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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9장 8-15절. 은혜를 주신 것은 선행을 위함임. 요약설교
8절.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1.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은혜’(χάρις:grace)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unmerited and free) 복(blessing)을 가리킵니다.
본 절에는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라는 표현으로써 대단히 강조적인 표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적인 역사를 이루어가는 생동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 초월적인 사랑이 햇빛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부어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끊임 없고 다 함이 없는 거저 주시는 풍성한 사랑이 현 세상에서도 계속 부어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원천이 하나이지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며, 풍성히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혜’(πᾶσαν χάριν: all grace)란 죄용서와 영생 천국의 영적인 복들(spiritual blessings)만이 아니라, 건강과 물질과 성공과 행복과 가정과 자손과 사업과 명예와 장수에 관한 모든 물질적 복들(physical, temporal, worldly, material blessings)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세계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질세계도 모두 창조하셨으므로, 만물이 주님의 것이고,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찬송가 1장에도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MacLaren)는 본 문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샘(fountain)과 저수조(basin)와 시냇물(stream)로 나누고 있습니다.
즉 첫째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성도들에게 넘치게 주시는 것은 샘에 해당하고, 둘째 성도들이 모든 것이 항상 넉넉한 것은 저수조에 해당하고, 셋째 성도들이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것은 시냇물에 해당하다고 했습니다.
‘능히’(넘치게 하시나니;δυνατεῖ--περισσεῦσαι: is able to make all grace abound)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문 속에서(엡 4:15-21)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란 표현에 잘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1)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복 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복을 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행을 한 데 대한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도 주시고, 모든 것을 거저 은혜로 선물로 주신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자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2)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역대상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학개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디모데전서 6:15.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시고 유일한 전능자이시며 모든 왕과 주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사무엘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복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예레미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6:14.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2. 이는 성도들이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always all-sufficiency in all things) 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서 온전한 은혜가 쏟아 부어져서 성도들의 삶의 그릇이 모든 면에서 가득 차고 넘치는 것을 가리킵니다.ace from the fountain is that the basin may be full)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 5절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들을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들과 슬픔과 시험들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들을 가리킵니다.
가끔은 무거운 짐과 짓누르는 슬픔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고를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삶이 힘들고, 슬픔에 짓눌리고, 가는 길이 어두워도, 주의 은혜가 ‘항상’ 모든 일에 넉넉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성도들이 항상 모든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들이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즉 성도들이 부유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금욕하고, 금식하고,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건강하고, 부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가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면,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영생 천국에 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현 세상에서도 우리가 건강하고 부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희생의 목적입니다.
(2)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복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전도서 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신명기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신 이유는 여러분 성도님들이 부유하게 사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물론 이러한 성도의 부요는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고 구하면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5,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요한일서 5:14,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반드시 주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구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6-30, 까마귀도 먹이시고,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사랑하는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지시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3장 5절.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과연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 14절에는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단지 오늘 본 절 말씀에도 나왔듯이, 착한 일을 위해서 주시지, 향락하고 죄짓고, 교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3, 구해도 받지 못한 것은 정욕을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물론 다음에서 보겠지만, 우리가 건강하고 부요하고 행복해져서,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범죄하고 악을 행하면 이것은 큰 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강하고 부요하고 행복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제하고, 돌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 성도들을 부요하게 하시는 이유는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you may abound in every work good)
우리는 본래 가난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존재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로 가득 채워주시는 것은 가련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것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고후 6:1).
‘주는 자는 더 넉넉히 되되, 안 주는 자는 가진 것도 빼앗길 수 있다’(마 13:12)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MacLaren)
잠언 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이웃을 구제함으로 가난해지는 사람은 없다”(no one is usually made the poorer by being liberal)는 속담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선행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항상 채워주십니다. Barnes
(1) 하나님께서는 능히 성도들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이유는 성도들이 모든 것에 항상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도록 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요를 주신 이유는 착한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선행은 바울이 그토록 반대했던 율법주의(즉 율법적 선행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와 모순되지 않는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단, 율법주의와 다른 것은, 선한 행위를 하되 구원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선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2)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도 굶주리고, 허덕이고, 병들고, 가정이 불행한데, 어떻게 남을 돕고 남의 일에 신경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남을 도우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아서 우리가 넉넉하고, 풍성하고, 건강과 부요와 행복이 넘쳐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으로 도와주어야 전도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해야 병약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해야 불행한 가정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와 자손들이 잘 되어야,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3) 물론 우리가 부요하고, 넉넉하면서 우리만 잘 먹고 잘살면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빼앗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도와주면 주님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4) 이방인 교회가 가난한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돈을 주고, 병 고침을 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고, 돈을 주고 병 고침을 주면서 이단도 전도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돈과 병 고침을 주는 것이 곧 전도의 방편이고, 전도의 접촉점이 되는 것을 고린도후서 8장 9절과 9장 8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불신자에게 돈과 병 고침을 주지 않으면 거의 복음 전도의 문이 잘 열리지 않습니다.
똑같이 이단자에게도 돈과 병 고침을 주지 않으면 거의 전도의 문이 잘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병을 고쳐주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7-8.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부요케 하셔서, 착한 일을 많이 하시고, 전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9절.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 기록된 바
이 말씀의 인용은 시편 112편 9절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의 인용입니다.
시편의 말씀은 ‘선한 사람은 가난한 자에게 주지만, 그의 선물로 가난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는 자의 곳간은 늘 채워져서 주는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와 재물이 그 집에 있고, 그의 의가 영원히 계속된다(시 112:3)고 했습니다. Ellicott
구제 헌금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사라 없어진 것 같으나, 그것은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고, 엉켜 쥐어도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Matthew Henry
시편 112편에서 묘사하는 의인은 흩어 나누어주는 사람이고, 가난한 자들에게 너그럽게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선언되었는데(시 112:1), 그는 후손이 잘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12: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그래서 반스(Barnes)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하고, 그의 뿔이 영화롭게 들리로다’고 번역했습니다.
즉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번성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2.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가(he)란 ‘구제하는 선한 사람’을 가리키고, ‘흩어’(σκορπίζω)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듯이 땅에 씨를 흩어 뿌리는 것을 가리키고, 영세민에게 돈을 뿌려서 구제하는 동양인의 관습을 가리킵니다. Barnes
‘가난한 자들’(τοῖς πένησιν: the poor)이란 ‘먹고 살기 위해서 매일 일하는 노동자’나 ‘가난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나 ‘구걸해서 먹고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흩어 구제하여도 부하게 되는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잠언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그가 영원한 처소로 너를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6:9).
누가복음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사람의 재물은 영원히 남아 있지 않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사람의 의는 영원토록 남게 될 것입니다. Matthew Poole
그러나 흩어 구제한다는 말은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자기 능력에 따라 신중하게 구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도 함부로 몹쓸 땅에 뿌리는 것이 아니고, 싹이 잘 나오고 결실할 만한 땅에 적당하게 뿌립니다.
이와 같이 구제하는 사람도 술 먹고, 방탕하고 노름하는 사람에게 구제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서 성실히 살고자 하나, 건강이 좋지 않거나 힘이 없거나 기술이 없거나 재주가 없거나 밑천이 없어서 가난하게 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3.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1) 본문의 '의'는 '자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의’란 자선 행위를 가리킵니다. Barnes, Jamieson-Fausset-Brown.
많은 학자들(Doddridge, Bloomfield, Clarke)은 ‘의’(righteousness)라는 말씀이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자선’(almsgiving)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영원토록 있느니라’는 말씀은 이 구제 행위가 하나님의 기록 책(God’s book of remembrance)에 영원토록 남아 있어서, 히브리서 6장 10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선행을 잊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Matthew Poole
히브리서 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주의할 것은 이 ‘의’(his righteousness)가 자기 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이 ‘의’는 그의 구제 행위 자체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구제 연금 자체를 ‘의’라고 부릅니다. (common with the Jews to call alms ‘righteousness’)
바로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말씀한 ‘의’가 바로 자선 행위를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즉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 자선이 잊혀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서 자라게 된다는 뜻입니다. Gill
4. 마태복음 6장 1, 2절에는 자선을 베푸는 의에 대해서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은 ‘의로운 삶’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의’가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고, 영원토록 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서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작은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옷을 입혀 주고, 돌보아주고, 감옥에 있을 때 돌아보았고, 그것을 잊었습니다.
동시에, 이 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8절에서 은혜를 주신 것은 착한 일을 하게 하신 것이라고 했는데요, 이처럼 착한 일을 하게 된 결과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이 일을 다 기억하시고, 그것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십니다.
시편 112:2-9.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5. 잠언 19장 17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돕는 일을 ‘선행’이라고 하시고, 이 선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보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잠언 22장 9절에도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처럼 주는 사람은 영원토록 그의 의를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십니다. 할렐루야!
10절.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1.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본 절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상통합니다
이사야 55: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씨와 양식’이란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all things needful for your souls and bodies)을 가리킵니다.
‘씨’(seed)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능력과 재물을 가리키고(Your ability to help others), 구제할 물질들(means for liberality)을 가리킵니다.
농부가 씨앗을 밭에 뿌릴 때, 하나님께서는 먹을 양식을 주실 뿐만이 아니라 다시 씨를 뿌릴 씨앗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대한 보상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다음에도 고린도 교인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먹을 양식’이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all needs of for this life)을 가리킵니다.
씨앗이 땅에 뿌려지면, 그것이 자라서 금 년에 먹을 양식을 주고, 다음 해에 다시 뿌릴 씨앗을 풍성히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매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또 심을 씨앗을 주셔서 구제할 의의 열매들을 매번 증가시켜주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바울의 기도와 소원으로 해석하지만, 대부분의 역본들(Vulgate Latin, Syriac, and Ethiopic versions)은 미래형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루어주실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식은 다 먹더라도 씨앗은 반드시 남겨놓고 다시 땅에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추수할 것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구제 헌금은 마치 농부가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다 소비해버리지 말고, 구제를 함으로써, 씨앗을 심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구제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먹고 살 풍성한 양식을 주시고, 또 구제할 수 있는 씨앗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2.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땅에 섬겨진 씨앗은 점점 더 수확이 많아져서, 농부가 다시 더 풍성하게 심을 수단이 됩니다.
이처럼 구제 헌금은 씨앗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다시 구제할 수 있는 풍성한 곡식을 주시고, 또 구제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이처럼 구제하면 하나님께서 더욱 풍성한 복을 주셔서, 많은 수확을 주시고, 그래서 다시 심을 씨앗(구제금)도 더욱 풍성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바라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헌금의 결과가 매우 풍성하게 되어서, 고린도 교인들이 더 많은 선을 행하고, 그들의 기쁨이 더 많이 확산되는 수단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Barnes
3.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여기서 ‘의의 열매들’은 구제 의연금( alms-giving)을 가리킵니다.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는 것은 ‘네가 가난한 자를 구제한 것에 대해서 충분한 보상을 해주신다는 것’과 ‘구제하는 일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란 하나님이 축복을 더해 주신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고취시켜서, 기쁨으로 구제할 것을 격려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풍성히 주셔서 가족들이 먹고, 또 장에 가서 팔고, 곡간에 저장해서 더 좋은 값으로 팔 뿐만 아니라, 밭에 다시 씨를 심어서 풍성한 수확을 하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게 하신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서, 그것이 ‘의의 열매’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제한 성도는 사람들 가운데서 명예를 얻고, 축복과 칭찬과 감사를 얻고, 현세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하나님께서 풍성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 의연금은 ‘의’로 불릴 뿐만 아니라, ‘심겨진 씨앗’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Jarchi)은 시편 37편 26절(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을 ‘그의 씨가 복을 받는다’(and his seed is blessed)고 번역했고, 의 즉 구제 헌금을 심는 자는 마침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 10장 12절(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에서 ‘공의를 비처럼’(rain righteousness) 내리시리라는 것을 본 절의 ‘의의 열매’(fruits of righteousness)를 거두는 것과 연관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가지고 일부를 구제함으로써, 더욱 풍성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풍성한 수확에서 구제를 함으로써, 그 구제금이 또 씨앗이 되어서 더욱 풍성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구제함으로써 더욱 풍성한 복을 받으시고, 계속 더욱 풍성한 구제를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된 성도님과 자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고린도 교인들은 싸움과 분쟁 등 여러 가지 약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은사가 부요한 성도들이었으며, 그에 따라 물질적으로도 부요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교회들보다도 구제 헌금을 풍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헌금하는 데 있어서,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고, 너그럽게 헌금함으로써, 구제를 받는 예루살렘 교인들이 풍성한 감사를 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2.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하게 되면, 구제를 받는 예루살렘 교인들은 고린도 교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감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 ‘우리로 말미암아’란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가는 바울과 일행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 교회들과 고린도 교회의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면, 구제를 받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제 헌금을 하는 사람도 있고, 구제 헌금을 받는 사람도 있는데, 중간에서 바울이 구제 헌금을 하도록 설교를 했고, 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구제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주고, 구제 받는 사람이 구제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도록 촉매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즉, 바울 사도는 헌금에 대해서 설교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예루살렘 교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주었고, 또 구제 헌금을 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더욱 복을 받을 수 있는 길도 마련해주었습니다.
(3) 이처럼 바울 사도는 구제해야 할 참된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화려한 생활이나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구제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자녀와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과 자녀들이 부유할 뿐만 아니라, 행복을 갖게 하게 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4) 우리 즉 바울 일행은 매개체가 되어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주시는 만복의 근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구제는 참된 구제자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방향으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구제자나 전달자가 영광을 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Barnes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구제 생활을 통해서 매년 더욱 하나님께서 풍성한 복을 주시고, 더욱 많은 구제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제를 받으시는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구제하는 분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 구역의 구역장이나, 교회의 지도자들께서는, 어느 정도 신앙이 자란 성도들에게는 구제 생활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시고 신앙 지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12절.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1.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1) 이 ‘봉사’(λειτουργία)가 원래는 국가에 대한 봉사를 가리켰는데, 70인역에서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 행위를 가리켰습니다.
이 헬라어가 영어의 예전(liturgy)이란 말로 전이되었는데, 처음으로 성만찬의 예전에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구제 헌금(large and liberal gift to Christ’s poor)에 적용되었습니다.
(2) ‘성도들의 부족을 보충한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구제 헌금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의 궁핍을 보충해준다는 뜻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인들은 사도행전 2장의 공동생활로 재산이 다 고갈되어버렸고, 아가보 예언대로(행 11:28) 흉년으로 가난해졌고, 유대교인들이 경제 카르텔을 형성해서 기독교인들이 장사를 못하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구제 헌금이 예루살렘 교인들의 궁핍을 보충해주었다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어떤 이(Matthew Poole)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마게도냐 교회들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감동해주셨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3.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헌금을 봉사 혹은 예배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즉, '봉사'라는 말(λειτουργία: service)은 '공적으로 섬기는 것' 즉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헌금이란 단순히 교회의 재정을 돕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예전적 행위로서 예배의 한 순서에 해당합니다.
13절.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 이 직무를 증거로 삼아
달리 표현하면 ‘이 직무의 경험으로써, 여기에 제시된 너희 관대함의 증거로써’란 뜻입니다.
즉 바울 사도 일행이 중간 역할을 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을 구제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진실히 믿는다는 것이 증거되고, 예루살렘 교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2.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1) 구제 헌금을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진실히 믿고, 또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제 헌금은 고린도 교인들이 진실한 신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의 가난을 돕기 위해서 구제 헌금을 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진실하게 복종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신앙 고백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가리키고,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내용대로 자신의 물질과 노력을 바쳐서 가난하고 병든 자를 구제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병든 자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내용대로 전도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물질과 치료를 통해서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구제 헌금’이란 성도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참된 신앙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신앙 행위’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가련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은 복음을 믿는 믿음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며, 예수님께 대한 순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진실한 믿음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고, 실제 말로 복음을 전하고, 실제 물질로 구제하고, 몸으로 도와주고, 기도해줌으로써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악과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가련한 이웃을 위해 구제하고,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믿음을 증명하시고, 예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내십시오!
3.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 ‘그들’이란 구제를 받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예루살렘 교인들을 섬기는 고린도 교회의 후한 연보로 인하여, 구제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후한 물질을 주시고, 또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구제할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2) 성경에는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구제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해 구제 헌금을 하는 것은 어쩌면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구제 헌금을 하기 전까지는 예루살렘 교인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이방 쌍놈들이라고 멸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제 헌금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인들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가 화목이 되었습니다.
즉, 구제 헌금을 하기 이전에는 예루살렘 교인들은 고린도 교인들처럼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을 못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제 헌금을 받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들을 원수같이 미워하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해서 사랑의 표현인 헌금을 한 것을 보고, 예수 믿을 때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인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제 헌금은 구원의 사랑을 증거하는 눈에 보이는 복음 전도의 역할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8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하여,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도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라”고 했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복음 신앙에 맞게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8장 8절에는, 구제 헌금이 복음적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이처럼 구제 헌금은 복음을 통해서도 이루지 못한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간의 불신과 반목을 놀랍게 해결해주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담긴 헌금을 통해서 불화한 사람들간에 신뢰와 형제애가 형성되는 것은 너무나도 놀랍고 은혜로운 결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간의 반목과 불신과 적대감을 원수 갚음으로 보복하지 않고, 이처럼 구제 헌금이라는 사랑의 방법을 통해서 복음적으로 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4) 사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파(야고보파)는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아서 바울 사도를 거짓 사도로 매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천거서(시무 추천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는 자기가 사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고린도후서 3장을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반대하는 율법주의자들은 바울 사도가 제자들을 시켜서 헌금도 교묘하게 착복한다고까지 모함했습니다( 고후 12장).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처럼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 책으로써, 반대파를 뒤에서 사주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제 헌금을 해서 갖다주었습니다.
(5)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원수같이 대항하는 우리 인간들을 원수 갚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대신 죽게 하시는 사랑으로써 화목하신 것과 똑같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고린도후서 8-9장의 헌금에 관한 교훈은 (고후 8장 9절과 9장 8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원수된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헌금의 기본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불신하고 핍박합니까?
오히려, 그들의 부족한 점을 물질로 도와줌으로써, 사랑으로써 미움을 이기십시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복음적으로 화목하는 길을 열어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선으로써 악을 이기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그들이’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가리키며, ‘너희를 위하여 간구한다’는 것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구제 헌금으로 도와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해준다는 뜻입니다.
구제 헌금은 단순히 가난한 성도의 필요를 채워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하게 하며, 다시 구제 헌금을 풍성히 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시며, 헌금한 성도의 영육간의 행복을 위해서 매일 끈질기게 기도하게 해줍니다. Gill
즉, 고린도 교인들의 예루살렘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헌금은, 위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했고, 옆으로는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원수 관계가 사라지고, 형제애가 생겨난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혈통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연대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가 더 넓게 뻗어나가는 기독교 역사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문제로 교회 회의를 했을 만큼(행 15:1-21), 유대인 성도와 헬라인 성도 사이에 있었던 좋지 않은 감정들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2.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1) '사모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ἐπιποθέω:에피포데요)는 '그리워하다, 간절히 바라다, 애정을 갖다'(long for, desire greatly, have affection for)는 뜻입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earnestly desire you; that is, to see you)는 뜻입니다.
구제 헌금을 받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구제 헌금을 해준 고린도 교인들의 행복을 간절히 바랄 것이고,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친교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이란 뜻입니다.
극히 가난한 성도들의 기도는 우리가 그들에게 자선을 베푼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주인공이 되시기 때문에(God is the author of all grace),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Barnes
여기서 ‘지극한 은혜’란 물질적인 은혜뿐만 아니라, 영적인 은혜로서 중생과 진실한 신앙과 참된 소망과 신실한 사랑과 칭의와 양자됨과 성화와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모두 포함한 은혜를 가리킵니다. Gill
(2) ‘사모한다’는 말은 바울이 그의 개종자들을 만나 보고 싶어하는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롬 1:11; 빌 1:8; 살전 3:6).
로마서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빌립보서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따라서 ‘사모한다’는 말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 만나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교우 관계를 맺고 형제애를 나누기 원한다는 것은, 단지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구제 헌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지극한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교제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기꺼이 구제 연보를 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의 행위를 지나, 교회들간에, 교우들 간에, 친교와 연합과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8:6).
15절.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1) ‘은사’로 번역된 단어(δωρεᾷ)는 단수로서 단순히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거나, 사람들의 마음에 부어진 사랑의 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고(행 2:38, 8:20, 10:45, 11:17), 로마서에서는(롬 5:15, 5:17) 사죄나 칭의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단수로 사용된 것은 은하계 속에서 빛나는 여러 빛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태양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선물들 가운데 단 하나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MacLaren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개역 성경)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 가지 은혜(선물)들을 주시지만, 가장 대표적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께서 다른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2) 주는 자의 은혜와 받는 자의 감사는 결국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귀착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는데, 사랑은 선물의 원인이고, 선물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아들이 하나님을 나타내셨다(declared)’고 했는데, 바울은 본 절에서 그처럼 아들을 주신 것이 ‘말할 수 없는 은사(선물)’ 즉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은사(선물)라는 말과 연관시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은사(선물) 밑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하면서 접근해야 합니다.
(3) ‘이 말할 수 없는 은사(선물)’에는 말할 수 없는 희생이 따릅니다. (The gift involves unspeakable sacrifice)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독자도 아끼지 않음을 내가 보았다’고 하신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희생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련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물질이나 노력이나 기도의 희생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 어둠이 땅을 뒤덮은 것은 아들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그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동정해야만(Sympathy:fellow-feeling)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는 도움은 도움이 아닙니다. (Heartless help is no help).
말로만 배부르게 하라, 덥게 하라고 하면서 쓸 것을 주지 않는 것은 ‘형편없는 위로자’(miserable comforter)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마음을 공감하시고, 그 아들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상대하신 것은 맨손으로 달궈진 쇠를 만지는 것 같고, 맨발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밟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4) 이처럼 바울 사도는 이 사랑의 헌금을 통해서 그 동안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간에 막혔던 장벽이 무너지고,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주 안에서 하나 된 형제애를 회복한 데 대한 감사를 ‘말할 수 없는 은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인과 고린도 교인 간에 반목이 사라지고 형제애가 형성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 많은 이 세상에 내어주심으로써 그 은혜와 사랑을 받아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은사’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은혜를 가리킵니다. (롬 8:32)
그러므로, 이 땅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서 시작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자신과 원수된 이웃과 화목을 이루어 감으로,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나아가서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이 은혜를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이 소속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이 충만하게 퍼져나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