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를 꿈꿨던 한 여대생이 있었다.
뉴욕의 소호, 파리의 샹젤리에, 밀라노의 두오모에서 일하기를 소망했다.
뛰어난 재능을 알아 본 지도교수는 유학을 추천했다.
장차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미래를 약속한 남자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까운 재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쳤다.
해외로 떠나는 비행기 대신 신혼여행을 택했다.
한아름 부케를 들고 돌아 온 그녀는 남편과 낙농업에 뛰어들었다.
캔버스와 연필을 잡던 고운 손으로 소젖을 짰다.
정성껏 짜낸 젖은 치즈로 가공했다.
갓 생산된 달콤한 치즈를 맛보며 부부는 사랑을 키웠다.
부부의 따뜻한 사랑이 깃든 치즈는 금세 입소문을 탔다.
특유의 풍미와 뛰어난 맛에 주문이 쇄도했다.
물량을 맞추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잠자리에 든 날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렇게 20여년이 흘렀다.
그녀가 생산한 치즈는 어느새 지역사회 명산품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봄에는 최신설비를 갖춘 공장까지 신축했다.
작은 농장에서 시작해 어엿한 공장주가 된 것이다.
화려한 디자이너를 뒤로하고 치즈장인이 된 영화 같은 이야기.
임실치즈 전북총판 배정은(47) 대표가 주인공이다.
△ 들었던 나이보다 젊어서 놀랐다.
그런가. 그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다(웃음). 매일 아침 우유와 치즈를 꾸준히 먹었더니 도움이 됐나 보다. 치즈는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식품’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양소가 풍부하다.
우유가 10배로 농축돼 있다고 보면 된다. 치즈에는 단백질, 미네랄, 비타민, 무기질, 칼슘이 듬뿍 들어있다. 그 중 칼슘은 슬라이스 치즈 두 장만 먹어도 하루 권장량이 모두 섭취될 정도다. 단백질도 소화가 잘돼 모발과 피부 관리에 으뜸이다. 신선한 우유로 만든 치즈를 꾸준히 섭취한다면 다른 영양제는 필요없다.
△ 치즈생산을 하게 된 계기가 독특하다.
사실 디자인을 오래 공부했다. 대학교 때 전공도 마찬가지였다. 의상 디자이너로 진로까지 결정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났다. 따뜻한 마음에 끌려 결혼을 결심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유학도 포기했다. 결혼하고 남편과 임실에서 치즈생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남편 도움으로 공부하고 나름대로 노하우도 터득했다.
나중에는 그 과정에 재미를 붙였다. 즐기는 마음으로 만든 치즈를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 행복했다. 그렇게 20년을 넘게 치즈를 만들었다.
△ 오랫동안 공부했던 디자인을 포기한 것이 후회되지 않나.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남편과 함께 치즈를 만들 때 가장 행복하다.
△ 임실치즈에 대해 설명해달라.
사실 임실치즈 역사는 길지 않다. 프랑스의 브리나, 이탈리아의 고르곤졸라, 스위스의 에멘탈, 영국의 체다치즈 같은 오랜 역사는 갖고 있지 않다. 임실치즈는 1967년에 벨기에에서 온 지정환 신부가 산양유로 처음 생산했다.
당시에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1980년대가 돼서야 육류 소비가 늘면서 치즈수요도 증가했다.
이 때부터 우리나라 최초 치즈인 임실치즈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유명 외국 치즈만큼의 깊은 풍미는 없지만 신선하고 깨끗한 맛이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후, 임실에서 신용조합이 결성됐고 1990년대 임실치즈농협으로 거듭났다. 2000년대부터 불어 온 웰빙 열풍은 임실치즈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임실치즈가 건강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잘 닦아 온 덕이다.
최근에는 치즈를 활용한 다양한 식품도 개발해 대형마트에 납품하고 해외에도 수출하고 있다.
△ 현재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어떤 것들이 있나.
너무 다양해서 열거하기 힘들지만 현재 주력 상품은 치즈커틀릿과 치즈고구마스틱이다. 커틀릿은 돈가스와 같다. 돈가스 안에 모짜렐라 치즈를 듬뿍 넣어 다양한 풍미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기존에 있던 제품이지만 우리 공장에서 생산되는 돈가스는 치즈의 함량이 20%이상 많다. 치즈고구마스틱은 남편이 개발했다. 춘권피로 감싼 치즈스틱에 고구마를 넣어 달콤한 맛을 냈다. ]
궁합이 너무 잘 맞았다.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바로 상품화했다. 현재 한옥마을에 매장도 설립해 판매 중이다. 주말마다 매장을 둘러보는데 항상 밀려드는 손님들로 줄이 끊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납품을 확대할 계획이다.
△ 치즈 얘기만 너무 오래 한 듯싶다. 사회공헌활동도 활발하다고 들었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다. 도민들의 성원으로 이렇게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항상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집주변에서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입장에서 자율방범대 활동과 아동봉사단 활동을 하고 있다.
워낙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성격이라 마음처럼은 잘 되지 않았다. 사회단체와 각 기관에서 표창을 수여받기는 했지만 더 노력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앞으로도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기부와 봉사활동으로 그 동안 받은 성원에 보답할 계획이다.
△ 봄에 공장을 설립했다. 20년 만에 성과인데 끝으로 한 말씀 해달라.
사실 작은 농장에서 남편과 치즈를 만들 때만 해도 이렇게 공장까지 설립하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다 도민들의 성원 덕이다. 그 동안 다른 것은 없고 ‘항상 정직하게 고객을 대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일했다. 그렇게 일해 온 것이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나서 우리부부가 잘나서 이렇게 된 것이 절대 아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 마음 변하지 않고 깨끗하고 신선한 치즈를 도민들께 만들어 드리려고 한다. 좋은 설비가 들어온 만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정말 끝으로 하는 질문이다. 디자인을 포기한 것을 후회하지 않나.
정말정말 후회하지 않는다(웃음)
달콤하고 시큼한 치즈내음이 물씬 풍기는 공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이보다 앳되보이는 얼굴에서 치즈에 대한 자부심과 내공이 묻어났다.
‘치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수십분씩 설명하는 그녀
전북에도 이런 치즈장인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이다.
새전북신문에서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