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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강원도 춘천군 남내일작면(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태생이다. 소설 〈소낙비〉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1935년에 등단했으며 1937년에 요절할 때까지 주로 농촌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크게 호평받았다. 유정은 여자 이름에 주로 쓰이지만 그는 남자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별도의 아호는 없다.
농촌 배경의 토속적 작품이 많다 보니 착각하기 쉬운데 당대 다른 젊은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시크한 도시인이다. 당시 신문에 실린 문답 등을 보면 그야말로 "무심한 듯 시크하게"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이다. 그는 구인회의 회원으로 소설가 겸 시인 이상과 특히 친한 친구였다. 이상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김유정〉을 지었을 정도로 특히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점은 소설 속의 그는 아주 건강하고 활동적인 청년이었으나 현실의 그는 이 작품이 발표된 지 1달 후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그가 아프다는 것은 문인들 모두가 아는 일로 김유정을 만나면 다들 건강을 걱정했다. 그의 수필 중에 길에서 만난 한 젊은이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다방으로 끌고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 더 아프시기 전에 빨리 걸작을 한 편 더 쓰셔야겠다고 이야기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내용도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봐도 아파 보였을 정도로 병색이 깊었다는 것이다. 말년에는 만성 폐결핵과 치루가 주는 고통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질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친구 이상은 어차피 자신이 병으로 죽을 거,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게 더 의미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병과 가난으로 고통을 겪으며 공감대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동반자살을 권유했다. 그러나 누가봐도 죽음이 가까워 보였던 그는 이 권유를 거절했는데 평생 병으로 힘들어했어도 죽기 전까지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은 자신의 소설에서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밤으로 치러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과 이상 - 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 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1937년 3월 29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 생애
본관은 조선 시대의 명문 양반 가문 중 하나인 청풍 김씨. 아버지는 김춘식(金春植, 1874 ~ ?)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8남매 중 일곱째이자 2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0대조가 대동법 실시에 크게 공헌한 명재상 김육이고 9대조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이다. 거기에서 계보는 김우명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고향에서는 꽤 명망 있고 부유한 지주였다. 하지만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까지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이러한 집안의 후원으로 그는 재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차례로 입학하는 등 현대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0살도 되기 전 유년기에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누나들은 죄다 시집을 간 상태에서 홀로 남겨져 눈칫밥을 먹고 지내다 보니 여성에 대한 집착도 강했고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게다가 애정결핍의 후유증으로 인해 말을 더듬는 증세를 보였는데 이는 휘문고보 2학년에 눌언 교정소에서 겨우 교정받을 수 있었다. 말년의 병약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휘문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운동장에서 투포환을 가슴에 맞고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으며 야구 · 축구 · 스케이팅 · 권투 · 유도 등의 스포츠와 소설 읽기, 영화 감상, 바이올린 연주, 하모니카 연주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늑막염에 걸린 채로 후술할 박녹주와의 일을 겪은 후 실연의 아픔을 처절하게 맛본 그는 방 안에 틀여박혀 폐인 생활을 하다가 지병인 늑막염이 악화되고 치질까지 걸려 1930년 여름에 형 김유근이 있는 고향 춘천의 실레 마을로 내려간다. 낙향의 원래 목적은 집안의 남은 재산까지 탕진하고 있는 형 유근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송을 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춘천으로 내려간 그는 들병이들과 어울리며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하는데 박녹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집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 이후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도 휴양할 겸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닸지만 이곳에서조차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다가 결국 건강만 더 악화된 채 서너 달 만에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왔는데 광산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후 그는 실레마을의 낙후된 환경을 목격하고 1931년 야학당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설립해 교사가 되어 주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햤다. 인근부락 청년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자기 또래 젊은이가 농민회니 부녀회니 만들어 놓고 꺼덕이는 꼴이 아니꼬워 그에게 걸핏하면 시비를 걸었고 결국 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가끔 싸움판을 벌였다. 그는 싸움만 붙으면 야학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했는데 증리에 살던 당시의 제자들에 의하면 그는 싸움만 붙으면 몹시 날래게 움직여 수십 명을 상대해 쫓아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얼마 못 가서 야학이 강제로 해체되고 유산을 상속받은 맏형 김유근이 방탕한 생활로 자산을 다 날려먹었기 때문에 경성과 춘천의 집을 팔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로 집안이 기운다. 이에 그는 1933년부터 경기도 광주에 있던 큰누나에게 얹혀살게 되었지만 이미 치질의 고통에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악화되어 항상 누워 있는 신세였다. 게다가 누나 집도 가난했고 공장 노동자들에게 밥을 팔며 살던 누나는 기둥서방 남편 정 씨와의 심한 불화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병으로 누워 있는 동생에게 "내가 고생해서 벌어 온 돈이 아깝다. 네 놈은 돈은 못 벌어 오고 집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냐! 취직이라도 좀 해라."라고 잔소리를 하며 풀었다. 물론 그의 체력과 건강을 보면 이것은 불가능했다. 하도 큰누나의 잔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김유정은 결국, "정 그렇다면 일본에 가서 막일이라도 하며 살겠다."고 하자 큰누나는 그가 험한 일을 하다가 그나마도 좋지 않은 건강이 더 악화되는 것이 염려되어 김유정에게 사과하였고 둘은 화해했다. 그러나 그는 매형이 싫었기 때문에 거처를 큰누나 집에서 다섯째 누나 집으로 옮겼으며 이외에도 옷차림이 남루하다고 병원에서 간호사들에게 무시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쭉 안타깝게 지켜보던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안회남은 그에게 "차라리 밖에 나가서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니?"라고 제안하였고 그는 비로소 1934년 본격적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고 구인회에 가입했다. 그 결과 1935년 1월 소설 소낙비 등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등단한 지 2년 만인 1937년 3월 29일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 2년 동안 그는 그야말로 목숨을 불태운 집필 활동을 했는데, 단편작들을 모두 이때 집필한 것은 물론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장편도 하나 만들었고 심지어 번역본까지 한 권 만들었다. 이렇게 그가 2년 동안 남긴 작품은 무려 30여 편이나 된다. 그의 열정이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례는 그의 형제, 조카들, 친구 안회남에 의해 화장으로 치러져 한강에 유골이 뿌려졌다.
죽기 전인 1937년 3월 18일에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치질과 가난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말해주며 처절함 그 자체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 되고 흥미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譯)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개요에서 언급된 이상의 소설 실화에도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찬란한 정사... 다음 부분이다.
"이것 좀 보십시오."
하고 풀어헤치는 유정의 젖가슴은 초롱(草籠)보다도 앙상하다.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구겼다 하면서 단말마의 호흡이 서글프다.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유정은 운다. 울 수 있는 외의 그는 온갖 표정을 다 망각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유 형! 저는 내일 아침차로 동경 가겠습니다."
"......"
"또 뵈옵기 어려울걸요."
"......"
그를 찾은 것을 몇 번이고 후회하면서 나는 유정을 하직하였다.
2.1. 박녹주를 향한 집착
김유정은 생전 늘 어머니의 사진을 품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유년기의 상처로 인한 애정결핍이 심했고 연상의 여성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과 집착 증세가 있어 유독 연상인 여성에게 집착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소리계에서 유명한 박녹주 명창에 대한 스토킹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황당하게도 이게 그의 생애를 다룬 글에서 간혹 '짝사랑'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상 까놓고 말해 스토킹 범죄다. 21세기에 태어났다면 꼼짝없이 범죄자 취급을 받고 매장당했을 수준이다.
어느날 우연히 김유정은 목욕을 마치고 목욕탕 문 앞에 서 있던 박녹주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1928년 봄 조선극장에서 열린 8도 모창대회에 박녹주 명창이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대회가 끝난 후 수소문하여 그녀의 대기실에 찾아갔다고 한다. 박녹주와 대화를 나눈 후 김유정은 본격적으로 박녹주를 연모하게 되어 편지를 보내 정식으로 그녀에게 고백했고 이미 1920년에 원산시의 부호 남백우와 살림을 차렸던 박녹주는 그의 편지를 찢어 버렸으나 "그래도 한 번 정도 만나보는 게 어떠냐"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김유정을 집으로 불렀다.
박녹주는 김유정에게 "나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라고 점잖게 타일렀지만 김유정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면서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오히려 이때의 일로 그녀의 동생 태술과 친해진 김유정은 그를 통해 본격적으로 각종 선물이나 레코드판에서 뜯어낸 박녹주의 사진 밑에 ‘당신을 연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옵소서’라고 적힌 편지 등을 박녹주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유정은 이미 늑막염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박녹주는 그가 이러한 편지들을 보내는 족족 갖다 버렸다.
그러자 김유정은 본격적으로 박녹주를 스토킹하기 시작했는데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라는 협박편지가 시초였으며 집착과 망상도 점점 심해져 처음에는 박녹주를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박녹주가 외출을 나갔다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김유정이 하얀 몽둥이를 들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는 "녹주야 내려라. 내 오늘은 너를 해치지 않으마"라며 말했고 녹주는 떨면서 인력거에서 내렸는데 그녀에게 유정이 대뜸 "네가 내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라 그런 것이지?" 하고 말했다고 한다. 박녹주는 무슨 미친 사람이 버릇없이 말하는 질문에 당황하는 한편 잘못 말하면 자신이 돈에 집착하는 천한 여자로 여겨질 것 같아서 "저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라며 한 소리 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유정은 도망갔으며 다음날 박녹주의 집 앞에서 김유정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후 김유정의 스토킹은 점점 심해졌고 박녹주는 외출도 거의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1928년 겨울의 어느 날에는...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天香園)으로 간 것을 보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라는 내용의 혈서까지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스캔들은 경성 전국에 퍼졌고 결국 참다못한 박녹주는 1929년 여름 김유정을 다시 한 번 집으로 불러서 "무슨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편지질이오? 학생과 기생이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요?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김유정은 "학생과 소리 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라고 막무가내로 대들며 "도대체 네가 사람이냐"라고 외쳤다고 한다. 박녹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유정은 죽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박녹주에게 "너무 큰 소리를 쳐서 미안해"라면서 사과를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30분을 있다가 헤어졌고 그날 이후 비로소 김유정의 스토킹이 멈췄다고 한다.
1931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에 박녹주가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스트레스 및 조선극장 지배인이었던 신 모 씨와의 애정문제로 자살 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1년 전에 중퇴한 김유정이 다짜고짜 박녹주가 입원 중인 병원을 찾아가서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만약 당신이 죽으면 저도 같이 따라갈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병실에 있던 박녹주는 "괜한 기대 말고 돌아가라."라면서 소리쳤고 그것이 박녹주와 김유정의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한다. 직후 박녹주는 순천의 거부인 김종익과 결혼했다. 박녹주는 결혼 이전부터 김종익과 교류했으며 김종익은 이 인연으로 국악계에도 지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김유정은 삶을 다할 때까지도 박녹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은데 29세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 그의 방 안에는 '녹주, 너를 연모한다'라는 혈서가 벽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장례식을 치른 안회남이 술에 만취한 채로 박녹주의 집에 나타나서 "당신이 박녹주요? 친구는 당신이 죽인 거요.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갔소!"라며 원망했다고 한다. 당연히 박녹주의 입장에서는 그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김유정에게 이골이 날 정도로 시달렸던 박녹주는 훗날 회고록에서 "김유정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한 벌을 뒤늦게 받아 내가 평생 슬하에 자식 없이 살았나 보오. 그가 그토록 훌륭한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손이라도 한 번 잡게 해 줄 것을."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박녹주는 특별히 그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
이외에도 김유정은 1936년, 잡지 「여성」(1936년 5월)에 <그 분들의 결혼 플랜,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라는 공동 제목으로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와 자신의 글이 나란히 실렸다는 이유로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에게 우발적으로 30통의 연애편지를 쓰기도 했다. 물론 김유정이 병약한 데다 평상시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들러붙는 행각을 여러 번 보인 것을 알고 있었고 여동생을 아꼈던 박용철 본인이 그의 행동을 좋게 보지 않아 중간에 편지를 읽고 커트해서 성과는 없었다. 박봉자는 같은 해 김유정 자신도 알고 지낸 사이였던 문학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했으며 김유정은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박봉자 여사가 1970년대에 들어 회고하길 "아무리 내가 그 당시 신여성이었더라도 김유정이 보낸 뜨거운 구애의 편지는 지금 시대여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정도의 내용이었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이 일화는 뮤지컬 팬레터의 모티브가 된다.
3. 주요 작품
유명한 작품으로는 〈금 따는 콩밭〉, 〈봄·봄〉, 〈동백꽃〉, 〈만무방〉, 〈소낙비〉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작품에 해학적 요소가 많고 영서 방언과 아름다운 순 한국어 단어를 잘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글이 상당히 재밌다. 봄봄의 장인과 나의 고자되기뿐 아니라 만무방, 금따는 콩밭, 동백꽃 등도 실감나는 서술로 읽는 맛이 좋다. 동백꽃에서 점순이가 말한 "느그 아버지가 고자라지?" 등.
이는 앞서 서술된 박녹주의 영향으로 보인다. 생전 그는 박녹주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였던 흥보가와 춘향가의 대사를 외울 정도로 즐겨 들었다고 한다. 그의 단편작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었으며 배경도 대부분 그의 고향 실레마을이다.
짧은 기간 동안 창작열을 불태운 탓에 거의 모든 단편 작품이 한 권의 단편집으로 집약되어 있다. 1938년 출간된 <동백꽃>에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봄·봄>, <만무방>, <금 따는 콩밭> 등 그의 대표작이 모두 실려 있다. 2007년에는 그의 모든 소설과 수필, 편지, 일기와 번역한 소설을 모두 담은 <김유정 전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다만 현대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아서 가독성은 약간 떨어진다. 그의 모든 소설이 담겨 있고 심지어 미발표 원고도 들어 있다. 총 31편.
적잖은 사람들이 일제의 지배 하에 놓여있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조선의 현실을 외면하고 연애소설이나 썼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가 일제강점기 농촌의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은 해학 속의 비참함이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다루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쓴 소설들을 읽어보면 농촌사회의 암울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만무방〉에선 수탈을 막기 위해서 제 논의 벼를 떳떳이 거두지 못하고 몰래 훔쳐 거둬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 나온다. 처음엔 그리 비극적으로 와닿지 않으나 한 번 더 생각하고나면 소설 속의 상황이 얼마나 암울한지 눈치채게 된다.〈소낙비〉에서는 이 해학 속 비극이 더욱 두드러진다. 남편이 도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에게 매음을 종용하여 동네 유지에게 보내는 줄거리가 해학적이고 향토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 중심에는 생존을 위해 윤리마저 버린 일제강점기 농촌의 비참한 현실이 깔려 있다.
오히려 〈동백꽃〉이나 <봄·봄>이 유명하거나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던 이유도 다른 작품들보다 덜 암울하고 덜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단편들에서는 가난 때문에 매춘을 하거나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타난다. 〈금 따는 콩밭〉만 해도 해학적이지만 상황은 정말로 허탈할 정도로 망한 상황에 친구며 부부끼리 치고 박고 싸우며 위에서 언급된 만무방이나 소낙비 같은 부류는 아예 등장인물이 도둑질, 매춘을 권하는 내용이 있다. 〈산골 나그네〉는 술집 작부까지 하다가 혼인 혼수를 들고 본남편과 도망가는 이야기고 〈따라지〉나 〈땡볕〉 같은 작품은 아예 작품의 설정부터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따라지〉는 셋방살이하는 인간 군상들과 주인집과의 기싸움을 그리고 있고 〈땡볕〉은 남편이 병든 아내를 지게에 짊어지고 병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그나마 밝다고 꼽히는 〈동백꽃〉과 〈봄·봄〉도 엄밀히 말하면 지주의 횡포와 착취에도 저항할 수 없는 계층의 상황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더 슬픈 사실은 여기서 소작농이 마름을 대하는, 즉 갑이 을을 대하는 태도가 현대인들에게도 쉽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마저도 '주인집 딸이라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설명에 별다른 의문 없이 수긍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해학적이고 풍자적일 뿐 이야기의 시작점에는 당시 농촌~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과 현실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 여담
은근히 모에 계통에서는 시대를 앞서간 작가 중 하나다. 단편소설인 〈동백꽃〉의 등장인물 점순이만 봐도 츤데레를 포함해 은근 많은 모에요소를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시대를 앞서간 모에요소나 개그신을 넣은 것 외에도 전술했듯이 해학 뒤에 있는 비참한 시대상을 작품 안에 담아내면서 은연중에 보여주는 표현기법도 매우 훌륭한 작가다.
작품의 주 배경이 되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실레마을)에 김유정문학촌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관 외에도 소소한 재밋거리들이 많고 잘 짜인 행사도 자주 하고 있으니 근방에 갈 일이 있다면 한 번쯤 둘러보는 것도 좋다. 여담으로 촌장은 유명한 소설가 이순원이다.
김유정문학촌에서 5분만 걸어가면 그의 이름을 딴 경춘선 김유정역이 나온다. 원래의 이름은 신남역이었으나, 마을 주변이 김유정 관련 관광지로 조성되다 보니 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역명까지 바꿔 단 케이스다. 인물 이름을 역 이름으로 사용한 한국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 복선 전철 개통과 함께 바로 옆에 새로 지은 한옥 스타일의 역사로 옮겼다.
2017년 6월 1일 지식채널e에서 그에 대해 다루었는데 제목은 '약골 청년의 마지막 봄'이다. 보러 가기
2018년부터 일부 인터넷몰과 여러 대형서점에서는 한국과 외국의 여러 유명 작가 · 작품의 이름을 따 온 향수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그의 이름을 딴 향수도 있다. 참고 달달한 꽃향기가 난다. 상품명이 김유정 - 봄봄인데 아마 봄봄의 분위기를 담기 위해 향수의 향을 봄 느낌이 나는 달달한 꽃향기로 설정한 듯하다.
Limbus Company 4장의 중간보스 동백의 모티브가 그다.
5. 관련 문서
김유정역
봄·봄
동백꽃
김유정문학촌
김유정문학상
김유정신인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