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주운명(夢周殞命) 판본오륜행실도(板本五倫行實圖)

김홍도, 판본오륜행실도 1797년 한국화 종이에 채색 22 x 14 cm 호암미술관 소장 출처 : 한국데이터진흥원
몽주운명夢周隕命은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그린 충신도忠臣圖이다.
이 그림의 출전은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설순偰循 등이 1431년(세종 13)에 편간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중간본重刊本이다. 1730년(영조 6)에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 이형좌李衡佐가 왕명을 받아 간행한 『삼강행실도』 (규 12148) 본과 내용은 동일하나 이형좌가 쓴 서문이 빠져 있고, 판본도 약간 달라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간행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책 113장의 목판본木版本으로 권두卷頭에 1432년(세종 14)에 집현전集賢殿 응교應敎 권채權採가 왕명을 받아 쓴 원서문原序文이 실려 있고, 목록에 이어 효자도孝子圖, 충신도忠臣圖, 열녀도烈女圖의 순으로 각 35편씩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충신도에 수록된 충신 35명 중 29명은 중국의 하夏나라부터 금金나라 시대까지의 사람이고 6명만 우리나라 사람이다. 한글 창제 이후 편간된 세종대의 『삼강행실도』의 전범典範처럼 1장의 판목에 1명의 행적 기사를 수록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를 반으로 접었을 때, 앞 페이지 상단에 언해, 하단에 판화로 만든 삽화를 수록하고 뒤 페이지 상단에 언해, 하단에 한문 기사와 시詩를 수록하였다. 삽화는 주요 장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할하여 한 화면에 그려 넣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삽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주인공만 이름을 함께 판각하여 표시하였다. 언해는 한문 기사를 전부 풀이한 것이 아니라 요약하여 제시되어 있다.
이 그림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최영崔瑩이 신우辛禑에게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할 것을 권하였다. 태조가 의롭게 군사를 돌려 왕씨를 다시 세웠다. 좌사左使 조준趙浚, 정당政堂 정도전鄭道傳, 밀직사密直司 남은南誾 등이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있는 곳을 알고 태조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태조太祖 홍무洪武 임신壬申 3월에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다. 수시중守侍中 정몽주가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이 진심으로 태조를 돕는 것을 근심하여 대간으로 하여금 이들을 논박하여 귀양을 보내도록 하였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와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이 태조에게 “사세가 이미 급박한데 어찌 하고자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태조가 “살고 죽는 것은 명에 달렸으니 단지 명에 순종하여 받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화와 제가 휘하의 조영규趙英珪에게 말하기를 “이씨가 왕실에 공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지만 이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휘하 중에 힘쓸 자가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조영규가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길에서 정몽주를 격살하였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이 때문에 병이 더욱 깊어졌다. 공정대왕恭定大王(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여 정몽주가 고려를 오로지 섬기고 두 마음을 갖지 않았던 것을 아름답게 여겨 시호를 내려 문충공文忠公이라 하였다. 그림은 아래 부분에 이화와 이제가 조영규에게 정몽주를 죽이도록 사주하는 장면과, 위부분에 조영규가 무리를 거느리고 길에서 정몽주를 격살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강행실도』는 중앙에서 제작하여 각 지방에 몇 부씩 나누어주면, 각 지방에서 다시 이를 번각하여 일반 백성에게 배포하였다. 때문에 같은 시기에 제작된 『삼강행실도』라도 번각의 정도에 따라 판화의 격이 달랐다. 세종판(1434)년을 시작으로, 성종판(1490년), 선조판(1579년), 영조판(1726년) 등 여러 차례 복각되어 내용은 같아도 판화에는 시대적인 양식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자료: 조선시대왕실문화도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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