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에는 크게 세 가지 유파가 있었다고 한다. 역사학회에서 간행한 『실학연구입문』을 읽고나서 다음 물음에 답한다면? 첫 번째 문제. 실학의 제1기. 제도상의 개혁. 이익을 대종으로 한다. 이 유파의 이름은? 두 번째 문제. 실학의 제2기. 기술면의 혁신.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다. 이 유파의 이름은? 첫 번째 문제의 답은 ‘경세치용파’. 두 번째 문제의 답은 ‘이용후생파’. 혹시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라고 쓴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쉽지만 오답이다.
본래 조선후기 실학의 유파를 경세치용파와 이용후생파로 나눈다는 아이디어는 농촌 실학과 도시 실학의 구별에서 출발했다. 「실학파의 문학」(이우성, 1957)은 근기 지역 농촌 환경의 복고적인 ‘광주학파’와 서울 지역 도시 환경의 진보적인 ‘북학파’를 상정했다. 「18세기 서울의 도시적 양상」(이우성, 1963)은 이에 기반해서 조선후기 실학 유파를 제시했는데, 역시 골자는 ‘경세치용학파’(농촌 현실)와 ‘이용후생학파’(도시 분위기)에 있었다.
이러한 실학 지식이 널리 퍼지는 데 기여한 책이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이었다. 초판(1967)은 제도 개혁에 치중하는 복고적인 경세치용의 학문과 산업 발전을 도모하는 진보적인 이용후생의 학문을 말했고, 개정판(1976)은 농업 중심의 이상국가론과 상공업 중심의 부국안민론을 말했다. 핵심은 조선후기 농촌과 도시의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학문이 실학이라는 뜻이었다. 이 단계가 되면 이미 ‘조선후기 사회와 실학’이라는 학술 관념이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에서 친숙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은 대략 이런 정도이다. 친숙하게 접하다 보니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이 오래 전부터 늘 그래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도 이런 말을 자주 썼을까? 마음만 먹으면 데이터베이스 검색이 되는 멋진 세상. 먼저 실록에다 ‘經世致用’(경세치용) 네 글자를 검색한다. 결과는 0건. 승정원일기 검색 결과는? 역시 0건. 기이한 일이다.
이번에는 ‘利用厚生’(이용후생) 네 글자를 검색한다. ‘경세치용’과 달리 검색 결과가 제법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실록의 경우 조선전기는 명종 단 1건, 조선후기 전체 21건은 고종(8건), 정조(6건), 순종(4건), 기타 0~1건이다. 승정원일기의 경우 조선후기 전체 64건은 고종(23건), 정조(14건), 순조(14), 영조(5건), 기타 0~2건이다. 이 역시 기이한 일이다. 그러니까 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보여주는 것은 경세치용은 한국사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다는 것, 이용후생은 주로 조선말기 고종과 조선후기 정조 때의 언어였다는 것.
한국문집총간 정집(1-350)으로 옮겨 검색해도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다. ‘經世致用’ 검색 결과는 1건. 장지연의 스승 허훈의 『방산집』에 유일하다. ‘利用厚生’ 검색 결과는 99건. 정약용(12건), 정조(9건), 신기선(8건), 박지원(6건), 홍양호(5건), 김윤식(4건), 곽종석(4건), 기타 0~3건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용례는 이이의 『성학집요』, 그리고나서는 이정귀의 『동의보감』 서문이다. 역시 경세치용은 거의 쓰지 않는 언어, 이용후생은 대략 조선 정조와 조선 고종 때의 언어.
실록도 그렇고 문집도 그렇고 이용후생은 조선 명종․선조 연간 처음 출현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세종대왕 때를 배경으로 하는 TV 사극에서 신하들이 제도 개혁이나 산업 발전을 주장하면서 유식한 척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을 외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데이터베이스 검색 결과는 관습적인 사고의 혁신을 불러일으킨다. ‘경세치용’이 근대 외래어일 가능성이 있다면 그 경로는 무엇일까? ‘이용후생’이 조선후기 정조 연간의 언어인 동시에 조선말기 고종 연간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간 이용후생의 사상사를 조선후기 실학의 범주에서만 논해 왔던 것은 얼마나 좁은 생각이었는가? 대한제국 매체에서 발화된 이용후생은 그 이전의 이용후생을 향해 무엇을 비추고 있는가? 이용후생은 조선의 언어인 동시에 근대의 언어였다.
노관범(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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