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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경(他經)을 배우는 사람이 이근(利根)이고 지혜(智慧)도 어질고·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문수(文殊) 미륵(彌勒)과 같은 사람으로 제경(諸經)을 마음속에 다 알고 계시는 사람들의 공덕(功德)보다도 뛰어남이 백천만억배(百千萬億培)된다는 것이 경문(經文) 및 천태(天台)·묘락(妙樂)의 육십권(六十卷) 중(中)에 쓰여있다. 그러므로 경문(經文)에는 「부처의 지혜(智慧)로써 다소(多少)를 주량(籌量)한다 해도 그 변(邊)을 알지 못함」이라고 설(說)하여져 부처의 지혜(智慧)조차 이 사람의 공덕(功德)을 아시지 못함이라. 부처의 지혜(智慧)의 진귀(珍貴)함은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칠일(七日)·혹은 이칠일(二七日)이나·내리는 비의 수(數)까지도 아실 수가 있으나, 다만 법화경(法華經)의 일자(一字)를 부르는 사람의 공덕(功德)만은 알지 못하신다고 쓰여있다. 하물며 우리들 역죄(逆罪)의 범부(凡夫)가 이 공덕(功德)을 알수 있을 소냐. 그렇지만 여래(如來) 멸후(滅後) 이천이백여년(二千二百餘年)에 이르러 오탁(五濁)이 성해진지 해가 오래되었으니 매사(每事)에 있어 선(善)한 일은 매우 드물다. 설령 선(善)을 행(行)하는 사람도 一의 선(善)에 十의 악(惡)을 만들어 쌓아서 결국(結局)은 소선(小善)에 의(依)하여, 대악(大惡)을 만들고 마음으로는 대선(大善)을 수행(修行)했다는 만심(慢心)을 일으키는 세상(世上)이 되었느니라. 그런데 여래(如來)가 세상(世上)에 출현(出現)하신 나라로 부터는 이십만리(二十萬里)의 산해(山海)를 거쳐서 동(東)쪽에 있는 일역변토(日域邊土)의 작은 섬나라에 태어나 오장(五障)의 구름이 두꺼우며, 삼종(三從)의·고삐에·묶여진 여인(女人) 따위의 몸으로서 법화경(法華經)을 신용(信用)하심은 존귀(尊貴)한 일인지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나이다. 대저 니치렌대성인의 불법(佛法)에서 말하는 공덕과 벌이란 소위 굴러온 호박 같은 이익이라든가, 불신(佛神)의 제재나 처벌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법(法)을 근본으로 해서 이를 따랐을 때의 좋은 과보(果報), 위배했을 때의 나쁜 과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통법규를 무시하면 사고를 당하고, 장사의 요령을 발견하면 판매도 증대한다는 예를 들 필요도 없이 법에 대한 순역(順逆)은 전혀 반대의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다루는 근본의 법, 우주를 관통하는 근본의 법인 묘법(妙法)에 귀의(歸依)했을 때의 과보가 불법에서 말하는 공덕이고 묘법에 위배했을 때의 과보가 벌입니다.
공덕에는 생활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좋은 과보가 있으며 정신력, 생명력이 강해지고 충실해지는 것도 그 중의 하나지만, 궁극적으로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영원한 행복 경계(境界), 성불의 경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 그 근본의 뜻입니다.
벌에도 여러 가지 천심(淺深)이 있습니다. 그리고 뚜렷이 나타나는 현익(顯益)과 현벌(顯罰), 뚜렷이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생명 속에 쌓이는 명익(冥益)과 명벌(冥罰)의 차이가 있습니다. 말법인 현재의 공덕은 명익이 중심이며 현익보다도 명익이 더 큰 것입니다.
어서에 「공덕이란 육근청정(六根淸淨)의 과보(果報)이니라.」 (신편어서 p.1775) 라고 있습니다. 육근이란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을 말하며 생명의 감각, 식별작용의 기관입니다. 이것들이 깨끗해지고 사물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을 육근청정이라고 합니다.
번뇌에 싸여 판단과 행위에 차질이 많은 것이 보편적인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깨끗하고 판단이 적확한 인생은 얼마나 멋진 것인지 모릅니다. 이 외에도 어서에는 여러 각도에서 공덕과 벌에 대해 깊이 논하시고 있는데 본존님의 공덕력은 참으로 심심무량(甚深無量)이라는 말 이외는 없습니다.
제26세 니치칸(日寬) 상인은 “이 본존님의 공덕은 무량무변(無量無邊)의 묘용(妙用)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잠시라도 이 본존님을 믿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면 즉 기원(祈願)으로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고, 죄(罪)로서 멸(滅)하지 않음이 없으며, 복(福)으로서 오지 않음이 없고 이(理)로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난조고시치로고로전(南條故七郞五郞殿)의 사십구일(四十九日)·보리(菩提)를 위하여 보내 주신 물품(物品)의 목록(目錄)에 관한 일, 엽전(葉錢) 이련(二連)·백미(白米) 일타(一駄)·토란 일타(一駄)·순두부(純豆腐)·곤약(菎蒻)·감 一바구니·유자(柚子) 오십개(五十個) 등(等) 운운(云云), 보리(菩提)를 위하여 법화경(法華經)의 일부(一部)·자아게(自我偈)를 수차(數次)·제목(題目)을 백천번(百千番) 봉창(奉唱)하였나이다.
대저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하는 경(經)은 일대성교(一代聖敎)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經)으로서·더구나 유불여불(唯佛與佛)이라고 설(說)하시어 부처와 부처만이 아시므로, 등각(等覺) 이하(已下) 내지(乃至) 범부(凡夫)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외다.
그러므로 용수보살(龍樹菩薩)이 대론(大論)에는 부처 이하(已下)는 오직 믿음으로써, 부처가 된다고 쓰여 있나이다. 법화경(法華經)의 제사법사품(第四法師品)에 가로되 「약왕(藥王)이여, 지금 그대에게 고(告)하노니 나의 소설(所說)의 제경(諸經)이 있다. 그런데 이 경중(經中)에 있어서 법화(法華) 최제일(最第一)이니라」 등(等) 운운(云云). 제오(第五)의 권(卷)에 가로되 「문수사리(文殊師利)여, 이 법화경(法華經)은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비밀(秘密)의 장(藏)이니라 제경(諸經) 중(中)에 있어서 가장 위에 있느니라」 등(等) 운운(云云), 제칠(第七)의 권(卷)에 가로되 「이 법화경(法華經)도 또한 역시 이와 같으니 제경(諸經) 중(中)에 있어서 가장 그 위이니라」 또 가로되 「가장 조명(照明)하며 가장 존귀(尊貴)하니라」 등(等) 운운(云云), 이들의 경문(經文)은 사의(私義)가 아니라 부처의 성언(誠言)이므로 반드시 결(決)코 그릇됨이 없으리라, 백성(百姓)의 집에 태어난 자(者)가 나는 무사(武士)와 같다느니 한다면 반드시 책망(責望)이 오고 더구나 나는 국왕(國王)과 같노라·또한 뛰어났노라 따위로 말한다면 자신의 죄과(罪過)가 될 뿐 아니라 부모(父母)에게도 처자(妻子)에게도 반드시 피해(被害)를 준다고 함은 비유(譬喩)컨대 대화(大火)가 가택(家宅)을 불태우고 대목(大木)이 쓰러질 때·소목(小木)들이 피해(被害)를 입는 것과 같다.
불교(佛敎)도 또한 이와 같이 화엄(華嚴)·아함(阿含)·방등(方等)·반야(般若)·대일경(大日經)·아미타경(阿彌陀經) 등(等)에 의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믿은대로 승렬(勝劣)도 분별(分別)치 못하고서·우리 아미타경(阿彌陀經) 등(等)은 법화경(法華經)과 제등(齊等)하다느니·또는 뛰어났다느니 말하면 그 동류(同類)의 사람들은 자기 경(經)을 칭찬받아서 기쁘게 생각 하지만 오히려 죄과(罪過)로 되어 스승도 제자(弟子)도 단나(檀那)도 악도(惡道)에 떨어짐이·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법화경(法華經)이 일체경(一切經)보다 뛰어났다고 하는 것은·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대공덕(大功德)으로 됩니다, 경문(經文)과 같기 때문이니라.
이 법화경(法華經)의 시초(始初)에 무량의경(無量義經)이라고 하는 경(經)이 계시느니라, 비유(譬喩)컨대 대왕(大王)이 행차하실 때·장군(將軍)이 전진(前陣)하여 낭자(狼藉)를 진압하는 것과 같다. 그 무량의경(無量義經)에 가로되「사십여년(四十餘年)에는 아직 진실(眞實)을 나타내지 않았음」등(等) 운운(云云). 이는 장군(將軍)이 대왕(大王)에게 적대(敵對)하는 자(者)를 대궁(大弓)으로써 쏘아서 없애 버리고·또 장도(長刀)로써 베어버리는 것과 같다, 화엄경(華嚴經)을 읽는 화엄종(華嚴宗)·아함경(阿含經)의 율승(律僧) 등(等)·관경(觀經)의 염불자등(念佛者等)·대일경(大日經)의 진언사(眞言師) 등(等)의 자(者)들이 법화경(法華經)에 따르지 않음을 공격(攻擊)하여 복종(服從)시키는 이검(利劍)의 칙선(勅宣)이니라, 비유컨대 사다토(貞任)를 요시이에(義家)가 공격(攻擊)하고 기요모리(淸盛)를 요리토모(賴朝)가 타도(打倒)한 것과 같다. 무량의경(無量義經)의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문(經文)은 부동명왕(不動明王)의 검삭(劒索)·애염명왕(愛染明王)의 궁전(弓箭)이니라.
고난조고로전(故南條五郞殿)이 사출(死出)의 산(山)·삼도(三途)의 강(江)을 건너실 때, 번뇌(煩惱)의 산적(山賊)·죄업(罪業)의 해적(海賊)을 평정(平定)하고·사고(事故) 없이 영산정토(靈山淨土)로 가시도록 수행(隨行)하는 무사(武士)는 무량의경(無量義經)의 사십여년(四十餘年)·미현진실(未顯眞實)의 경문(經文)이로다.
법화경(法華經) 제(第)一의 권(卷)·방편품(方便品)에 가로되 「세존(世尊)의 법(法)은 오래된 후 반드시 응당(應當) 진실(眞實)을 설(說)하시리라」 또 가로되 「정직(正直 )히 방편(方便)을 버리고 다만 무상도(無上道)를 설(說)함이라」 운운(云云). 제(第)五의 권(卷)에 가로되 「오직 계중(髻中)의 명주(明珠)」 또 가로되 「유독(唯獨) 왕(王)의 정상(頂上)에 이 일주(一珠)가 있음」 또 가로되 「그 강력(强力)한 왕(王)이 오래 호지(護持)하던 명주(明珠)를 지금 바로 이를 수여(授與)함과 같도다」등(等) 운운(云云). 문(文)의 뜻은 일본국(日本國)에 일체경(一切經)이 도래(渡來)하였는데 칠천삼백구십구권(七千三百九十九卷)이니라, 그러한 경(經)들은 모두 법화경(法華經)의 권속(眷屬)이니라, 예컨대 일본국(日本國)의 남녀(男女)의 수(數)·사십구억구만(四十九億九萬) 사천팔백이십팔인(四千八百二十八人)이 있으나 모두 한 사람의 국왕(國王)의 가신(家臣)인것과 같다. 일체경(一切經)의 참뜻은 우치(愚癡)의 여인(女人)들이 오직 일시(一時)에 유의(留意)해야 할 것은 예를 들면 대탑(大塔)을 쌓는데는 우선 재목(材木) 이외(以外)에 비계라고 하여 많은 소목(小木)을 모아서 일장(一丈) 이장(二丈)쯤 짜 올리느니라, 이렇게 짜 올려 놓고 재목(材木)을 가지고 대탑(大塔)을 쌓아 올리고 나면·도리어 비계를 잘라 버리고 대탑(大塔)만 있느니라, 비계라고 함은 일체경(一切經)이며, 대탑(大塔)이라고 함은 법화경(法華經)이니라. 부처가 일체경(一切經)을 설(說)하신 것은,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시기 위한 비계이니라,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이라고 하여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은 아미타경등(阿彌陀經等)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대일경등(大日經等)의 진언종(眞言宗)·아함경등(阿含經等)의 율종(律宗)의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等)을 잘라버리고 내던진 후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느니라. 대탑(大塔)을 쌓기 위해서는 비계가 소중(所重)하지만, 대탑(大塔)을 쌓아올리고 나면 비계를 잘라 떨어뜨린다.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이라고 하는 문(文)의 뜻은 이것이 니라, 비계로부터 탑(塔)은 출래(出來)하였지만 탑(塔)을 버리고·비계를 배례(拜禮)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세상(世上)의 도심자(道心者)들·일향(一向)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부르며 일생(一生)을 보내고·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한번도 부르지 않는 사람들은 대탑(大塔)을 버리고 비계를 배례(拜禮)하는 사람들이니라. 세간(世間)에서는 현명(賢明)하나·실(實)은 어리석은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니라.
고시치로고로전(故七郞五郞殿)은 당세(當世)의 일본국(日本國)의 사람들을·닮지 않으시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현명(賢明)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이 아직 이십(二十)에도 미치지 않은 사람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고 부처가 되시었으니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은 이것이니라. 바라고 원(願)컨대 비모(悲母)가 내 자식을 그립다고 생각하신다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어, 고난조전(故南條殿)·고고로전(故五郞殿)과 한곳에 태어나겠노라고 소원(所願)하시라, 한 종자(種子)는 한 종자(種子)·다른 종자(種子)는 다른 종자(種子)·같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종자(種子)를 마음에·간직하고 계신다면·같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나라에 태어나시리라, 세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실 때·그 기쁨이야말로 오죽하시겠느뇨.
대저 이 법화경(法華經)을 펴서 배견(拜見)하노라면 「여래(如來)는 즉 그를 위해 의복(衣服)으로써 이를 덮어 주시고 또한 타방(他方) 현재(現在)의 제불(諸佛)이 호념(護念)하는 바가 되리라」 등(等) 운운(云云). 경문(經文)의 뜻은 동서남북(東西南北)·팔방(八方)·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외(外)·사백만억나유타(四百萬億那由佗)의 국토(國土)에 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잇따라와서 충만(充滿)하시었다, 하늘에는 별과 같이·땅에는 도마(稻麻)와 같이 열(列)지어 계시며,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시는 것을 비유하면 대왕(大王)의 태자(太子)를 모든 신하(臣下)가 수호(守護)하는것과 같다. 단(但) 사천왕(四天王)의 동류(同類)가 수호(守護)하여 주시는 것도 황송한 일인데, 일체(一切)의 사천왕(四天王)·일체(一切)의 성수(星宿)·일체(一切)의 일월(日月)·제석(帝釋)·범천(梵天) 등(等)이 수호(守護)하시니 만족(滿足)해야 할 일이니라. 게다가 일체(一切)의 이승(二乘)·일체(一切)의 보살(菩薩)·도솔내원(兜卒內院)의 미륵보살(彌勒菩薩)·가라타산(伽羅陀山)의 지장(地藏)·보타락산(補陀落山)의 관세음(觀世音)·청량산(淸凉山)의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등(等)·각각(各各) 권속(眷屬)을 구족(具足)하여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해 주심으로써 만족(滿足)해야 할 것인데·또한 황송하게도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친(親)히 자진(自進)해서 내림(來臨)하시어·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동안 수호(守護)해 주심에 대한 황송함은 말로 다하지 못하노라.
이렇듯 고마운 경(經)을 고고로전(故五郞殿)은 믿으시어 부처가 되시고, 오늘은 四十九일이 되었으니, 일체(一切)의 제불(諸佛)이 영산정토(靈山淨土)에 모이셔서 혹은 손에 얹으시고·혹은 머리를 어루만지시고·혹은 안으시고·혹은 기뻐하시니·달이 처음으로 떠오르는 것과 같이·꽃이 처음으로 피었듯이·얼마나 사랑하시겠느뇨. 대저 어찌하여 삼세(三世)·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은 강력(强力)히 이 법화경(法華經)을 수호(守護)하실까 하고 생각하건대·도리(道理)인 것이외다.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함은 삼세시방(三世十方)의 제불(諸佛)의 부모(父母)이니라·유모(乳母)로 되고·주(主)이신 것이니라. 개구리라는 동물(動物)은 어미의 음성(音聲)을 먹이로 하는데·어미의 음성(音聲)을 듣지 않으면 생장(生長)하지 못하느니라. 가라구라(迦羅求羅)라고 하는 벌레는 바람을 먹이로 하니·바람이 불지 않으면 생장(生長)하지 못한다. 물고기는 물을 의지하고·새는 나무를 보금자리로 한다·부처도 또한 이와 같이 법화경(法華經)을 목숨으로 하고·식물(食物)로 하고·주처(住處)로 하시느니라. 물고기는 물에 살고·부처는 이 경(經)에 사신다·새는 나무에 살고·부처는 이 경(經)에 사시며·달은 물에 깃들고·부처는 이 경(經)에 깃드시니, 이 경(經)이 없는 나라에는 부처가 계시는 일이 없다고 심득(心得)하십시요.
옛날 윤타왕(輪陀王)이라고 하는 왕(王)이 계셨는데 남염부제(南閻浮提)의 주(主)이니라. 이 왕(王)은 무엇을 수라(水剌)로 하셨는가 알아보니 백마(白馬)의 울음을 듣고 수라(水剌)로 하시었다. 이 왕(王)은 백마(白馬)가 울면 나이도 젊어지고·안색(顔色)도 환해지고·정신(精神)도 상쾌하고·힘도 세고·또한 정사(政事)도 공명(公明)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는 백마(白馬)가 많이 모아서 길렀다. 비유컨대 위왕(魏王)이라고 하는 왕(王)이 학(鶴)을 많이 모으고 덕종황제(德宗皇帝)가 반딧불을 사랑한 것과 같았다. 백마(白馬)가 우는 것은 또한 백조(白鳥)가 울기 때문이라, 그래서 백조(白鳥)를 많이 모았는데, 어느 때 어찌된 일인지 백조(白鳥)가 모두 사라져서·백마(白馬)가 울지 않게 되자, 대왕(大王)은 수라(水剌)를 끊으시고 한창 핀 꽃이 이슬에 시들어 버린 것 같고·만월(滿月)이 구름에 가리워진 듯 하였다. 이 왕(王)이 거의 붕어(崩御)하시려고 하자, 왕후(王后)·태자(太子)·대신(大臣)·일국(一國)이·모두 어머니와 헤어진 자식 같이·모두 실색(失色)하여 눈물이 소매를 적시었다·어찌하랴·어찌하랴, 그 나라에 외도(外道)가 많았으니·당시(當時)의 선종(禪宗)·염불자(念佛者)·진언사(眞言師)·율승등(律僧等)과 같았다. 또한 부처의 제자(弟子)도 있었으니·당시(當時)의 법화종(法華宗)의 사람들과 같았다. 사이가 나쁘기는·수화(水火)이고·호(胡)와 월(越)과 같았었다. 대왕(大王)이 칙선(勅宣)을 내리시어 가로되, 일체(一切)의 외도(外道)가 이 말을 울게 한다면 불교(佛敎)를 없애고, 오로지 외도(外道)를 믿기를·제천(諸天)이 제석(帝釋)을 공경(恭敬)함과 같이 하리라, 불제자(佛弟子)가 이 말을 울게 한다면 일체(一切)의 외도(外道)의 목을 베고 그 거처(居處)를 몰수(沒收)하고 불제자(佛弟子)에게 따르리라고 운운(云云). 외도(外道)는 실색(失色)하고·불제자(佛弟子)도 서로 한탄(恨歎)하였다. 그러나·그대로 끝날 일이 아닌지라 외도(外道)는 먼저 칠일(七日)을 행(行)했으나, 백조(白鳥)도 오지 아니하고·백마(白馬)도 울지 않았다. 후(後) 칠일(七日)을 불제자(佛弟子)에게 넘겨서 기도(祈禱)하게 하였던 바, 마명(馬鳴)이라고 하는 소승(小僧)이 한 사람 있어서, 제불(諸佛)이 어본존(御本尊)으로 삼으시는 법화경(法華經)으로써 칠일(七日)을 기도(祈禱)했던 바·백조(白鳥)가 단상(壇上)에 날아와서, 이 새가 한 마디 울자 한 마리의 말이 한 마디 우니, 대왕(大王)은 말의 소리를 듣고 병상(病牀)에서 일어나시었다. 왕후(王后)를 비롯하여 제인(諸人)은 마명(馬鳴)을 향(向)하여 예배(禮拜) 하였다, 백조(白鳥)가 一·二·三 내지(乃至) 십(十)·백(百)·천(千)·출래(出來)하여 국중(國中)에 충만(充滿)하였다. 백마(白馬)가 자꾸만·울어 한 마리·두 마리 내지(乃至) 백(百)·천(千)의 백마(白馬)가 울게 되니 대왕(大王)은 이 소리를 들으시고, 면모(面貌)는 三十정도·마음은 해와 같이 밝아져서 정사(政事)가 정직(正直)하였으므로 하늘에서 감로(甘露)가 내리고, 칙풍(勅風)·만민(萬民)을 순종(順從)케 하여 무량(無量)·백세세상(百歲世上)을 다스리시었다.
부처도 또한 이와 같이 다보불(多寶佛)이라고 하는 부처는 이 경(經)을 만나지 않으실 때에는 입멸(入滅)하시고, 이 경(經)을 읽는 세상(世上)에는 출현(出現)하신다, 석가불(釋迦佛)·시방(十方)의 제불(諸佛)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러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덕(德)이 있는 경(經)이기에·이 경(經)을 갖는 사람을·어찌하여 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후지천안대보살(富士千眼大菩薩)이 버리시겠느뇨 라고·믿음직스러운 일이로다. 또한 이 경(經)을 적시(敵視)하는 나라는·아무리 정직(正直)히 기도(祈禱)해도·반드시 그 나라에 칠난(七難)이 일어나서 타국(他國)에게 패(敗)하여 망국(亡國)이 된다는 것은·대해(大海) 중(中)의 대선(大船)이 대풍(大風)을 만난것과 같고·대한발(大旱魃)이 초목(草木)을 고사(枯死)시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라. 당시(當時) 일본국(日本國)이 어떠한 기도(祈禱)를 한다 해도, 니치렌(日蓮)의 일문(一門)·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멸시(蔑視)하므로, 여러가지 기도(祈禱)가 이루어지지 아니 하고 대몽고(大蒙古)에서 공격(攻擊)당하여 이미·망(亡)하려고 함과 같으니라. 지금도 보시라·그냥 이대로는 있지 못하리라·이는 모두 법화경(法華經)을 적대시(敵對視)하기 때문이라고 믿으시라.
대저 고고로전(故五郞殿)이 돌아가신지 벌써 四十九일(日)이니라. 무상(無常)은 상사(常事)이지만, 이것은 듣는 사람조차 역시 견디기 어려운데, 하물며 어머니이시고 아내이신 사람이야·심중(心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자식에는 어린 사람도 있고·어른다운 사람도 있고·미운 사람도 있고·불구자(不具者)조차도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법인데 하물며 남자(男子)인데다가 매사에 족(足)하고, 정(情)이 많았더라, 고우에노전(故上野殿)께서는 한창일 때 먼저 세상(世上)을 뜨시어, 한탄(恨歎)도 깊었으니·이 자식을 회임(懷妊)하지 않았더라면 불에도 뛰어들고 물에도 들어가려고 생각했으나·이 자식이 이미 평안(平安)하니·누구에게 맡기고 투신(投身)하랴 생각하여, 이렇듯 마음을 달래면서 이 십사(十四) 오년(五年)을 지나셨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고·두 사람의 사내자식에게·업혀 가리라고·믿음직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금년(今年) 구월(九月) 오일(五日)·달이 구름에 가리우고·꽃을 바람에 날리게 해서·꿈인가·생시(生時)인가·얼마나 기나긴 꿈이련가 하고·탄식(歎息)하고 있었는데·현실(現實)로서·이미 四十九日이 지나갔구려, 사실(事實)이라면·어찌하랴·피어 버린 꽃은·지지 않고·봉오리진 꽃이 시들었으니, 늙은 어머니는·머무르고·어린 자식은·떠나갔다, 매정스러운 무상(無常)인지고·무상(無常)인지고.
이러한 무정(無情)한 나라를·싫어하여·버리시고 고고로전(故五郞殿)은 믿으셨던 법화경(法華經)을 따르시어·상주불괴(常住不壞)의 영산정토(靈山淨土)로 일찍이 가셨는데 아버지는 영산(靈山)에 계시고·어머니는 사바(裟婆)에 머무르시니 두 사람의 중간(中間)에 계시는 고고로전(故五郞殿)의 마음이야말로·동정(同情)이 가서 애처롭게·생각됩니다, 할 말은 많으나·그치겠소, 공공근언(恐恐謹言).
우에노전모친답서(上野殿母親答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568~1573쪽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시는 것을 비유하면 대왕(大王)의 태자(太子)를 모든 신하(臣下)가 수호(守護)하는것과 같다. 단(但) 사천왕(四天王)의 동류(同類)가 수호(守護)하여 주시는 것도 황송한 일인데, 일체(一切)의 사천왕(四天王)·일체(一切)의 성수(星宿)·일체(一切)의 일월(日月)·제석(帝釋)·범천(梵天) 등(等)이 수호(守護)하시니 만족(滿足)해야 할 일이니라. 게다가 일체(一切)의 이승(二乘)·일체(一切)의 보살(菩薩)·도솔내원(兜卒內院)의 미륵보살(彌勒菩薩)·가라타산(伽羅陀山)의 지장(地藏)·보타락산(補陀落山)의 관세음(觀世音)·청량산(淸凉山)의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등(等)·각각(各各) 권속(眷屬)을 구족(具足)하여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해 주심으로써 만족(滿足)해야 할 것인데·또한 황송하게도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친(親)히 자진(自進)해서 내림(來臨)하시어·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동안 수호(守護)해 주심에 대한 황송함은 말로 다하지 못하노라.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
법화초심성불초(法華初心成佛抄) 미노부에서 56세에 술작 555 ~ 557쪽현익(現益)이란, 눈앞에 직면한 괴로움과 고민이 해결되는 등 생활 표면상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공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신심을 시작하고 치료에 긍정적으로 임해 병이 나았다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에 비해 명익(冥益)이란, 어린나무가 오랜 세월 속에 이윽고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듯이 한결같은 신앙의 실천 속에서 삼세三世에 걸쳐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복운이 쌓여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수년간이라는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엄연하게 변혁을 이루어 내고 행복을 얻으며 인격적으로도 성장하여 빛을 발하는 공덕이라 하겠습니다.
대성인은 「정법(正法)을 받기는 간단하지만 수지(受持)하기는 어렵다. 성불은 지속하는 것에 있다.」(신편어서 p.775)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기원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원하면 기원한 만큼 공덕에 감싸이며 행복의 궤도로 자기 자신을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지속해 가는 속에 비로소 생명 변혁인 성불(成佛)이 있습니다. 이 생명 변혁이 가장 큰 명익인 것입니다.불법(佛法)에서 말하는 벌(罰)은 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했을 때 받는 나쁜 과보(果報), 즉 손해나 불행을 말합니다. 불법은 우주와 생명의 근원의 법을 설하고 있으므로 불법의 법리에 위반하면 예외 없이 생명력이 쇠퇴하고 리듬이 흐트러져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법의 법리에 수순(隨順)해서 서로 받는 이득을 공덕이라고 한다. 생명력이 충실해지고 우주 본연의 리듬과 일치하면서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다음에 숙업(宿業)이란 숙세(宿世)의 업인(業人)을 말합니다. 즉 과거세에 만든 업의 축적에 의해 금세의 과보가 나타나는 인과(因果)의 이법(理法)이 불법에 설해져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우리의 행위(行爲)를 업(業)이라고 합니다. 업에는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이 있습니다. 몸으로 행동하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업으로 됩니다. 이 신구의 삼업은 행위 후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영향력을 생명 속에 각인(刻印)합니다. 진에 등의 번뇌(煩惱)에 의한 행위는 악업(惡業)을 각인하고 반대로 자비 등의 행위는 선업(善業)을 새깁니다.
이 선악의 업이 과거세에서 현세의 생명에 이어졌을 경우 그것을 숙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숙업에는 선의 숙업과 악의 숙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숙업이란 악의 숙업을 말합니다.
그런데 벌과 숙업의 관계를 말하면 벌은 악업의 과보입니다. 불법에 위배된 행위를 하면 악의 업인을 생명에 각인하게 됩니다. 그 악인(惡因)이 각종 연(緣)에 의해 악의 과보로 나타나면 삼악도(三惡道) 등 불행한 경계(境界)를 초래합니다. 즉 벌입니다.
벌은 악인이 생명에 각인된 후 즉시 나타날 때도 있으며 다음 태어날 때까지 잠재했다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 속에는 과거세부터의 업인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악업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것은 우주와 생명의 구극(究極)의 법인 묘법과 법화경의 행자를 비방한 죄업입니다.
그러나 어느 악의 숙업이라도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에 귀의해서 본존님을 신수(信受)하면 현세에 다 받아서 소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악업을 전환해서 미래를 위한 선업으로 해서 벌을 공덕으로 바꾸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참으로 생사(生死)를 두려워하고 열반(涅槃)을 원하며 신심(信心)을 면려하고 갈앙(渴仰)을 한다면 천멸무상(遷滅無常)은 어제의 꿈이고·보리(菩提)의 각오(覺悟)는 금일(今日)의 현실이로다.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면 멸(滅)하지 않는 죄(罪)가 있겠는가, 오지 않는 복(福)이 있겠는가. 진실(眞實)이고 심심(甚深)하니 이를 신수(信受)할지어다.부처도 또한 이와 같이 다보불(多寶佛)이라고 하는 부처는 이 경(經)을 만나지 않으실 때에는 입멸(入滅)하시고, 이 경(經)을 읽는 세상(世上)에는 출현(出現)하신다, 석가불(釋迦佛)·시방(十方)의 제불(諸佛)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러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덕(德)이 있는 경(經)이기에·이 경(經)을 갖는 사람을·어찌하여 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후지천안대보살(富士千眼大菩薩)이 버리시겠느뇨 라고·믿음직스러운 일이로다. 또한 이 경(經)을 적시(敵視)하는 나라는·아무리 정직(正直)히 기도(祈禱)해도·반드시 그 나라에 칠난(七難)이 일어나서 타국(他國)에게 패(敗)하여 망국(亡國)이 된다는 것은·대해(大海) 중(中)의 대선(大船)이 대풍(大風)을 만난것과 같고·대한발(大旱魃)이 초목(草木)을 고사(枯死)시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라.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보리(菩提)이니라. 소위(所謂)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상행(上行)·무변행(無邊行) 등(等)·보현(普賢)·문수(文殊)·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 대범천왕(大梵天王)·석제환인(釋提桓因)·일월(日月)·명성(明星)·북두(北斗)·칠성(七星)·이십팔수(二十八宿)·무량(無量)의 제성(諸星)·천중(天衆)·지류(地類)·용신(龍神)·팔부(八部)·인천(人天)·대회(大會)·염마법왕(閻魔法王)·상(上)은 비상(非想)의 구름 위로부터 하(下)는 나락(那落)의 불길 바닥까지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이 수제(首題)를 봉창(奉唱)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 모두 불리어서 여기에 모일 때 자신(自身)의 법성(法性)의 법보응(法報應)의 삼신(三身)이 함께 이끌려서 현출(顯出)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초신의 공덕이란 불도수행을 이제 막 시작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공덕을 말합니다. 초신자의 수행이 아직 얕아도 정법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 주어 초신자에게 묘법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초신의 공덕이라 해도 사람과 그 상황에 따라 다양합니다. 병을 이겨 내거나 고민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초신의 공덕입니다. 또 올바른 신앙의 결과로 지금보다 더 진취적이고 생활에 활력이 솟아 더 좋은 인생을 위해 나아가자는 자세 자체도 공덕입니다. 신심의 결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을 공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신의 공덕은 본존님의 위대한 공덕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대성인께서 『시조깅고전답서(四條金吾殿答書)』에 「받기는 쉽고 가지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불(成佛)은 가지는데 있으며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는 사람은 난(難)을 만난다고 심득(心得)해서 갖는 것이니라.」(신편어서 p.775)고 말씀하셨듯이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한 신행학의 실천을 관철하여 성불이라는 가장 존귀하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행복 경애를 확립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구극의 공덕입니다.우인(愚人) 가로되, 일본(日本)·육십여주(六十餘州)·사람이 다르고 법이 다를지라도 혹은 염불자(念佛者)·혹은 진언사(眞言師)·혹은 선(禪)·혹은 율(律)·참으로 한 사람도 방법(謗法)이 아닌 자는 없소이다. 그러나 남을 시비(是非)해서 무엇하리요. 오직 자기 심중(心中)에 깊이 신수(信受)해서 남의 잘못일랑 상관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오. 성인(聖人)이 타일러 가로되, 그대 말하는 바는 실로 그러하니라.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바 경문(經文)에는 혹은 불석신명(不惜身命)이라고도 혹은 영상신명(寧喪身命)이라고도 설(說)했는데 왜 그와 같이 설(說)했는가 하고 생각했더니 오직 남을 꺼리지 않고 경문(經文)대로 법리(法理)를 홍통(弘通)하면 방법(謗法)의 자(者)가 많은 세상에는 반드시 삼류(三類)의 적인(敵人)이 있어서 생명(生命)에도 미치리라고 쓰여 있느니라. 그 불법(佛法)의 잘못을 보면서 스스로도 책(責)하지 않고 국주(國主)에게도 호소하지 않으면 가르침에 위배되어 불제자(佛弟子)가 아니라고 설했느니라. 열반경제삼(涅槃經第三)에 가로되 「만약 선비구(善比丘)가 있어서 법(法)을 깨뜨리는 자(者)를 보고도 그냥 두고 가책(呵責)하고 구견(駈遣)하고 거처(擧處)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불법(佛法) 중(中)의 원(怨)이니라. 만약 능(能)히 구견(駈遣)하고 가책(呵責)하고 거처(擧處)한다면 이는 나의 제자(弟子)요, 참된 성문(聲聞)이니라」고. 이 문(文)의 의(意)는 부처의 정법(正法)을 넓히는 자(者)가 경교(經敎)의 의(義)를 잘못 설(說)함을 듣고 보면서도 자신이 책하지 않고 자신(自身)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국주(國主)에게 말씀드려서라도 이를 대치(對治) 아니하면 불법(佛法) 중(中)의 적(敵)이니라. 만약 경문(經文)과 여(如)히 남을 꺼리지 않고 자기도 책하고 국주(國主)에게도 호소하는 사람은 불제자(佛弟子)이며 참된 승(僧)이라고 설(說)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불법(佛法) 중(中) 원(怨)의 책(責)을 면(免)하려고·이렇게 제인(諸人)에게 미움을 받아도 명(命)을 석존(釋尊)과 법화경(法華經)에 바치고 자비(慈悲)를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주어 방법(謗法)을 책(責)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욕하고 눈을 부릅뜨더라. 그대 실로 후세(後世)를 두려워한다면 몸은 경(輕)히 여기고 법(法)을 중(重)히 여겨라. 이로써 장안대사(章安大師) 가로되 「차라리 신명(身命)을 잃을지라도 교(敎)를 숨기지 말라고 함은 몸은 경(輕)하고 법(法)은 중(重)하니 몸을 죽여서 법(法)을 넓히라」고. 이 문(文)의 의(意)는 신명(身命)을 멸(滅)할지라도 정법(正法)을 숨겨 두지 말지어다. 그 까닭은 몸은 경(輕)하고 법(法)은 중(重)하니 몸을 죽이더라도 법(法)을 넓히라는 뜻이니라. 슬프도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도리(道理)이므로 설사 장수(長壽)를 얻었을지라도 결국에는 무상(無常)을 피할 수 없느니라. 금세(今世)는 백년내외(百年內外)의 명(命)이라 생각하면 꿈 속의 꿈이로다. 비상(非想)의 팔만세(八萬歲)도 아직 무상(無常)을 면(免)치 못하며 도리(忉利)의 일천년(一千年)도 역시 퇴몰(退沒)의 바람에 부서지느니라. 하물며 인간(人間)·염부(閻浮)의 상사(常事)는 이슬보다도 위태롭고 파초(芭蕉)보다도 연약하며 포말(泡沫)보다도 허무하다. 수중(水中)에 비치는 달이 있는가, 없는가와 같고 초엽(草葉)에 붙은 이슬이 늦게 없어지는가, 먼저 없어지는가 하는 정도의 몸이니라. 만약 이 도리(道理)를 안다면 후세(後世)를 일대사(一大事)로 삼으시라. 환희불(歡喜佛)의 말세(末世)의 각덕비구(覺德比丘)가 정법(正法)을 넓힐 때에 무량(無量)의 파계(破戒)들이 이 행자(行者)를 미워하여 책(責)하므로 유덕국왕(有德國王)이 정법(正法)을 지키기 위해 방법(謗法)을 책(責)하고 드디어 명종(命終)해서 아축불(阿閦佛)의 나라에 태어나 그 부처의 제일(第一)의 제자(弟子)가 되었다. 대승(大乘)을 중(重)히 여겨 오백인(五百人)의 바라문(婆羅門)의 방법(謗法)을 훈계한 선예국왕(仙豫國王)은 불퇴위(不退位)에 올랐더라, 믿음직스럽도다, 정법(正法)의 승(僧)을 존중(尊重)하고 사악(邪惡)의 무리를 훈계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덕(德)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금세(今世)에 섭수(攝受)를 행(行)하는 사람은 방인(謗人)과 함께 악도(惡道)에 떨어짐은 의심할 바 없다. 남악대사(南岳大師)의 사안락행(四安樂行)에 가로되 「만약 보살(菩薩)이 있어서 악인(惡人)을 장호(將護)하고 치벌(治罰)하지 않는다면 내지(乃至) 그 사람은 명종(命終)해서 제악인(諸惡人)과 함께 지옥(地獄)에 떨어지리라」고. 이 문(文)의 의(意)는 만약 불법(佛法)을 행(行)하는 사람이 방법(謗法)의 악인(惡人)을 치벌(治罰)하지 않고 관념사유(觀念思惟)만을 전수(專修)하여 사정권실(邪正權實)을 가리지 않고 거짓으로 자비(慈悲)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은 여러 악인(惡人)과 함께 악도(惡道)에 떨어진다고 하는 글이니라. 지금 진언(眞言)·염불(念佛)·선(禪)·율(律)의 방인(謗人)을 훈계하지 않고 거짓으로 자비(慈悲)를 나타내는 사람은 이 글과 같이 되리라.
이에 우인(愚人)은 마음을 깊이 정(定)하여 솔직하게 가로되, 참으로 주군(主君)을 간(諫)하고 집안을 바르게 한다는 선현(先賢)의 가르침은 본문(本文)에 명백(明白)하나이다. 외전(外典)마저 이와 같으니 내전(內典)이 이에 상위(相違)하겠나이까. 악(惡)을 보고 훈계하지 않고 방법(謗法)을 알고 책하지 않으면 경문(經文)을 배반(背反)하고 조사(祖師)에 위배(違背)함이외다. 그 훈계(訓誡)는 특히 중(重)하니 지금부터 신심(信心)을 하겠소이다. 단(但) 차경(此經)을 수행(修行)하기란 어려우니 만약 그 최요(最要)가 있다면 증거(證據)를 듣고자 생각하나이다. 성인(聖人) 밝혀서 가로되, 지금 그대의 도의(道意)를 보건대 정중(鄭重)·은근(慇懃)하니라. 소위(所謂) 제불(諸佛)의 성체득도(誠諦得道)의 최요(最要)는 오직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니라. 단왕(檀王)이 보위(寶位)에서 퇴(退)하고 용녀(龍女)가 사신(蛇身)을 고침도 오직 이 오자(五字)의 소치(所致)이니라. 대저 생각하건대, 금경(今經)은 수지(受持)의 다소(多少)를 일게일구(一偈一句)라 말하고 수행(修行)의 시각(時刻)을 일념수희(一念隨喜)라고 정(定)했느니라. 대저 팔만법장(八萬法藏)의 광대(廣大)함도 일부팔권(一部八卷)의 많음도 오직 이 오자(五字)를 설(說)하기 위(爲)함이니라. 영산(靈山)의 운상(雲上)·추봉(鷲峯)의 안개 속에서 석존(釋尊)이 요(要)를 묶어 지용부촉(地涌付囑)을 하게 된 것도 법체(法體)는 뭔가 하면 오직 이 요법(要法)에 있느니라. 천태(天台) 묘락(妙樂)의 육천장(六千張)의 소(疏)가 옥(玉)을 이은 것도 도수행만(道邃行滿)의 수축(數軸)의 석(釋)이 금(金)을 나란히 함도 모두 이 의취(義趣)를 벗어나지 않느니라. 참으로 생사(生死)를 두려워하고 열반(涅槃)을 원하며 신심(信心)을 면려하고 갈앙(渴仰)을 한다면 천멸무상(遷滅無常)은 어제의 꿈이고·보리(菩提)의 각오(覺悟)는 금일(今日)의 현실이로다.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면 멸(滅)하지 않는 죄(罪)가 있겠는가, 오지 않는 복(福)이 있겠는가. 진실(眞實)이고 심심(甚深)하니 이를 신수(信受)할지어다.
우인(愚人)이 합장(合掌)하여 무릎을 끓고 이르되, 귀명(貴命)은 간(肝)에 물들고 교훈(敎訓)은 마음을 감동케 하였지만 그러나 상능겸하(上能兼下)의 도리(道理)이므로 광(廣)은 협(狹)을 묶고 다(多)는 소(少)를 겸(兼)함이라. 그런데 오자(五字)는 적고 문언(文言)은 많으며, 수제(首題)는 좁고 팔축(八軸)은 넓은데 어찌 공덕(功德)이 제등(齊等)하겠느뇨. 성인(聖人)이 가로되, 그대는 어리석도다, 사소취다(捨少取多)의 집착(執着)은 수미(須彌)보다 높고 경협중광(輕狹重廣)의 정(情)은 명해(溟海)보다 깊구나. 지금의 문(文)의 초후(初後)는 반드시 많음이 거룩하고 적음이 천(賤)함이 아님은 앞에 밝힌 것과 같으니라. 여기서 또 소(小)가 대(大)를 겸(兼)하고 一이 다(多)에 뛰어남을 이야기하리라. 저 이구류수(尼拘類樹)의 열매는 개자(芥子)의 삼분지일(三分之一)의 길이지만 오백량(五百輛)의 수레를 숨기는 덕(德)이 있으니 이는 소(小)가 대(大)를 포함함이 아니겠느뇨.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는 하나지만 만보(萬寶)를 내리게 하여 결(缺)함이 없으니 역시 소(少)가 다(多)를 겸(兼)함이 아니겠느뇨. 세간(世間)의 속담에도 一은 만(萬)의 어머니라고 했는데 이러한 도리(道理)를 모르느뇨. 결국(結局) 실상(實相)의 이(理)의 배계(背契)를 논(論)하시라. 굳이 다소(多少)에 집착(執着)하는 일 없을지어다. 그대가 극히 어리석으니 지금 하나의 비유를 들겠노라.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보리(菩提)이니라. 소위(所謂)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상행(上行)·무변행(無邊行) 등(等)·보현(普賢)·문수(文殊)·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 대범천왕(大梵天王)·석제환인(釋提桓因)·일월(日月)·명성(明星)·북두(北斗)·칠성(七星)·이십팔수(二十八宿)·무량(無量)의 제성(諸星)·천중(天衆)·지류(地類)·용신(龍神)·팔부(八部)·인천(人天)·대회(大會)·염마법왕(閻魔法王)·상(上)은 비상(非想)의 구름 위로부터 하(下)는 나락(那落)의 불길 바닥까지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이 수제(首題)를 봉창(奉唱)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 모두 불리어서 여기에 모일 때 자신(自身)의 법성(法性)의 법보응(法報應)의 삼신(三身)이 함께 이끌려서 현출(顯出)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 예(例)컨대 새장 속에 있는 새가 울 때, 하늘을 나는 많은 새가 동시(同時)에 모이는데 이를 보고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이에 우인(愚人)이 이르되, 수제(首題)의 공덕(功德)·묘법(妙法)의 의취(義趣)는 지금 듣고 보니 소상(昭詳)하외다. 다만 이 취지(趣旨)는 틀림없이 경문(經文)에 이것이 실렸느뇨, 어떠하뇨. 성인(聖人)이 가로되, 그 도리(道理)가 밝혀진 이상은 경문(經文)을 찾을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청(請)에 따라 이를 밝히리라. 법화경(法華經) 제팔(第八)·다라니품(陀羅尼品)에 가로되 「그대들 단지 능(能)히 법화(法華)의 이름을 수지(受持)하는 자(者)를 옹호(擁護)하는 복(福)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 문(文)의 의(意)는 부처가 귀자모신(鬼子母神)·십나찰녀(十羅刹女)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겠다고 맹세함을 칭찬하여 그대들이 법화(法華)의 수제(首題)를 갖는 사람을 수호(守護)하겠다고 맹세하는 그 공덕(功德)은 삼세요달(三世了達)의 부처의 지혜(智慧)도 역시 미치기 어렵다고 설(說)하셨느니라. 불지(佛智)가 미치지 않는 일이 무엇이 있으리요마는 법화(法華)의 제명(題名)을 수지(受持)하는 공덕(功德)만은 이를 모른다고 말했느니라. 법화일부(法華一部)의 공덕(功德)은 오직 묘법(妙法) 등(等)의 오자(五字)속에 들어 있느니라. 일부팔권(一部八卷)·문문(文文)마다 이십팔품(二十八品)이 생기(生起)는 다를지라도 수제(首題)의 오자(五字)는 동등(同等)하니라. 비유컨대 일본(日本)의 이자(二字) 중(中)에 육십여주(六十餘州)·섬 둘 들어가지 않는 지방(地方)이 있겠는가, 포함되지 않는 군(郡)이 있으리요. 비조(飛鳥)라고 하면 하늘을 나는 것이라 알고 주수(走獸)라 하면 땅 위를 달리는 것으로 아는데, 일체(一切) 이름이 중요함은 대체로 이와 같으니라. 천태(天台)는 명전자성(名詮自性)·구전차별(句詮差別)이라고도 명자대강(名者大綱)이라고도 판정(判定)함은 이 뜻이니라. 또 명(名)은 사물(事物)을 불러들이는 덕(德)이 있으며 사물(事物)은 명(名)에 응(應)하는 작용(作用)이 있으니 법화제명(法華題名)의 공덕(功德)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우인(愚人)이 이르되, 성인(聖人)의 말과 같다면 실(實)로 수제(首題)의 공(功)은 막대(莫大)하외다. 다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의 부동(不同)이 있나이다. 나는 궁전(弓箭)을 휴대하고 병장(兵杖)을 주(主)로 하여 아직 불법(佛法)의 진미(眞味)를 모르는데 만약 그렇다면 얻는 바의 공덕(功德)이 어찌해야 깊겠나이까. 성인(聖人)이 가로되, 원돈(圓頓)의 교리(敎理)는 초후(初後)가 전(全)혀 불이(不二)로서 초위(初位)에 후위(後位)의 덕(德)이 있으며, 일행(一行)은 일체행(一切行)으로서 공덕(功德)이 갖춰지지 않음은 없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공덕(功德)을 알고 심지 않는다면 상(上)은 등각(等覺)에서 하(下)는 명자(名字)에 이르기까지 득익(得益)은 전혀 있을 수 없으니 금경(今經)은 유불여불(唯佛與佛)이라 설하기 때문이니라. 비유품(譬喩品)에 가로되 「그대, 사리불(舍利弗)마저 차경(此經)에서는 신(信)을 가지고 들어감을 득(得)했느니라. 하물며 타(他)의 성문(聲聞)에 있어서랴」 문(文)의 심(心)은 대지(大智)·사리불(舍利弗)도 법화경(法華經)에는 신(信)을 가지고 들어갔으며 그의 지분(智分)의 힘은 아니었으며 하물며 자여(自餘)의 성문(聲聞)에서랴 라고 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법화경(法華經)에 와서 믿었으므로 영불성불(永不成佛)의 이름을 지우고 화광여래(華光如來)가 되었는데, 영아(嬰兒)에게 젖을 먹이면 그 맛을 모를지라도 자연(自然)히 그 몸이 성장(成長)하고, 의사(醫師)가 병자(病者)에게 약(藥)을 주는데 병자(病者)가 약(藥)의 근원(根源)을 모를지라도 복용(服用)하면 자연(自然)히 병(病)이 치유(治愈)되나 만약 약(藥)의 근원(根源)을 모른다고 해서 의사(醫師)가 주는 약(藥)을 복용(服用)치 않으면 그 병(病)이 낫겠느뇨. 약(藥)을 알든 모르든 복용(服用)하면 병(病)이 치유(治愈)됨과 같으니라. 이미 부처를 양의(良醫)라 호칭하고 법(法)을 양약(良藥)으로 비유하며, 중생(衆生)을 병자(病者)에 비유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일대(如來一代)의 교법(敎法)을 도사화합(擣蓰和合)해서 묘법일립(妙法一粒)의 양약(良藥)으로 환제(丸製)했느니라. 어찌 알든 모르든 복용(服用)하는 자(者)는 번뇌(煩惱)의 병(病)이 낫지 않겠느뇨. 병자(病者)는 약(藥)도 모르고 병(病)도 분별(分別)하지 못할지라도 복용(服用)하면 반드시 낫느니라. 행자(行者)도 또한 그러하니 법리(法理)도 모르고 번뇌(煩惱)도 모를지라도 오직 믿는다면 견사(見思)·진사(塵沙)·무명(無明)의 삼혹(三惑)의 병(病)을 동시(同時)에 끊어버리고 실보적광(實報寂光)의 전각(殿閣)에 올라가 본유삼신(本有三身)의 살갗을 연마(硏磨)함은 의심할 바 없느니라. 그러기에 전교대사(傳敎大師) 가로되 「능화(能化) 소화(所化)가 함께 역겁(歷劫) 없이 묘법경(妙法經)의 힘으로 즉신성불(卽身成佛)함이라」고, 법화경(法華經)의 법리(法理)를 가르치는 사장(師匠)도 또한 배우는 제자(弟子)도 오래지 않아 법화경(法華經)의 힘에 의하여 함께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경문(經文)이니라. 천태대사(天台大師)도 법화경(法華經)에 대해 현의(玄義)·문구(文句)·지관(止觀)의 삼십권(三十卷)의 석(釋)을 만드셨느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는 또한 석첨(釋籤)·소기(疏記)·보행(輔行)의 삼십권(三十卷)의 말문(末文)을 거듭해서 주석(注釋)하였는데 천태육십권(天台六十卷)이란 이것이로다. 현의(玄義)에는 명체종용교(名體宗用敎)의 오중현(五重玄)을 건립(建立)해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의 공능(功能)을 판석(判釋)했느니라. 오중현(五重玄)을 석(釋)하는 중(中)의 종(宗)의 석(釋)에 가로되 「강유(綱維)를 당기는데 그물코로서 움직이지 않음이 없고, 옷의 일각(一角)을 끌어당기는데 누(縷)로서 오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의(意)는 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신앙(信仰)하는 일행(一行)에 공덕(功德)으로서 오지 않음이 없고 선근(善根)으로서 움직이지 않는 일이 없다. 비유컨대, 망목(網目)은 무량(無量)일지라도 하나의 대강(大綱)을 당기면 움직이지 않는 그물코도 없고 옷의 실낱이 많을지라도 일각(一角)을 당기면 실낱으로서 오직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는 의(義)이니라. 그런데 문구(文句)에는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 작례이거(作禮而去)까지 문문(文文)·구구(句句)에 인연(因緣)·약교(約敎)·본적(本迹)·관심(觀心)의 사종(四種)의 석(釋)을 만들었느니라. 다음에 지관(止觀)에는 묘해(妙解)의 위에 세우는 바의 관불사의경(觀不思議境)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는 본각(本覺)의 입행(立行)이며·본구(本具)의 이심(理心)이니라, 지금 여기에 상설(詳說)하지 않겠노라, 기쁘도다, 생(生)을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받았다 할지라도 일승(一乘)의 진문(眞文)은 견문(見聞)하게 되었느니라. 희련항사(熙連恒沙)의 선근(善根)을 쌓은 자(者)가 이 경(境)을 만나서 신심(信心)을 일으킨다고 설해졌느니라. 그대가 지금 일념수희(一念隨喜)의 신(信)을 다하니 함개상응(凾蓋相應) 감응도교(感應道交)는 의심할 바 없느니라.
우인(愚人)이 머리를 숙이고 합장(合掌)하여 이르되, 나는 지금부터는 일실(一實)의 경왕(經王)을 수지(受持)하고 삼계(三界)의 독존(獨尊)을 본사(本師)로 삼아 금신(今身)에서 불신(佛身)에 이르기까지 이 신심(信心)을 결코 퇴전(退轉)하지 않으리라. 설사 오역(五逆)의 구름은 두터울지라도 비노니 제바달다(提婆達多)의 성불(成佛)을 이어가고 십악(十惡)의 파도는 거칠어도 원(願)컨대 왕자(王子)·복강(覆講)의 결연(結緣)과 같이 되리라. 성인(聖人) 가로되, 사람의 마음은 물이 그릇에 따름과 같고 물건의 성질(性質)은 달이 물결따라 움직임과 흡사하니라. 고(故)로 그대는 당장은 믿는다 해도 후일(後日)은 반드시 번드치리니 마(魔)가 오고 귀(鬼)가 올지라도 소란(騷亂)함이 없을지니라. 무릇 천마(天魔)는 불법(佛法)을 미워하고 외도(外道)는 내도(內道)를 싫어함이라. 그러므로 멧돼지가 금산(金山)을 비비고 중류(衆流)가 바다에 들어가며, 장작이 불을 성(盛)하게 하고 바람이 구라(求羅)를 증대(增大)시키듯이 하면 어찌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느뇨.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 가마쿠라에서 44세에 술작 495~500쪽물어 가로되 경문(經文)에 「사십여년(四十餘年)은 아직 진실(眞實)을 나타내지 않았음」이라 말하고, 또 「무량무변불가사의아승기겁(無量無邊不可思議阿僧祇劫)을 지날지라도 끝내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成就)함을 득(得)하지 못함」이라고 설(說)했는데 이 문(文)은 어떠한 것을 말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이 문(文)의 심(心)은 석가불(釋迦佛)·일기(一期) 오십년(五十年)의 설법중(說法中)에 처음의 화엄경(華嚴經)에도 진실(眞實)을 설하지 아니했고 중(中)의 방등(方等)·반야(般若)에도 진실(眞實)을 설하지 않았느니라. 이런 고(故)로 선종(禪宗)·염불(念佛)·계(戒) 등(等)을 행(行)하는 사람은 무량무변겁(無量無邊劫)을 지나도 부처가 되지 않는다는 문(文)이니라. 부처가 사십이년(四十二年)의 세월(歲月)을 거친 후(後)·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신 문(文)에는 「세존(世尊)의 법(法)은 오래 가서 후(後)에 반드시 응당(應當) 진실(眞實)을 설(說)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리불(舍利弗) 등(等)의 千二百의 나한(羅漢)·만이천(萬二千)의 성문(聲聞)·미륵(彌勒) 등(等)의 팔만인(八萬人)의 보살(菩薩)·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만억(萬億)의 천인(天人)·아사세왕(阿闍世王) 등(等)의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국왕(國王)이 부처의 말씀을 영해(領解)하는 문(文)에는 「우리들은 옛부터 이제까지 자주 세존(世尊)의 설(說)을 삼가 들었으나 아직 일찍이 이와 같은 심묘(深妙)한 상법(上法)을 듣지 않았음이라」고 하여 우리들은 부처로부터 떨어지지 않고서 사십이년(四十二年)·많은 설법(說法)을 청문(聽聞)하였지만 아직 이와 같은 존귀(尊貴)한 법화경(法華經)을 듣지 못하였다고 한 이들의 명문(明文)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세간(世間)의 사람은 법화경(法華經)과 여경(餘經)과 동등(同等)하다 생각하고 더군다나 기(機)에 맞지 않으므로 어두운 밤의 비단·거년(去年)의 달력 따위로 말하고, 마침 수지(受持)한 사람을 보고는 멸시하고 경시(輕視)하며 미워하고 질투하며 입을 비쭉거리기도 함은 이는 오로지 방법(謗法)이 되니 어찌 왕생성불(往生成佛)이 있겠느뇨. 반드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자(者)라고 쓰여 있느니라.
물어 가로되, 대개 불법(佛法)을 깊이 알고 불의(佛意)에 맞는 사람을 세간(世間)에서는 이를 존중(尊重)하고 모두 이를 귀(貴)히 여기는데 당세(當世)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 사람들을 세상은 온통 미워하고 질투하며 경시(輕視)하고 천시(賤視)하며 혹(或)은 거처(居處)를 추방(追放)하고, 혹(或)은 유죄(流罪)하며 공양(供養)까지는 생각치도 못하고 원적(怨敵)과 같이 미움받음은 결국 마음가짐이 나쁘고 불의(佛意)에도 맞지 않으며·그릇되게 법(法)을 알고 있음이니라. 경문(經文)에는 어떻게 설(說)해 있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경문(經文)과 같다면 말법(末法)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남에게 미움받을수록 수지(受持)함을 진실(眞實)한 대승(大乘)의 승(僧)이라 하였더라. 또한 경(經)을 넓혀서 남을 이익(利益)케 하는 법사(法師)이니라. 남이 좋다고 생각해 주고 사람의 마음에 따름으로써 존귀(尊貴)하다고 여겨지는 승(僧)을 법화경(法華經)의 적(敵), 세간(世間)의 악지식(惡知識)이라고 생각할지어다. 이 사람을 경문(經文)에는 엽사(獵師)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슴을 노리며, 고양이가 발톱을 숨기고 쥐를 노리듯이 하여 재가(在家)의 속남(俗男)·속녀(俗女)인 단나(檀那)에게 아첨하고·거짓을 꾸미며 광혹(誑惑)하리라고 설(說)하셨느니라. 게다가 권지품(勸持品)에는 법화경(法華經)의 적인(敵人) 삼류(三類)를 열거(列擧)하셨는데, 一에는 재가(在家)의 속남(俗男)·속녀(俗女)이니, 이 속남(俗男)·속녀(俗女)는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미워하고 욕하며, 치고 참살(斬殺)하며 거처(居處)를 쫓아내고 혹(或)은 상(上)에게 참주(讒奏)해서 원류(遠流)시키고, 비정(非情)하게 미워하는 자(者)이니라. 二에는 출가(出家)의 사람이니 이 사람은 만심(慢心)이 높아서 내심(內心)에는 알지도 못하면서도 지자(智者)처럼 행세하여 세간(世間)의 사람이 학장(學匠)이라 여기게 하고,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보고서는 원질(怨嫉)하고 경시(輕視)하며, 천시(賤視)하고 개나 야간(野干)보다도 나쁜 듯이 남에게 말해 혐오케 하고, 법화경(法華經)을 자기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者)이니라. 三에는 아련야(阿練若)의 승(僧)이니, 이 승(僧)은 극히 귀(貴)한 상(相)을 모습에 나타내고 삼의(三衣)·일발(一鉢)을 몸에 지니고, 산림(山林)의 한적(閑寂)한 곳에 틀어박혀서 재세(在世)의 나한(羅漢)과 같이 제인(諸人)에게 공경받고 부처와 같이 만인(萬人)에게 숭앙(崇仰)받으며, 법화경(法華經)을 설(說)과 여(如)히 읽고 수지(受持)하는 승(僧)을 보고는 미워하고 질투하여 가로되, 대우치(大愚癡)의 자(者)·대사견(大邪見)의 자(者)이며, 전혀 자비(慈悲) 없는 자(者)·외도(外道)의 법(法)을 설(說)한다 따위로 말하리라. 상일인(上一人)부터 받들어 신(信)을 취(取)하시니 그 이하만인(已下萬人)도 부처와 같이 공양(供養)을 하게 되리라. 법화경(法華經)을 설(說)과 여(如)히 읽고 수지(受持)한 사람은 반드시 이 삼류(三類)의 적인(敵人)에게 적시(敵視)당한다고 부처는 설(說)하셨느니라.
물어 가로되, 부처의 명호(名號)를 가지듯이 법화경(法華經)의 명호(名號)를 유다르게 가져야 할 증거(證據)가 있느뇨 없느뇨. 답(答)하여 왈(曰), 경(經)에 가로되 「부처가 여러 나찰녀(羅刹女)에게 고(告)하시기를 좋도다 좋도다, 그대들 다만 능(能)히 법화(法華)의 이름을 수지(受持)하는 자(者)를 옹호(擁護)하는 복(福)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운운(云云). 이 문(文)의 의(意)는 십나찰(十羅刹)이 법화(法華)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수호(守護)하리라고 서언(誓言)을 세움을 대각세존(大覺世尊)이 칭찬하여 가로되, 좋도다 좋도다, 그대들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수지(受持)하는 사람을 수호(守護)하는 공덕(功德)은 얼마인지 헤아리기 어렵고·뛰어난 공덕(功德)이며 신묘(神妙)하니라고 말씀하신 문(文)이로다. 이는 우리들 중생(衆生)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를지어다 라는 문(文)이니라.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불성(佛性)과 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의 불성(佛性)과 문수(文殊)·미륵(彌勒) 등(等)의 불성(佛性)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묘법(妙法)과 일체불이(一體不二)인 이(理)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일체(一切)의 불(佛)·일체(一切)의 법(法)·일체(一切)의 보살(菩薩)·일체(一切)의 성문(聲聞)·일체(一切)의 범왕(梵王)·제석(帝釋)·염마(閻魔)·법왕(法王)·일월(日月)·중성(衆星)·천신(天神)·지신(地神)·내지(乃至)·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천(人天)·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불성(佛性)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라.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
법화초심성불초(法華初心成佛抄) 미노부에서 56세에 술작 555 ~ 557쪽제바달다(提婆達多)는 사자협왕(師子頰王)에게는 손자(孫子)요 석가여래(釋迦如來)에게는 백부(伯夫)였던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고, 아난존자(阿難尊者)의 사형(舍兄)이며 어머니는 선문장자(善聞長者)의 딸이니라.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일문(一門)이니 남염부제(南閻浮提)에서는 천(賤)하지 않은 사람이로다. 재가(在家)로 있을 때에는 부부(夫婦)가 되려고 한 야수다라녀(耶輸多羅女)를 실달태자(悉達太子)에게 빼앗기고 숙세(宿世)의 원수라고 생각했었는데, 출가(出家)한 후(後)에 인천대회(人天大會)가 모였을 때·부처로부터 너는 치인(癡人)이라·남의 침을 먹는 자(者)라고 꾸지람을 들은데다가·명문이양(名聞利養)이 깊었던 사람이었기에 부처가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것을 질투해서·자신(自身)은 오법(五法)을 행(行)하여 부처보다 존귀(尊貴)한 듯이 보이려고·쇠를 녹여서 천복륜(千輻輪)을 달고·반딧불을 모아서 백호(白毫)로 하고·육만보장(六萬寶藏)·팔만보장(八萬寶藏)을 다 알고 있으며, 상두산(象頭山)에 계장(戒場)을 세워 많은 불제자(佛弟子)를 꾀어 빼앗아갔다. 손톱에 독(毒)을 발라 부처의 발에다 칠하려고 하였으며·연화비구니(蓮華比丘尼)를 때려 죽이고·큰 돌을 던져서 부처의 발가락을 다치시게 하였다. 빠짐없이 삼역(三逆)을 범하고 결국(結局)은 오천축(五天竺)의 악인(惡人)을 모아서 부처와 아울러 제자(弟子) 단나(檀那) 등(等)에게 적대(敵對)해 왔는데, 빈바사라왕(頻婆沙羅王)은 부처의 제일(第一)의 단나(檀那)였다. 일일(一日)에 오백량(五百輛)의 수레를 보내서 나날이 부처와 제자(弟子)를 공양(供養)해 드렸느니라. 제바(提婆)는 시기하는 마음이 깊어서 아사세태자(阿闍世太子)를 꾀어 마침내 부왕(父王)을 일척(一尺)의 못 일곱개를 박아 사망(死亡)하게 하였다. 마침내 왕사성(王舍城)의 북문(北門)의 대지(大地)가 갈라져서 아비대성(阿鼻大城)에 떨어졌느니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사람은 한 사람도 이를 보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니 대지미진겁(大地微塵劫)을 지날지라도 무간대성(無間大城)을 나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법화경(法華經)에서 천왕여래(天王如來)가 되신 일이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존귀(尊貴)하니라.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성불(成佛)하신다면 꾀임에 빠졌던 무량(無量)의 악인(惡人)도 일업소감(一業所感)이므로 모두 무간지옥(無間地獄)의 고(苦)를 벗어나리라. 이는 오로지 법화경(法華經)의 은덕(恩德)이로다. 그러니 제바달다(提婆達多)와 그의 소종(所從)인 무량(無量)의 권속(眷屬)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실택(室宅)에 머물러 있으리니 마음 든든하니라.
모든 대지미진(大地微塵)과 같은 제보살(諸菩薩)은 등각(等覺)의 위(位)까지·올라가서 원품(元品)의 무명(無明)만을 가지고 있었으나·석가여래(釋迦如來)를 만나 뵈옵고 원품(元品)의 대석(大石)을 파(破)하려고 생각하였는데 교주석존(敎主釋尊)·사십여년간(四十餘年間)은 「인분가설과분불가설(因分可說果分不可說)」이라 하여 묘각(妙覺)의 공덕(功德)을 설(說)하여 나타내시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묘각(妙覺)의 위(位)에 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본의(本意) 아닌 일이로다. 그런데 영산(靈山) 팔년간(八年間)에 「유일불승명위과분(唯一佛乘名爲果分)」이라고 설(說)해 나타내시니·모든 보살(菩薩)이 모두 묘각(妙覺)의 위(位)에 올라 석가여래(釋迦如來)와 오달(悟達)이 동등(同等)하여·수미산정(須彌山頂)에 올라가서 사방(四方)을 보는 것과 같고 장야(長夜)에 일륜(日輪)이 뜬 것과 같이 밝아지셨으니 부처의 분부(吩咐)가 없더라도 법화경(法華經)을 홍통(弘通)하지 않으리오. 또한 행자(行者)를 대신(代身)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리라. 그래서 「아불애신명(我不愛身命) 단석무상도(但惜無上道)·불석신명(不惜身命) 당광설차경(當廣說此經)」 등(等)이라고 서언(誓言)하셨느니라.
그 위에 자부(慈父)인 석가불(釋迦佛)·비모(悲母)인 다보불(多寶佛)·자비(慈悲)의 부모(父母)들과 같이 조증(助證)하는 시방(十方)의 제불(諸佛)께서 한자리에 계시니 달과 달을 모은 것과 같고·해와 해를 나란히 한 것과 같이·되셨을 때 「모든 대중(大衆)에게 고(告)하노라, 나의 멸도(滅度)의 후(後) 누가 능(能)히 이 경(經)을 호지(護持)하고 독송(讀誦)할 것이뇨, 지금 불전(佛前)에서 스스로 서언(誓言)을 말하라」고 세번이나 간(諫)하시니 팔방(八方)·사백만억나유타(四百萬億那由佗)의 국토(國土)에 충만(充滿)하셨던 제대보살(諸大菩薩)이 몸을 굽히고 저두합장(低頭合掌)하고 함께 동시(同時)에 소리를 내어 「세존(世尊)의 불칙(佛勅)과 여(如)히 응당(應當) 빠짐없이 봉행(奉行)하겠나이다」라고 세번이나 음성(音聲)을 아끼지 않고 말하였으니 어찌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대신(代身)하지 않으시리오. 범어기(范於期)라고 하는 사람은 형가(荊軻)에게 목을 주었고 계찰(季札)이라는 사람은 서군(徐君)의 묘(墓)에다 칼을 걸어 놓았음은 약속(約束)을 어기지 않기 위함이라. 이들은 진단(震旦)·변토(邊土)의 오랑캐와도 같은 자(者)인데도 벗과의 약속(約束)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도 버리고 자신(自身)보다 소중(所重)히 여기는 칼을 묘(墓)에 걸어 놓았느니라. 하물며 제대보살(諸大菩薩)은 본래(本來)부터 대비대수고(大悲代受苦)의 서원(誓願)이 깊으니·부처의 간(諫)하심이 없을지라도 어찌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버리실 것이뇨. 그 위에 자신(自身)이 성불(成佛)한 경(經)인데다가 부처께서 은근(慇懃)히 간(諫)하셨으므로·불전(佛前)의 서언(誓言)은 정중(鄭重)한지라, 행자(行者)를 도우실 것은 의심(疑心)이 없느니라.
부처는 인천(人天)의 주(主)이시고·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부모(父母)이며·또한 개도(開導)의 스승이로다. 부모(父母)라도 천(賤)한 부모(父母)는 주군(主君)의 의(義)를 겸(兼)하지 못하고, 주군(主君)이라도 부모(父母)가 아니므로 두려운 면(面)도 있으며, 부모(父母)·주군(主君)이라도 사장(師匠)이 될 수는 없느니라·모든 부처는 또 세존(世尊)이시니 주군(主君)이시기는 하지만·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오시지 않았으니 사장(師匠)이 아니로다·또한 「기중중생실시오자(其中衆生悉是吾子)」라고도 밝히시지 않았는데·석가불(釋迦佛) 한 분만이·주사친(主師親)의 삼의(三義)를 겸(兼)하셨느니라. 그러하지만 사십여년간(四十餘年間)은 제바달다(提婆達多)를 꾸짖고 모든 성문(聲聞)을 헐뜯으시며 보살(菩薩)의 과분(果分)의 법문(法門)을 아끼시니, 부처이지만 때로는 천마(天魔)·파순(破旬)이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남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는 생각하였느니라. 이러한 마음은 사십여년(四十餘年)부터 법화경(法華經)이 시작(始作)될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영산팔년간(靈山八年間)에 보탑(寶塔)이 허공(虛空)에 나타나고 이불(二佛)은 일월(日月)과 같이 나란히 하고·제불(諸佛)은 대지(大地)에 열좌(列座)하여 대산(大山)이 모인 것과 같고, 지용천계(地涌千界)의 보살(菩薩)은 허공(虛空)에 별과 같이 나란히 줄지으시어 제불(諸佛)의 과분(果分)의 공덕(功德)을 말씀하시니·보장(寶藏)을 다 쏟아 빈인(貧人)에게 주는 것과 같고·곤륜산(崑崙山)이 무너진 것과 흡사하였다. 모든 사람은 이 옥(玉)만을 줍는 것과 같이 이 팔년(八年) 동안·진귀(珍貴)한 일이 심수(心髓)에까지 깊이 통(通)하였으므로·모든 보살(菩薩)은 신명(身命)도 아끼지 않고 말도 아낌 없이 맹서를 하였는데·촉루품(屬累品)에서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는 보탑(寶塔)에서 나오시어 비(扉)를 닫으시니 제불(諸佛)은 각기(各其) 제나라로 돌아가시고, 모든 보살(菩薩)들도 제불(諸佛)을 따라서 돌아가셨느니라.
점차로 마음이 쓸쓸하여졌을 때 「각후삼월당반열반(卻後三月當般涅槃)」이라고 하시니 마음이 허전하고 귀를 놀라게 하였으므로 제보살(諸菩薩) 이승(二乘) 인천(人天) 등(等)은 모두 법화경(法華經)을 청문(聽聞)하고 부처의 은덕(恩德)이 심간(心肝)에 새겨져서, 법화경(法華經)을 위(爲)하여 신명(身命)마저도 던져서 부처님께 보여드리려고 생각하였는데 부처의 말씀과 같이 만일 열반(涅槃)하신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울까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던 차에 부처님의 성수(聖壽)·만팔십(滿八十)이 되신 이월(二月) 십오일(十五日)의 인묘(寅卯)의 시(時)에 동천축(東天竺)·사위국(舍衛國)·구시나성(俱尸那城)·발제하변(跋提河邊)에서 부처님이 입멸(入滅)하신다는 음성(音聲)이 상(上)에는 유정(有頂)·횡(橫)으로는 삼천대천계(三千大千界)까지 울린 것이야말로 눈이 캄캄하고 마음도 스러져 버림이라. 오천축(五天竺)·십육(十六)의 대국(大國)·오백(五百)의 중국(中國)·십천(十千)의 소국(小國)·무량(無量)의 속산국(粟散國) 등(等)의 중생(衆生)은 한 사람도 의식(衣食)을 갖추지 못하고 상하(上下)를 가리지 않고, 우마(牛馬)·낭구(狼狗)·주취(鵰鷲)·문맹(蟁蝱) 등(等)의 오십이류(五十二類)의 일류(一類)의 수(數)·대지미진(大地微塵)도 다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오십이류(五十二類)에 있어서랴. 이 유(類)가 모두 화향의식(華香衣食)을 갖추어 최후(最後)의 공양(供養)으로 하였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보배(寶貝)의 교량(橋梁)이 무너지려고 한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눈이 빠지려 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부모(父母)·주군(主君)·사장(師匠)이 돌아가시려 한다는 등(等)의 말이 울려 퍼지니 몸에 소름이 끼칠 뿐만 아니라·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머리를 두드리고 가슴을 누르며 소리도 아끼지 않고 외쳤으므로·피눈물·피땀이 구시나성(俱尸那城)에 큰 비 보다도 심하게 내리고·대하(大河)보다도 많이 흘렀느니라. 이는 오로지 법화경(法華經)에서 성불(成佛)하였으므로 부처의 은혜(恩惠)를 갚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느니라.
이와 같이 한탄하는 자리에서도 법화경(法華經)의 적(敵)은 혀를·잘라야 한다고·자리를 같이 하지 말라고 외치셨느니라. 가섭동자보살(迦葉童子菩薩)은 법화경(法華經)의 적(敵)의 나라에는 서리와 우박이 되어 쏟아지리라고 맹서하시었다. 그 때 부처는 누우신 자리로부터 일어나 기뻐하시며 선재(善哉) 선재(善哉)라고 찬탄(讚嘆)하시었다. 제보살(諸菩薩)은 부처의 뜻을 헤아려서 법화경(法華經)의 적(敵)을 타파(打破)하겠다고 하면·잠시(暫時)라도 더 살아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일이 맹서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제보살(諸菩薩)·제천인(諸天人) 등(等)은 법화경(法華經)의 적(敵)이여 출래(出來)하여라, 불전(佛前)에서의 맹서를 다하여 석가존(釋迦尊)과 아울러 다보불(多寶佛)·제불(諸佛)·여래(如來)에게도 실(實)로 불전(佛前)에서 맹서하였듯이 법화경(法華經)을 위하여서는 이름도 신명(身命)도 아끼지 않았었다고 인정(認定)받으시려고 생각하셨으리라.
어찌 기원(祈願)의 성취(成就)가 늦으리요. 대지(大地)를 가리켜서 빗나갈지라도 허공(虛空)을 동여매는 자(者)는 있을지라도·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없는 일은 있을 지라도, 해는 서(西)쪽에서 돋을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모든 보살(菩薩)·인천(人天)·팔부(八部) 등(等)·이성(二聖)·이천(二天)·십나찰(十羅刹) 등(等)이 천(千)에 하나라도 와서 수호(守護)하시지 않는 일이 있다면 위로는 석가제불(釋迦諸佛)을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구계(九界)를 속이는 죄가 되리라. 행자(行者)는 확실히 부실(不實)할지라도 지혜(智慧)는 어리석을지라도 몸은 부정(不淨)할지라도, 계덕(戒德)은 갖추지 않았을지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수호(守護)하시리라. 주머니가 더럽다고 하여 금(金)을 버리지 말지니라. 이란(伊蘭)을 미워하면 전단(栴檀)은 있을 수 없느니라. 계곡(溪谷)의 연못을 부정(不淨)하다고 싫어 한다면 연(蓮)꽃은 취(取)하지 못할 것이며 행자(行者)를 퇴박 하신다면 서원(誓願)을 깨뜨리심이라. 정상(正像)이 이미 지나 버렸으니 지계(持戒)는 시중(市中)의 호랑이와 같고 지자(智者)는 인각(麟角)보다도 희귀(稀貴)하리라. 달이 뜨기 전(前)에는 등(燈)불을 의지할 것이며 보주(寶珠)가 없는 곳에는 금은(金銀)도 보배(寶貝)로다. 백오(白烏)의 은(恩)을 흑오(黑烏)에게 갚고 성승(聖僧)의 은(恩)을 범승(凡僧)에게 갚을지니라. 속히 속히 이생(利生)을 주십사 하고 강성(强盛)히 기원(祈願)한다면 어찌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으리요.
물어 가로되, 위에 써놓으신 도리(道理)·문증(文證)을 배견(拜見)하니 진실로 일월(日月)이 천(天)에 계시고 대지(大地)에 초목(草木)이 생장(生長)한다면, 주야(晝夜)가 국토(國土)에 있고, 대지(大地)가 뒤집히지 않으며 대해(大海)의 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있다면,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의 현세(現世)의 기원(祈願)과 후생선처(後生善處)는 의심할 바 없느니라.
그러나 이 이십여년간(二十餘年間)의 천태(天台)·진언(眞言) 등(等)의 명장(名匠)이 많이 대사(大事)의 기도(祈禱)를 하였으나 뚜렷하고 훌륭한 기도(祈禱)라고는 보이지 않으며, 외전(外典)의 자(者)보다도 오히려 못한 것 같이 생각되었느니라. 아마도 경문(經文)이 헛됨인지 행자(行者)의 행위(行爲)가 어리석음인지 시기(時機)가 맞지 않음인가 하고 의심스러워서 후생(後生)도 어떨까 생각되느니라.
그건 그렇다 하고 귀승(貴僧)은 산승(山僧)의 제자(弟子)라고 들었고 아버지의 죄(罪)는 아들에게로·스승의 죄(罪)는 제자(弟子)에게 간다고 들었소이다. 에이산(叡山)의 승도(僧徒)가 온조(薗城)·산문(山門)의 당탑(堂塔)·불상(佛像)·경권(經卷)·수천만(數千萬)을 불태워 버리셨는데 더욱이 두렵고 세간(世間) 사람들도 소동(騷動)하고 소원(疏遠)하게 되었음은 어찌된 일인지·전(前)에도 약간(若干) 들었으나 이번에 자세히 듣고자 하나이다. 다만 의심되는 것은 이러한 악승(惡僧)들이니 삼보(三寶)의 어의(御意)에도 맞지 않을 것이요, 천지(天地)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니 기원(祈願)도 이루어지지 아니 하리라 생각되는데 어떠하오. 답(答)하여 가로되, 전(前)에도 약간(若干) 말하였지만 이번에 또 대강 말하리라. 일본국(日本國)에서는 이 일이 중대사(重大事)이니라. 이를 알지 못하는 고(故)로 많은 사람이 입으로 죄업(罪業)을 지음이라. 우선 산문(山門)이 시작(始作)된 것은 이 나라에 불법(佛法)이 들어온지 이백여년(二百餘年),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어우(御宇)에 전교대사(傳敎大師)가 처음으로 세우시었다. 당시(當時)의 교토(京都)는 옛적에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왕기(王氣)가 있는 상(相)이라 하였지만 천태종(天台宗)이 들어올 때를 기다리느라고 도성(都城)을 세우시지 않았었다. 또한 조구태자(上宮太子)의 기(記)에 가로되 「나의 멸후(滅後) 이백여년(二百餘年)에 불법(佛法)이 일본(日本)에 널리 퍼지리라」 운운(云云). 전교대사(傳敎大師)가 연력연중 (延曆年中)에 에이산(叡山)을 세우시자, 간무천황(桓武天皇)은 다이라(平)의 교토(京都)를 세우셨으니 태자(太子)의 기문(記文)이 틀리지 않는 까닭이로다. 그러므로 산문(山門)과 왕가(王家)와는 소나무와 떡갈나무와 같고, 난(蘭)과 잔디와도 같음이라. 소나무가 마르면 반드시 떡갈나무도 마르고 난초(蘭草)가 시들면 잔디도 시드느니라. 왕법(王法)의 번영(繁榮)은 산(山)의 기쁨이요, 왕위(王位)의 쇠(衰)함은 산(山)의 슬픔이라고 보이는데 이미 세상(世上)은 간토(關東)로 옮겨졌으니 어떻게 생각하셨겠느뇨.
기도초(祈禱抄) 51세에 술작 1348~1353쪽어찌 기원(祈願)의 성취(成就)가 늦으리요. 대지(大地)를 가리켜서 빗나갈지라도 허공(虛空)을 동여매는 자(者)는 있을지라도·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없는 일은 있을 지라도, 해는 서(西)쪽에서 돋을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의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모든 보살(菩薩)·인천(人天)·팔부(八部) 등(等)·이성(二聖)·이천(二天)·십나찰(十羅刹) 등(等)이 천(千)에 하나라도 와서 수호(守護)하시지 않는 일이 있다면 위로는 석가제불(釋迦諸佛)을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구계(九界)를 속이는 죄가 되리라. 행자(行者)는 확실히 부실(不實)할지라도 지혜(智慧)는 어리석을지라도 몸은 부정(不淨)할지라도, 계덕(戒德)은 갖추지 않았을지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수호(守護)하시리라. 주머니가 더럽다고 하여 금(金)을 버리지 말지니라. 이란(伊蘭)을 미워하면 전단(栴檀)은 있을 수 없느니라. 삼세의 생명관을 설하는 불법에서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과거세에 자신이 행한 행동의 결과라고 합니다.
본래 숙업(宿業)에서 ‘업(業)’은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업’에는 선(善)과 악(惡)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주로 악업을 말합니다.
현재 맞닥뜨린 고난은 자신이 과거세에 쌓은 악업의 과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숙업론은 행복해지려면 지금까지 자신이 쌓은 악업을 모두 소멸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래세에 걸쳐 생사를 반복하며 과거세에 쌓은 악업을 하나 또 하나 소멸하는 일은 심적으로 아찔한 과정입니다.
이에 반해 니치렌대성인님은 근본적으로 숙명을 전환하는 법리(法理)를 밝히셨습니다. 즉 모든 악업의 근원은 만인성불과 인간존경 그리고 자타 함께 하는 행복을 완전히 설한 정법(正法)인 법화경을 비방하는 일에 있다고 합니다.
정법을 믿고 넓히는 실천으로 이 근본적인 악업을 금세(今世)에 전환할 수 있다고 설했습니다. 생명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고 일체의 숙명을 전환하는 길은 어본존(御本尊)을 믿고 불법을 열심히 실천하는 속에 있습니다.미래세에 걸쳐 생사를 반복하며 과거세에 쌓은 악업을 하나 또 하나 소멸하는 일은 심적으로 아찔한 과정입니다.
이에 반해 니치렌대성인님은 근본적으로 숙명을 전환하는 법리(法理)를 밝히셨습니다. 즉 모든 악업의 근원은 만인성불과 인간존경 그리고 자타 함께 하는 행복을 완전히 설한 정법(正法)인 법화경을 비방하는 일에 있다고 합니다.
정법을 믿고 넓히는 실천으로 이 근본적인 악업을 금세(今世)에 전환할 수 있다고 설했습니다. 생명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고 일체의 숙명을 전환하는 길은 어본존(御本尊)을 믿고 불법을 열심히 실천하는 속에 있습니다.능(能)히 대범천왕(大梵天王)·제석(帝釋)·사천(四天)과 싸우는 대아수라왕(大阿修羅王)이 있어서 선종(禪宗)·염불종(念佛宗)·율종(律宗) 등(等)의 동량(棟梁)의 심중(心中)에 붙어 들어가서 점차로 국주(國主) 국중(國中)에 옮겨 들어가 현인(賢人)을 없애느니라. 이와 같은 대악(大惡)은 범석(梵釋)도 역시 막기 어려우니 어찌 하물며 일본수호(日本守護)의 소신(小神)에 있어서랴, 단(但) 지용천계(地涌千界)의 대보살(大菩薩)·석가(釋迦)·다보(多寶)·제불(諸佛)의 가호(加護)가 아니면 이루기 어려우니라, 불교에서는 보통 숙업(宿業)이라고 하는데, 숙명(宿命) 즉 숙업을 전환하지 못하면 힘있는 종교, 진실한 불법(佛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숙업이란 우리 생명을 규정하고 우리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요인과 경향성을 말하며, 이 숙업에서 나쁜 것을 바꾸지 않고 인간은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숙업 전환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 어떻게 숙업이 형성되는지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행위(行爲)’라고 불법은 설합니다. 그 행위를 ‘업(業)’이라고 합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행위’는 신구의(身口薏) 삼업이라고 해서 신구의(身口薏)에 걸친 행위가 그대로 생명 속에 새겨집니다. 불법의 숙업론은 이것을 삼세(三世)관으로 깊이 파고든 것입니다.
이 숙업론을 결정론적으로 파악한 종교는 근본적인 숙업전환의 방법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가르침의 실천에 의한 귀착점은 현실도피 이외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 니치렌대성인 불법에서는 자신의 숙업에 감연히 맞서 숙업을 타개하고 현실을 강력히 변혁하는 숙업전환의 원리를 설합니다.
대성인님은 『가연정업서可延定業書』에서 「정업(定業)조차 깊이 깊이 참회(懺悔)하면 반드시 소멸(消滅)하니 황차 부정업(不定業)에 있어서랴.」(신편어서 p.76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업 즉 정해진 수명마저 법화경(어본존)에 참회, 멸죄의 기원을 하면 묘법의 공력으로 연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흐르는 강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숙업전환이란 흐리고 탁한 물을 맑고 깨끗한 물로 정화하는 작업입니다. 묘법을 신수(信受)해 자신의 생명을 정화하고 생명력과 지혜를 용현해 행복과 희망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예(例)컨대 이 사도지방(佐渡地方)은 축생(畜生)과 같으며 또한 호넨(法然)의 제자(弟子)가 충만(充滿)하여 가마쿠라(鎌倉)에서 니치렌(日蓮)을 미워한 것보다도 백천만억배(百千萬億倍)니라. 하루도 목숨이 유지되리라고는 보이지 않지만 각자(各者)의 후의(厚意)가 있기에 지금까지 목숨을 지탱하였다. 이를 가지고 헤아려 보건대 법화경(法華經)을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대보살(大菩薩)·공양(供養) 공경(恭敬)하시고 있으니 이 불(佛)·보살(菩薩)은 여러분의 자부비모(慈父悲母)에게 날마다·밤마다·십이시(十二時)동안 고(告)하실 것이로다. 당시(當時) 주군(主君)의 총애(寵愛)를 받고 있는 것도 자부(慈父)·비모(悲母)의 가호(加護)에 의함이리라. 형제(兄弟)도 형제(兄弟)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직 자식이라 생각하시라. 자식일지라도 효조(梟鳥)라 하는 새는 어미를 먹고, 파경(破鏡)이라는 짐승은 아비를 먹으려고 엿보느니라. 내 자식인 시로(四郞)는 부모(父母)를 부양(扶養)하는 자식이지만 나쁘다면 어찌할 수가 없느니라. 타인(他人)일지라도 막역(莫逆)한 사이라면 목숨도 대신하느니라. 사제(舍弟)들을 자식으로 여기신다면 금생(今生)의 동반자(同伴者)·남보기에 좋으리라, 여동생들을 딸이라 생각하면 어찌 효양(孝養)하지 않으리요. 이 곳에 유배되었을 때에는 일인(一人)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동행(同行)은 칠팔인(七八人) 이하가 아니니, 상하(上下)의 자량(資糧)도 여러분의 조치가 없었더라면 어찌하리오. 이는 오로지 법화경(法華經)의 문자(文字)가 여러분의 몸에 바뀌어 들어가서 도우시는 것이라 생각되느니라.
어떠한 세상의 혼란에도 여러분을 법화경(法華經)·십나찰(十羅刹)이여, 도우십사고 젖은 나무에서 불을 내고 마른 흙에서 물을 얻으려 하듯, 강성(强盛)하게 말하느니라. 일이 번잡하므로 이만 그치나이다.
가책방법멸죄초(呵責謗法滅罪抄) 사도에서 52세에 술작 1131쪽번뇌는 우리의 심신을 괴롭히는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번뇌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세히 논해져 있으나 대표적인 것으로 탐욕, 진에, 우치 등이 중생의 심신을 괴롭히는 삼독(三毒)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탐욕(貪慾)이란 오근(五根)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근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진에(瞋恚)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분노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우치(愚癡)는 사물의 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삼독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마음의 작용에 의해 우리는 각종 고통과 고민을 느끼고 있습니다.
소승교에서는 이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 엄격한 계율을 통한, 고행을 수행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여러 조건을 생각하면 번뇌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없애려면 생명활동이 완전히 정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번뇌절멸을 주장하는 소승교의 수행을 대승(大乘)에서는 회신멸지(灰身滅智)라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에 빠지지 않는 강력한 자기를 확립하기 위해 욕망을 만드는 생명의 작용 그 자체를 잘 파악하고 욕망을 조정할 수 있는 풍부한 생명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따라서 생명의 법에 대한 무지가 번뇌의 근원이고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이 무명을 깨닫고 생명의 법을 깨달았을 때 무명은 ‘명(明)’이 되고 번뇌로 싸였던 어둠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깨달음이며 보리(菩提)입니다.
결국 번뇌는 생명의 무명으로 싸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작용이며 보리는 무명이 제거되었을 때의 상태로서 공히 같은 생명이 나타내는 두개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법을 깨닫고 번뇌를 보리로 전환하는 것이 번뇌즉보리이고 이 생명의 법을 설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말법의 오늘날 번뇌즉보리의 법리를 현실화하는 길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본존님에 대한 신심이며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실천뿐입니다.부처는 인천(人天)의 주(主)이시고·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부모(父母)이며·또한 개도(開導)의 스승이로다. 부모(父母)라도 천(賤)한 부모(父母)는 주군(主君)의 의(義)를 겸(兼)하지 못하고, 주군(主君)이라도 부모(父母)가 아니므로 두려운 면(面)도 있으며, 부모(父母)·주군(主君)이라도 사장(師匠)이 될 수는 없느니라·모든 부처는 또 세존(世尊)이시니 주군(主君)이시기는 하지만·사바세계(娑婆世界)에 나오시지 않았으니 사장(師匠)이 아니로다·또한 「기중중생실시오자(其中衆生悉是吾子)」라고도 밝히시지 않았는데·석가불(釋迦佛) 한 분만이·주사친(主師親)의 삼의(三義)를 겸(兼)하셨느니라.계곡(溪谷)의 연못을 부정(不淨)하다고 싫어 한다면 연(蓮)꽃은 취(取)하지 못할 것이며 행자(行者)를 퇴박 하신다면 서원(誓願)을 깨뜨리심이라. 정상(正像)이 이미 지나 버렸으니 지계(持戒)는 시중(市中)의 호랑이와 같고 지자(智者)는 인각(麟角)보다도 희귀(稀貴)하리라. 달이 뜨기 전(前)에는 등(燈)불을 의지할 것이며 보주(寶珠)가 없는 곳에는 금은(金銀)도 보배(寶貝)로다. 백오(白烏)의 은(恩)을 흑오(黑烏)에게 갚고 성승(聖僧)의 은(恩)을 범승(凡僧)에게 갚을지니라. 속히 속히 이생(利生)을 주십사 하고 강성(强盛)히 기원(祈願)한다면 어찌 기원(祈願)이 성취(成就)되지 않으리요.
물어 가로되, 위에 써놓으신 도리(道理)·문증(文證)을 배견(拜見)하니 진실로 일월(日月)이 천(天)에 계시고 대지(大地)에 초목(草木)이 생장(生長)한다면, 주야(晝夜)가 국토(國土)에 있고, 대지(大地)가 뒤집히지 않으며 대해(大海)의 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있다면,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의 현세(現世)의 기원(祈願)과 후생선처(後生善處)는 의심할 바 없느니라.
그러나 이 이십여년간(二十餘年間)의 천태(天台)·진언(眞言) 등(等)의 명장(名匠)이 많이 대사(大事)의 기도(祈禱)를 하였으나 뚜렷하고 훌륭한 기도(祈禱)라고는 보이지 않으며, 외전(外典)의 자(者)보다도 오히려 못한 것 같이 생각되었느니라. 아마도 경문(經文)이 헛됨인지 행자(行者)의 행위(行爲)가 어리석음인지 시기(時機)가 맞지 않음인가 하고 의심스러워서 후생(後生)도 어떨까 생각되느니라.일대성교(一代聖敎)를 홍통(弘通)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이처럼 대사(大事)인 법문(法門)을 전교(傳敎) 천태(天台)도 아직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이것도 도리(道理)인 것이니 말법(末法)의 처음의 오백년(五百年)에 상행보살(上行菩薩)이 출세(出世)하여 홍통(弘通)하셔야 할 법문(法門)이기 때문이니라. 깊이 명심(銘心)하고·어떻게 하든 이번에 이 경(經)을 깊이 믿어 명종(命終)의 때·천불(千佛)의 마중을 받아 영산정토(靈山淨土)에 달려가시어 자수법락(自受法樂) 하시라. 신심(信心)이 약(弱)해서 성불(成佛)이 연장(延長)될 때·나를 원망하지 마시라. 비유(譬喩)컨대 병자(病者)에게 양약(良藥)을 주었는데 독(毒)을 좋아하여 복용(服用)하셔서 그 병(病)이 낫기 어려울 때, 나의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의사(醫師)를 원망함과 같이 되리라. 이 경(經)의 신심(信心)이라 함은 조금도 사견(私見) 없이 경문(經文)과 여(如)히,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화일부(法華一部)에 배반(背反)하는 일이 없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니라. 부처가 된다고 함은 별(別)다른 일은 아니로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타사(他事)없이 불러 나아간다면 천연(天然)히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를 갖추게 되느니라.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 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 비유(譬喩)컨대 새의 알은 처음엔 물인데 그 물속에서 누가 하는 것도 아닌데, 주둥이나 눈이 생겨나서 허공(虛空)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 우리들도 무명(無明)의 알이고 천박한 몸이지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창제(唱題)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삼십이상(三十二相)의 주둥이가 나오고 팔십종호(八十種好)의 개모(鎧毛)가 생겨 갖추어져서 실상진여(實相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되느니라. 이로써 경(經)에 가로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명(無明)의 알속에 있어 지혜(智慧)라는 주둥이가 없다. 불모(佛母)라는 새는 분단동거(分段同居)의 옛집에 돌아와 무명(無明)의 알을 두들겨 부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이란 새를 보금자리를 떠나게 하여 법성진여(法性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한다」라고 설(說)했느니라 취의(取意).
유해무신(有解無信)이라 해서 법문(法門)을 알아도 신심(信心)이 없는 자(者)는 결코 성불(成佛)할 수 없으며 유신무해(有信無解)라 해서 해(解)는 없어도 신심(信心)이 있는 자(者)는 성불(成佛)하느니라. 모두 이 경(經)의 의(意)이지 나의 말은 아니로다. 그러므로 이(二)의 권(卷)에는 「신(信)으로써 들어감을 득(得)하였지 자기(自己)의 지분(智分)은 아니다」라고 해서 지혜제일(智慧第一)의 사리불(舍利弗)도 오직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고 신심(信心) 강성(强盛)함으로써 부처가 되었으며 자기(自己)의 지혜(智慧)로써 부처가 되지 않았다고 설(說)하시었다. 사리불(舍利弗)조차도 지혜(智慧)로써는 부처가 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우리들 중생(衆生)이 약간의 법문(法門)을 터득했다 해도 신심(信心)이 없으면 부처가 되기란 의심스럽도다. 말대(末代)의 중생(衆生)은 법문(法門)을 약간 알면 승(僧)을 멸시(蔑視)하고 법(法)을 등한히 해서 악도(惡道)에 떨어진다고 설(說)하셨느니라. 법(法)을 터득한 증거로서는 승(僧)을 공경(恭敬)하고 법(法)을 숭앙(崇仰)하며 부처를 공양(供養)할지어다. 지금은 부처가 계시지 않으니 해오(解悟)의 지식(智識)을 부처라고 공경(恭敬)하여라. 어찌 덕분(德分)이 없겠는가. 후세(後世)를 원(願)하는 자(者)는 명리명문(名利名聞)을 버리고 아무리 천(賤)한 자(者)일지라도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는 승(僧)을 생신(生身)의 여래(如來)와 같이 공경(恭敬)하여라. 이것은 틀림없는 경문(經文)이니라.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443~4쪽신심을 해도 인생에 있어서 각종 고난이나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고난과 문제를 신심을 근본으로 하나하나 극복했을 때 돌이켜 보면 그 고민이나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성장했던 것입니다. 좋은 방향으로 열어나갔다고 절실히 느끼게 되는데 이것을 ‘변독위약(變毒爲藥)이라 합니다.
‘변독위약’이라는 말은 “독을 바꾸어 약으로 한다”라고 읽습니다. 인도에 태어난 용수(龍樹)가 쓴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있는 “대약사(大藥師)가 능히 독(毒)으로써 약(藥)으로 함과 같다”라는 글에 유래합니다.
이것은 본래 대약사를 법화경(法華經)에 독을 낮은 깨달음으로 만족하고 있는 이승(二乘)의 생명에 약을 성불의 경계에 비유한 것입니다.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에서는 영원히 성불할 수 없다고 했던 이승이 법화경에 이르러 비로소 성불이 허락된 것은 마치 독을 바꾸어 약으로 한 것과 같다는 뜻의 글입니다.
이와 같이 이승이 묘법의 힘으로 성불한 것을 ‘변독위약’이라고 했는데 니치렌대성인은 이것을 한 단계 더 높여 「능히 독(毒)으로써 약(藥)으로 한다 함은 무엇이뇨, 삼도(三道)를 바꾸어 삼덕(三德)으로 함이라.」(신편어서 p.120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독을 이승의 생명 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숙업, 고뇌의 삼도를 독으로 하시고 부처의 생명,영지(英智), 깨달음의 삼덕을 약으로 하시고 있습니다. 이 삼도를 삼덕으로 바꾸는 것은 삼대비법(三大秘法)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에 대한 신심과 창제입니다.
대성인의 불법(佛法)에 있어서 변독위약이란 고뇌의 늪에 완전히 빠진 자신의 생명을 빛나는 부처의 생명으로 열어 전환시키는 것이며, 이 오염된 생명을 부정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탁한 생명을 이를테면 재료로 해서 청정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본존님을 신수해서 창제할 때 지금까지 고뇌에 속박됐던 생명은 고난에 도전해서 극복하는 강력한 생명으로 전환해서 미혹은 지혜로 바꾸고 묘법의 리듬에서 벗어난 행동은 행복과 성장을 형성하는 행위로 바꾸어 나갑니다.
우리 생명상에 나타나는 이 즉신성불, 숙업 전환의 모습을 변독위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행과 고뇌의 ‘독’을 회피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법에서는 오히려 그 독을 ‘약’의 인(因)으로 바꾸고 닥쳐오는 난관과 장해를 자신의 성장의 양식으로 만드는 건강한 삶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또한 조구태자(上宮太子)의 기(記)에 가로되 「나의 멸후(滅後) 이백여년(二百餘年)에 불법(佛法)이 일본(日本)에 널리 퍼지리라」 운운(云云). 전교대사(傳敎大師)가 연력연중 (延曆年中)에 에이산(叡山)을 세우시자, 간무천황(桓武天皇)은 다이라(平)의 교토(京都)를 세우셨으니 태자(太子)의 기문(記文)이 틀리지 않는 까닭이로다. 그러므로 산문(山門)과 왕가(王家)와는 소나무와 떡갈나무와 같고, 난(蘭)과 잔디와도 같음이라. 소나무가 마르면 반드시 떡갈나무도 마르고 난초(蘭草)가 시들면 잔디도 시드느니라. 왕법(王法)의 번영(繁榮)은 산(山)의 기쁨이요, 왕위(王位)의 쇠(衰)함은 산(山)의 슬픔이라고 보이는데 이미 세상(世上)은 간토(關東)로 옮겨졌으니 어떻게 생각하셨겠느뇨.
기도초(祈禱抄) 51세에 술작 1348~1353쪽그들은 현재(現在)는 그와 같으며 살해(殺害)되면 또 지옥(地獄)에 가리라. 우리들은 현재(現在)는 이 대난(大難)을 당(當)할지라도 후생(後生)은 성불(成佛)하리라. 비유(譬喩)컨대 뜸과 같으니 당시(當時)는 아플지라도 후(後)에는 약(藥)이 될 것이니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느니라.
저 아쓰하라(熱原)의 우치(愚痴)한 자(者)들은 말로 격려(激勵)할 것이요, 위협(威脅)하지 말라. 그들에게는 오직 한결같이 결단(決斷)하게 하여라, 좋아지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요 나쁘게 되는 것은 필정(必定)이라고 생각하라. 배가 고프다고 하거든 아귀도(餓鬼道)를 가르치고, 춥다고 말하거든 팔한지옥(八寒地獄)을 가르치며, 두렵다고 생각하거든 매를 만난 꿩, 고양이를 만난 쥐를 타인(他人)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자세히 쓰는 것은 이와 같이 해마다 다달이 날마다 말해 왔으나, 나고에(名越)의 부인(夫人), 쇼우보(少轉房)·노토보(能登房)·산미보(三位房) 등(等)과 같은 사람이 있느니라. 겁장이이고 법리(法理)를 기억(記憶)하지 못하며, 욕심(慾心)이 많고 의심(疑心)이 많은 자(者)들은 옻칠한데다가 물을 끼얹고 허공(虛空)을 자르는 것과 같은 것이외다.
산미보(三位房)의 일은 매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들이 많았으나 많은 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지혜(智慧)있는 사람을 시기(猜忌)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생각하리라고 여겨져서 말을 하지 않았더니 마음이 비뚤어져서 대난(大難)을 당(當)하였느니라. 매우 엄(嚴)하게 말하였더라면 구제(救濟)될수도 있었을터인데, 너무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하므로 말하지 않았느니라. 또 이렇게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일을 말한다고 하리라. 거울로 삼으라고 하는 말이니라. 또 이 일은 그 사람들도 내적(內的)으로는 겁을 먹고 두려워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되나이다.
성인어난사(聖人御難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1190~1쪽열심히 신심을 해도 인생의 고난에 맞닥뜨립니다. 또 광포를 실천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장마(障魔)가 다투어 일어납니다. 대성인은 이런 고난을 만나 숙명전환 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전중경수(轉重輕受)의 공덕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전중경수는 ‘무거운 것을 바꾸어 가볍게 받는다’고 읽습니다. 과거세의 무거운 죄업(罪業)으로 현세뿐 아니라 미래세에 걸쳐 받아야 할 무겁고 괴로운 과보를 금세에 정법을 믿고 넓히는 공덕으로 중죄의 과보를 일시에 가볍게 받아 죄업을 모두 소멸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지옥(地獄)의 괴로움은 금방 사라지고」(신편어서 p.480)라는 성훈대로 대성인 불법은 모든 숙업을 근본적으로 전환합니다.
따라서 열심히 신심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어려움은 ‘본디 오랜 시간에 걸쳐 받아야 할 업의 과보를 전환하여 가볍게 받고 있다’고 확신하며 정면으로 대처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대성인은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검(劍)으로 되고 현성(賢聖)은 매리(罵詈)함으로써 시험(試驗)되느니라. 나의 이번의 감죄(勘罪)는 세간(世間)의 허물은 조금도 없으나 오로지 선업(先業)의 중죄(重罪)를 금생(今生)에 없애고 후생(後生)의 삼악(三惡)을 면하기 위함이니라.」(신편어서 p.589)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떠한 고난이라도 금세에 확실한 숙명전환을 이루기 위해, 숙업을 없애고 생명을 단련하는 좋은 기회입니다.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사(法師)란 오종법사(五種法師)이고 공덕(功德)이란 육근청정(六根淸淨)의 과보(果報)이니라, 결국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니라, 그러므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법(法)의 스승으로 되어, 큰 덕(德)이 있느니라, 공(功)이란 행(幸)이라는 것이며 또한 악(惡)을 멸(滅)함을 공(功)이라 하고 선(善)을 생(生)함을 덕(德)이라고 하느니라, 공덕(功德)이란 즉신성불(卽身成佛)이고 또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설문(說文)과 같이 수행(修行)함을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운운(云云).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762쪽「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이란 단어는 중국 장안대사(章安大師)가 열반경소권12(涅槃經疏卷12) 『보살품(菩薩品)제16』에 설한 글월인데, 「몸(身)은 가볍게(輕), 법(法)은 무겁게, 몸을 죽여서 법을 넓힌다」라고 읽습니다.
중생의 몸은 가볍고 넓혀야 할 법은 무거운 까닭에 신명(身命)을 걸고 불법을 넓혀야 한다는 절복홍교의 정신을 나타낸 어구(語句)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마쓰노님답서(松野殿御返事)』에, 「적문(迹門)에는 『나는 신명(身命)을 사랑하지 않고 단 무상도(無上道)를 아끼노라』고 설하고, 본문(本門)에는 『스스로 신명을 아끼지 않느니라』고 설했으며, 열반경에는 『몸은 경(輕)하고 법은 중(重)하니 몸을 죽여서 법을 넓히노라』고 쓰여있느니라. 본적양문(本迹兩門)·열반경 다 같이 신명을 버려서 법을 넓힐지어다라고 쓰여있노라. 이러한 훈계를 배반하는 중죄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쌓여서 지옥에 떨어진다」(신편어서 p.1051)라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법화경 적문의 『권지품(勸持品) 제13』에서 설하신 「나는 신명을 아끼지 않고 다만 무상도(無上道)를 아까워한다」(신편 법화경 377항)라는 문장과 본문(本門)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16』에서 설하신 「부자석신명(不自惜身命)」(同439항)이라는 문장, 또한 열반경에서 설하신 「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의 문장을 인용하여 신명을 버리고 법을 넓혀야 한다는 것을 설하시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부처의 훈계를 배반하는 것은 중죄이며 그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업인(業因)이라고 설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의 비유를 전게(前揭)의 『마쓰노님답서(松野殿御返事)』에는, 「설산동자의 옛날을 생각하면 반게(半偈)를 위하여 또한 목숨을 버리셨거늘 하물며 이 경의 일품(一品) · 일권(一卷)을 청문(聽聞)하는 은덕에 있어서랴. 무엇으로써 이를 보답하리오. 마땅히 후세를 원한다면 설산동자와 같이 함이 바람직하나이다. 자기 신명(身命)을 버려서 불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신명을 버려서 불법을 배울지어다.」(신편어서 p.1050) 하고 설하시고 있습니다.
불법의 반게(半偈)를 듣기 위해 나찰[(羅刹): 귀신]에게 몸을 던진 설산동자의 불석신명(不惜身命)의 행위와 그 구도심(求道心)이야말로 「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이며, 말법탁악(末法濁惡)의 세상에 정법을 홍통하는 정신임을 어지남하시고 있습니다.
『오토님소식(乙御前御消息)』에서는, 「신경법중(身輕法重), 사신홍법(死身弘法)이라고 설해져 있으니 몸은 경(輕)하여서 남이 때리고 미워할지라도 법은 중하므로 반드시 홍통(弘通)되리라. 법화경이 홍통되면 시체는 오히려 무거워질 것이며, 시체가 무거워지면 이 시체는 이생(利生)이 있으리라.」(신편어서 p.898)라 설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갖가지 법난이나 박해를 만나더라도 사신홍법의 정신으로 정법을 홍통해 가는 것이 자신의 참회멸죄(懺悔滅罪)의 행법(行法)임을 알고, 게다가 그 공덕으로 가벼운 범부의 몸도 법과 같이 무겁고 존귀한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광선유포의 대원성취와 즉신성불의 공덕을 얻기 위해서 자타(自他) 공(共)히 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의 절복행에 매진해 나갑시다.법화경 적문의 『권지품(勸持品) 제13』에서 설하신 「나는 신명을 아끼지 않고 다만 무상도(無上道)를 아까워한다」(신편 법화경 377항)라는 문장과 본문(本門)의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16』에서 설하신 「부자석신명(不自惜身命)」(同439항)이라는 문장, 또한 열반경에서 설하신 「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의 문장을 인용하여 신명을 버리고 법을 넓혀야 한다는 것을 설하시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부처의 훈계를 배반하는 것은 중죄이며 그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업인(業因)이라고 설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의 비유를 전게(前揭)의 『마쓰노님답서(松野殿御返事)』에는, 「설산동자의 옛날을 생각하면 반게(半偈)를 위하여 또한 목숨을 버리셨거늘 하물며 이 경의 일품(一品) · 일권(一卷)을 청문(聽聞)하는 은덕에 있어서랴. 무엇으로써 이를 보답하리오. 마땅히 후세를 원한다면 설산동자와 같이 함이 바람직하나이다. 자기 신명(身命)을 버려서 불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신명을 버려서 불법을 배울지어다.」(신편어서 p.1050) 하고 설하시고 있습니다.
불법의 반게(半偈)를 듣기 위해 나찰[(羅刹): 귀신]에게 몸을 던진 설산동자의 불석신명(不惜身命)의 행위와 그 구도심(求道心)이야말로 「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이며, 말법탁악(末法濁惡)의 세상에 정법을 홍통하는 정신임을 어지남하시고 있습니다.
『오토님소식(乙御前御消息)』에서는, 「신경법중(身輕法重), 사신홍법(死身弘法)이라고 설해져 있으니 몸은 경(輕)하여서 남이 때리고 미워할지라도 법은 중하므로 반드시 홍통(弘通)되리라. 법화경이 홍통되면 시체는 오히려 무거워질 것이며, 시체가 무거워지면 이 시체는 이생(利生)이 있으리라.」(신편어서 p.898)라 설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갖가지 법난이나 박해를 만나더라도 사신홍법의 정신으로 정법을 홍통해 가는 것이 자신의 참회멸죄(懺悔滅罪)의 행법(行法)임을 알고, 게다가 그 공덕으로 가벼운 범부의 몸도 법과 같이 무겁고 존귀한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광선유포의 대원성취와 즉신성불의 공덕을 얻기 위해서 자타(自他) 공(共)히 신경법중(身輕法重)·사신홍법(死身弘法)의 절복행에 매진해 나갑시다.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 일일(一一)의 자(字)의 밑에 일(一)의 묘(妙)가 있으니, 통틀어 육만구천삼백팔십사(六萬九千三百八十四)의 묘(妙)가 있느니라, 묘(妙)란 천축(天竺)에서는 살(薩)이라 하고, 한토(漢土)에서는 묘(妙)라고 하며, 묘(妙)란 구(具)의 의(義)이고, 구(具)란 원만(圓滿)의 의(義)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일일(一一)의 문자(文字)·일자(一字) 일자(一字)에 나머지의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를 갖추었느니라. 비유컨대 대해(大海)의 한방울의 물에 일체(一切)의 하천(河川)의 물을 갖추고, 하나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개자(芥子)만 하지만, 일체(一切)의 여의보주(如意寶珠)의 재물(財物)을 내리게 함과 같다. 비유컨대 추동(秋冬)에 마른 초목(草木)이 춘하(春夏)의 해를 만나서 지엽(枝葉)·화과(華果)가 출래(出來)함과 같이 이전(爾前)인 추동(秋冬)의 초목(草木)과도 같은 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의 묘(妙)의 일자(一字)라는 춘하(春夏)의 일륜(日輪)을 만나 뵙고, 보리심(菩提心)의 꽃이 피고 성불왕생(成佛往生)의 열매를 맺는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이 대론(大論)에 가로되 「비유컨대 대약사(大藥師)가 능(能)히 독(毒)을 가지고 약(藥)이 되게 함과 같음」 운운(云云). 이 글월은 대론(大論)에 법화경(法華經)의 묘(妙)의 덕(德)을 석(釋)하는 글월이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의 석(釋)에 가로되 「고치기 어려움을 능(能)히 고치기 때문에 묘(妙)라고 칭(稱)함」 등(等) 운운(云云). 대체로 성불왕생(成佛往生)키 어려운 자(者)가 사인(四人)이 있으니, 제일(第一)에는 결정성(決定性)의 이승(二乘)·제이(第二)에는 일천제인(一闡提人)·제삼(第三)에는 공심(空心)의 자(者)·제사(第四)에는 방법(謗法)의 자(者)이니라. 이들을 법화경(法華經)에 있어서 부처가 되게 하셨으므로 법화경(法華經)을 묘(妙)라고 하느니라.
제바달다(提婆達多)는 곡반왕(斛飯王)의 제일(第一)의 태자(太子)·정반왕(淨飯王)에게는 조카·아난존자(阿難尊者)의 형(兄)·교주석존(敎主釋尊)에게는 종제(從弟)에 해당하며, 남염부제(南閻浮提)에서는 경시(輕視) 못할 사람이니라. 수타비구(須陀比丘)를 스승으로 하여 출가(出家)해서, 아난존자(阿難尊者)로부터 십팔변(十八變)을 배우고 외도(外道)의 육만장(六萬藏)·부처의 팔만장(八萬藏)을 다 알고 오법(五法)을 행(行)하여, 거의 부처보다도 존귀(尊貴)한 듯하였다. 부처와 맞서서 파승죄(破僧罪)를 범(犯)하기 위하여, 상두산(象頭山)에 계단(戒壇)을 짓고 불제자(佛弟子)를 이끌어 들여 빼앗고, 아사세태자(阿闍世太子)를 꾀어 말하되, 나는 부처를 죽이고 신불(新佛)이 되리니, 태자(太子)는 부왕(父王)을 죽이고 신왕(新王)이 되시라. 아사세태자(阿闍世太子)는 이미 부왕(父王)을 죽이니, 제바달다(提婆達多)는 또한 부처를 엿보아, 대석(大石)을 가지고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내게 하고, 아라한(阿羅漢)인 화색비구니(華色比丘尼)를 때려 죽여서, 오역(五逆) 내(內)인 삼역(三逆)을 고루 지었으며, 게다가 구가리존자(瞿伽梨尊者)를 제자(弟子)로 삼고, 아사세왕(阿闍世王)을 단나(檀那)로 의지하여, 오천축(五天竺)·십육(十六)의 대국(大國)·오백(五百)의 중국(中國) 등(等)의 일역(一逆)·이역(二逆)·삼역(三逆) 등(等)을 지은 자(者)는 모두 제바(提娑)의 동류(同類)가 아님이 없느니라. 비유컨대 대해(大海)가 제하(諸河)를 모으고, 대산(大山)이 초목(草木)을 모은 것과 같았다. 지혜(智慧)가 있는 자(者)는 사리불(舍利佛)에게 모이고, 신통(神通)이 있는 자(者)는 목련(目連)에게 따르고 악인(惡人)은 제바(提婆)에게 따랐느니라. 그리하여 두께 십육만팔천유순(十六萬八千由旬), 그 아래에 금강(金剛)의 풍륜(風輪)이 있는 대지(大地)가 이미 벌어져 생신(生身)으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졌다. 제일(第一)의 제자(弟子) 구가리(瞿伽梨)도 또한 생신(生身)으로 지옥(地獄)에 들어가고, 전차바라문녀(旃遮婆羅門女)도 떨어졌고·파유리왕(波瑠璃王)도 떨어졌으며 선성비구(善星比丘)도 떨어졌느니라.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생신(生身)으로 떨어진 것을 오천축(五天竺)·십육(十六)의 대국(大國)·오백(五百)의 중국(中國)·십천(十千)의 소국(小國)의 사람들도 모두 이것을 보았고, 육욕(六欲)·사선(四禪)·색(色)·무색(無色)·범왕(梵王)·제석(帝釋)·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도 염마법왕(閻魔法王) 등(等)도 모두 보셨느니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시방법계(十方法界)의 중생(衆生)도 모두 들었었다. 그러므로 대지(大地)·미진겁(微塵劫)을 경과한다 해도 무간대성(無間大城)을 나오지 못하리라. 겁석(劫石)은 엷어져도 아비대성(阿鼻大城)의 고(苦)는 다하지 않을 것으로 모두 생각했는데, 법화경(法華經)의 제바품(提婆品)에 와서 교주석존(敎主釋尊)의 옛 스승이며 천왕여래(天王如來)라고 수기(授記)하신 일이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생각되느니라. 이전(爾前)의 경(經)들이 진실(眞實)이라면 법화경(法華經)은 대망언(大妄言), 법화경(法華經)이 진실(眞實)이라면 이전(爾前)의 제경(諸經)은 대허광죄(大虛誑罪)이니라. 제바(提婆)가 삼역(三逆)을 고루 범(犯)하고, 그밖에 무량(無量)의 중죄(重罪)를 지었어도 천왕여래(天王如來)로 되었으니, 하물며 이역(二逆)·일역(一逆) 등(等)의 모든 악인(惡人)의 득도(得道)가 의심(疑心)이 없음은, 비유컨대 대지(大地)를 뒤엎으면 초목(草木) 등(等)이 뒤엎어짐과 같고, 견석(堅石)을 깨뜨리는 자(者)가 연(軟)한 풀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경(經)을 묘(妙)라고 하느니라.
법화경제목초(法華經題目抄) 기요스미(淸澄)에서 44세에 술작 944~5쪽우리의 절복홍교(折伏弘敎)의 마음가짐으로서 『법사품(法師品)제10』에는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가 설해져 있습니다.
의좌실의 삼궤란 여래(如來)의 방(室)에 들어가 여래(如來)의 옷(衣)을 입고 여래(如來)의 자리(座)에 앉아서 태만함 없이 널리 묘법을 설하는 것으로, 니치렌 대성인은 「의(衣)란 유화인욕(柔和忍辱)의 의(衣)이고, 당착인욕개(當著忍辱鎧) 이것이니라. 좌(座)란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수행이므로 공좌(空座)에 거처하니라. 실(室)이란 자비(慈悲)에 살면서 홍통(弘通)하기 때문이고,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함과 같으니라.」 (신편어서 P.1750)이라 나타내고 계십니다.
1. 여래(如來)의 옷(衣
「여래(如來)의 옷(衣)」이란 「유화인욕(柔和忍辱)의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유화(柔和)란 삼대비법의 가르침에 정직하게 깊이 귀의하는 것이며, 인욕(忍辱)이란 갑옷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어떠한 치욕(恥辱)에도 견뎌내고 어떠한 위해(危害)도 참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본존을 향한 확신에 찬 자세와 언동(言動)을 가지고 절복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호하게 말하면 상대의 마음에 올바르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확신 있는 행동이 상대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또한 창제와 절복을 해가면 마(魔)의 작용이 활발해져 갖가지 문제가 생겨납니다. 정법을 해(害)하려는 마의 작용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심을 분기(奮起)하고 참고 견디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 유화인욕의 마음을 가지고 절복에 힘쓴다면 반드시 어본존의 명호[(冥護): 모르는 사이에 신불이 가호함]를 입어 절복 성취의 큰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