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들사람 예수, 귀신추방과 병자 치유/ 임의진
복음서엔 예수님이 귀신과 대면한 장면들이 종종 나옵니다. 귀신, 악령, 악마, 사탄. 이 모든 것은 사악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실 신이 모두 귀신이죠. 귀신과 더불어 사는 것이지 추방하는 일은 귀신이 몽니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존재를 믿나 안 믿나를 떠나 귀신 이야기나 현상, 두려움은 인간 생존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집단 거주 생활, 낮과 빛의 선호, 범죄 예방 등 생명 안위에 이 귀신설이 큰 도움을 끼쳤습니다.
귀신은 어둠과 관계되어 있어요. 어둠은 두려움의 배경이 되어줍니다. 해 저물고 어둠이 찾아오면 저절로 오싹해지는 음습한 뒷골목을 피하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인 습성으로 생존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진화의 이야기에선 매우 특별한 인간 생존 지능이라고 얘기합니다.
귀신 신자를 구약성서엔 754회 등장, 그중 시편에 144회 나옵니다. 신의 원초적 표현은 목구멍(하바 2,5), 숨결, 생물, 사람이기도 합니다. 네페쉬란 추상화된 내면 인격, 영혼을 가리킵니다. 바알과 아돈도 똑같은 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바알은 주인, 소유자란 뜻. 아돈은 권력자를 상징. 아돈의 어원은 아버지입니다. 신명기 10, 17절엔 “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다(아돈들의 아돈이다)” ... 마귀는 그리스어로 ‘디아볼로스’, ‘중상하고 훼방놓는다’는 동사 ‘디아발로’에서 나왔지요. 또 옛 뱀, 용, 공중권세 잡은 자로도 표현됩니다. 마귀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 공동체를 깨트립니다.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딤전 4:1) 마태복음 16:23엔 “사탄아 물러가라”고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어둠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마가 16, 17) 사탄은 여기서 신적 개념입니다.
지난번 강의 ‘식탁 초대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치유 기적과 병자, 귀신 추방 이야기차례입니다. 병자와 귀신을 연결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예수님은 카리스마적인 치유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성서 시대 당시 병은 죄로 인식되어 의학보다 종교의 처분이 먼저였지요. 병자는 부정한 죄인이었습니다. 정결/부정예법이 이 진단 키트(Kit)였죠.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약자 차별과 혐오를 폭로하고, 치유는 사회적 복권과 공동체 회복의 시도였습니다. 물 위를 걷는 것도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새로운 변형에 가깝고, 이는 죽음과 공포에서 해방되는 장면의 이야기입니다.
현대의학은 귀신을 다중인격 분열증, 그러니까 정신병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의 데카폴리스 10개의 도시에서 벌어진 귀신추방도 보면 레기온(로마군단)에 겨냥되고, 내리 달리는 풍경도 그리스어 동사 ‘오르메센’, 돌격 장면과 유사합니다. 이 모든 얘기가 로마제국 전쟁사의 지중해권 사회심리와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5장 4절의 이집트 파라오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졌다는 장면도 흡사합니다. 귀신을 쫓아낼 때 ‘엑크발로’란 그리스어를 씁니다. ‘밖으로’란 전치사 ‘엑크’와 ‘던지다’라는 동사 ‘발로’의 합성어죠. 밖으로 던져내라는 것입니다. (마태 10:8) 나병환자는 고쳐서 안으로 들이고, 귀신은 쫓아내서 밖으로~. 이는 공동체 추방을 가리킵니다. 귀신을 당시엔 로마군대, 전쟁으로 인한 병리적 후유증, ‘심리적 공황상태’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귀신은 표적과 기사 이적을 앞세웁니다. 직통계시를 운운하는 자. 미혹의 영이 스며든 것입니다. 입신을 하고 천국과 지옥에 다녀왔다고들 떠듭니다. 성경 위에 계시를 둡니다. 내용은 저급하고 황당무계합니다. 사람들을 교회 바닥에 쓰러뜨리는 성령, 은니를 금니로 만드는 성령, 순종하는 인격이 아닌 도구로 사용되는 인격으로 자신하는 성령도 귀신의 역사(탈복음의 역사)입니다. 고신대 박영돈 교수는 성령님을 거룩한 수줍음이란 단어로 비유하였는데, 성령은 얼굴 없는 인격으로 두드러진 특징이 거룩한 수줍음이란 것입니다. 자신을 잊고 상대에 관심을 갖는 사랑의 특성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여호와 라파 치료하는 하나님은 출애굽기 15: 26, 회복과 평안, 안식을 선물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린 이야기가 있는데, 이어서 베드로는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렸고, 바울은 창문에 앉아 졸다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렸습니다. 사도행전의 기자는 이 두 그룹을 비교하고 경쟁하듯 보도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인간상은 창조된 원형대로 중생하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사는 것이지 병을 낫는 것이 1차 목표가 아닙니다. 물론 고통스런 질병에서 벗어나는 기적이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일을 기적에 의지하는 것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병자 치유의 기적들의 현대적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 26, 39)입니다.
한편 바른 <성령 세례관>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하며 귀신과 병자들의 이야기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사도행전 1:5)에서의 성령 세례는 앞서 물세례와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이 준 세례는 예수님 이름으로 준 세례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참회의 세례였지요. 이후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은 이와(예수님과) 연결됩니다. 둘을 나누어 판단하는 것은 주님의 풍성하고도 치밀한 해방 사역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물세례와 신앙생활 그 자체가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바울 이야기를 보면 에페소 교회에서 성령을 받았냐고 질문하는데 듣도 보도 못한 얘기라 하자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믿은 후에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부터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보면 회개하여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입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1종 세트이지 무슨 단계별 세트가 아닙니다. 빌립이 전개한 사마리아 선교사에 딱 하나 예외가 나와요. 신자공동체가 불순한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방문해 기도함으로 성령의 임하심을 완수시켰다는 얘깁니다. 이 예외는 아마도 수위 사도권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일 터입니다.
악령들의 세계(악령을 믿는)가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매우 번거롭고 피곤하게 만들며, 이를 통해 자신의 역사를 과대 포장하고 영광을 가로챕니다. 단박에 이루어진 주님의 구속과 해방하심을 ‘협소하고 핍진하고, 질질 끄는 시간 등 난감함과 어려움으로’ 전락시킵니다. 결국 그 사이 집단세뇌하여 우매한 열광주의와 광신자로 떨어트립니다. 보다 더 주님께 나아가고(열린 신앙으로 진보해나가고), 이 사회의 참신한 어깨동무와 참여자로 세우지 못합니다. 의지하며 자립하지 못하는 이타주의와 광신주의는 둘이 매우 닮았습니다. 시인 ‘예후다 아미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옳다고만 믿는 땅엔 새싹이 자라지 않아요. 딱딱하게 굳어있지요. 질문과 사랑은 세상을 파헤칩니다. 두더지나 괭이처럼요. 그리고 속삭이는 소리, 새싹이 올라오는 소리”... 질문하는 신앙은 발전합니다. 그리고 악령들의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뵙자 귀신인 줄 알고 여인들이 도망칩니다. 우리는 진짜 자기(True Self)를 만나면, 예수를 두려움 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엔 이 부활 예수체(몸)를 ‘다른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16:12) 우리는 예수님의 전후 내생까지 전생애를 선물 받았고, 이는 이 지상세계의 여정에서 지표이자 방향타가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알고 진짜 자기를 발견하는 회심(Conversion)을 경험하면 영원과 잇대어 두려움없이 살게 됩니다. 회심은 성공하기 위해 달려온 삶과 아주 다른 체험입니다. “성공하려고 노력한 인생은 낭비된 인생이다(토마스 머튼)” 가짜 자기가 바로 귀신입니다. 영과 육을 나누고 육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바울의 시선은 그리스 철학 개념으로,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예수는 부활하여 다시 육이 되었죠.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육이 아니라 에고, 가짜 자기입니다(False Self). 온전한 나, 참나, 하느님과 연결되고 합일된 나를 찾아가는 순례가 바로 인생입니다. 그 가운데 병도 찾아오고, 사회적 불안정에 휩싸이기도 하고, 가짜 나, 에고, 악령의 꾀임에 응대하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오로지 예수님을 우뚝 세우며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예수는 바로 그러할 때 쓰는 말입니다. 들사람 예수, 야인이신 예수님, 야생화처럼 들가운데 피어 우리를 반기시는 가을입니다. 우리를 온실 속에서 키우지 않으시고 이 광막한 광야에서 야물고 튼튼하게 기르시는 분에게 찬미합니다.
(다음 편: 제자 모집, 구인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