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부 전선에 가다.(6)
이때 조 목사님이 우리를 인제까지 데려다 준다고 한다. 아무래도 인제는 차가 많아 서울가기가 훨신 쉽다는 논리다. 아마도 헤어지기 섭섭해서 그럴 것이다는 생각에 차에 다시 올라 타고 진부령을 넘는다. 진부령은 넘어오는 길에 오른쪽으로 가면 칠절봉을 거쳐 향로봉에 올게 되고 좌측으로 들어가면 과거 알프스 스키장을 지나 마산봉(1,052m)을 지나 새이령-신선봉(1,212m)- 상봉(1,242m)-미시령-황철봉으로 해서 설악산에 이르는 갈림길 목이다.
당연히 이 진부령은 피아간에 확보해야할 주요 지역이었다.
그러나 전쟁중에는 거의 아군의 수중에 있었다. 비록 용대리는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어도 진부령은 국군이 통제하고 있었다. 이유는 동해안의 함포가 쉴새없이 포탄을 퍼 붓는데 정찰기가 하늘에 올라서 이동하는 적들의 동태를 무전으로 연락하면 여지없이 포탄이 날아가 동해안은 아군의 독무대였다. 그러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북한군은 주로 밤에 기동을 하여 이동하고 혹시나 낮에 통과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는 부역자들에게 아군 옷을 입혀 산에 오르게 한다.
나는 고성 토성면 도원리에 들어가 도원저수지 옆으로 해서 신선봉에 오른다. 낮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주변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옆에서 누가 나와 날 데려가도 모를 그런 아침나절에 우린 산을 올라 갔다. 이유는 그곳에 전투 흔적이 있다해서다.
우리 11사단이 '51년더 6월초에 진격한 곳으로 전사는 되어 있다. 하지만 계속 어필 되는 사안이지만 이곳은 동해안에서 눈으로 바로 식별되는 곳으로 적군은 이런 곳을 루트로 하지않는다.
함포의 위력이 무섭다는 것을 아는 그들은 부역자들을 이용하여 복장을 바꾸고 또는 민간인 복장으로 해서 이곳에 올려 놓고 우리 아군이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보면서 바로 그 서쪽 용대리 일대에 활동을 개시 하였을 것이다.
오르고 올라 신선봉(1212m)에 도달하니 온통 조각 바위군으로 반경 100m정도는 돌 뿐이다.
늦은 봄에 피어난 꽃이 마가목나무 꽃인지 군데군데 조밀하게 피어있고 검은 색의 돌만이 황량하게 널려 있다. 푸른 동해바다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철석거리는 파도소리로 우리들에게 인사를 하고 어쩌다 갈매기 무리들이 끼웃하고 날아왔다 돌아가는 곳, 신선봉이다.
우린 돌을 딛고 다니며 그 틈새를 눈여겨 본다. 아차 하는 순간 돌에 깔려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에 무슨 이유로 사람이 오르고 포탄은 불을 뿜었을까!
"정덕이 너는 저쪽에서 위로 올라 가면서 돌틈을 잘 봐라""
"병석이 너는 바로 요 밑에서 좌우측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돌틈을 잘 봐라"
"재훈이는 나를 따라 오면서 주변에 혹시나 유품이 있나 눈여겨 봐라"
무려 한시간 남짓 탐사를 하다 나는 그만 눈알이 빠지는 순간을 맞이 했다. 아니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돌틈에 사람 뼈가 박혀 있다.
"어어, 이것이 뼈다. 야~, 이 신발 잔해좀 봐!"
나는 바위틈에 고개를 밀어 넣고 일어서지 못했다. 뭐라 표현하지 못한다. 적군이든 아군이든 아니 민간인이든 그 대상의 유무를 떠나 산 사람이 산산이 부서져 여기저기 조각으로 나 뒹구는 현장을 한번 생각해 보라. 이유를 막론하고 그 모습이 나며 내 부모형제며 친구라 치자.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 했는데 정말 이런 모습으로 죽어간 그 영혼의 쓰라림을 나는 느끼고 싶었다.
"영혼이여, 우리를 지켜 주소서!"
"영혼이여,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눈물이 흘러 돌틈에 뚝 뚝 떨어지는 그 순간은 잊을 수 없는 벅찬 그리고 너무 아픈 순간의 하나였다.
함께한 정덕이가 소리친다.
"과장님, 여기 돌틈에 어깨뼈가 보입니다.!"
우린 두시간여를 탐사하고 하산하여 다시 도원리를 거쳐 속초로 달렸다. 내려오는 도중에 신촌회관 앞을 지나는데 나이드신 아저씨가 계셔서 차에서 내려 혹시나 신선봉에 전투가 있었는지 아시는가 질문을 했더니 아뿔사 바로 이분이 부역으로 그곳에 갔다 살아온 장본인이었다.
"거기죽어있는 사람은 부역자요, 속초사람 양양사람 다 있어요!"
군인은 없단다. 모두가 인민군에게 속아 부역자로 끌려간 민간인이 함포맞고 죽었단다.
더이상 묻지말라고 하신다. 본인을 알라고도 말란다. 기막힌 시대에 태어난 것이 죄라 한다.
나는 속초에 과거 HID 출신 월남남전 참전용사님이 긴급히 나를 보자고 해서 만나러 갔다. 이분은 가수 진미령의 아버지인 고 김동석 대령(유격군의 대부)의 휘하에 있었던 인원으로 한 두번 만난 인연이 있다. 오후 4시경 속초 사무실로 도착하니 웬 아저씨가 한분 와 있다.
오늘 신선봉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니 바로 이분도 그곳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죽어갔다 한다. 참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오늘은 이상하게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분은 집이 청간리로 소년병으로 6.25전쟁때 유격군에 들어가 활동하다 다시 군에 갔다온 경력을 가지고 있는 참전용사님이었다. 아버지가 여차여차해서 끌려가 죽었는데 어떻게 국가 배상을 받을 수 있느냐의 질문을 하러 날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분야는 아니다.
양양 화일리의 영혈사에 있는 호국영령 위패에 대하여 나는 의문점을 물어 보았다.
영혈사는 호국영령 위패가 모셔져 있어 좀 특이한 절로 신라시대 원효에 의해 창건 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때도 불타지 않은 절로 이곳 설악산 일대의 전투에서 숨진 용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원래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곳이 지장전이라 하는데 이곳을 충령각이라고도 하여 큰돌로 명판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 위패의 탄생 비밀을 나는 알고자 했는데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다.
아마도 전쟁이후 참전용사들이 현지를 찾아보거나 주둔하는 부대들이 잊지 말자는 뜻에서 나름의 기억되는 전우들의 이름을 올린 것 같았다.
절 우측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둔전리가 나오고 그 위로가 화채봉(1320m)이다. 우측은 관모봉(877m)이다. 이 두봉우리는 설악산 대청봉에서 갈라져 내리는 지맥으로 '51년도 국군제11사단이 5월초에 설악동에서 마등령-저항령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 5월공세로 인민군과 접전을 이루며 대관령선가지 내려와 다시 5월말에 진격을 하는데 이곳으로 20연대가 진격을 하여 능선을 이용하요 마등령 저항령 황철봉 미시령 상봉-신선봉으로 밀고 올라 갔다.
그러니 당연이 위패 카드에 명단은 이 11사단이나 백골병단 아니면 설악산 전투에 참여했던 국군 3사단 수도사단 인원이어야 한다. 물론 100%다는 아닐것이다. 왜냐하면 지원나온 육군 직할부대도 있고 공병단도 있고 있겠지만... .
그러나 바로 HID(북파공작원)요원들의 명단은 의문점을 해소 하였다.
과거 김동석(현재는 고인이 됨. 육사 8기생이며 만주 출신임. 현 진미령 가수의 친아버지임. 대령으로 예편한 후 수원시장 목포시장 등 역임) 이 지역 HID 대장이 근무시 북으로 침투 혹은 훈련중에 순직한 인원들의 명단이 이곳에 위패 카드로 작정 되어 있었다.
나는 김동석대장의 생전에 한번 같이 동행하여 이곳에 찾았고 그 후 혼자서 찾아보았으니 두번의 방문이 있었다.
"여보, 당신은 대장이야!"
이승만 대통령의 실제 대화 내용이다. 바로 김동석 예비역 대령의 일화로 맥아더 원수가 자주 김동석을 칭찬했던 것 같다. 워낙 중국어를 잘하고 일본어도 능통한 인원으로 장개석 군대에서 소령까지 하고 해방이후 남한으로 들어와 육사 8기로 임관한다.
그러나 북한군의 편제나 주요 지휘자의 내력을 알고자 하는 유엔사측에서 아마도 그런 임무를 수행할 대상자를 찾던중에 김동석씨가 선발 된다. 여기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바로 105전차여단 제일 선봉에서 서울에 입성한 대대장이 "김웅"으로 서대문 구치소를 직접 개방한 장본인인데 죽미령 전투후 어찌된 일인지 아군측에 귀순하게 되고 이 인원을 심문하고 활용하는데 김동석씨가 개입하여 결국 총살되지 않고 살아남는 계기가 된다. 그러면서 초기 전투시 천안에서 사라진 북한군 제6사단의 행방을 알아내는데 결정적 정보를 준 장본인이 바로 김웅이었다.
나는 이 두분의 생전에 김동석씨는 여러번을 대면하고 실제 67사 포병연대장 재임시는 안보강연도 하도록 하였으며 이대 김웅씨가 함께 내려와 강연을 한다.
이 인연으로 서울 수유리 김웅씨 집 근처에서도 2~3회 만남을 갔고 점심을 성대히 대접 받기도 했다. 그는 바로 소련군 출신으로 독소전쟁에도 참가한 장본인으로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남으로 진격한 북한군 전차 대대장이다.
이런 인원이 김동석씨의 정보맨이 되어 1.4후퇴시에 중공군 주요 직위자를 포로로 획득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하여 바로 청야작전(지금 일산부터 서울 북방까지 초토화 시켜 중공군의 진출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함.)을 실현하여 중공군의 진출 속도를 둔화 시킴은 물론 한강 이남으로 대부대가 내려오지 못하는 절대적 작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래서 바로 맥아더 원수가 "어떻게 그렇게 저들의 정보를 훤히 들여다 보느냐?"는 질문에 "This Man"이라 하여 가리키는데 그가 김동석소령이었다.
51년초 대위시절 강화도에서 유격군으로 활동시에도 김웅씨는 함께 있으며 많은 정보를 만들어 내서 유엔군에 올리게 되며 이것이 많은 역활을 하였다 한다.
김웅는 김동석보다 6살 위로 서로 호형호제하며 평생을 지내다 김동석씨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웅씨도 바로 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손한번 잡아 봅시다. 얼굴색이 홍조를 띠고 있어야지 젊은 분이 좀 고생이 많구만... ."
나를 보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해결하라 한다. 의미있는 말씀이었다.
"야, 동석아 너 요즘 한달에 한번이라도 하냐?, 너 죽은 놈이냐!"
"야임마 나이가 얼마인데 너 지금도 청계천에 가지. 참 대단하다. 아직도 청춘이라니... ."
"야 혼자야 되냐. 도와 주니까 되지 바보야... ."
"그래 너 돈 많이 있지. 많이 배풀고 가라... ."
영문을 모르는 나를 멋진 중국집 식탁에 앉혀놓고 나누는 대화는 80을 훌쩍 넘긴 사람들이라 느끼기에는 아직 젊어 보였다.
그 당시 김웅씨는 우이동 유원지에 땅이 2천평이나 있는데 삼성그룹에서 격려금조로 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 금싸라기 땅이 되어 월세만 받아도 천만원이라 한다. 한국 땅에서 늦게 장가를 다시 가서 2005년도에 갓 30을 넘긴 아들이 한명 있었다.
90이 다 되었는데 손수 외제차 멋진 것을 몰고 다니는 멋쟁이 용사, 하지만 결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북에 남겨진 가족들과 조상의 애환을 가슴에 안은체 자연인으로 돌아가셨다.
어느날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 화암사(미시령고개 밑에서 좌측으로 있는 절)에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게 되고 이곳 HID대장인 김동석이 자리에 참석헀는데 이 자리에서 미군이 이렇게 큰 공을 세운 장본인이 아직도 장군이 안되었다고 하자 "무슨 소리야 이 사람은 대장이야" 말이 그대로 각인되어 이 절 입구에 보면 "김동석 대장"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하지만 금번 서거한 김종필씨와 육사 동기이면서 경쟁자로 평생을 함께 같은 자리에 앉지않은 뚝심으로 살았던 김동석씨다.
5.16군사혁명에서도 이승만 정권의 비호 세력으로 사형자 명단에 들지만 박정희의 각하로 살아 남게 되는데 이는 알본 만주군이었던 박정희가 일본의 패망으로 쏘련군의 포로로 될뻔한 싯점에 바로 장개석 군대의 소좌계급이던 김동석이 개입하여 그 포로대열에서 빼내어 오게 되며 이때 정일권도 함께 구출되어 오는 인연으로 죽지않고 끝까지 버티기를 하고 살았던 고집있는 용사였다.
차는 진부령 고개에 잠시 머물러 넘나드는 바람을 맞고 있다. 넘실대는 저멀리 동해바다는 푸르기만 하고 조국산하는 가을로 접어들어 오색 단풍이 춤을 추는데 전쟁의 소용돌이는 아직 끝나지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바로 찾지 못한 전사자 유해가 무려 13만여명이란 사실이다.
저 산등성이를 잣대로 인제군과 속초시 고성군이 구별된다. 지금 이곳 알프스 스키장은 옛 명성은 사라지고 그 잔해만 남아 썰렁한 상태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슨 집시들이 머물다 간 곳처럼 황량함마저 드는 이곳은 초기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스키장이었다고 한다. 얼마전까지는 그래도 군 스키부대가 있어 조금 오가는 사람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 부대마저 사라져 백두대간의 바람흐르는 소리만 요란한 곳이 되었단다.
이곳으로 그 많은 군인들이 남북을 오가며 밀고 밀리며 운명을 가른 뼈아픈 곳, 대한민국의 모든 곳은 상처 투성이인데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안내 간판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조금 내려가면 연화동 계곡이 나온다. 그곳은 '95년도에 잠수함으로 강릉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마지막 사살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곳이 지금 용대 자연 휴양림으로 각광을 받으며 관광객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는데 사실 바로 그 위가 그 유명한 1271m 매봉산과 1,172m 칠정봉이 서쭉에 우뚝 솟아 있고 동남쪽으로는 1,380m의 황철봉이 자리잡아 깊은 계곡을 형성 하고 있다.
"내 임무는 뒤로 물러나는 아군을 총으로 쏘는 독전대요."
어느날 수도사단 헌병출신 참전용사님을 만났다. 본인이 성명을 밝히지 않는다. 다만 유해발굴에 관련된 몇가지를 질문하시고 용대리 위에 있는 매봉에 대해 증언을 해 주셨다.
특무상사까지 달고 제대한 용사님은 대학을 다니다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대구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입대 하였다. 물론 자진 입대가 아닌 길거리에서 붙들려 대구 어디 방직공장 운동장에 가서 신검을 받는데 키만 작았지 아무런 문제가 없어 전쟁터로 가야 한다.
훈련을 몇일 받다가 누군가 찾아왔다고 불려가서 만나니 아는 친구가 군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배속된 곳이 수도사단이다.
안강-기계전투시는 낮은 계급이라 뭘 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루에도 수십차례 주인이 바뀌는 전쟁터에서 어떻게 운좋게 살아 남았는데 그때는 피난민 통제와 오열들을 색출해 내는데 주로 검색 임무를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밀려드는 피난민을 검색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이 여자라고 한다. 남자야 발가 벗기면 그만인데 여자는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그러니 여자를 이용하여 오열들이 상호간에 연락을 주고 받는다고 하니 참 난감한 때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여자를 좋아하는 지휘자를 만나면 하급자는 더욱 난처해 지는데 어쩔수 없이 선택을 해서 데리고 가는 심정이 때로는 전쟁이니 그렇구나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 아픔이 무겁고 죄스런 것은 그 선택된 여인이 계속 잘 되어가면 그래도 괜찮은데 몇일 못가서 사라져 버리고 또 다른 여자를 진상해야 하는 지금 생각하면 못된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풍문으로는 죽었다고 하고 차를 태워 저 어디 후방으로 보냈다고 하고 알 수는 없다. 그런 위치도 아니다. 흔한 말로 까라면 까는 위치에 있었다.
눈 앞에서 아군과 적군이 서로 붙들고 죽고 죽이는 전쟁이 대낮에도 벌어진다.
더이상 이런 일을 하기에 체질이 맞질 않아 고민이 많던 차에 헌병으로 차출이 되었다. 대학 다니는 것이 작용했는지 부산가서 교육받고 다시돌아와 보니 형산강전투가 정말 치열하게 벌어져 대낮에 저기 보이는 산에서 육박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아군이 쏘는 포탄이나 비행기 폭격이 어떻게 피아를 가려 사격할 수도 없고 그냥 산 정수리에 퍼 부어 버리면 그 비명소리가 십리를 간다고 한다. 포연이 뽀얗게 산을 뒤덮고 돌격하라는 소대장의 우렁찬 목소리며 위생병을 간절하게 부르는 부상병의 절규도 들었다.
얼마나 죽어나가는지는 모른다. 본인도 그랬듯이 여기 전선에 오르는 대부분의 군인은 제대로된 훈련을 받고 총을 쏘아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훈련장에서 대표로 몇명이 수류탄을 던지는 시범으로 끝나고 총을 들고 한 서너발 쏘아보면 합격이라고 큰소리로 교관이 목청을 돋구고 이것으로 훈련 끝이다. 벌써 연병장 입구에 트럭이 쭈욱 대기하고 있다.
그런 9월 중순에 갑작스레 인민군이 물러나 차를 타고 진격하는 사단을 따라 양양-속초를 지나 간성을 지나 원산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원산 입구 어딘지는 모르는데 갑작스레 사단 지휘소를 인민군 게릴라들이 기습을 하여 많은 군인들이 죽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눈앞에서 따뜻한 피를 흐리는 모습과 뛰는 심장 소리를 들어보았다 한다.
계급도 하나 올라가 이제 쫄병 신세는 면했다.
"수천명이 죽어 과수원에 나부러진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침에 보니 그 일대가 무슨 과수원같은데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왠 사람들이 죽어서 있는데 수천은 족히 되어 보인다. 알고 보니 인민군들이 뒤로 물러나며 이 고장 사람들과 남에서 끌고 온 양민들을 어떻게 데려가기 곤란하니 다 죽여버렸단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누가 한삽 흙이라도 올려주는 군인도 없다. 왜냐하면 전진해야 한다.
지금 그곳에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 아마도 사람을 동원하여 대충 파고 다 밀어넣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다 다시 하사관으로 차출되어 교육을 받으러 떠나고 복귀하려니 중공군이 쳐 내려와 모두 남쪽으로 후퇴하고 있단다. 그래서 간 곳이 묵호로 가서 다시 사단을 만나고 독전대가 된다.
독전대란 그말 그대로 전투를 하라고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통제하는 임무다.
혹독한 추위속에 양양근처에 올라가 피난민을 통제하는 임무를 우선 맡아야 했다.
지금 이곳의 피난민은 북한 주민들이다.
쏟아져 내려온 피난민이 골짜기 골짜기마다 넘쳐 나는데 동해안은 땅이 넓지않아 모두가 바로 산 밑에 오두막집같은 모습으로 거적을 이용하여 많게는 어느 가족은 20여명이 함께 야숙하고 있는데 아침에 보면 그 체온과 입김으로 내린 눈이 녹아 뽀끔뽀끔 구멍이 난 모습이 마치 바둑판의 흰돌 까만돌 같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 군인들도 힘들지만 피난민들은 정말 어렵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강릉인지 양양인지 "아바이 순대"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바로 아바이 마을이 피난민 마을이다.
그러다 다시 후퇴하여 정선인지 묵호인지 모르지만 내려갔다. 또 진격하는데 이제 대관령 옆에 지금의 용평 스키장이 있는 일대로 올라 갔다가 설악산으로 진출한다고 한다. 이때 일등중사가 되었다. 아마 무척 빨리 진급한 케이스인데 학교 덕택이 아닌가 싶단다.
하지만 왠일, 바로 지금의 한계령근처로 올라 서게 된 때가 이른 봄인데 중공군이 목전에 왔다고 한다. 하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중공군을 만나고 싶기도한 충동심이 생기기도 했다.
"중공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인민군이 나타났다."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피아간에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 산을 넘는다는 것은 어렵다고 한다. 재량밭일대에 전방 통제소가 있었는데 연대 병력이 설악산 서북능선을 따라 대승령-안산-백담사근처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라 한다.
이때 처음으로 한계령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향해 실제 총을 쏴 무질서한 후퇴를 막았다.
그러니 지금보니 그게 5월 중순은 넘었는데 사단 좌측에 있던 3사단이 어떻게 밤사이 적의 침투를 허용하여 사단이 무너졌다고 소문이 확 돌았다.
"어휴, 가리산계곡에 쏟아지는 적의 기관총 소리가 천지를 진동케해 모두 주눅이 들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울리는 총소리는 정말 가공할 만큼 공포감을 준다. 그런데 기관총으로 가리산 주억봉 밑에 계곡에 대고 인민군이 무작정 갈겨대는 총소리는 앞에서 총쏘는 소리 몇십배의 울림으로 산을 돌고돌아 모두 포위되어 버린 공황을 가져온다.
대대장도 전령을 대동하고 한계령 정상에서 병력을 추수리는데 겁이난 병력들이 허겁지겁 한계령에서 점봉산 방향으로 일부는 바로 맞은편 산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리고 있다.
지금 북한군이 바로 앞에 온것도 아닌데... .
헌병이 총을 쏴대고 대대장도 돌아서서 적과 싸우라 하는데 소대장은 없다. 중대장도 없다. 아마도 앞의 장군대 산속에서 다 전사했던지 포로가 된 모양이다. 이제는 헌병이 최선봉에서 적과 대치하는 극한 상황이 왔다. "아마 헌병이 적과 대응하여 전투를 했다고 하면 안믿을 거요.!"
용사님은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적군과 직접 교전을 하며 뒤로 가는 국군을 따라 원하지 않는 후퇴를 해야만 했다. 한번 겁 먹은 병력을 뒤로 돌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렇게 설악산까지 오른 수도사는 우측에 국군 3사단과 9사단이 뒤로 밀리면서 덩달아 밀려 지금의 영동선까지 내려 갔다가 다시 올라 서는데 때는 '51년 6월초였다. 사단은 신나게 진격하여 설악산을 넘어 진부령에서 향로봉산맥을 타고 일거에 진출하는데 가장 밑에 봉우리가 매봉으로 1271m나 된다. 매봉-칠정봉-동굴봉-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사선형으로 전선이 형성 되었는데 이때 바로 매봉에 올라가 독전대 임무를 또 다시 하게 되었다.
"뒤로 돌아서면 그냥 쏜다. 앞으로만 가라!"
이곳 산은 능선자체가 1000m이상 되는 고지능선이며 서북쪽은 모두 고지로만 되어 있어 적이 은거하여 기습공격을 잘 할 수 있는 지형이다. 이곳으로 진출은 했으나 계속적으로 적의 역습에 밀리어 뒤로 내려서는 반복을 하나보니 이곳서 낙오자 통제소를 설치하고 강력하게 밀어 붙히는 작전이다.
명령이 무조건"돌아서면 쏴라"했으니 기구한 운명이었다. 적에게 쏴야 할 총이 아군에게 쏘야 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