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나무White Mulberry , 桑樹 , マグワ真桑
분류학명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예부터 농업과 함께 농상(農桑)이라 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 양잠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1) 〈마한 조(條)〉에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서 옷을 해 입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삼한시대 이전으로 짐작된다. 우리의 기록에도 고구려 동명왕과 백제 온조왕 때 농사와 함께 누에치기의 귀중함을 강조한 대목이 있다. 신라 박혁거세 17년(BC 40)에는 임금이 직접 6부의 마을을 돌면서 누에치기를 독려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누에치기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비단은 당시로서는 오늘날의 반도체나 자동차만큼이나 나라의 중요한 기간산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비단 생산을 더욱 늘려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처음 나라를 열어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려면 산업생산을 통한 수입증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단입국’의 기치를 높이 들 수 있었던 이유는 명나라에 보내는 조공과 신흥귀족들의 품위유지를 위한 비단의 수요가 만만치 않아서다.
태종 때는 집집마다 뽕나무를 몇 그루씩 나누어주면서 심기를 거의 강제하다시피 했다. 이후 세종으로 내려오면서 누에치기를 더욱 독려했다. 예부터 내려오던 친잠례(親蠶禮)를 강화하여 왕비가 직접 비단을 짜는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각 도마다 좋은 장소에 뽕나무를 널리 심도록 하였고, 누에치기 전문기관인 ‘잠실’을 설치했다. 그러다가 중종 원년(1506)에는 보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각 도에 있는 잠실(蠶室)을 서울 근처로 모이도록 구조조정을 한다. 바로 그때 그 장소가 오늘날의 서초구 잠원동 일대다.
흔히 우리는 세상이 너무 변하여 옛 정취를 찾을 수 없게 되면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쓴다. 잠실은 이제 뽕나무 밭, 누에들의 터전이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촌이 되어버렸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300~400년이나 된 뽕나무가 여럿 있었다고 하나 이제는 모두 죽어버렸다. 얼마 전까지 살아 있던 단 한 그루도 죽어버리자, 그의 시신을 없애지 않고 서울시 기념물 1호란 이름으로 옛터를 지키게 하고 있을 따름이다. ‘임도 보고 뽕도 따던’ 그 옛날의 청춘남녀들은 무성한 잎으로 은밀한 사랑 놀음을 가려줄 뽕밭이 없어졌으니 모두 카페나 PC방으로 가버릴 수밖에 없다.
뽕나무는 단순히 잎을 따서 누에치기에만 쓰인 것은 아니다. 우선 약재의 원료로서 뽕나무의 쓰임새는 끝이 없다. 열매인 오디는 가난하던 시절 맛있는 간식거리로 애용되었고, 건조시키면 한약재로 둔갑한다. 이뇨효과와 함께 기침을 멈추게 하고 강장작용이 있으며, 기타 여러 가지 질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매의 즙액을 누룩과 함께 섞어 발효시킨 상심주(桑픮酒)는 정력제라고도 한다. 물론 뽕나무 껍질도 약재 대열에서 빠지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춰 보면 ‘상상기생(桑上寄生)’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온다. 뽕나무에 빌붙어 사는 기생식물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보는 늘푸른잎을 가진 보통의 겨우살이와 다른 종류로 ‘꼬리겨우살이’로 짐작되는데,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귀하게 생각한 것 같다. 다른 데서도 자라지만 상상기생은 백령도와 대청도가 특산지이며, 나이를 먹은 큰 뽕나무에 주로 난다고 한다.
뽕나무는 누에에게 이파리 공양을 쉽게 하기 위하여 자꾸 잘라대는 탓에 사람 키보다 조금 큰 크기로 자란다. 제 자람대로 두면 둘레가 두 아름이 넘는 큰 나무가 된다. 겉껍질은 세로로 깊게 갈라지고, 안껍질은 노란 것이 특징이다. 나무속은 황색빛을 띠고 있어서 독특한 정취가 있고, 단단하고 질기며 잘 썩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에는 밤나무와 같이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위패를 만들었고, 나무배의 겉 판자를 잇는 나무못으로 쓰이기도 했다. 또 굵은 나무는 목관재(木棺材)로 쓰였다. 경북 경산시 임당동에는 삼국이 자리를 잡기 전에 어느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족장쯤으로 짐작되는 이의 뽕나무 목관이 발견되었다.
뽕나무는 특별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품새가 근사하여 묵객의 붓질로 화선지에 올라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숲속의 천여 가지 나무 중 이름 없는 한 나무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평범한 나무였다. 그러나 잎이 잘려나가는 아픔을 이겨내고 누에와의 인연을 소중히 승화시켰다. 덕분에 누에라는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만들어준 비단길을 통하여 동서양 문화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한 귀한 나무가 되었다. 최근에는 상황(桑黃)버섯이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뽕잎을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누에 그 자체가 바로 약으로 쓰이는 세상이다. 비단에서 출발하여 상상기생, 상황버섯을 거쳐 이제는 ‘누에그라’로 또다시 고개를 들어 영광을 일구어내는 그의 변신술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