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韓石峰, 1543~1605)
전북 익산시 석불사 대웅전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정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
서울 봉은사
어린이가 쓴 것과 같은 천진난만한 글씨가 이채롭다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
천등산봉정사(안동)
덕휘루(안동 천등산 봉정사)
홍하문 / 운달산김용사(문경)
김가진(金嘉鎭, 1846~1922) : 대한 제국 때의 문신·독립 운동가로 호는 동농(東農). 주일본 판사대신(判事大臣)으로 수년간주재하였으며, 귀국 후 농상공부 대신을 지냈다. 대동단(大同團) 고문을 거쳐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요인으로 활약하였다. 붓글씨에도 능해 조선후기 4대 명필이라 불리기도 함
벽하 조주승(碧下 趙周昇, 1854~1905)
호서제일가람 / 법주사 일주문 도쿄에
조주승(1854~1905)은 김제출신의 호남 명필로 특히 해서체가 뛰어나고 사군자도 잘쳤다고 한다. 아들 또한 한학자이자 유명한 서예가인 조기석(趙沂錫)이다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964~1654)
봉은사 대도장
*오세창(吳世昌, 1864~1953)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위창(葦滄). 1896년 독립협회의 간사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독립공원의 건조사업을 관장하는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의 전개.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18년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당시의 세계정세와 국내동향으로 보아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킬 시기라고 생각하고, 최린(崔麟)·권동진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를 발의했다. 1919년 1월초 국내에 들어온 도쿄 유학생 송계백(宋繼伯)으로부터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계획을 듣고 손병희·최린·권동진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여, 운동의 3대기본노선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확정했다. 기독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손병희·최린·권동진과 더불어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서화(書畵)에 전념하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1918년 서화가들의 친목단체인 대한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한 그는 서화는 물론 그 감식(鑑識)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역대 서화가의 사적을 토대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가들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하여 편술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이래의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자료를 모아 집성한 근역인수(槿域印藪), 수집한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 등은 모두 서화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들이다. 글씨는 특히 전서·예서에 능했는데,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고전(古錢)·갑골문 형태의 구성적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의 두전(頭篆)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 남아 있다. 6·25전쟁 중 피난지인 대구에서 사망,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隱樵 정명수(1909~2001)
천등산비봉사(안동)
비봉산의곡사(진주)
비봉루(진주)
은초 정명수(1909~2001)는 은초 정명수는 진주에서 태어나고 진주에서만 활동한 유명한 서예가이다. 1930년대 말부터 당시 최고의 서예가인 성파 하동주 선생 아래서 추사체를 익혔다.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심검당(여주 신륵사)
尋劍堂이란 말은 '칼을 찾는 집'이란 뜻이다 여기에서는 무명을 끊는 지혜의 칼을 의미하는데 이 말은 위앙종 영운 지근(靈雲 志勤) 선사의 오도송에서 유래하였다.
三十年來尋劍客(삼십년래심검객) 삼십년간 칼을 찾던 나그네
幾廻落葉幾抽枝(기회낙엽기추지) 잎 지고 가지 트기 그 몇번인가
自從一見桃花後(자종일견도화후) 복사꽃 한 번 본 이후에
直至如今更不疑(직지여금갱불의) 지금까지 다시 의심하지 않았네
태종사(부산 태종대) 편액
보광루(통영 미륵산 관음암) 편액
범종루(양산 통도사) 편액
대광전(의성 비봉산 수정사) 편액
만수산무량사(부여)
천왕문(부여 만수산 무량사)
광명문(무여 만수산 무량사)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주자서체(朱子書體)로 유명한 서예가. 통영 미륵산 관음암의 보광루. 한산도 제승당의 한산정, 만수산 무량사의 일주문과 천왕문.설악산 신흥사 천왕문. 태종대 태종사. 수원 용주사 천보루 뒷편 홍제루(弘濟樓) 여주 신륵사 적묵실. 심검당. 조계산 송광사 임경당 주련 의성 수정사 사찰 편액을 쓰다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
관음전(觀音殿 김천 황학산 직지사)
천왕문(부안 능가산 내소사)
모악산금산사(김제)
봉명루 / 문경 운달산 김룡사
관음전 / 양평 용문사
용문산 용무사 / 양평
경권다로 / 양산 천성산 홍룡사 요사채
도솔산선운사(고창)
능가산 내소사 / 부안
팔공산파계사 / 대구 파계사 일주문
범종각(내장산 내장사)
一中의 글씨는 추사 이래 비첩혼융이 시대서풍이 된 20세기 근현대 서단에서 왕희지와 안진경 중심의 진당고법(晋唐古法)과 전예(篆隸)는 물론 한글 궁체와 고체까지 하나로 혼융해 냄으로써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가장 전통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동강 조수호(東江 趙守鎬, 1924~)
충주 석종사 오화각 편액
*조수호(趙守鎬, 1924~ ) : 경북 선산 추신으로 호는 東湖, 서울대 서양화르 전공하고 서예를 택함. 소전(素전 艸밑에 全 ) 손재형(孫在馨.1903-1981)에게서 사사했지만 한글 서예가인 평보 서희환(1934-1995)과 함께 일찌감치 소전의 영향을 벗어나려 애쓴 서예가로 꼽힌다. 특히 그림과 글씨는 본디 같은 것이라는 서화일치의 생각으로 묵조는 먹으로 조형성을 표현하는 먹의 기하학이라 하였음. 1962년에는 최연소 국전심사위원이 됐고 1974년 1호 국전초대작가를 지냈으며 서울교대 교수, 한국교육서예가협회 회장을 지내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는 등 서화가이자 이론가로서 많은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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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 부분이 보이질......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변산반도의 " 내소사 "가 있으니
너무 너무 반갑네~~~
추사의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 현판을 자랑하자면, 반드시 그 옆 전각인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의 글씨를 보고 비교하게 된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서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전, 잘 못썼다고 떼어버리라 했다가 나중, 복귀하는 길에 다시 들러, 원교의 현판을 보고 자기 글씨보다 훌륭하다고 칭찬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