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과 모험의 나날들
―강현덕, 『너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영숙
0. 들어가며
시집을 대하는 태도는 대략 이렇다. 손을 씻고 와서 시인의 이름이나 시집 제목 중 더 익숙한 어느 하나부터 차례로 악수하고, 친지의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듯 앞표지와 뒤표지를 둘러본 뒤 시집을 펼친다. 사진과 약력에 가볍게 목례하고, <시인의 말>을 경청하면서 그 여운과 함께 목차 산책에 나선다. 대부분 네 블록으로 나뉘어 여러 채의 집을 품고 있는 목차는 친절하게 일일이 주소를 표기해서 읽는 이의 수고를 덜어준다. 이는 이미 알고 있는 시가 등장할 때 매우 유용하다. 순식간에 공간 이동이 일어나는데, 이 시집에서는 「밤에 사는 참외」 등이 그것이다. 구면이어서 잠시 흥분하는데, 목차에서 발견한 「불 꺼진 창밖의 고양이」가 궁금해 다녀오는 길에 앞, 뒤, 옆집도 가볍게 들린다. 마음이 좀 차분해지면 드디어 시와 만날 준비가 된 것이다. 시집의 첫 시를 펼친다. 「거울 속 거울」부터 죽죽 읽어 나간다. 그런데 몇 쪽 지나지 않아 「헛」, 「파주」, 「심금(心琴)」, 「편경」 등이 길을 턱턱 막아선다. 이상하다. <시인의 말>에서 미처 해독하지 못하고 지나온 그 ‘뭔가’에 대한 단서 같은 게 반짝이는 듯해서다. 앞부분으로 돌아와 「거울 속 거울」을 다시 읽는다. 이 시에서도 물음표하고 지나간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실마리가 보인다. 다시 시를 죽죽 읽어 나간다. <시인의 말>과 연루된 여러 편의 시가 챙겨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정독하는 사이 며칠이 지났다. 이제 퍼즐을 맞출 시간이다.
1. 퍼즐
말 많은 임금도
법령 많은 법전도
기능 많은 가전도
메뉴 많은 밥집도
주석이 너무 많아서
읽을 수 없는 당신도
―「헛」 전문
시조 시인으로서 강현덕의 근력은 이 시에서도 여지없다. 술어를 생략하고, 제목에 따라붙을 품사도 생략한 채 근육만으로 시를 꾸린 것은 아마도 수다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던지고 싶은 할(喝)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주석이 너무 많아서/ 읽을 수 없는 당신”에서의 ‘당신’이다. ‘임금’, ‘법전’, ‘가전’, ‘밥집’이 단일하고 특정한 대상을 가리킨 것이 아니듯, ‘당신’의 층위 역시 그래 보인다. ‘당신’은 혹시 <시인의 말>에서의 ‘너’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너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어서
아무리 해도 비파형 동검이나 불탄 책들을 필사했던 중세의
수도사처럼은 사유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의 사유는 외로움의 깊이만큼 더 오롯해졌다
―<시인의 말> 전문
놀랍게도 <시인의 말>에서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인도 ‘나의 사유는 외로움의 깊이만큼 더 오롯해졌다“는 식의 과잉된 자의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글에서 시인은 “아무리 해도 비파형 동검이나 불탄 책들을 필사했던 중세의 수도사처럼은 사유할 수가 없었”던 ‘너’의 위치에 시인 자신을 둠으로써 자신을 낮추고 ‘나’의 존재를 높인다. 발화자인 ‘나’는 시인을 부릴 수 있는 존재, 곧 임명권자이자 ‘중세의 수도사처럼 사유할 수 있는’ 존재다, 말하자면 시인이 ‘아무리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시의 본령, 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가 발화자인 <시인의 말>은 <시의 말>로 수정되어야 할까. 아니다. 이러한 사실관계에 대한 시인의 통찰이자 고백이며 대언(代言)이므로 <시인의 말>이 맞다. 이 대목에서 「헛」의 ‘당신’은 ‘주석이 많아 실패한’ 시로, <시인의 말>의 ‘너’는 시인 자신을 포함한 시인들로도 확장된다. 표제를 ’배출‘한 <시인의 말>에는 강현덕의 시조 정신과 인문학적 근력을 키우는 이유가 그야말로 ’오롯‘하게 담겨 있다. ’뭔가‘의 실체가 점차 뚜렷해지는데 ‘중세의 수도사’가 우연히, 혹은 수사를 위해 등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 시가 보여준다.
폐쇄된 채석장에 내가 잘려 있네
울음이 함께 남아 고요에 물려 있네
수직의 암벽 아래에 그런 내가 모여 있네
안개에 떠넘겼던 모든 부끄럼과
순정이라 믿었으나 무용했던 노래와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언젠가라는 말들이
일시에 붙들려 와 이 감옥에 갇혔네
울음은 마땅한 것 슬퍼서가 아니네
어깨가 들먹거릴 때 어루만질 돌 같은 것
채석장 하늘에는 수십 개 달이 떴네
달빛에 눌려 있는 영혼의 껍데기들
적당한 간격에 맞춰 일시에 나를 보네
―「거울 속 거울」 전문
이 시의 ‘거울 속 거울’은 일순 ‘내가 잘려 있는’ ‘폐쇄된 채석장’이 “모든 부끄럼과/ …무용했던 노래와/ …언젠가라는 말들”인 ‘헛’의 ‘감옥’과 겹쳐지면서 추상적 시공간으로 자리를 잡는 듯하다. 그러나, ‘나’들(“내가 모여 있네”)과 ‘채석장 하늘에 뜬 수십 개 달’이 서로를 되비치는 무한반복의 울림(“울음”)을 통해 시는 ‘거울 속 거울’이 어떤 구체적 대상임을 드러낸다. 아르보 페르트(1935~ )가 작곡한 동명의 <거울 속의 거울>이 단서를 제공한다. 그의 다른 곡들도 이 연장선에 있지만, 이 곡은 “그레고리안 성가와 르네상스 시대 폴리포니(다성음악)의 영향을 받아 단순하면서도 깊은 영성을 지닌다. 단선율이자 모노톤이다. … 단순한 3도 화음의 반복 위에 바이올린이나 첼로, 비올라의 느린 선율이 얹”(서영처)힐 뿐이다. ‘헛’을 배제한다는 측면에서 강현덕이 추구하는 시 세계와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 세계는 닮았다. 현대 생활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단순함과 깊이를 찾아 중세나 그 이전으로까지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모험을 한다는 점에서도, 그 절대음감을 심연에 심어두었다는 점에서도.
2. 심연
언제부터 마음아, 숲을 가졌더냐
소나무 오동나무에 명주실 걸어놓고
바람의 긴 목덜미도 부풀려 두었더냐
깊은 강물처럼 흐르기로 했더냐
네게서 전해오는 눈물을 좇아서
마을로 저 착한 마을로 나도 자꾸만 간다
거문고자리 별들도 술대를 쥐려나 보다
너도 네 음역을 흠뻑 넘나들려무나
마음아,
울어보려무나
온전히 울어보자꾸나
―「심금(心琴)」 전문
아마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심연에 ‘숲’이 우거지게 된 시점은. “소나무 오동나무에 명주실 걸어놓고/ 바람의 긴 목덜미도 부풀려 두었”던 ‘마음’이 “깊은 강물처럼 흐르기로 했”던 바로 그 무렵. ‘거문고자리 별들’이 ‘술대를 쥐려’는 예감으로 빛나던 하늘과 제 “음역을 흠뻑 넘나들려”는 ‘마음’이 교감할 그때 심금을 울리는 음악도, 시도 시작되었을 것이다. 음악과 시가 하나였던 무렵이었으므로 “눈물을 좇아서” 오가는 ‘마음’을 시로 끌어올린 것은 아무래도 ‘울음’이라는 ‘노래’일 수밖에 없다.
완강한 노래들만 여기에 바쳐졌다
단단한 돌의 심장 두 손엔 옥색의 피
등뼈를 꺾어서 내는 또렷한 정음들만
각퇴를 만나기도 전 정전 기둥은 울었다
한 번도 그 중심을 잃은 적 없었기에
종묘는 더 깊어져갔다 고아한 조선의 악(樂)
―「편경」 전문
그리하여 강현덕에게서 ‘노래’는 ‘완강한’ 시이면서 동시에 “단단한 돌의 심장 두 손엔 옥색의 피/ 등뼈를 꺾어서 내는 또렷한 정음들”로만 연주되는 제의다. 언어를 제련하여 시를 짓되 언어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넓이가 아니라 깊이로 깊어져야 한다는 것을 시로 구현하면서 시인은 풍경이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본질에 근접한 어떤 경지를 창조해 낸다. “각퇴를 만나기도 전 정전 기둥은 울었다”와 같은 대목이 그것인데, 이는 마치 편경이 연주되기 직전의 찰나를 정지시킨 후 순간 확대한 극적 효과를 낸다. ‘정전 기둥’이 울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제의에 참석하는 정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리라. 연주자도 시인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이천 년 전 노래가 이 밤에도 들”(「금관가야」)리듯이 ‘더 깊어져’간 ‘종묘’와 ‘고아한 조선의 악(樂)’이 대신하는 시조라는 노래.
3. 기원(起源)
여기, 여기까지다
모두가 내려야 한다
그리움의 종착지
그리움의 출발지
두 발은 되돌아가고
눈물만 남는 곳
―「파주」 전문
궁극에 도달할 때가 있다. “여기, 여기까지다” 말하고 움켜쥔 것을 놓는 일은 길의 막다른 곳이나 인연의 마지막 고비,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 앞에서다. “모두가 내려야 한다” 말하고 누구도 예외 없음을 깨달을 때조차 산 자를 위한 위무는 없다. 사랑하는 이가 마지막으로 몸담은 곳이니 “그리움의 종착지”요, 사랑하는 이가 새 거처로 삼았으니 “그리움의 출발지”가 되는 이곳에서 ‘두 발’에 실려 몸은 ‘되돌아’갈지라도 ‘눈물’은 내내 여기 남는다. 언어의 푸짐한 살집과 육질마저 제거해버린 시가 그려낸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 문양은 이처럼 날렵하다. 뼛속마저 비워낸 듯하여 마음만 먹으면 날아갈 수 있을 것도 같다. “하늘색 배냇저고리/ 처음으로 입”고 “이름 없는 위패와/ 영정 없는 액자”의 조문을 받는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무연고 작은 별”(「배웅―무연고 영아 장례식」)의 여린 죽음이 우리를 날렵한 감성의 상태로 만들어 궁극의 지점으로 데려간다. 처음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 호수도 예전엔 조그만 웅덩이였으리
어쩌다 발을 헛디뎌 주저앉는 바람에
몇 차례 빗물 고이고 나뭇잎 떠다녔으리
이 호수도 나처럼 후회하고 있으리
어쩌다 널 헛디뎌 여기 빠져 있는지
조그만 웅덩이였을 때 흙 몇 줌 다져줄 것을
―「사랑」 전문
그러나 시인이 종종 시간의 지층을 밟고 근원으로 내려가거나 세기를 거스르며 존재의 기원을 탐구하는 이유는 세계의 비극보다는 삶의 비의를 드러내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호수’에 비유된 ‘사랑’의 기원이 이처럼 명쾌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번다한 언어와 사유의 군살에 단호한 시인의 시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조그만 웅덩이’가 ‘호수’가 되고, ‘널 헛디뎌’ ‘사랑에 빠진’ 이 단순함이 깊어지는 지점은 “이 호수도 나처럼 후회하고 있으리”란 대목에서다. 두 대상이 한 층위에 놓였으므로, ‘호수’가 조그만 웅덩이 시절을 그리워할망정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의 연장선에서 ‘사랑’에 뒤따르게 마련인 희열과 고통 때문에 ‘사랑’의 시초를 부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데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쩌다 널 헛디뎌 여기 빠져 있는지”라고 묻는 것은 슬픔과 비애조차 포용하는 ‘사랑’의 기쁨을 유머와 겸양으로 우회시킨 반어적 어법으로 읽힌다.
감씨를 심었는데 고욤이 열렸다
신의 높은 생각이 궁금했던 그날 아침
하늘엔 잘 부푼 구름이 소명처럼 떠 있었다
감나무 가지를 잘라낸 아저씨는
친친 말없는 끈을 고용나무에 잇대셨다
모든 것 다 버린 뿌리는 땅을 힘껏 움켜쥐었다
마침내 고용나무에 감들이 열렸다
선홍의 단과로 지어진 신들의 집
영미의 의붓어머니 고아한 품도 그랬다
―「영미의 어머니」 전문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구조를 가진 강현덕의 시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 시에서 시인은 인연은 어디에서 기원해서 어떻게 맺어지는가에 대해 묻고 스스로 답한다. ‘고욤나무’에 ‘감나무 가지’를 접목하여 ‘감나무’도 ‘고욤나무’도 열리게 한 ‘아저씨’(영미 아버지)와 새 여자를 들여 또한 ‘영미’를 품게 한 ‘아저씨’는 동일인이다. 이질적인 대상을 ‘친친 말없는 끈으로 잇대는’ 과정의 지극함으로 형상화된 이들의 관계는 “신의 높은 생각”이나 “영미의 의붓어머니 고아한 품”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시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는 고양된다.
4. 나가며
강현덕의 시 세계는 찰나와 세속에서 영원을 발견하려는 실험과 모험의 나날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조가 직면한 시 자신과의, 또한 세계와의 갈등을 돌파하기 위해 그는 시조와 세계의 가능성을 믿고 분투하는 시인이다. “너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어서”라는 시의 말이나, “아무리 해도 … 중세의 수도사처럼은 사유할 수가 없”는 자기 내면의 말을 경청하면서 시적 대상을 직관하기 위한 인문학적 성찰과 시적 단련을 쉬지 않는, 강현덕은 지성파 시조 시인이다.
―《문학저널》 202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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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덕_1994년 《중앙신인문학상》,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림정 역에서 잠이 들다』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나왔다』 『첫눈 가루분 1호』 『먼저라 는 말』이 있다. <중앙시조대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한국시조작품상>등을 수상했으며, <역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