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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4월 11일 토요일]
《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
22세 색불루, 23세 아흘, 24세 연나, 25세 솔나 》 (27)
二十二世 檀君 索弗婁 在位四十八年
丙申元年 帝命修築鹿山 改官制 秋九月親幸藏唐京 立廟祀高登王 十一月親率九桓之師 屢戰破殷都 尋和 又得大戰 破之 明年二月 追至河上 而受捷賀 遷弁民于淮垈之地 使之畜農 國威大振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1285)에 단제께서 명하여 녹산성을 고쳐 쌓으라 하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廟)를 세우고 고등왕의 제사를 지냈다. 11월 몸소 구한(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도읍을 점령하고 잠시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황하 상류까지 추격하여 승전의 하례를 받았다.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 양자강 하류와 회수 사이)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辰丑六年 臣智陸右 奏曰 阿斯達千年帝業之地 大運已盡 寧古塔 王氣濃厚 以勝於白岳山 請築城移之 帝不許曰 新都已宅更何他往
신축 6년(B.C.1280)에 신지 육우가 주청하기를, ”아사달은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大運)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합니다.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합니다.“라 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새 도읍지에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다시 어찌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 하였다.
乙卯二十年 至是藍國頗强 與孤竹君 逐諸賊 南遷 至俺瀆忽 居之 近於殷境 使黎巴達 頒兵 進據邠岐 與其遺民 相結 立國稱黎 與西戎 雜處於殷家諸侯之間 藍氏威勢甚盛 皇化遠及 恒山以南之地
을묘 20년(B.C.1266) 이때에 이르러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국 왕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아내고는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홀(奄瀆忽 산동성 태산 부근)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는데 은나라 경계에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군사를 나누어 진격하여 빈(邠) 땅과 기(岐) 땅을 점거하도록 하고,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에 섞여 살게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강성해져서 단군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산서성에 있는 산으로 오악 중 북악에 해당하는 산) 이남의 땅에까지 미쳤다.
辛未三十六年 邊將申督 因兵作亂 帝暫避于寧古塔 民多從之
癸未四十八年 帝崩 太子阿忽立
신미 36년(B.C.1250)에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계미 48년(B.C.1238)에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태자 아홀(阿忽)이 즉위하였다.
[논주] 색불루 단군 때는 은나라와 치열하게 전쟁을 했는데, 은나라 수도를 점령하고 산동성 회대지역과 태산 지역까지 세력을 펼쳤다. 이때는 중국 대륙 동부의 동이족과 황하강 중류의 화하족 간에 팽팽한 세력 균형 상태였다. 외전(外戰)이 정리된 후에 장수 신독이 일으킨 내란도 있었다. 단군이 많은 백성들과 함께 영고탑으로 피할 정도면 반군의 세력이 무척 강했다. 전쟁기에는 장수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자가 왕이 되려는 야심을 갖는다. 그러나 다행히 내란을 수습히고 태자가 단군의 대를 이었다.
二十三世 檀君 阿忽 在位七十六年
甲申元年 命皇弟固弗加 治樂浪忽 遣熊乫孫 與藍國君 觀南征之兵 置六邑於殷地 殷人相爭不決 乃進兵攻破之 秋七月 誅申督還都 命釋囚浮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C.1237)에 단제께서 아우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을 통치하도록 했다. 또한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한 군대를 열병한 후에,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고 어지러운 것을 보고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은나라 군사들을 쳐부수고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신독(申督)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乙酉二年 藍國君今達 與靑邱君 句麗君 會于周愷 合蒙古里之兵 所到破殷城柵 深入奧地 定淮岱之地 分封蒲古氏於淹 盈古氏於徐 邦古氏於淮 殷人望風煌怯 莫敢近之
을유 2년(B.C.1236)에 남국 왕 금달(今達)이 청구 왕, 구려왕과 함께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까지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하고 험한 곳까지 쳐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한 뒤 포고씨를 엄(淹) 땅에, 영고씨를 서(徐) 땅에, 방고씨를 회(淮) 땅에 각각 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戊子五年 召二韓及五加 議停寧古塔移都事
己亥七十六年 帝崩 太子延那立
무자 5년(B.C.1233)에 이한(二韓) 및 오가(五加)를 불러서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은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B.C.1162)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하였다.
[논주] 앞 시대에 이어 이 시대에도 화하족이 사는 중국 대륙 동부 지역을 단군조선이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은나라 백성들은 양자강 계통으로 동이족에 속한다. 황하 중상류에 거주하는 화하족은 중아아시아에서 서북쪽으로 중국대륙에 들어왔다. 이후 단군조선이 쇠하여 동이족의 본류가 한반도로 이주하고, 중국 대륙에 남은 동이족들은 모두 화이족에 융합되었다.
二十四世 檀君 延那 在位十一年
庚子元年 命皇叔固弗加爲攝政
辛丑二年 諸汗奉詔 增設蘇塗祭天 國家有大事異災則輒禱之 定民志于一
庚戌十一年 帝崩 太子率那立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자년 원년(B.C.1161)에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신축년 2년(B.C.1160)에 여러 한(汗)들이 조서를 받들어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자주 기도하고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아서 정하였다.
경술 11년(B.C.1151)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二十五世 檀君 率那 在位八十八年
辛亥元年
丁亥三十七年 箕徙居西華 謝絶人事
丁酉四十七年 帝在上蘇塗 講古禮 因間侫臣直臣之分 三郞洪雲性 進對曰 執理不屈者直臣也 畏威曲從者侫臣也 君源臣流 源旣濁矣 流其求淸 是爲不可 故君聖然後臣直 帝曰善哉
己酉五十九年 田穀豊登 有一莖五穗之栗
戊寅八十八年 帝崩 太子鄒魯立
25세 단군 솔나 재위 팔십팔년
신해 원년(B.C.1150).
정해 37년(B.C.1114)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정유 47년(B.C.1104)에 단제께서 소도에 서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다가 아첨하는 신하와 바른 신하의 구분을 물으셨다. 이에 삼랑 홍운성이 나서서 대답하기를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를 바른 신하라 하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신하를 아첨하는 신하라 합니다. 임금이 물의 근원이라면 신하는 흘러가는 물이니 근원이 흐리면 물 흐름이 맑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거룩한 다음에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라 하였다. 단제께서 ”옳은 말인지고“라 하였다.
기유 59년(B.C.1092)에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무인 88년(B.C.1063)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논주] <기자조선설>의 발단은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에 있는 한 줄 문장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사서인 『삼국유사』의 [고조선] 기사에는 당나라 [배구전]까지 인용하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의 필연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 <25세 단군 솔나>의 기사에는 ‘丁亥三十七年 箕徙居西華 謝絶人事’뿐이다. 이후에 기자가 조선의 제후가 됐다는 기사는 없고 단군 솔나가 51년을 더 재위하고 B.C.1063에 붕어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후 단군들은 기자의 후손이 아니라 모두 조선 사람이다. B.C.1114에 기자가 우리 단군조선 땅에 오긴 왔는데 제후가 된 게 아니라 망명객으로 서화 땅에서 살았다. 서화(西華)는 하남시 상구시 서남쪽 지명이다. 그곳에서 기자는 ‘謝絶人事’란 말 그대로 완전한 칩거 생활을 했다. 중국 학자들은 기자가 활동했다고 하는 곳을 하북성 노룡현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기자의 무덤이 하남성 상구시(商丘市)에 있다. 기자의 은거와 활동 영역, 무덤의 위치는 단군조선의 번국인 번조선의 영역과 영향력이 하북성을 넘어 하남성에까지 이르렀다는 방증이다.
기자가 B.C. 1122년 처음부터 주무왕으로부터 번조선의 제후로 임명받은 것이 아니다. 46세 단군 보을 재위 19년 B.C. 323년 기사에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번한성의 궁에 들어거 스스로 번조선 왕이 되고자 한다면서 사람을 보내 윤허를 청하였다. 단군께서 윤허하시고 연나라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하도록 했다.“라고 한다.
읍차면 고급 관리다. 그 읍차인 기후가 반란을 일으켜 번조선인 수유국(須臾國)을 차지하고 왕이 됐다. 기후는 기자의 791년 후 자손이다. 서화 땅에 은거한 기자의 후손들이 기자의 명성에 힘입어 번성하였고, 드디어 왕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47세 단군 고열가가 은퇴하고 오가(五加)가 다스리던 시대인 B.C. 238년~232년 기사에 ”왕족인 대해모수가 은밀히 수유국과 약속을 하고 옛 도읍지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니 시방에서 모두 그 명을 들으며 따랐다. 이때부터 여러 장수를 봉하고 수유국 제후 기비(箕伾)의 등급을 올려 번조선왕으로 삼으며 상하운장에 가서 지키도록 했다.“라고 한다.
대해모수가 무단히 몸을 일으킨 게 아니라 노쇠한 고열가 단군이 스스로 은퇴하고 오가의 우두머리가 협의하여 다스리게 되면서 무력해진 단군의 권한을 왕족인 자기가 되찾아 세워야 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궐기했다. 왕족이기 때문에 역성혁명이나 반란이 아닌 내부혁신 운동이다. 또한 진, 연, 제, 조나라 등 화하족과 비쥬류 동이족들로부터 가해지는 외세가 서쪽으로부터 밀려들면서 나라의 안전이 위태로운 시대였다.
번조선 왕 기후의 태자가 기비이고, 기비의 태자가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다. 북부여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B.C. 196년 가사에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했다. 그 무리인 위만이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단군께서는 병이 깊어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없었는데 번조선의 왕 기준이 실책을 많이 범하자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삼고 상하운장(上下雲障)을 떼어 봉했다.“가 있다. 또한 북부여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원년 B.C. 194년 가사에 ”번조선의 왕 기준이 오랫동안 수유에 머물면서 많은 복을 베풀어 백성들 모두가 풍족했으나, 나중에 떠돌이 도적이 되어 패망하자 바다로 들어가버리곤 돌아오지 않았다.“가 있다.
중국과의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에는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해 온 연, 제, 조의 무리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위만은 이들을 이끌고 B.C. 194년에 번조선을 쳐서 멸망시킨다. 상하운장의 서쪽 경계에는 진나라 당시 변방 초소인 요동외요가 있었는데 한이 건국된 후에는 멀어 지킬 수가 없어서 연과 진이 쌓았던 옛 요새인 요동고새 (遼東故塞)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요동고새란 산해관(山海關)이다.
위만은 모수리 단군과 기준 왕을 배신하고 상하운장의 연, 제, 조의 무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번조선을 정복했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아니다. 앞선 기자조선 역시 B.C. 1122년부터 중국인 기자가 시조왕이 되어 전해진 기씨왕조가 아니라 791년 동안 번조선 땅에 살면서 동이족으로 동화된 기후가 B.C. 323년에 번조선을 접수하고 왕이 된 나라이다. 기사에는 기씨조선의 끝왕 기준이 ”나중에 떠돌이 도적이 되어 패망하자 바다로 들어가버리곤 돌아오지 않았다.“라 하지만, 기준은 위만에게 쫓겨 해로로 한반도 한강 이남 지역에 정착하여 韓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기존의 마한 등 여러 작은 나라들의 세력에 눌렸다.
기자조선이 아니라 기씨조선은 3대 129년 동안이었다. 기후는 은나라 기자의 후손이지만 800년 동안 단군조선 영역에 사는 동안 살며 동화된 조선인이다. 그런데도 전한 초의 한문제 이전~그 무렵을 보낸 학자 복승(伏勝)이 복원한 《상서대전》(尙書大傳)에 나온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후로 봉해졌다."을 근거로 하여 이후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여러 중국 사서들이 이러한 기술을 따르게 되면서, 중화권에선 위만에 의해 멸망한 조선왕 기준은 이 기자조선의 왕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면서 동이족 조선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인들 역시 기자가 무지몽매한 동이족에게 문명의 불을 밝혀준 은인으로 숭배하였고, 현대에도 그와 같이 생각하는 무리들이 여전하다.
복승(伏勝)이 ”조선후로 봉해졌다."라고 쓴 것은 과장과 왜곡으로 학자다운 태도가 아니다. 기자는 ‘조선후’로 봉해진 게 아니라 조선으로 망명했다. 단군조선과 주나라가 어금버금한 국력인데 어찌 함부로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할 수 있겠는가. 그 당시에도 현인이라 칭송받는 기자가 무력으로 제후 자리를 꿰찰 리가 없다.
이렇게 이치에 안 맞지만 상식에도 어긋난다. 그러므로 기자조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상식과 이치를 모르거나 외면한 사람들이다.
기자의 아득한 후손 기후가 찬탈한 기씨조선은 있지만 기자가 처음부터 왕이 된 기자조선은 없다. 중국사에서 기자는 현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런 현인이 망명을 받아준 단군조선을 배신하고 기자조선을 세울 만큼 배은망덕한 인간은 아닐 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기자조선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현인 기자의 이미지와 권위만 추락한다.
역사의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사마천과 여타 학자들이 복승의 과장과 왜곡을 여과 없이 그대로 믿고 인용한 것 역시 학자다운 태도가 아니다. 학자는 학자되 인류 보편적 가치를 기준으로 한 학자가 아니라 중국이란 자기 나라를 가치 기준으로 하는 국수주의 학자이다. 학자는 학자이나 인간과 세상, 자연과 우주를 크고, 넓고, 깊고, 높고, 무겁게 보는 큰 학자가 아니라 자기 나라와 민족의 이익과 명예에만 집착하는 편협한 작은 학자들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작은 그릇이라면 고려-조선-한국의 학자들은 간장 종지이다. 기자조선을 철석같이 신뢰하여 평양에 기자릉을 만든 고려의 유학자들부터 현대한국의 관변학자들까지 모두 중국학자들이 맛있게 먹는 상(床) 위에 놓인 간장 종지이다.
정리하면, 기자가 단군조선에 망명한 후 791년 만인 B.C. 323년에 기자의 후손인 기후(箕詡)가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세운 나라가 기씨조선(箕氏朝鮮)이다. [단군세기]와 [북부여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연 김견명과 그 당시의 지식층이 그러했듯이 이후 고려와 조선의 지식층 다수가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프레임을 수호하며 지적, 문화적 열등감을 모면하려고 했다. 그러나 요하문명에서 나타나듯이 우리 민족은 고대부터 찬란한 지식과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현대 사학이 발달하여 기자조선의 허구성이 차츰 드러나고, 이제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부정하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사군설의 허구성도 규명되어야 한다.
학문의 생명은 사실성과 진실성이다. 이 사실성과 진실성은 국적과 국경을 초월하여 학문하는 모든 사람이라면 마음의 중심에 굳건히 담아두어야 한다. 기자조선설과 한사군설 등이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 투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양국 학자들의 허비일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양국 간의 미래에 결코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한국 학자들이 기씨조선과 한사군을 부정하며 단군조선의 영역이 저 멀리 화북-산동성까지였다라 하며 떠들어 자랑하는 의도가 동물적 야만성의 국수주의이고, 중국 학자들이 한나라 사군이 한반도 서북부였고,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변방사로서 그 영역이 한반도 중부까지였다고 강조하는 의도 역시 동물적 야만성의 국수주의라면, 미래 언젠가 두 국수주의가 야수가 되어 격렬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 두 국수주의가 미래의 동북아 백성들의 평화와 행복을 망칠 것인가? 망치고 싶으면 두 국수주의 학자들은 열심히 연구하고, 발표하고, 교육하고, 세뇌해서 후일 언젠가 한국이 중국 만주와 동부를 접수하든지, 중국이 한반도를 접수하든지 큰 전쟁을 하기 바란다. 이 말이 시골 선비의 넋두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현재 양국의 국수주의 학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북아 전체 백성들과 생물들을 천인절벽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철학, 어려운 말이다. 역사지식과 역사의식까지는 지식인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사의 지식과 의식을 승화시켜 철학으로 나아가는 학자는 매우 드물다. 토인비를 일러 현대의 가장 우수한 역사철학자리고 한다. 그런데 토인비가 자기 조국인 영국이 수세기 동안 인도와 중동 등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서 저지른 약탈, 살인, 납치 등등의 죄악에 대하여 진지하게 참회한 적이 있는가? 토인비 그가 진정한 역사철학을 아는 학자라면 자기의 모든 저서 첫 장에 “나의 조국 영국이 인류 역사에 저지른 죄악을 참회합니다”라는 글을 써놓아야 하고, 모든 대중 강연에서 가장 처음 한 말 역시 “나의 조국 영국이 인류 역사에 저지른 죄악을 참회합니다”여야 한다. 그는 영국신사와 숙녀들이 입은 고급 의상 속에 감춰진 총과 칼을 낱낱이 고백했어야만 했다.
영국인 토인비는 역사학자이지 역사철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동북아에 사는 한국-중국-일본의 학자들은 역사학자의 수준을 넘어 역사철학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국수주의적 관점과 시각을 버리고 인류 보편적 관점과 시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기의 연구 결과만을 선으로 보지 말고 다른 학자들의, 특히 다른 나라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구는 크고 둥글지만 우리들이 사는 동북아는 작고 편편하다. 함께 자전과 공전을 하며 춘하추동이 오가고, 폭염대와 한랭대가 오르내리면 달구었다 식혔다 하며,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동북아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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