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112:1~10
제목: 성숙한 성도는 연보을 하여 빈궁한 성도들을 돕는다
● 기독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결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른 성도들도 아울러 사랑하고 도와주는 신앙입니다.
시112:1.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성숙한 신앙입니다. 계명은 율법으로 볼 수도 있고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데요. 예리하게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참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합니다.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하나님의 율법(=계명=말씀)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말씀을 읽고 듣는 것 정도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순종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모세가 기록한 것은 모두 율법이고 예수님은 복음이라고 분리하고 단절하면 안 됩니다. 사랑과 복음의 화신(化身)이신 예수님도 율법과 계명을 아래와 같이 주셨습니다.
마19:16.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왜 청년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예수님께 들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주석과 설교들이 각양각색의 훌륭한 설명을 합니다. 묵상자가 위 성경 본문 안에서 보면 청년이 지키기 어려운 명령을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자 청년은 너무 과감한 말을 했습니다. 그 청년은 계명들에 대해서 감히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자신을 했습니다. 십계명 중 1~4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5~10 계명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요. 부자 청년이 사람을 사랑하는 대인(對人)계명을 진정으로 다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킬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에 대해서도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는 주관적 확신은, 참 믿음과 그것에 대한 증명인 실천의 요구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계명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고자 애를 쓰고 성화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생에 걸쳐있는 긴 마라톤과 같은 여정으로서 점진적 성화에 불과합니다. 주관적 확신으로서의 믿음은 시험을 당하고 증명을 해내야 하는 숙제가 남습니다. (구원파는 아예 율법을 폐기하고 부인하는 이단이고,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는 이단입니다.) 참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gift)이라 |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영어 번역 gift는 종종 은사로도 번역됩니다(고전12:4 딤전4:14 등). 하나님이 친히 주신 은사와 선물로서의 믿음은 신자 개인의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구원을 받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설명하신 것이 위 마19:16~26에 나오는 부자 청년 에피소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마19:25.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gift)이라 |
● 사람이 자기 안에서 쥐어짜낸 믿음, 자신은 계명을 다 지켰고 앞으로 지킬 수 있다는 주관적 확신, 계명은 어차피 못 지킬 것이니 모두 지키지 말자는 율법폐기론 따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마19:26에 나오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는 믿음인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가진 자는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의 서정 가운데에서 성화를 하며, 성화를 하는 과정 중에 참된 연보(the generous gift)도 할 수 있습니다. 연보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씀이 신구약에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시112: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
고후9:.8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
참 성도는 믿음으로 칭의된 자들입니다. 성도들의 칭의가 진실한 것이라면 그 결과와 열매로 성화가 나타나고, 성화의 과정 중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며 그 착한 일의 핵심적인 대표 사례가 연보(捐補)인 것입니다. 연보에 대해서는 아래 내용이 아주 충실하게 설명하므로 모두 첨부합니다.
연보란 말은 ‘헌금'과 동일한 말이다. 그러나 헌금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이란 뜻인데 비해, 연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의연금의 성격이 강하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연보를 미리 준비하라고 권면하였다(고후 9:5). 초대교회에서의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 사랑의 실천적 의미가 강했다. |
연보의 원리 1.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고후 9:5). 2. 억지로나 인색한 마음이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후 9:7). 3. 희생적인 마음으로 해야지 자기과시나 자랑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후 9:9). |
연보의 결과 1. 적게 하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하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6). 2. 하나님께서 영적인 은혜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신다(고후 9:8). 3.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상하실 것이다(고후 9:9-10). ← 비전성경 |
연보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보상하신다고 합니다(고후 9:9, 10). 대신(對神)계명을 참으로 즐거워하고 순종하는 성도는, 대인(對人)계명도 지킬 것이며, 대인계명을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대신계명을 믿고 지키는 증명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칭의의 결과인 성화를 하는 참 성도의 모습입니다. 세상 바깥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교회 안에서라도 연보를 하여, 우리의 하나님 경외함이 연약한 성도를 돕는 사랑, 성숙한 믿음으로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쉽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첫댓글 ... 헌금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이란 뜻인데 비해, 연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의연금의 성격이 강하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연보를 미리 준비하라고 권면하였다(고후 9:5). 초대교회에서의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 사랑의 실천적 의미가 강했다. ...
출처: <비전 성경>, 고후 9장.
네, 연보의 성경적 의미를 되새기니 현대 한국 교회의 관행에 조금 일탈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신약에서는 기근으로 인하여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 위한 이방인 교회의 부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 고후 9:13에서는 "교제"라는 뜻의 '코이노니아'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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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개역 성경에서는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는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의 의미로 쓰였으며(대하 34:9, 14), 신약에서는 기근으로 인하여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 위한 이방인 교회의 부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내용을 다양한 헬라어로 담아서 묘사하고 있다. 고전 16:1에서는 "모금"이라는 뜻의 '로기아'로, 고후 8:2에서는 "기쁨으로 드린다"는 뜻의 '하플레스'로 고후 9:5에서는"좋은 모금"이라는 뜻의 '율로기아'로 각각 표현하며, 고후 9:13에서는 "교제"라는 뜻의 '코이노니아'로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억지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것을 당부하고 있다(고후 9:5, 7; 몬 1:14).
바울이 모금한 거액의 부조는 그 당시 비판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었지만(고후 8:20-21), 그는 이를 신중히 진행시켰으며,
그것은 이방교회 와 예루살렘 교회의 벽을 허무는 큰 쾌거로 인식되었다(고후 9:12; 롬 5:27).
이것은 또한 구원이 원래 유대 기독교에 주어진 것인데, 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이방 교회의 감사예물의 구실을 하였다. 복음서에 언급되는 연보궤는 성전 입구에 놓아둔, 성전의 유지 보수와 구제를 위한 헌금궤인 듯하다(막 12:41; 요 8:20).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츨판사>
@장코뱅 고후9:13에서는 코이노니아라는 뜻으로까지 사용이 되었군요. 깊은 설명을 추가로 올려 주셔서 잘 참고하겠습니다.
초신자와 시간이 없는 분들은 묵상 본문과 위에 있는 댓글 정도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아래에 첨부한 주석의 설명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러는 것이 효울적이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시편>
112:1
본 시는 111편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있으며 히브리어 문자 '알렙'(* )에서 '타우'(* )까지 22문자가 문두에 놓여 한 행씩 배열되는 답관체 형식의 시인 것이다. 111편이 하나님의 영광과 행사를 찬양하라는 내용인 반면 본 시는 인생이 필히 추구히야 할 영적 지혜를 교훈하고 있는 지혜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알렙'(* )과 '베트'(* )로 시작되는 두 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악을 행하고 불의한 방법으로나마 어떤 이익을 얻게 된다면 대단히 기뻐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의를 통해서는 결코 복을 얻지 못할 것임을 시인은 여기서 분명히 지적한다. 설사 불의한 방법으로 어떤 유익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휠씬 차원 높고 풍성한 유익을 주실 것이다. 한편 이 구절을 원인-결과절로 보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그 계명을 크게 기뻐할 것이라'(Calvin)고 번역해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은 111편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상의 진전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111:10) 더 나아가 참된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Alexander).
@장코뱅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 아멘!
<호크마 주석: 시편>
112:9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 9절과 10절은 각각 세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구는 17번째 문자인 '페'(* )로 시작되는데 의인의 선한 행위와 너그러운 마음을 노래한다. 의인은 재물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궁핍한 자의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과감하게 나누어 주는 용기를 가진 자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재하여서는 허영으로 탕진하고 만다. 한편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과 구제의 의무는 성경의 중요한 명령으로서 신.구약 성경에 자주 언급된다(레 25:35;신 15:7, 8;눅 11:41).
그 의가 영원히 있고 - 이 문구는 18번째 문자인 '차데'(* )로 시작되는데 의인의 선한 행위에 대한 열매와 보상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 19번째 문자인 '코프'(* )로 시작되고 있다. '뿔'(* , 케렌)은 '힘', '능력' 또는 '자존심'을 상징한다. 자신의 뿔을 든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만심과 교만에 사로잡힌 상태를 가리킨다(75:4).
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의인의 자비로운 행위를 기쁘게 보시고 그들의 위치를 더욱 높여서 권세와 영광으로 보상하신다는 뜻이다.
@장코뱅 구약의 구약적인 표현이 신약에 오면 겸손하고 온유하게 바뀌는 것을 느낍니다.
<호크마 주석>, 시편112편 강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을 열거하고 있는 본시는 1. 의인의 모습(1절) 2. 의인의 여러 가지 축복(2-9절) 3. 악인의 멸망(10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의 결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아울러 악인의 슬픈 멸망을 예견하고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제식 배경과 관련하여 순례자가 성전에 들어갈 대 부르는 입당송 혹은 예배자의 감사 기도에 대한 제사장의 응답송 등으로 주장하지만 분명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본시는 어떤 특정한 상황과 연관하여 저술된 작품이 아니라 참된 인생의 행복에 대해 설명하는 교훈적인 노래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시는 시편의 장르상 '지혜시'(wisdom psalm)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의인의 축복과 악인의 멸망을 대조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 대 가치있는 삼이 이루어짐을 가르쳐 주고 있다. 또한 본시는 11편과 마찬가지로 '할렐루야'로 시작되는 '할렐시'이며 행의 첫 문자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배열된
'알파벳 시'이다.
그리고 111편에서 하나님에 관해 사용되었던 단더들이 본시에서 의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점을 보아(예, '의'-3절, 11:3;'기억하다'-6절, 11:4;'정하다'-7절, 111:8), 두 시편의 저자는 동일한 인물일 것으로 보여진다. 특별히 111편이 하나님이 행하신 행사의 속성에 대해 말하였다면, 본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행사와 성품, 그리고 그 복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본시의 전반적인 주제는 1편이나 신명기의 사상처럼 의인의 현세적인 축복과 악인의 급속한 파멸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여기에 참다운 경건의 사회적 의미에 관해서도 덧붙여 언급하고 있다. 특히 본시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을 '의인'으로 보고 있가 때문에 '악인'에 대해 간단히 한 절(10절)로 언급하고 있다.
이제 의인의 승귀와 악인의 슬픈 멸망이 예견되는 본시의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좀 더 자세하게 고찰해 봄으로써 경건한 삶의 속성과 그 결과에 대해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1. 의인의 모습(112:1)
본시의 첫머리에서 시인은
의인이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의인의 모습은 여호와르르 경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경외 사상'은 이스라엘의 지혜의 근본이자(111:10),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무이다(미6:8).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 대해 시인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계명'은 일차적으로는 십계명을 가리키지만, 보다 포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모든 명령과 지시를 의미한다. 그리고 시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있어서 계명을 지키는 일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도리어 큰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고백하고 있다(1:2;40:8;119:35,97).
2. 의인이 받는 축복(112:2-9)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진정한 의인임을 선언한 시인은 이제 의인에게 임할 가정적, 사회적 축복과 아름다운 덕행에 대해 자세하게 열겨한다. 시인은 의인이 받을 복의 내용을 1 의인의 가정이 받는 축복(2, 3절)과 2 의인의 사회적 덕행(4-9절)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로, 시인은 의인의 후손이 강성하고 현세에서도 축복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2,3절). 2절에서 '강성하다'는 말은 재물과 사회적 지위가 든든함을 뜻한다. '의인의 자손들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37:25)는 말과 같이 의인의 자손은 재물로나 사회적 지위로서도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복은 물론 일차적으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번영이지만, 본시를 전체적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영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의 상징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즉, 시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인 부요는 사회적 선행의 수단이 될 수 있으므로 의인이 부유한 사회는 복된 사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시인은 의인의 가정이 부요와 재물의 축복을 받는다고 밝히고 있다(3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질적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왕상 3:13;잠3:9이하;22:4). 물론 재물과 부요는 사람을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만들기 쉬우며, 부패의 온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의인의 재물은 하나님의 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심지어 그의 부요와 재물이 사라진다 할지라도 그 의도는 변함없이 드러날 것이다.
둘째로, 시인은 의인이 사회적으로 받는 축복과 영향력에 관해 말한다(4-9절). 먼저 의인은 어질고 자비한 성품으로써 어두움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4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은 어두운 사회를 밝혀 사람들에게 자비와 어진 마음씨를 보여준다. 그는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함으로써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한다(사58:10).
이어서 시인은 이 같은 의인의 자비와 덕행을 부요와 재물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움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다(5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은 곧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자이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본받아 가난한 자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재물을 빈궁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한편 그는 부유한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에서도 자유롭다(7, 8절). 그는 자신의 소유를 세상에 나누어 줌으로써 약하고 가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는 자신의 축복을 질시하는 원수들로부터 받게 될지 모르는 박해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진실로 의지하고 붙들고 있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의인들도 역시 다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통과 서러움 속에서 번민하는 어두움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흉한 소식을 접할 수 있다(7절). 이전에 누렸던 풍요로움이 모두 사라지고, 그의 의로움조차 무참히 짓밟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의인에게 닥치는 재난은 그의 소유나 환경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존재와 영혼의 깊은 곳까지 손상을 입히지는 못한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향하여 견고하게 고정되어 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는다(7, 8절).
또한 의인은 그의 의로움과 덕행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존경을 받게 되고 그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게 된다(9절). 반대로 경건치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랑을 일깨워 주거나, 어떤 감사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생을 보내게 된다. 그가 죽고 나면 모든 것은 잊혀지고 오로지 비난만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순결한 삶을 통하여 후세에까지도 향기를 발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3. 악인의 멸망(112:10)
시인은 결론적으로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대조시킴으로써 독자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삶에로 초대하고 있다. 악인은 의인의 번영을 시기하며 의로운 자의 패망과 파멸을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악인의 삶은 결국 헛되고, 그 종말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본문을 통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을 살도록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참된 의는 필연적으로 베풂을 동반한다(5, 9절). 베풂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증거이며(마5:42-45;6:1-4),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표시이자, 인간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2 의인의 선은 후대에서도 반복된다(2절). 거룩한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받고, 기독교적인 원칙 하에서 훈련을 쌓은 젊은 남녀들은 탁월한 인격과 도덕적 성품을 소유할 수 있다. 3 의인은 미래에 대해 경건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8절).
하나님께서 만물을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을 믿음으로써 언제나 확고한 안정을 소유할 수 있다.
@장코뱅 깅해라서 한 편의 설교 같은 느낌을 줍니다.
선하고 의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가난한 자들에게 풍족히 베풀어주시고, 베풀어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악한 마귀는 도둑질과 강도질로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그저 빼앗아가기에 바쁘네요.
가난한 교우들을 돕기 위해 주일 연보를 말했던 사도 바울의 정신도 예수님께 배운 것이고, 또 유대교에서도 배웠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네요.
구제할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결국은 구원을 선물로 받은 신실한 신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서 할 수 있는 것이 구제이며, 연보도 이런 차원에서 이뤄졌었다는 것을 잘 짚어 주셨네요. 주일 연보를 원래의 취지에 맞게,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목회자와 교회 제반 일에 사용도 하고, 교회 안에 가난하고 돌봄이 필요한 교우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인색하지 않게 배분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고 했으니 교회 재정도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이런 일을 구체적으로 잘 시행을 하고 있더군요. 그들이 그냥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재물을 나누는 실천이 곧 사랑을 베푸는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온 선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배웁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현대의 유대교가 구약성경을 믿지만 기독교나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오시고 성령강림으로 신약교회가 수립되기 전에는 구약교회가 존재를 했습니다. 구약성경과 구약교회의 유산 중 좋은 것들이 신약교회에도 연속되는 것으로 보면 더 좋겠습니다.
@장코뱅 두 분의 풍성한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본문과 댓글을 읽고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의연금 성격의 연보 의미를 너무나 많이 퇴색시켰다고 깨닫습니다. 본래 성경의 취지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저에게 깨달음과 은혜를 함께 주는 좋은 묵상입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