 믿지 말고 친근하지 말지니, 성과(聖果)를 증득하기 전에는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생사윤회의 근본은 애욕에 있으니 애욕을 끊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서로 멀리하는 것이 성도(成道)하는 근본이니,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3.천대(賤待) 천하에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은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무슨 일에든지 남에게 지고 밟히고 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 천대받고 모욕받는 즐거움이여, 나를 무한한 행복의 길을 이끄는 도다. 남에게 대접받을 때가 나 망하는 때이다. 나를 칭찬하고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수도를 제일 방해하는 마구니이며 도적이다. 중상과 모략 등의 온갖 수단으로 나를 괴롭히고 헐뜯고 욕하고 해치고 괄시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은 없으니, 뼈를 갈아 가루를 만들어 그 은혜를 갚으려 해도 다 갚기 어렵거늘 하물며 원한을 품는단 말인가? 나의 공부를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 주고 참는 힘을 많이 북돋아 주어 도를 일취월장(日就月將)케 하여 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 칭찬과 숭배는 나를 타락의 구렁으로 떨어뜨리나니 어찌 무서워하지 않으며, 천대아 모욕처럼 나를 굳세게 하고 채찍질 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은혜가 아니랴. 그러므로 속담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미운자식 밥 많이 주고, 고운 자식 매 많이 때린다.’고 하니, 참으로 금옥(金玉)같은 말이다. 항상 남이 나를 해치고 욕할수록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나는 그 사람을 더욱 더 존경하며 도와야 한다. 한산과 습득스님이 천태산 국청사에 있으면서 거짓 미친 행동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모욕과 천대를 받고 있었다. 그 주의 지사가 성인인 줄 알고 의복과 음식을 올리며 절하니 한산과 습득스님이 크게 놀래어 외쳤다. ‘이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 그리고는 도망쳐 달아나서는 다시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옹스님은 남에게 대접받지 않고 미움과 괄시를 받기 위해서 일부러 도적질을 다하였다.이것이 공부인(工夫人)의 진실방편(眞實方便)이다. 최잔고목(최殘故木)! 부러지고 이지러진 마른 나무 막대기를 말함이다. 이렇게 쓸데없는 나무 막대기는 나무꾼도 돌아보지 않는다. 땔나무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 땔 물건도 못되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어디 한 곳 쓸 곳이 없는, 아주 못 쓰는 물건이니, 이러한 물건이 되지 않으면 공부인 되지 못한다. 결국은 제 잘날 싸움 마당에서 춤추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서, 공부 길은 영영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 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버리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는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당하는 사람, 살아나가는 길이란 공부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불법 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사람, 쓸데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 지자대사같은 최고의 고승도 죽을 때 탄식하였다. ‘내가 만일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던들, 육근청정(六根淸淨)의 성위(聖位)에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어른노릇 하느라고 오품범위(五品凡位)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자대사 같은 분도 이렇게 말씀하였거늘, 하물며 그 외 사람들이랴.
4.하심(下心)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항상 남에게 미루고, 남부끄럽고 욕되는 것은 남모르게 내가 뒤집어 쓰는 것이 수도인의 행동이다. 육조대사가 말씀하셨다. ‘항상 자기의 허물만 보고 남의 시비, 선악은 보지 못한다.’ 이 말씀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눈이다. 내 옳음이 추호라도 있을 때에는 내 허물이 태산보다 크다. 나의 옳음을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라야 조금 철이 난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에든지 전혀 내 허물만 보이고, 남의 허물은 볼래야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내 옳고 네 그른 싸움’이니 내 그르고 네 옳은 줄만 알면 싸움이 영원히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깊이 깨달아 ‘내 옳고 네 그름’을 버리고 항상 나의 허물, 나의 잘못만 보아야 한다. 법연(法演) 선사가 말씀하셨다. ‘20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서 공부하니, 이제 겨우 내 부끄러운 줄 알겠다.’ ‘내 잘났다’고 천지를 모르고 어깨춤을 추는 어리석음에서 조금 정신을 차린 말씀이다. 뉴튼은 천고(千古)의 큰 물리학자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훌륭하다’고 많이 존경하였으나 뉴튼 자신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기가 생각해 볼 때는 자신은 대학자는 고사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자기를 대학자고 취급하는지 의심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말하였다. ‘우주의 진리는 대해(大海)같이 넓고 깊다. 그러나 나는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이나 줍고 노는 어린아이데 불과하여, 진리의 바다에는 발 한 번 적셔 보지 못했다.’ 이말도 자기의 어리석음을 조금 짐작하는 말이다. 서양의 제일가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항상 크게 외쳤다.‘나는 단지 한 가지만 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볼때,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제 못난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요, 다 제 잘나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임제종의 종흥조인 법연선사의 말씀을 잊지 말자. 누가 법문을 물으면 항상 말씀하였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천하의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도 떠드는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다. 지상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은, 오로지 모든 사람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잘나지 못함을 자각하는 정도로 그 사람의 인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잘나지 못함을 자각하는 정도로 그 사람의 인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잘나지 못함을 철저히 깨달아 일체를 부처님과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가 나를 부처님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낮고 낮은 곳이 자연히 바다가 되나니. 이것은 일부러 남에게 존경을 받으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을 생각이 있으면, 남이 존경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내 몸을 낮추고 또 낮추어 밑없는 곳까지 내려가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더라.’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보러 가니, 노자가 말했다. ‘그대를 보니 살과 뼈는 다 썩고 오직 입만 살았구나! 큰 부자는 재산을 깊이 감추어 없는 것같이 하고 어진 사람은 얼굴을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하나니, 그대의 교만한 행동과 도도한 생각을 버려라, 무엇을 알기에 그렇게 잘난 척하는가?’ 공자가 듣고 크게 탄복하며 노자를 ‘용과 같아’고 하였다. 노자가 도 공자에게 말하였다. ‘내 부탁하노니 누구든지 총명한 사람이 그 몸을 망치는 것은 다 남의 허물을 잘 말하기 때문이다. 부디부디 조심해서 남의 나쁜 것과 그른 것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이 두 분은 지상에서 큰 성인이라 존경하는 바이다. 서로 처음 만났을 적에 이런 말로써 경계하니, 누구든지 일생동안 지켜도 남을 말들이다.
하심(下心)의 덕목을 몇 자기 적어 본다. -. 도가 높을 수록 마음은 더욱 낮추어야 하니,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며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긴다. -. 어린이나 걸인이나 어떠한 악인이라도 차별하지 말고 극히 존경한다. -. 낮은 자리에 앉고 서며 끝에서 수행하여 남보다 앞서지 않는다. -. 음식을 먹을 때나 물건을 나눌 때 좋은 것은 남에게 미루고 나쁜 것만 가진다. -. 언제든지 고되고 천한 일은 자기가 한다.
5. 정진(精進) 모든 육도만행(六度萬行)은 그 목적이 생사해탈(生死解脫), 즉 성불(成佛)에 있으니, 성불의 바른 길인 참선에 정진하지 않으면 이는 고행외도(苦行外道)에 불과하다. 정진은 일상(日常)과 몽중(夢中)고 숙면(熟眠)에 일여(一如)가 되어야 조금 상응함이 있으니, 잠시라도 화두에 간단(間斷)이 있으면 아니 된다. 정진은 필사의 노력이 필수조건이니, 등한·방일하면 미래겁이 다하여도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못하나니, 다음의 조항을 엄수하여야 한다. -.네 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벙어리같이 지내며 잡담하지 않는다. -.문맹같이 일체 문자를 보지 않는다. -.포식·간식하지 않는다. -.적당한 노동을 한다.
6. 고행(苦行) 병 가운데 제일 큰 병은 게으름 병이다. 모든 죄악과 타락과 실패는 게으름에서 온다. 게으름은 편하려는 것을 의미하니, 그것은 죄악의 근본이다. 결국은 없어지고 마는 이 살덩어리 하나 편하게 해주려고 온갖 죄악을 다 짓는 것이다. 노력 없는 성공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대성공자는 대 노력가 아님이 없다. 그리고 이 육체를 이겨내는 그 정도만큼, 성공이 커지는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항상 말했다. ‘나의 발명은 모두 노력에 있다. 나는 날마다 이십시간 노력하여 연구했다. 그렇게 삼십년간 계속하였으나 한 번도 괴로운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의 정법이 두타제일(頭陀第一)인 가섭존자에게로 오지 않았는가. 총림을 창설해서 만고에 규범을 세운 백장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 〕‘고 하지 않았는가! 손끝 하나 까딱이지 않고 편히만 지내려는 생각, 이러한 썩은 생각으로써는 절대로 대도는 성취하지 못한다. 땀 흘리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남의 밥 먹고 내 일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서는 만사불성(萬事不成)이다. 옛부터 차라리 뜨거운 쇠로 몸을 감을지 언정 신심있는 신도의 의복을 받지 말며, 뜨거운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인의 음식을 얻어먹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결심 없이는 대도는 성취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잊지 말고 인지 말라, 일일부작 일일불식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만고철칙을! 오직 영원한 대 자유를 위해, 모든 고로(苦勞)를 참고 이겨야 한다.
7.예참(禮懺) 일체 중생의 죄과는 곧 자기의 죄과니, 일체 중생을 위하여 매일 백팔참회(百八懺悔)를 여섯 번 하되 평생토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행한다. 그리고 건강과 기타 수도에 지장이 생길 때에는 무두 자기 업과인, 1일 3천배를 일주일 이상씩 특별 기도를 한다. 또 자기의 과오만 항상 반성하여 고쳐 나가고, 다른 사람의 시비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8. 이타(利他) 수도의 목적은 이타에 있으니 이타심이 없으면 이는 소승외도(小乘外道)이니, 심리적, 물질적으로 항상 남에게 봉사한다. 자기 수도를 위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되, 추호의 보수도 받아서는 아니 된다.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는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한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이라도 귀신도 모르게 한다. 오직 대도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성(自性) 가운데 쌓아둘 따름,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 한 푼어치 착한 일에 만 냥 어치 악을 범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만 손해 볼 뿐이다. 예수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오른손으로 남에게 물건을 주면서 왼손도 모르게 하라.’ 세교(世敎)도 그렇거늘, 하물며 우리 부처님 제자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행(實行). 실행 없는 헛소리는 천 번, 만 번 해도 소용이 없다. 아는 것이 천하를 덮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털끝의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고인은 말하였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나니,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말했다. ‘옳은 말 천 마디 하는 것이 아무 말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오직 실행만 잇을 뿐 말은 없어야 한다. |
|
학륵나(鶴勒那)존자와 학이 된 제자 부처님으로부터 제 23대 존자이신 학륵나존자가 계셨는데 이 학륵나 존자는 제자가 없어서 근심을 하고 계실 때 스승이신 제 22대 마노라존자께 이르시기를 그렇게 고민하지만 말고 제자들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하여 어찌 제가 제자를 만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매일 밥을 먹을 때 밥 한 수저를 헌식 대에 가져다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헌식 대는 매 끼니마다 먹을 것을 조금 덜어 두어 짐승들이 와서 먹이로 먹는 자리입니다. 하여서 학륵나존자께서 그것을 일생을 실천하였고 마침내 500여 제자들 두게 되었습니다. 학륵나 존자께서는 마음을 깨달아 성불의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존자의 500여 제자들은 수행을 게을리 하여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과거 전생의 업으로 말미암아 시은- 시주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경성치 못하여 글자 그대로 500마리의 학이 되고 말았습니다. 23대 학륵나 존자는 500마리의 학을 몰고 다닌다 하여 학륵나존자가 되었습니다. 혹여 결혼을 하였어도 자손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자식을 갖는 것이 법인데 결혼을 하였어도 자식을 못 갖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법을 여겼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이 있으면 연이 있는 것인데. 인의 씨앗인 종자를 없애 버린바 자식을 못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을 없애버렸나? 이 인(因)은 인할 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근본자리에 있다고 하며 이 자리에서 인이 나오는데 인이 없어진 이유는 인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이 학륵나 존자가 매일 헌식 대에 헌식을 하여 그 밥을 먹고 그것이 인이 되어 중생으로 태어나 스님이 되어 수행을 했으나 그 시은은 갚지 못하고 원래 그대로 돌아가 그 500여 제자는 학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올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내가 밥을 먹기 이전에 밥 한술을 떠서 같이 다른 중생에게도 먹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날짐승도 있을 것이고 기어 다니는 짐승도 있을 것이고, 태로 난 중생, 알로 난 중생, 습한 곳에서 나온 중생, 변화해서 나온 중생, 생각이 있는 중생, 생각이 없는 중생, 몸이 있는 중생, 몸이 없는 중생. 이와 같이 하여서 구류 중생들이 헌식 대에서 밥을 몇 알 먹고 그로 인하여 사람의 몸을 받아 500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아주 분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 같지만 제가 항상 간곡하게 말씀드리지만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는 세계만이 이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는 일부분, 극소수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한없이 많습니다. 그러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무슨 법으로 다스려야 하느냐, 우리 종교인들은 이것을 잘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귀로 듣는 세계만 세계인줄 알지만 귀로 듣지 못하는 소리가 이 세상에는 더 많으니 거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무엇으로 대응하여 다스려야 할 것인가. 본래 여기에 서 있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물 한 방울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대로 물입니다. 지수화풍의 사대에서 작게 보자면 물 한 방울로 나의 존재가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물 한 방울이 나를 만들었다고 볼 때 내가 떠놓은 밥풀을 까치들이 와서 하나씩 주어먹고 다시 그 인으로 연하여 500 제자가 되었다는 말이 과연 틀린 말이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제자가 되어서 자기가 자기를 모르고,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다시 500명의 제자가 학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그 존자가 학자를 써서 학륵나 존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곳은 없는데서 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마이크를 잡고 설법을 하는 화계사 스님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가 물 한 방울을 받고 인의 종자를 얻어 사람으로 변신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자손이 없는 여러분들은 무엇인가 인을 짓지 못하여, 씨앗 종자 의식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밖의 연을 만나지 못하여 자손이 없습니다. 열심히 정전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염불하는 것이 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밥 먹기 전에 밥 한술을 떠서 어느 한곳에 두어 업의 연으로서 다른 중생이 그 밥을 먹고 변화하고 변화하여 나의 후손을 이어 태로 낳는 중생으로 화하더라. 이 학륵나 존자가 말씀하시기를 인득 심성시(認得心性時) 마음으로서 성품을 알아 얻을 때는 가설 불사의(可設不思議) 가히 불가사의라고 말할지라도 요요 무가득(了了無可得) 깨달아도 얻은바 없으니 득시 불설지(得時不說知) 깨달았을 때에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가히 생각이나 뜻으로도 알아 헤아릴수 가 없다고 학륵나 존자가 말합니다. 우리가 견성을 했다. 성불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득시 불설지라, 만일 차후 내가 얻었다고 할 때는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 성품을 본 사람이 나 견성했소, 하고 말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분명하게 얻을 것이 없습니다. 다시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하다보면 기도가 넘쳐버립니다. 우리가 가마솥에 불을 떼서 밥을 할 때 밥이 한번 우글우글 끓어 넘칩니다. 그러면 불을 그만 떼고 아궁이의 불을 끄고 그 밑불로 밥을 잘 뜸을 들입니다. 기도는 하는 바 없이 하여야 하는데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하게 되면, 기도를 욕심껏 하게 되면 뭐가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산신기도를 밤 자시 -12시에 열심히 합니다. 산왕대신 산왕대신하면 꼭 번 기도를 이루어 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너무 욕심껏 부르니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넘쳐 기도에 집착을 하면 뭐가 보입니다. 산신님이 댓돌위에 어흥!하고 턱 나타납니다. 기겁을 해서 쫓아 내려와 “아이고 선덕스님 큰일 났습니다. 산왕대신이 나타났어요!”하며 난리를 피웁니다. 가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자기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씁니다. 빌 공자와 꽃 화자를 써서 공화(空花)다. 허공에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산신기도를 할 때 산왕대신이 나타나기를 열심히 빌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열심히 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는 바 없이 하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면 뭐가 막 나타나요. 그러면 그것이 신일 줄 알고 막 대화를 합니다. 이 신(神). 이것이 정신을 똑바로 차렸을 때는 정신 신, 정신이 흐리멍텅 할 때는 통할 신, 이렇게 3자로 읽습니다. 옥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신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모두 다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도. 그렇죠? 그래서 득시 불설지라, 얻을 때는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도를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자는 나기도 열심히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스님 나 백일기도 열심히 해서 끝마쳤는데 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죠? 하고 물어본단 말입니다. 이것은 뭐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는 바 없이 할 때 성취가 되지 욕심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득시 불설지라 얻을 때는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얻었을 때는 그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얻을 것이 없다. 견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볼견 자에다가 성품 성, 마음을 봤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얻은 것입니까? 본 것이지, 얻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원이 성취되지마는 욕심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기도를 하면 여러 가지가 보입니다. 그러면 막 대화를 나누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은 절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잡아주는 것이 부처님의 법입니다. 참선하는 분들 자기 마음을 얻은 것 같아 아주 기분이 좋아서 빙그레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들 하늘 보고 웃게 되거든, 잘못됩니다. 똑똑히 마음을 차리고서 정신 신자가 되어야지, 귀신 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 말입니다. |
|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꿈 석왕사로 얾긴 나한과 이성계 <안변· 석왕사(釋王寺)> 조선국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아직 장군 시절일 때다. 날로 부패해 가는 고려왕조를 탄식하던 그는 청운의 뜻을 품고 팔도강산을 두루 돌며 무예를 익히는가 하면 명산대찰을 찾아 제불보살님의 가호를 빌었다. 그가 함경도 안변 땅에 머물던 어느 날 밤, 이성계는 참으로 묘한 꿈을 몇 가지나 꾸었다. 『거참 이상한 일이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꿈을 하룻밤에 몇 가지나 꾸다니....』 이튿날 새벽 눈을 뜬 이성계는 간밤 꿈자리가 어쩐지 석연치 않아 하나하나 꿈을 되새기며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다. 풀리지 않는 꿈 때문에 답답해하던 그는 대장부 체통도 접어둔 채 그 마을에서 해몽을 잘한다는 노파를 찾아갔다. 『내 간밤에 하도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이렇게 찾아왔으니 해몽을 좀 부탁하오』 상세히 설명하는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들은 점쟁이 노파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신중하게 말문을 열었다. 『대장부가 받은 꿈의 계시를 어찌 미천한 아낙이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서족 40리 쯤 들어가면 설봉산이 있고 그 산허리 조그만 토굴에 신승이 한 분 살고 계십니다. 그 도인 스님은 토굴을 파고 공부하신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한 번도 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합니다. 그 스님께 가면 잘 풀어주실 것입니다 』 이성계는 그 길로 설봉산 도인 스님을 찾아갔다. 토굴에 당도하니 스님은 선정에 들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스님께 삼배를 올린 이성계는 찾아온 사연을 밝혔다. 『이상한 꿈을 꾸셨다구요? 거 어디 들어봅시다.』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온 고을 닭들이 일제히 울어대더니 집집마다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꽃이 마치 비 오듯 떨어져 내렸습니다. 다시 또 꿈은 이어져 저는 어느 집 헛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문득 꿈을 깨게 됐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요?』 『참으로 그런 꿈을 꾸었다면 함부로 발설해선 안 될 꿈입니다.』 스님은 은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이 꿈은 아주 길몽입니다. 마을의 닭들이 일제히 울어댄 것은 「꼬끼오, 꼬끼오」한것이니 이는 반드시 고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며 방아찧는 소리는 귀하게 될 것을 축하하는 의미입니다. 또 헌 곳간에서 서까래 세 개를 가로졌으니 그 모양은 마치 임금 「왕」자와 같지 않습니까.』 스님의 말을 들은 이성계는 흥분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상기된 얼굴에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스님, 그럼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스님은 말없이 시 한 수를 적어 내놓았다.
꽃이 떨어졌으니 열매가 맺힐 것이요, 거울이 깨졌으니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 스님은 다시 이성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대 얼굴엔 군왕의 기상이 가득하오. 허나 아직 겁기(劫氣)가 다 벗어지지 못했소. 성현에게 기도를 올리고 공덕을 지어야 일이 성취돌 것이오. 앞으로 3년은 더 기다려야 할 터이니 그 동안 이곳에 절을 세우고 오백 나한을 모셔 기도를 잘 올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일은 나만 알고 비밀을 지킬 터이니, 장군도 꿈 이야기를 입 박에 내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오.』 스님께 스승의 예를 올리고 물러난 이성계는 기도 올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안변 땅에 절을 세우고는 후일 임금 왕 자를 해석했다 하여 「석왕사」라 불렀다. 그 후 이성계는 오백 나한을 모시기 위해 석왕사 경내에 응진전을 건립했다. 때마침 함경도 길주에 있는 광적사가 병화로 폐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그 절에 방치된 대장경과 오백 나한상을 석왕사로 모셔 오기로 했다. 길주에서 원산포까지 배로 옮겼으나 원산서 석왕사까지는 이성계가 직접 무거운 돌나한님을 한 분씩 등에 업고 정성스럽게 모셨다. 이렇게 498상을 옮기고 마지막 두분이 남게 되자 그는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었는지 두 분을 한꺼번에 옮겨 모셨다. 다음날 아침 기도를 드리고 나서 살펴보니 이게 웬일인가. 간밤에 분명히 오백 나한님을 다 모셨는데 맨 나중에 모셔온 존상 한분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놀란 이성계는 사방을 두루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단념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그 존상이 나타날 줄이야. 『그대의 신심이 그렇게 여일치 못해서야 되겠는가? 한 분씩 업어 오시다가 나만 덧붙여 업어가다니, 나는 그렇게 정성이 부족한 푸대접을 받기가 싫네. 해서 묘향산 비로암에 와 있으니 그리 알게.』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성계는 날이 밝는 즉시 묘향산 비로암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곳에 나한상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이었다. 즉시 달려간 이성계는 정중한 자세로 참회한 후 다시 그 나한님을 모셔왔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그 나한님은 또 없어지고 말았다. 이성계는 할 수 없이 그 나한존상의 자리에 명패만을 모셨다. 석왕사 응진전에 나한님이 5백 명에서 한 분 모자라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라고 한다. 『큰일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일러준 스님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긴 이성계는 천 일간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올려 마침내 역사의 새 장을 열게 되었다.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제일 먼저 신승을 찾아 왕사로 모시니 그 스님이 조선조 5백년을 기반을 닦는 데 큰 도움을 준 무학대사였다. 이성계는 등극 후 명하여 석왕사를 도에서 으뜸가는 거찰로 만들었다. 건문 신사(태종 1·1401)년에는 친히 이곳에 와 동구에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으니, 후일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고 좋은 배를 임금에게 올린 것은 그때의 성교였다. 이렇듯 유서 깊은 절이나 지금은 갈 수 없는 「북한의 사찰」일 뿐이다. |
|
구마라존자와 치계(꿩)의 전생록 은혜를 갚은 꿩 <치악산 ·상원사> 옛날 강원도 땅에 사는 한 젊은 선비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영월과 원주 사이에 드높이 솟은 험준한 치악산을 넘어야 하는 나그네의 발길은 바쁘기만 했다. 수림이 울창하고 산세가 웅장한 이 산은 대낮에도 호랑이가 나와 사람을 해치고 밤이면 도적떼가 나온다는 무시무시한 곳이기 때문이다. 괴나리봇짐에서 활을 꽂고 치악산을 오르던 젊은 과객은 산 중턱에서 잠시 다리를 쉬면서 준령스런 산의 운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영산이로구나!』 이때였다. 바로 몇 발짝 거리에서 꿩의 울음소리가 절박함을 호소하는 듯 요란하게 들렸다. 청년 과객은 고개를 들어 밭이랑을 보았다. 그곳에는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꿩을 향해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꿩은 구원을 청하는 듯 더욱 절박하게 「꺽꺽」울어댔다. 깊은 산중에 울려 퍼지는 꿩의 울음소리에 청년은 구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구렁이가 붉은 피를 쏟으며 힘없이 쓰러지자 꿩은 잠시 머뭇거리며 꺽꺽 울어댔다. 생명의 은인에 대한 감사의 뜻인 듯 좀 전의 울음과는 달랐다. 꿩은 몇 번인가 청년을 향해 울더니 훌쩍 날아가 버렸다. 과객은 땅거미가 지자 걸음을 재촉했으나 산을 넘기엔 아직도 길이 멀었다. 인가가 있을 리도 없고 과객은 나무 밑에 낙엽을 펴고 하룻밤 쉬어 가기로 했다. 막 누우려는데 청년의 눈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이 산중에 웬 불빛일까?』 청년은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의 눈앞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 한 채가 나타났다. 청년은 깊은 산중에 이렇게 큰 기와집이 있다는 것이 내심 의아스러웠으나 혹시 절인지도 모른다 싶어 우선 주인을 찾았다. 『뉘신지요?』 대문 안에서는 뜻밖에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하룻밤 신세를 좀 질까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대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지요.』 『감사하오.』 청년은 대문을 들어서며 여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절세미인이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이 산중에 홀로 지낸다니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 있을 거야.」 여인의 미모에 넋을 잃은 청년은 안방으로 안내되었다. 『어떻게 이런 심산유곡에 홀로 오셨나요?』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길입니다.』 『피곤하시겠군요. 저녁상을 차려 오겠어요.』 잠시 후 밥상이 들어왔다. 밥상에는 먹어본 일이 없는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청년은 식사를 하면서 궁금증을 풀려는 듯 슬그머니 묻기 시작했다. 여인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녀는 본래 강원도 윤부자로 알려진 윤씨댁 셋째 딸입니다. 갑자기 집안에 괴물이 나타나 폐가가 되고 식구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후 저는 이곳에 혼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거참 딱한 사정이구려.』 『오늘밤도 괴물이 나올까봐 무서워 떨고 있다가 손님이 오셔서 잠을 잘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청년은 안방에 자리하고 잠을 청했다. 밤이 깊어지자 창 밖에선 바람이 불고 멀리서 승냥이 울음이 을씨년스럽게 들려왔다. 그때였다. 『손님.』 문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시오?』 『무서워서 도저히 잘 수가 없어요. 윗목에 앉아 날을 샐 테니 들어가게 해 주세요.』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한방에서 자다니, 청년은 난감했다. 잠시 망설이던 청년은 여인에게 잠자리를 내주고 윗목으로 옮겼다. 여인은 수줍은 듯 등을 돌리고 옷을 벗더니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창밖에 달빛이 휘영청 밝은데 여인은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조차 없다. 청년은 한걸음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운 중압감에 눌려 눈을 떴다. 그 순간 『악-.』 청년은 그만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을 징그러운 구렁이가 칭칭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온 힘을 다해 몸을 빼려 노력했으나 그럴수록 구렁이가 더욱 힘껏 감아대는 듯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구렁이의 음성은 바로 절세미녀의 목소리였다. 『누....누구냐?』 『네가 낮에 활로 쏘아 죽인 구렁이의 아내다.』 『뭐....뭐라구!』 『너로 인해 남편을 잃었으니 오늘밤 나는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으로 둔갑했다. 이제 너를 물어 죽일 것이다.』 『살생을 목격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리 됐으니, 제발 목숨만 좀...』 『만약 범종소리가 네 번 울린다면 목숨을 살려주마.』 바로 그때, 대청마루 쪽에서 「딩」하고 종소리가 울려 왔다. 『아니 저 종소리가?』 종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지자 구렁이는 그만 힘이 빠지면서 당황해 했다. 『딩- 딩 - 딩-』 종소리는 세 번 더 울렸다. 구렁이는 몇 번 몸을 흔들더니 스르르 몸을 풀어 방 밖으로 나갔다. 청년은 정신을 가다듬어 벌떡 일어나 대청으로 달려갔다. 『아니 이게 웬 꿩들인가?』 대청마루 바닥엔 머리가 깨져 피투성이가 된 꿩 네 마리가 죽어 있었다. 꿩들은 자기들의 은인인 청년에게 보은키 위해 목숨을 던져 청년을 구한 것이다. 그 후 과거에 급제한 청년은 꿩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까치 「치」자를 따서 본래 적악산이던 이 산 이름을 치악산이라 불렀다. 그리곤 꿩이 죽은 그 자리에 절을 세워 불도를 닦으니 그 절 이름이 오늘의 강원도 원성군에 위치한 상원사이다. |
|
솥을 아홉 번 건 구정선사(九鼎禪師) “네 이놈, 그렇게 늦게 나와서야 어떻게 신용을 지킬 수 있겠느냐?” 노승의 불호령에 젊은이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인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인데 이미 인시를 친 지도 꽤나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다시 나오너라. 인시가 칠 때까지 나와야 하느니라.” “큰 스님, 죄송합니다. 내일은 일찍 나오겠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옵소서.” 노승은 젊은이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부드럽게. 그러나 아주 진진하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늙은이보다도 동작이 굼떠서야 쓰겠는가?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신용이 있어야 하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약속을 져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알았으면 내일 다시 오너라.” 젊은이는 벌써 두 번째,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간 것이었다. 한번은 늦잠을 자다가 묘시는 되어서야 나갔고, 그리고 오늘은 인시 중에 나갔던 것이다. 연거푸 이틀을 내리 노승보다 늦게 나간 젊은이는 잠을 아주 약속 장소에 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이는 그날 밤 삼경이 되자 노승과의 약속 장소로 나갔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고즈넉한 밤이었다. 초겨울로 접어드는 밤의 공기는 제법 살 속을 파고들었다. 젊은이는 이미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거, 추운데 괜히 나왔나? 이러다가 혹시 얼어 죽기라도 하는 거 아냐? 그렇지만 노스님께서 도를 배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련과 고통도 참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 정도 초겨울 날씨쯤이야 당당하게 참아 내야지.’ 청년은 비단 장수였다. 그날그날 비단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해 가던 젊은이가 하루는 대관령을 넘던 중 고갯마루에서 쉬고 있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노승 한 분이 누더기 옷을 입고 고갯마루에 서서 벌써 여러 시간을 꼼짝 않고 있었다. 비록 누더기는 입었지만 노승에게서 풍겨오는 인자하면서도 천지를 가늠할 만한 풍모에 젊은이는 끌리듯 다가갔다. “실례지만 큰 스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옵니까? 제가 뵙기에 큰 스님께서는 벌써 몇 시간째 서서 꼼작 않고 계시는데요.” 노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중생들에게 공양할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일세.” “중생들이라뇨? 어떤 중생 말입니까?” “내 이 누더기 속에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중생이 있네. 소위 이라고 하지. 이 이들이 내 피를 빨아먹으려면 내가 가만히 있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일세.” 이 말을 들은 젊은이는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젊은이는 문득 세속의 삶이 하찮게 여겨졌다. 이런 노승을 따라간다면 커다란 배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마음속에 노스님의 제자가 될 결심을 굳혀갔다. “큰스님! 큰스님을 모시고 큰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힘껏 정진하겠습니다.” 젊은이의 말이 떨어지자 노승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중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랴, 세상의 영화를 탐내려는 것도 아니요, 부유함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등 따습고 배불리 먹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세상의 욕락을 버리기 위함이요, 우주,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요, 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시련과 역경도 참아 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자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가 대답했다. “어떠한 어려움도 능히 참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를 인도하리니 내일 새벽 인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나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나온 지 이틀, 그런데 그 이틀 모두 큰스님보다 늦게 나와 꾸지람만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삼경에 와서 노스님을 기다리고 있을 참이었다. 살 속을 파고드는 냉기가 젊은이에게 시간을 더디게 가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그는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노스님이 서 계셨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야 틀림없는 합격이겠지?’ 그러는 중에 노스님의 호령이 떨어졌다. “자로고 도를 닦는 사람은 광음을 금쪽같이 아껴야 하거늘 이렇게 무가치하게 보내 다니..그래 몇시에 나왔느냐?” “네, 큰스님! 어젯밤 삼경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젯밤 삼경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자네는 시간을 너무 헤프게 썼어. 약속이란 서로 간에 시간을 절약해서 헛된 낭비를 줄이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처럼 일찍 나왔으니 자네는 그 만큼의 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시간의 낭비라고요?” “약속이란 일각을 먼저 나오면 자신의 일각을 낭비함이며, 일각을 늦게 나오면 상대방의 일각을 낭비시킴이니라. 내일 다시 나오너라.” 나흘째 되는날, 젊은이는 시간을 맞추어 나갔다. 지난 아침 되돌아오면서 거리를 짐작해 놓았으므로 얼마가 걸리는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승보다 간발의 차이로 먼저 도착했다. 그러자 노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스님을 따라갔다. 오대산 동대 관음암이었다. 관음암에 도착한 노스님이 젊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째서 내 뒤를 졸졸 따라 왔는가. 어떤 목적이라도 있는가? 젊은이가 대답했다. “네, 큰스님. 중이 되고 싶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가르침을 달게 받겠나이다.” “뭐, 중이 되고 싶다고? 그렇다면 어떤 일이라도 능히 참고 해내겠느냐?” “네, 큰스님!” “너 솥은 걸어보았느냐? 그렇다면 우리 절 솥을 다시 걸어야 하겠으니 너는 오늘부터 솥을 걸도록 해라.” 젊은이는 솥을 걸었다. 그의 솥 거는 솜씨는 이미 인근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솥 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노승은 ‘오늘부터’라는 말을 남겼다. 솥은 하나뿐이었다. 젊은이는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아 솥을 아주 근사하게 걸어 놓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아마 노스님께서 돌아오셔서 보시면 마음에 흡족하실 거야. 암.” 들뜬 마음으로 젊은이는 노승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저녁때가 되어 탁발에서 돌아 온 노승에게 젊은이는 자랑스레 말했다. “큰스님 솥을 다 걸었습니다. 한 번 보시지오.” 노승은 젊은이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노승은 솥 건 것을 보더니 혀를 차면서 말했다. “음! 솥을 잘못 걸었구나. 다시 걸어라.” 말을 마치고 노승은 조실로 돌아갔다. 젊은이는 다시 솥을 걸었다. 초겨울이었다. 바깥 날씨가 저녁때가 되니 더욱 쌀쌀했다. 그는 짚을 썰어 흙에 섞어 잘 이겼다. 그리고 솥을 걸었다. “큰스님, 솥을 다 걸었습니다.” 조실에서 노승은 끙 하더니 부엌으로 나왔다. 노승은 주장자로 새로 건 솥을 꾹 눌러버렸다. 아직 굳지 않은 부뚜막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잘못 되었으니 다시 걸어라.” 젊은이가 보기에는 잘못 된 곳이 없었지만, 그는 전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청년은 이와 같이 허물고 다시 걸고 하기를 아홉 번이나 거듭하였다. 아홉 번에 이르도록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홉 번째 솥을 걸었을때 노승은 비로서 인정을 했다. “으음! 그래, 이제 제대로 걸렸구나.” 젊은이가 보기에는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노승의 인정을 받고 보니 기뻤다. 노승은 젊은이에게 출가할 것을 허락하고 그의 머리를 깎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솥을 아홉 번이나 걸었다는 뜻에서 ‘구정’이란 불명을 지어주었다. 구정스님은 그 후 열심히 정진하고 하심하여 마침내 대선지식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
|
달마대사
인도의 향지국 왕족 출신으로 본 이름은 보리다라입니다. 부처님 전등 제 27조이신 반야다라 존자로부터 법을 받아 존자로부터 달마라는 이름을 받으니 공 28조이십니다. 존자는 동쪽의 중국 땅에 불법의 인연이 성함을 보시고 바다 위에 작은 배를 띄우고 3년 간의 기간을 보낸 후에 중국으로 오시니, 양무제와의 문답, 제자 혜가와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달마 대사의 정법은 혜가 스님에게 전해지니 이가 바로 제 29조 혜가대사이십니다. 법을 전하시며 후에 오조 홍인대사에게서 육조 혜능이 나오고 이로부터 선종이 발양됨을 다음과 같은 전법 시로 남기셨습니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해 어리석은 이를 제도하려는 것이니 한 송이의 꽃에서 다섯 꽃잎이 벌어져 열매는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또한 달마대사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달마도를 보면 대머리에다가 눈을 부릅뜬 산적의 얼굴인데 본시 그의 모습이 그렇게 험한 것은 아니고 아주 잘 생긴 인도의 서구적인 드라비다 종족이 보여주는 그런 준수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주 못생긴 사람(일설에 의하면 도력을 가진 산도둑이라고 함)이 지나가다가 낮잠을 자고 있는 달마대사의 얼굴에 반해 버린 나머지 그 몸을 바꿔 가지고 챙겨 달아나는 바람에 달마대사는 무섭게 생긴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 일은 수나라 황제가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냐고 해서 달마대사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가 쫓겨나게 된 시점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중국에서는 당시에 잘 생긴 외래인 이라고 볼 수 있는 인도의 왕자 달마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다가 양제에게 쫓겨나서 소림사를 짓고 거기서 수도하는 승려들을 많이 키울 때쯤에는 아마도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무서운 얼굴로 바뀌었을 것이다. 여기서 달마의 얼굴 모습 전환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사람이란 본시 마음자리에 따라서 그 안면상이 변하는 법이므로 양제에게 수모를 당하고 쫓겨난 시점에서 아무리 도력이 높은 달마대사라고 해도 찡그린 얼굴이 지속되어 그저 중들에게 공부나 열심히 하고 다시는 왕족 같은 허망한 인간들과는 교류하지 말아라 하고 주장하다 보니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흉하고 무서운 얼굴로 변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습이 변한 달마를 보고서 너무나 달라졌으니까, 산적에게 몸을 도둑질 당했다고 변명했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말이 나중에 전설이 된 것은 아닐까? 혜능대사 부친은 본관이 범양인데 죄천되어 영남이 신주로 옮겨 살았다. 혜능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땔나무를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나뭇꾼 소년이었다. 어느날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고 문득 마음이 밝아져 그 손님께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손님이 말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 홍인대사님을 예배하였는데 그곳의 문하생이 천명이 넘는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대사께서 승려와 속인들에게 이 ‘금강경’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대사를 예배하였다. 홍인대사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느냐? 또 내게서 새삼스레 구하려는게 무엇이냐?” 혜능 왈, “제자는 영남사람인데 지금 큰 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너는 영남사람이오,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홍인은 더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고 더 말하지 않고 그를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혜능은 한 행자승이 이끄는 대로 방앗간에 가서 여덟 달동안 방아를 찧었다. 하루는 홍인이 문하생들을 다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반야의 자혜를 써서 계송 한 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거라. 내가 너희들의 계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조사가 되게 하리라.” 사람들은 물러나와 의논했다. “신수화상은 우리들 중의 대사형이므로 굳이 우리들이 계송을 지어 큰 스님에게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가 법을 얻은 후에 육조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 신수는 혜능보다 먼저 오조 홍인의 문하로 들어와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혜능에게는 대선배라 할 수 있다. 신수는 이것을 알고 심한 부담감을 느껴 번민을 하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삼경에 남쪽의 복도에 몰래 계송을 적었다.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오조 홍인이 아침에 그것을 보고 신수가 쓴 것임을 즉각 알아보고 신수에게 말했다. “네가 지은 이 계송은 소견은 당도했으나 다만 문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범부들이 이 계송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비록 타락하지는 않겠으나 진리는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너는 며칠 동안 더 생각하여 다시 한 계송을 지어 나에게 보여라.” 신수는 돌아가 며칠을 지냈으나 계송을 짓지 못했다.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계송을 외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혜능이 그것을 들었다. 혜능은 한 번만 듣고도 단번에 이 계송이 큰 뜻을 알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은 본래 글을 쓰지 못하는지라 그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읊는 계송을 복도에 쓰게 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 그리고 또 하나의 계송을 읊었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오,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나니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오조 홍인대사는 이 계송을 보고 즉각 그가 큰 뜻을 알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여러 사람들이 그를 시기할까 두려워 밤에 몰래 그를 불렀다. 그는 혜능을 조사당으로 불러 ‘금강경’을 강론해주었다. 혜능은 한 번 듣고 모두 깨우쳐 그날 밤으로 법을 전수받았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홍인은 그에게 의발을 전수하며 말했다. “너는 이제 육대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서 신표를 삼을 것이로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우치도록 해라. 옛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 목숨은 실날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즉시 길을 떠나도록 해라.” 혜능은 가사와 법을 받고 밤중에 남쪽으로 떠났다. 두 달가량 되어서 대유령에 이르렀는데 그때 가사와 법을 빼앗으려고 그의 뒤를 추적하던 진혜명이란 승려가 있었다. 혜명스님은 가사와 바루를 가지고 가려고 들었으나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혜능대상에게 “제가 짐직 멀리서 쫓아 온 것은 법을 구하고자함이요, 가사와 바루를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에 혜능대사가 법을 설하니 혜명스님은 즉시 깨달음을 얻었다. 혜능대사는 혜명스님으로 하여금 북쪽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교화하라고 말씀하시니 명에 따라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 이후 혜능은 남쪽지방을 순례하며 불법을 전파했고, 소주 동남쪽 삼십오리 떨어진 조계산에 머물러 수행법이 혁신을 주장했다. |
|
인도 보타낙가산 관음성지 원래 관음보살 설화의 탄생지인 인도에는, 보타(寶陀)에 낙가산(洛伽山)이라는 곳이 있고, 이 낙가산 동쪽 바닷가에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굴이 하나 있는데, 이 굴은 대관음보살인 백의(白衣) 보살이 거처하던 성지라고 일컬어 왔다고 한다. 이곳은 항시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파도가 심하여 일찍 아무도 들어가 본 사람이 없는 곳이기에 불교의 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불경을 공부하신 의상스님도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싶어서 바로 불경에 나오는 곳과 흡사한 홍련암 관음굴을 발견하고 그 위에서 기도를 한 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결국 관음보살을 친견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저 관음신앙이 생겼다고 볼 수 있는 중국에서 절강성 보타도가 관음신앙이 성지인데 이 곳도 바닷가이다. 이 보타도에 조음동 사원이란 곳이 있다. 조음동(潮音洞), 곧 바닷물 소리를 듣는 굴에 지은 이 사원은 바닷물이 절벽 아래까지 밀려들어와 절벽을 치며 파도를 일으키는 홍련암 관음굴과 그 구조가 비슷하다. 마치 홍련암과 형제처럼 담아있다. 그런데 이 중국 최대의 관음보살 성지가 한국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면서 흥미를 더하고 있다. 이 보타도 한가운데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관음원에는 원래 일본의 스님과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남송(南宋:1127~1279)때 저작된 「불조통기(佛祖統紀)」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일본에서 온 혜악이라는 스님이 산서성 오대산에서부터 관음성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고 하는데. 보타도앞을 지날 때 배가 도대체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배가 나가지 않자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하고 궁리한 끝에 관음상과 중국 동해와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문이 아니가 생각이 들어서 배를 내려 이 섬에 올라가 관음상을 섬에서 봉안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자 비로서 배가 움직였다고 한다. 이처럼 관음상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불긍거(不肯去)’라는 수식어가 절 이름 앞에 붙어 있고, 이 일대는 일본 스님과의 인연으로 관음보살이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 학자들이 공부를 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관음보살을 봉안하려고 했던 것은 일본 스님이 아니라 신라의 상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불긍거관음원이 일본승려와 인연이 있다고 기록된 것은 앞에서 본대로 「佛祖統紀(불조통기)」라는 책인데 , 그보다도 140여 년전인 1124년에 나온 책으로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徐兢(서긍)의 「高麗圖經(고려도경)」에서 전혀 다르게 기록돼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高麗圖經(고려도경)」에서 관음사 관련 항목을 보면 “보타도 돌다리에 오르면 깊은 산록에 소량(蕭梁)때 세운 보타원전에 영감스런 관음상이 있다. 옛날 신라상인이 오대산에서 불상을 새겨 가지고 와서 귀국하려 하자 바다에 암초가 나타나서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불상을 암초에 올려놓고 승려 종악이 보타원전에 봉안한 후에 선박의 왕래가 가능해졌으며, 복을 빌면 감응이 없지않다.” 라고 되어있다. 이 「高麗圖經(고려도경)」은 「佛祖統紀(불조통기」보다 연대가 앞선 만큼 그 만큼 더 당대에 가까운, 즉 보다 사실에 가까운 기록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당시 동중국해를 주름잡던 신라의 상인들이 관음신앙을 조국으로 가져가다가 생긴 설화인데. 후대 사람들이 기록하면서 신라의 상인을 일본 스님으로 잘못 적은 것이 분명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볼때 관음신앙은 원래 중국 내륙에 있던 것인데. 이를 우리 선조들이 바닷가로 가져와 곳곳에 봉안한 것임이 드러난 것이고, 그래서 우리나라의 관음보살 기도처들이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리라. 실제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지 얼마 지니지 않아서부터 관음신앙은 퍼져 나가기 시작해 서기 6세기말에는 신라 박제 등 삼국에 모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이 시기부터 관음보살상이 대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삼국유사’등에도 관음신앙의 기록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신라시대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밤낮 없이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났고, 꽃 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였기에 홍련암이라 하였다는 이 곳,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고 있어 창건 당시부터 법당 마루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이곳은 그 신비로운 창건설화를 이러가기라도 하듯 이적들이 계속 나타난 것이다. 1185(고려 명종 5) 독실한 불교신자인 병마사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관음굴 앞ㅇ서 분향하고 배례했을때 파란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세 떨어뜨렸다. 유자량은 크게 감격하여 시를 남기기도 했다. 바다 벼랑 높고도 아득한 곳 그 가운데 낙가봉 보문은 닫아도 닫히지 않네 명주는 내가 바라는 바 아니지만 청조와 이 사람은 상봉하였네 오직 바라옵나니 큰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 같은 모습을 뵈옵게 하옵소서 1683년(조선 숙종9)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는 공중에서 한 알의 명주(明珠)가 내려오는 이적이 있기도 했다. 이를 목격하고 환희에 찬 석겸(釋謙)스님은 곧 사리탑을 건립하고 탑의 이름을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이라 했다. 1694년에는 사리탑을 세우게 된 유래를 적은 공중사리탑비를 세웠다. 1930년 2월 25일, 현대의 고승 경봉(鏡峯)스님이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시작했는데 13일 째 되던 날 참선 중에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오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큰 정진력을 얻었다 한다. 스님은 이러한 인연으로 낙산사 원통보전과 홍련암 편액을 쓰기도 하였다. 이렇게 역대 내려오는 이적을 이번에도 다시 시현된 것이 아닌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홍련암을 비롯해서 전 세계의 대표적인 관음보살 성지는 바닷강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3대 기도처로 알려진 홍련암과 강화도 부문사, 경상남도 남해 상주의 보리암이 모두 바닷가에 있다. 관음보살, 곧 관세음보살은 말 그대로 세상의 고통받는 모든 중생이 소리를 살펴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어서, 한국에서는 석가모니불이나 정토신앙의 대명사인 아미타불보다 더욱 많이 신앙되어 왔다. 아마 이것은 관세음보살이 일반 민중들의 현실적인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벽히 뱃사람들이 많이 신봉해서 곳곳에 해수관음상도 세우고 있는데. 양양 낙산사 옆에 있는 동양최대이 관음입상 외에도 남해 상주 보리암에도 상주해수욕장과 망망한 대해를 은은한 미소로 내려보고 있는 해수관음보살상이 있다. 해수관세음보살은 우리 민족에게만 숭상되어온 관음보살로 알려져 있다. 많은 중생들이 소원을 풀기를 바라는 뜻에서 모신 것이리라. | |
|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한 나라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로서, 여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 천억 국토를 비추고,그 수명이 한량이 없어 백 천 억겁으로 셀 수 없다하여 극락전을 무량수전(무량수전)이라고 하며, 주불의 이름을 따라 미타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극락보전·무량수전·무량전·보광명전(보광명전)·아미타전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극락정토 신앙이 강하여 내부 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 [ 극락전 벽화 ]
|
|
1. 극락전 벽화 사찰에 가면 법당벽화로 심우도(尋牛圖)를 볼 수 있다. 소는 도가에서는 유유자적함, 오가에서는 의(義)를 상징했지만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자리'를 의미했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비유한 '심우도'가 이 같은 의미를 대표적으로 보여 준다. 선사들도 이러한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왔다. 고려 때의 보조국사 지눌은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했다. '소를 기르는 사람' 즉 참다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심우도'는 동자와 소를 등장시켜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 때 소는 인간의 진면목인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표현하기 때문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
|
1) 심우(尋牛) : 소를 찾아 나서다. 처음에 사람이 들에서 소를 찾는 모습으로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춰진 원성(圓成)인 심우(尋牛)를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는 것.
망망발초거추심(茫茫發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水활山謠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但聞楓樹晩蟬吟)도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 물은 넓고 산은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피로해 소 찾을 길은 없는데, 오로지 저녁 나뭇가지 매미 울음만이 들리네. |
|
|
|
2) 견적(見積) :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소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
수변림하적편다(水변林下跡偏多) 방초리피견야마(芳草離被見也마) 종시심산갱심처(慫是深山更深處) 요천비공즘장타(療天비孔즘藏他)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럽게 많으니, 방초를 헤치고서 그대는 보는가 못보는가? 가령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등창코를 어찌 숨기랴! |
|
|
|
3) 견우(牽牛) : 소를 보다. 수행자가 멀리서 소의견모습을 어렵풋이 본 것을 묘사한 그림으로 문법수학 (聞法修學)의 공(空)에 의해 마음의 소를 발견한 것을 상징화하는 불화
황앵지상일성성(黃鶯枝上一聲聲) 일난풍화안유청(日暖風和岸柳靑) 지차갱무회피처(只此更無回避處) 삼삼두각화난성(森森頭角畵難成)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사하고 바람은 서늘한데 언덕의 버들은 푸르기만 하다. 더 이상 빠져나아 갈 곳이 다시 없나니,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
|
|
|
4) 득우(득우) : 소를 얻다. 동자가 소를 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아직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므로 더욱더 열심히 수행 정진해야 함을 표현한 것.
갈진정신획득거(竭盡情神獲得渠) 심강력장졸난제(心强力將卒難除) 유시재도고원상(有時裁到高原上) 우입연운심처거(又入煙雲深處居)
온 정신을 다하여 이 놈을 잡았으나, 힘 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땐 고원 위에 올랐다가도,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에 들어가 머무누나. |
|
|
|
5) 목우(牧牛) : 소를 기르다. 소에 고삐를 물리고 돌아오는 모습으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보임)의 단계, 즉 깨달음 뒤에 오는 방심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책한 것.
편삭시시불리신(鞭索時時不理身) 공이종보입애진(恐伊縱步入埃塵) 상장목득순화야(相將牧得純和也) 기쇄무구자축인(기쇄無拘自逐人)
채찍과 고삐를 늘 몸에서 떼지 말라. 두렵도다, 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에 들어갈까봐.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고삐를 잡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을 따를 것이다. |
|
|
|
6)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다. 동자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으로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들었음으로 피안의 세계에 나아가게 된다는 것.
기우이리욕환가(騎牛이리欲環家) 강적성성송만하(강笛聲聲送晩霞) 일박일가무한의(日拍一歌無限意) 지음하필고순아(知音何必鼓脣牙)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오랑캐 피리소리가 저녁 놀에 실려간다.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곡조 아는 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
|
|
|
7) 망우존인(忘牛存人) : 소를 잊고 사람만 있다. 집에 돌아왔지만 소는 간데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있음을 묘사, 즉 본각무의(본각무위)로 돌아왔으나 쉬지 않고 수련해야 한다는 뜻.
기우이득도가산(騎牛已得到家山) 우야공혜인야한(牛也空兮人也閑) 홍일삼간유작몽(紅日三竿猶作夢) 편승공돈초당간(鞭繩空頓草堂間) |
|
|
|
8) 인우구망(인우구망) : 사람도 소도 다 잊다. 자기 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텅 빈 원만상, 주객분리 이전 상태로 정(정)을 잊고 세상의 물(물)을 버려 공(공)의 세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 것.
편삭인우진속공(鞭索人牛盡屬空) 벽천요활신난통(壁天療闊信難通) 홍로염상쟁용설(紅爐焰上爭容雪) 도차방능합조종(到此方能合祖宗)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는 다 비어 있나니, 푸른 허공만이 가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도다.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라. |
|
|
|
9) 반본환원(返本還元) : 근원으로 돌아가다. 티끌 하나도 없는 수록산청(수록산청)의 광경으로 사람의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보게 된 것.
반본환원이비공(返本還元已費功) 쟁여직하약맹롱(爭如直下若盲聾) 암중불견암전물(庵中不見庵前物) 수자망망화자홍(水自茫茫花自紅)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 보니 온갖 노력을 기울였구나!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장님 같은 것을,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인지하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
|
|
|
10) 입전수수(입전수수) :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 중생들에게 복과 덕을 베풀어 불교의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
료흉선족입전래(료胸跣足入廛來) 말토도회소만시(抹土途恢笑滿시) 불용신선진비결(不用神仙眞秘訣) 직교고목방화개(直敎枯木放花開)
맨 가슴 맨 발로 저자에 들어오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위를 쓰지 않아도, 당장에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게 하누나! | |
|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법당으로, 사찰의 주불전(主佛殿)인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고 한다. 원통전이란 명칭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 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반면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의 성격을 띨 경우에는 관음전이라 한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즉 중앙의 아미타불과 좌우의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모신다. 관음전 안에는 관음상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양류(煬柳)관음·십일면(十一面)관음·해수(海水)관음·백의(白衣)관음 등을 모신 곳도 있다. 그리고 후불탱화(後佛탱畵)로는 주로 아미타불화로 모신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大悲殿)이라는 현판을 걸기도 한다.
| |
|
|
|
|
|
|
|
|
|
용왕단(龍王壇)
사찰에서 용왕 또는 용신을 모셔 둔 사당을 말한다. 사찰에서 용은 주로 법당 안팎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 더러는 별도로 단을 두고 상(像)을 만들어 모시기도 한다. 해안이나 섬에 있는 사찰에는 그러한 예가 흔하다. 용은 고대 인도의 사신(蛇神) 신앙에서 발생한 것으로, 불교에 수용된 뒤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으로 자리 잡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불법이 가 나라로 전파되면서 점차 형상이 바뀐 점이다. 특히 발톱의 수가 그렇다. 인도의 용은 발톱이 6개, 중국은 5개, 우리나라는 4개, 일본은 3개이다.
용은 불교 이외에 민간신앙에도 자리 잡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 때 용왕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이때 용왕단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나라에서 용왕도량을 열기도 한 고려시대에는 용왕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왕도량은 3~7일 동안 열리는데, 궁전이나 사찰 또는 선상에서 《운우경(雲雨經)》을 독송하였다고 한다.
사찰에서 불경을 보관하는 건물을 해장각(海藏閣) 또는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용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이 불법을 믿지 않을 때가 오면 용왕이 세상의 모든 불경을 용궁에 모아 놓고 지킨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
| |
|
산신각(山神閣)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독성(獨星 )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듣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세계로 들어와 신중탱화의 중단 내지 하단에 자리 잡다가 나중에는 그 기능이 강화되어 단독으로 모셔진다. 그 중에서 산신은 한국 민족 신앙의 주요 대상으로서 우리의 생활공간으로 바짝 다가왔던 토속 신앙이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 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한라산이나 속리산·계룡산·지리산 등지의 사찰에는 드물게 여자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여자 산신은 트레머리에 댕기를 두르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호랑이에 걸터앉거나 기대고 있는 모습이며, 손에는 대개 불로초를 들고 있다. 이 밖에 북건(福巾)이나 유건(儒巾)·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지팡이를 든 유교적 산신도 있고, 삭발한 스님이 《묘법연화경》과 같은 불경을 들고 있는 불교식 산신도 흔하다. 이 경우 의상은 가사와 비슷하나 적.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
|
중앙에 치성광여래(치성광여래)를 두고 좌우에 일광보살(일광보살)과 월광보살(월광보살), 그리고 상단 좌우에 칠 여래, 하단 좌우에 칠원성군이 배치되어 있다. 칠성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제 1성(성)은 자손에게 만덕(만덕)을 주고, 제 2성(성)은 인간의 장애와 재난을 없애주며, 제 3성(성)은 업장을 소멸시켜주고, 제 4성(성)은 구하는 모든 것을 모두 얻게 하며, 제 5성(성)은 일백 가지 장애를 없애주고, 제 6성(성)은 복덕을 두루 갖추게 하며, 제 7성(성)은 수명을 오래도록 연장시켜 준다.
사찰의 전각을 그 중요도에 따라 상단·중단·하단으로 나눌 때 하단에 속하는 전각이다.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신다. 칠성신은 옛날부터 우리나라 민간에서 재물과 재능을 주고 아이들의 수명을 늘려주며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해주는 신으로 믿어왔다. 이 칠성신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처음에는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본래의 기능을 되찾아 별도의 전각인 칠성각에 모셔지게 되었다. 정면 1~2칸, 측면 1칸으로 대부분 규모가 작지만, 삼성각이라고 해서 칠성신을 산신·독성과 함께 모실 때는 칠성만을 모시는 전각보다 크게 짓기도 한다. 남극노인성 등 하늘의 천체와 관련있는 신들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전각의 명칭칠성(칠성)은 구체적으로는 탐랑·거문·녹존·문곡·염정·무곡·파군의 일곱 별로, 각각 부처로 바뀌어 칠 여래가 되는데. 예를 들면 제칠파군성군약사유리광여래는 칠성 중 파군이 여래로 바뀐 것이다. | [ 칠성각 벽화 ] |
|
황해도 해주 속명사(續命寺) 중창기 속명사는 황해도 서흥군(瑞興郡) 서흥면(瑞興面) 오운리(五雲理) 오운산(五雲山,일명 오덕산)에 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후 최영과 정몽주 등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명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나라가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하니 애가 탈 노릇이었다. 나라를 승인해주고 고려가 아닌 다른 이름의 국호를 내려 주십사 사신을 보냈으나 보내는 사신마다 목이 떨어져 돌아오니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나라의 비애일 수밖에 없었던 듯 싶다. 마지막엔 이성계의 측근이요, 명나라 황제와 동문수학한 조 대감을 보내게 된다.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죽으러 가는 길이고 보니 권속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는 조승상 대감의 가슴은 울적하고 답답하기만 했고, 식솔들은 울고불고 야단들이었다. 그러나 조승상 대감의 어머니만은 평상시의 모습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아들을 불러 앉힌다. ‘너는 부처님께 빌어서 얻은 자식이다. 결코 비명객사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죽더라도 사내 대장부답게 죽어라! 하시며 당신의 목에 걸었던 백팔염주를 조 대감의 손에 쥐어 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느니라! 이 염주를 절대로 놓지 말고 부처님을 생각하라. 반드시 가피가 있으리라!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웠던 유학자 조승상 대감이었지만 어머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심정에 염주를 꼬옥 쥐고 부처님을 부르며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용기와 지혜를 주십사 기원했다. 드디어 죽음의 여행은 시작되었고 걸음걸음 밟히는 그의 심정은 외롭고 고뇌 스러웠다. 여행은 계속되어 중국으로 건너가려는 배를 타려고 황해도 서흥에 머무르게 된다. 가을바람 소슬이 불고, 두고 온 처자식과 식솔들, 애간장 타는 가슴을 달랠 길 없어 어머니가 주신 염주를 꺼내 들고 부처님을 부르다 새벽녘이 되어 그대로 책상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는데 불보살님이 세 분이 나타나서 ‘네 조상들의 음덕이 갸륵하고 네가 간절히 우리들을 불러 나타났으니 시키는 대로 하면 공덕이 있으리라. 뒤에 보이는 산에 산사태가 있어 우리 셋이 지금 흙속에 묻혀 있으니 꺼내 주기 바란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바로 서흥 현감을 불러 물어 봤더니 오래 전에 뒷산이 무너져 절과 부처님이 매몰됐다는 이야기다. 현감에게 경비를 주며 꼭 복원할 것을 명하고 길을 뜬다. 장안에 들어가 황제를 배알하고 국화와 나라를 인정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역성혁명은 용서 받을수 없으니 비록 동문수학한 글동무지만 사적으로 국법을 어길 수 없다며 참수를 명한다. 청룡도를 휘두르는 망나니의 춤에 혼은 반쯤 빠졌지만 어머니의 모습과 부처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여유를 갖게 했다. 내려치는 청룡도에 조 대감의 머리가 싹둑 베어질 수 밖에.... 그런데 이것이 무슨 조화일까? 베어져야 할 머리가 멀쩡하고 육중한 청룡도가 댕강 부러지고 말았으니 망나니는 더 단단한 칼을 휘두르며 있는 힘을 다해 다른 목을 후려치나 그 청룡도 역시 부러지고 만다. 화가 난 망나니 더 크고 단단한 칼을 휘두른다. 조승상 대감 뒷목을 내려치니 아, 이것이 어쩐 일인가? 청룡도는 가루가 되고 만다. 이 사실을 들은 황제는 모두 다 인연이로다 . 나 역시 글동무인 그대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그대를 죽게 하였건만 이렇게 살았으니 하늘의 뜻이로다.(그때는 세 번 죽여도 살아남은 사람은 살려 주는 관습이 있었다.) 조 대감은 조선이라는 국호와 나라의 인준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게 된다. 그는 다시 황해도 서홍에 도착했는데 그날이 바로 뒷산에 매몰됐던 부처님을 모셔내고 사창르 복원하여 부처님을 다시 봉안하는 봉안식이 있던 날이었다. 조대감은 기꺼이 참석하여 부처님 몸에 둘러쳐진 광목을 벗기게 된다. 아! 이게 웬일인가? 조대감이 벗긴 부처님 목에는 송송이 핏방울 자국이 역력하지 아니한가! 양쪽의 두 분 역시 왼쪽과 뒤쪽에 핏방울도 영롱한 자국들이 점점이 맺혀 있었다. 조 대감은 그 자리에 통곡을 하며 부처님RP 귀의한다. 한양에 돌아와 이성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 절의 부처님은 대감으리 명을 잇게 하고 나라의 이름을 갖게 하였으니 그 이름을 잇고 나라를 이어 간다는 뜻으로 이를 속 목숨 명 절 사 속명사라고 이름하라 명령을 내리게 된다. 항해도 서흥군 서흥면 오운리 우운산에 있는 절이 바로 속명사니 유학을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왕조 건국의 국호마저 부처님의 가피였음을 후학들은 아는가? |
|
까마귀와 뱀의 인과 <청원 석대암>
유적지종류:사찰 관련 장소: 강원 철원군 동송읍 상로리 보개산 석대암 설화종류: 사찰전설 시대: 통일신라 <요약> 철월·석대암 이순석(사냥꾼) 석대암/ 우리나라 제 1의 지장신앙 성지 <내용> 신라시대의 일이다. 강원도 철원 땅 보개산 기슭에 큰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먹음직스런 배가 가지가 휘도록 열린 어느 해 여름, 까마귀 한 마리가 이 배나무에 앉아 짝을 찾는 듯 「까악 까악」울어댔다. 배나무 아래에는 포식을 한 독사 한 마리가 매미 산새소리를 들으며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까마귀가 다른 나무로 날아가려고 나래를 쭉 펴고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주렁주렁 달린 배 한 개가 독사의 머리에 툭 떨어졌다.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은 뱀은 화가 날대로 났다. 독기가 오른 뱀은 머리를 하늘로 쑥 뽑아 사력을 다해 독을 뿜어냈다. 독기는 까마귀 살속을 파고들었다. 순간 까마귀는 힘이 쑥 빠지면서 온몸이 굳어짐을 느꼈다. 『내가 일부러 배를 떨군 것이 아닌데 저놈의 뱀이 독기를 뿜어대는 구나.』 까마귀는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면서 죽고 말았다. 뱀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세게 얻어 맞은데다 독을 다 뿜어 죽어 버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어처구니없이 까마귀와 뱀이 죽었다. 까마귀와 뱀은 죽어서까지도 원한이 풀리질 않았다. 뱀은 죽어서 우직한 멧돼지가 됐고 까마귀는 암꿩으로 변했다. 멧돼지는 먹이를 찾아 이산 저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알을 품고 있던 암꿩의 모습이 멧돼지 눈에 들어왔다. 『음 전생에 나를 죽게 한 원수 놈이로구나. 저놈을 당장 죽여야지.』 멧돼지는 살며시 등성이로 올라가 발밑에 있는 큰 돌을 힘껏 굴렸다. 암꿩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까마귀를 죽인 멧돼지는 속이 후련했다. 이때 사냥꾼이 그곳을 지나다 죽은 꿩을 발견했다. 죽은 지 얼마 안되는 꿩을 주운 사냥꾼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단걸음에 오막살이집으로 내려갔다. 『여보, 오늘 내가 횡재를 했소.』 『어머나, 이거 암꿩이잖아요. 어떻게 잡으셨어요?』 『아 글쎄, 골짜기 바위 밑을 지나다 보니 이놈이 알을 품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겠수. 그래 돌을 집어 살금살금 다가가서 내리쳤지, 하하.』 내외가 그날 저녁 꿩을 잡아 실컷 먹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생겼다. 결혼 후 태기가 없던 사냥꾼 아내에게 그달부터 태기가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열 달 후 사냥꾼의 아내는 옥동자를 분만했다. 두 내외는 정성을 다해 아들을 키웠다. 이윽고 아들은 씩씩한 소년이 되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활쏘기를 익혔다. 사냥꾼은 아들이 훌륭한 사냥꾼이 되길 바랐다. 『자 이번엔 네가 쏴 봐라.』 『뭔데요, 아버지?』 『저기 저 소나무 아래 꿩말야.』 『꿩요? 난 꿩은 안 쏠래요,』 『아니 왜?』 『왠지 저도 모르겠어요, 전 멧돼지만 잡고 싶어요.』 『거참 이상하구나. 넌 왜 멧돼지 말만 하면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지 모르겠구나.』 『괜히 그래요. 멧돼지는 전부 죽이고 싶으니까요.』 『넌 아직 멧돼지 잡기엔 어리다.』 사냥꾼은 아들의 기개가 신통하다고 여기면서도 넌지시 일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사냥꾼 부자는 온종일 산을 헤맸으나 한 마리도 못 잡고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아들이 갑자기 외쳤다. 『아버지! 저기 멧돼지가 달려가요.』 『어디?』 사냥꾼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아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순간 벌써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화살은 멧돼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멧돼지가 죽은 것을 확인한 아들은 기뻐 날뛰며 소리쳤다. 『음, 저 녀석이 왜 산돼지만 보면 정신없이 구는지 모르겠군.』 아버지는 혼잣말로 뇌이며 아들의 거동을 유심히 살폈다. 아들은 장성할수록 더욱 멧돼지를 증오했다. 세월이 흘러 사냥꾼은 사냥도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청년기를 지나 중년에 이른 아들은 아버지 뒤를 이어 여전히 사냥을 계속했다. 어느 날 보개산으로 사냥을 나간 아들은 그날따라 일찍이 볼수 없었던 이상한 산돼지를 발견했다. 그 산돼지는 우람할 뿐 아니라 온몸에서 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한 놈이구나. 저놈을 단번에 잡아야지.』 그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적중했다. 그러나 금멧돼지는 피를 흘리면서도 여유있게 환희봉을 향해 치닫는 것이 아닌가. 그는 멧돼지가 숨어있을 곳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금돼지는 간 곳이 없고 돼지가 숨어있을 만한 자리에는 지장보살 석상이 샘 속에 몸을 담그고 머리만 물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아니 이건 내가 쏜 화살이 아냐?』 『지장보살 석상의 어깨엔 그가 쏜 화살이 꽂혀 있었다.』 이 석불이 산돼지로 화신한 것일까. 묘한 광경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까마귀와 뱀의 인과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처님께서 멧돼지로 화현하여 화살을 맞은 까닭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물속에 잠긴 작은 석상을 꺼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석상은 보기보다 의외로 무거워 끄덕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둡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 자리를 다시 찾은 그는 또 한번 질겁하며 놀랐다. 어제 분명히 샘 속에 잠겼던 석불이 어느 새 물 밖으로 나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은가. 그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는 석불 앞에 합장을 했다. 『부처님이시여!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키 위해 보이신 듯을 받들어 곧 출가하여 도를 닦겠습니다.』 그는 곧 출가하여 3백 여 무리를 동원 절을 짓고 석불을 모셨다. 그리고는 숲속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앉아 정진하여 높은 도력을 얻었다. 지금은 강원도 철원 보개산에 가면 신라시대 이순석이란 사냥꾼이 지었다는 절 석대암이 있다. 이 절의 주불 지장보살은 석 자쯤의 키에 왼손으로 구슬을 들고 있으며 왼족 어깨에는 사냥꾼이 화살이 박혔던 자리라고 하는 한치 가량의 금이 뚜렷이 남아있다. |
|
석종(石鐘)의 유래 <경주·홍효사(弘孝寺)>
옛날 신라 모량리 마을에 손순이라는 가난한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성품이 온순하고 너그러운 이들 내외는 위로 늙은 어머니와 슬하에 어린 아들 한 명을 두었다. 비록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내외의 효심은 지극했고 아들에 대한 사랑 또한 깊었다. 끼니를 구하러 집을 비우는 이들 부부는 자기들은 허리를 졸라매면서도 어머니 점심을 정성스레 차려 놓았다. 『어머니, 솥 안에 점심 담아 놓았으니 돌이 녀석 놀러나가거든 드세요.』 『오냐, 알았다. 어서들 다녀오너라.』 그러나 노모는 대답뿐, 늘 어린 손주에게만 밥을 먹이고 자신은 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나기가 쏟아져 반나절 일을 채우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손순내외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노모를 위해 아껴둔 찬밥덩이를 부엌에서 아들 내외가 꺼내 먹고 있지 않은가. 『아니 이 녀석아! 할머니 진지를 네가 먹으면 어떻게 해.』 『할머니가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래두 할머니 드시라고 권해야지 착한 손주지.』 『배가 고파 죽겠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날 밤 손순은 자는 아내를 깨워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어머니께서 깨실까봐 그랬소.』 『무슨 이야긴지 어서 해 보세요』 말을 할듯 말듯 하면서도 한동안 머뭇거리던 손순은 입을 열어JT다. 『부인, 어머님의 남은 여생을 위해 돌이를 버립시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님은 한번 가시면 그만 아니오, 그 녀석이 어머님 음식을 늘 옆에서 축내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도리가 없구려.』 『여보, 하지만 어린 자식이 너무 가엾잖아요. 부모 잘 만났으면 호강하고 귀여움을 독차지할 텐데...』 『부인, 나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소. 허나 다 전생의 업연이라 생각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돌이가 살아서 굶주리며 고생하느니 일찍 죽으면 더 좋은 인연 받을지 누가 아오?』 내외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돌이를 업고 뒷산으로 올랐다. 잘 먹이지도 못한 어린 생명을 생매장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손순의 손은 무겁고 떨렸다. 얼마만큼 팠을까.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괭이질을 하던 괭이 끝에서 「쨍」하는 쇳소리를 들었다. 산목숨을 매장하려던 터라 가슴 조이던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흙을 파헤쳤다. 뭔지 분간키 어려운 둥근 돌 모양이 드러났다. 더 깊이 판 후 꺼내 보니 그것은 신비스런 모양의 석종이었다. 손순 부부는 생전 처음 보는 이 종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괭이자루로 쳐 보았다. 『윙-윙』 맑고 청아한 울림이 울려나오자 내외는 깜짝 놀랐다. 『그것 참 이상하다. 돌 종에서 쇠 종소리가 나다니....』 돌이를 업고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여보, 이렇듯 이상한 물건을 얻게 됨은 필경 부처님R서 우리 돌이를 구해 주려는 뜻인 것 같아요. 그러니 돌이를 묻어선 안 되겠어요. 돌종을 갖고 어서 집으로 갑시다.』 『당신 말대로 부처님 영험이 아니고서 이런 신비스런 돌종이 이런 곳에서 나올 리 가 없지』 내외는 기쁜 마음으로 돌종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마당 나뭇가지에 종을 매달고 다시 쳐 보았다. 웅장하고 신비스런 종 소리가 울려 퍼지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손순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구경꾼들은 매일 몰려 왔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손순 부부의 효심을 칭송했다 『암, 부처님이 무심치 않으신 게야.』 『그렇지, 그토록 지극한 효심에 어찌 부처님께서 감응치 않으시겠나.』 마을 사람들도 부처님의 거룩하신 영험에 감사하고 감격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는 대궐에까지 은은하게 들렸다. 『거 참으로 청아한 종소리로구나. 마치 하늘에서 울려오는 듯한 저 신비로운 종소리가 아무래도 보통 종소리 같지 않으니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아오도록 해라.』 흥덕왕은 서쪽들에서 조석으로 올려오는 종소리의 정체를 알아오도록 좌우에 명을 내렸다. 대궐 신하가 손순의 집에 가서 종을 보고 그 사연을 다 듣고는 임금님께 아뢰었다. 호심 지극한 손순 부부의 간절한 사연을 다 듣고 난 임금은 몹시 흐뭇해했다. 『옛날 중국 한나라에도 순순 같은 효자 곽거가 있어 어머니를 위해 아들을 땅에 묻으려고 구덩이를 파니 그곳에서 금솥이 나왔다더니 손순의 경우 석종이 솟은 것은 필시 전세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특히 불보인 석종이 출현했으니 이 어찌 신라이 경사가 아니겠느냐, 불국토에 내린 부처님의 가피로구나.』 왕의 치사에 조정 대신들도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모았다. 『이 모두 대왕이 선정인가 하옵니다. 이 부부에게 후한 상을 내려서 백성들의 귀감이 되게 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왕은 손순 부부에게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씩을 하사토록 해 그들의 순후한 효성을 표창했다. 손순 부부는 석종을 왕에게 바치려 했으나 흥덕왕은 사양했다. 『부처님께서 효성을 가상히 여겨 베푸신 은혜의 신종을 어찌 과인이 받을 수 있겠느냐?』 그 후 손순은 부처님 은혜에 보답키 위해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 정진했다. 그이 아내는 남편이 큰스님이 되길 기다리며 노모를 봉양하면서 돌이를 잘 길렀다. 스님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손순은 자기가 살던 옛집을 절로 만들고 재가승이 되었다. 그리고 석종을 본존으로 모시는 한편 절 이름을 홍효사라 불렀다. 그 종은 진성왕 때 후백제의 침입 당시 없어졌다. 종이 발견된 곳을 사람들은 완호평이라 부르다 그 후 잘못 전해져 지량평이라 불리었다. |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경남 창원 백월산(白月山) 남사(南寺) 유적지 종류:사찰 관련장소: 경남 창원시 북면 마산리 설화종류: 사찰전설 시대:통일신라 <요약> 경남·창원 설화 배경인 남사- 소실됨 관련인물-미상 <내용> 옛날 신라의 진산으로 알려진 백원산(지금의 경남 창원 소재)아래 자리한 어느 마을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란 두 청년 선비가 살고 있었다. 풍채가 좋고 골격이 범상치 않은 두 청년은 속세를 초월할 높은 이상을 지닌 좋은 친구였다. 이들이 20세가 되던 어느 가을날. 두 사람은 백월산에 올라 먼 산에 곱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여보게, 우리가 이렇게 평범한 생활에 만족하여 지낼 수가 없지 않은가.』 두 청년은 그날 함께 출가할 것을 결심, 그길로 마을 밖 법적방(창원에 있던 절)에 가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부득은 회진암에 , 박박은 유리광사에 각각 터를 잡은 뒤 처자를 데리고 와서 밭을 일구며 정신수양을 했다. 양쪽 집이 서로 왕래하며 오순도순 재미있게 지냈으나 두 사람은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지내며 의식이 풍족하니 좋기는 하지만, 연화장 세계에서 여러 부처가 즐기는 것만 못하네. 더구나 볼도를 닦아 참된 것을 얻기 위해 머리를 깎았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인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것일세.』 추수를 끝낸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장차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공부할 것을 다짐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꿈을 꾸었다. 백호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그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상서로운 꿈이었다. 이튿날 아침, 서로 꿈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똑같은 꿈을 꾸었음에 감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갔다. 박박은 북쪽에 판잣집을 만들어 살면서 아미타불을 성심껏 구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경덕왕 8년(709) 4월 8일 .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릴 무렵, 20세 안팎의 아름다운 한 낭자가 난초 향기를 풍기면서 박박이 살고 있는 판잣집으로 찾아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글을 지어 박박 스님에게 올렸다. 갈 길 더딘데 해는 져서 먼 산 어둠이 내리니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런 스님은 노하지 마소서 글을 읽은 박박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한마디로 거절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므로 그대가 머물 곳이 아니오. 지체하지 마시고 어서 다른 곳으로 가 보시오.』 낭자는 다시 부득이 살고 있는 남암으로 찾아갔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맑고 고요하기가 우주의 근본 뜻과 같거늘 어찌 오고감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스님의 듯이 깊고 덕행이 높다고 풍문을 듣고 보리를 이루는 데 도움을 드릴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답한 낭자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자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게 아니고 |
|
세조와 문수동자, 고양이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잠자리에 든 세조는 악몽을 꾸는지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옆에 누웠던 왕비가 잠결에 임금의 신음소리를 듣고 일어나 정신 차릴 것을 권하니 잠에서 깨어난 세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신열이 있사옵니다. 옥체 미령 하옵신지요?』 세조는 대답 대신 호자 입속말을 했다. 『음, 업이로구나, 업이야.』 『마마, 무슨 일이세요? 혹시 나쁜 꿈이라도 꾸셨는지요.』 존사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을 들어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은 이 게송을 듣고 내심 몹시 놀랐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은 아니나, 이 깊은 산골짜기에서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밤이 깊자 부득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을 마주한 채 고요히 염불삼매에 들었다. 새벽녘이 되자 낭자는 부득을 불렀다. 『스님, 제가 산고가 있으니 스님께서 짚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자리를 마련해 준 뒤 등불을 비추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다시 목욕하기를 청했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일었으나 어쩔 수 없이 물을 덥히고 낭자를 통 안에 앉혀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아니!』 부득이 놀라 크게 소리치니 낭자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스님께서도 이 물에 목욕을 하시지요.』 마지못해 낭자의 말에 따라 목욕을 한 부득은 또다시 크게 놀랐다.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더니 자신의 살결이 금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옆에는 연화좌대가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했다. 『나는 관음보살이오,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 말을 마친 낭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한편 북암의 박박은 날이 밝자 『부득이 지난밤 필시 계를 범했겠지. 가서 비웃어 줘야지.』 하면서 남암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부득은 미륵존상이 되어 연화좌 위에 앉아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해서 이리 되셨습니까?』 부득이 그간의 사정을 말하자 박박은 자신의 미혹함을 탄식했다. 『나는 마음에 가린 것이 있어 부처님을 뵙고도 만나지를 못했구료. 먼저 이룬 그대는 부디 옛 정을 잊지 말아 주시오. 』 『통 속에 아직 금물이 남았으니 목욕을 하시지요.』 박박도 목욕을 하고 무량수를 이루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 법을 청하자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지를 설한 뒤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 훗날 경덕왕이 즉위하여 이 말을 듣고는 백월산에 큰절 남사를 세워 금당에 미륵불상을 모시고 아미타불상을 강당에 모셨는데 아미타불상에는 박박이 목욕시 금물이 모자라 얼룩진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한다. 『중전, 심기가 몹시 불편하구려, 방금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모친·세조의 형수)혼백이 나타나 내 몸에 침을 뱉지 않겠소.』 『원, 저런...』 꿈 이야기를 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세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린 조카 단종을 업어주던 모습이며, 생각하기조차 꺼려지는 기억들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이튿날 아침, 이게 웬일인가. 꿈에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아나고 있다니, 세조는 아연실색했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등 점점 악화되었다. 명의와 신약이 모두 효험이 없었다. 임금은 중전에게 말했다. 『백약이 무효이니 내 아무래도 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야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문수도량인 오대산 상원사가 기도처로는 적합할 듯하옵니다.』 왕은 오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정산에서 참배를 마치고 상원사로 가던 중 장엄한 산세와 맑은 계곡물 등 절경에 취한 세조는 불현듯 산간벽수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늘 어의를 풀지 않았던 세조는 그날도 주위를 물린 채 혼자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즐겼다. 그때였다. 숲속에서 놀고 있는 조그마한 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다. 『이리 와서 내 등 좀 밀어주지 않으련?』 동자승이 내려와 등을 다 밀자 임금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일렀다. 『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대왕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이렇게 응수한 동자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다 자신의 몸을 보니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게 됐다. 왕은 크게 감격했다.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본 문수동자를 그리게 했다. 기억력을 더듬어 몇 번의 교정을 거친 끝에 실제와 비슷한 동자상이 완성되자 상원사에 봉안토록 했다. 현재 상원사에는 문수동자 화상(畵像)은 없고, 얼마 전 다량의 국보가 쏟아져 나온 목각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또 세조가 문수동자상을 친견했던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갈라지는 큰 길목 10km 지점은 임금이 그곳 나무에 의관을 걸었다 하여 『갓걸이』또는 『관대걸이』라고 부른다. 병을 고친 이듬해 봄, 세조는 다시 그 이적의 성지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왕은 곧바로 법당으로 들어갔다. 막 예불을 올리는데 어디선가 별안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자꾸 앞으로 못 가게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예감이 든 왕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병사들을 풀어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세 명의 자객이 세조를 시해하려고 시퍼런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그들을 끌어내 참하는 동안 고양이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마터면 죽을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세조는 강릉에서 가장 기름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절에는 묘답 또는 묘전이란 명칭이 생겼다. 즉 고양이 논, 도는 고양이 밭이란 뜻,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의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고, 왕명으로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최근까지도 봉은사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또 지금도 상원사에 가보면 마치 이 전설을 입증하는 듯 문수동자상이 모셔진 청량선원 입구 계단의 좌우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속설에 의하면 「공양미」란 말도 고양이를 위한 쌀이란 말이 변하여 생겼다는 일설도 있다. 고양이 사건이 있은지 얼마 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에게 영험을 베풀어준 도량을 중창하여 성지로서 그 뜻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서였다.대중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한 왕은 상원사 중수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이 울렸다. 소탈한 세조는 스님들과 둘러앉아 공양 채비를 했다. 『마마, 자리를 옮기시지요.』 『아니오. 대중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는 것이 과인은 오히려 흡족하오.』 그때 맨 말석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승이 발우를 들더니, 세조의 면전을 향해 불쑥 말을 던졌다. 『이 거사, 공양하시오.』 놀란 대중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정작 놀라야 할 세조는 껄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도인될 그릇이로다.』 왕은 그 사미승에게 3품의 직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표시로서 친히 전홍대(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아마 세조는 지난날 자신의 병을 고쳐준 문수동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그 후 세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귀하게 되라는 징표로 붉은 허리를 졸라매 주는 풍속이 생겼다 한다
. |
|
선암사 극락전 옆 마당에 세워져 있는 이 석탑은 3매의 옥개석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규모가 작은 석탑이다. 석탑 부재의 크기 및 형태와 전각 체감율을 고려할 때 1층, 2층, 3층의 동일한 삼층석탑 옥개석으로 판단된다. 1층 옥개석은 지면과 맞닿은 아랫부분이 흙속에 많이 파묻혀 있지만 옥개받침이 4단이며, 낙수면과 옥개받침 등의 치석이 대체로 좋은 편이다. 이 석탑은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특히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선암사는 《조선사찰자료집(朝鮮寺刹資料集)》에 실려 있는 1868년의 중수기(重修記)와 1938년의「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에 의하면 신라 애장왕 4년(803)에 창건된 동평현에 있었던 견강사(見江寺)였고, 1400년(정종 2)에 부산포의 동북쪽으로 이건하여 사명을 선암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 삼층석탑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되어 견강사 경내에 세워져 있다가 사찰의 이건과 함께 선암사 경내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선암사의 사적기가 없는 현시점에서 선암사의 사력(寺歷)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 |
종각 |
백양산 천년고찰 선암사 산사의 풍경 입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