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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정혜의 아파트 / 거실 (저녁 무렵)
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정혜.
거실 구석에서 고양이가 물을 마시고 있다.
정혜, 가까이 다가가 앉아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고양이의 등에 손을 대보려고 하다가 - 왠지 방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에 - 잠시 망설이곤 그만 둔다.
(점프)
현관문 앞.
현관 열쇠 고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정혜.
걸려진 문고리를 풀었다가 다시 잠근다.
56. 우편취급소 건물 / 화장실 (아침)
화장실로 들어서는 정혜.
동료 1이 엉거주춤한 포즈로 거울을 보고 있다.
동료 1 마침 잘왔다.
정혜 응?
동료 1 뒤에서 옷 좀 올려줘. 브라자끈이 풀렸거든.
정혜, 동료 1의 뒤에 서서 옷을 올려준다.
동료 1 (손을 뒤로하여 끈을 채우며) 소장님 얘기 모르지?
정혜 아직 출근 안하셨잖아.
동료 1 (물을 틀고 손을 씻으며) 좀 전에 선희가 소장님 전화 받았는데... 부인 이 쓰러지셔서 병원 응급실에 계신다 그랬대.
정혜 ... 왜?
동료 1 원래 심장 질환이 좀 있으셨다며. 지금 검사중이라고, 결과 나와봐야 안다 지 아마.
57. 우편취급소 (낮)
카운터 안쪽에 앉아 일지에 도장을 찍고 있던 정혜, 문득 창 밖을 본다.
차임 벨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오고.
중학교 아이들이 무리지어 하교하는 모습.
출입구 옆 탁자에서 단골 여직원과 우편물에 스티커를 붙이던 동료 2, 뭔가를 보고 있다가 정혜에게 다가온다.
동료 2 언니. 이거 좀 봐봐요.
정혜가 돌아본다.
동료 2 (선거용 홍보물을 내밀며) 이분... (사진 속의 여자를 가리키며) 언니네 친 척 맞죠?
정혜 (부부가 활짝 웃고있는 사진을 보다가) 으응... 고모.
동료 2 어쩐지 어디서 봤다 했어. 예전에 몇 번 여기 들르셨잖아. (다시 홍보물을 들고 보며) 우리 구에서 출마하셨네. 멋있다...
여직원 (스티커를 붙이다가 돌아보며) 아는 사람이라구?
동료 2 으응. 저 언니 고모.
정혜, 일지를 접은 뒤 스탬프를 정리한다.
58. 우편취급소 앞 (저녁 무렵)
커피자판기 앞.
소장이 담배를 물고 커피를 뽑고 있다.
정혜가 소장에게 다가간다.
소장 (정혜를 의식하고는) 커피, 마실래?
정혜 예. (조끼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는데)
소장 (커피를 꺼내고 자기 동전을 더 넣으며) 크림 커피지? (버튼을 누른다)
정혜, 근심어린 표정으로 소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소장 (오히려 정혜를 다독거리듯이) ...괜찮을 거야.
소장이 건네는 커피를 받아드는 정혜.
59. 정혜의 아파트 / 엄마의 방 (밤)
정혜, 책을 들고 창가에 놓인 제사상 앞에 앉아 있다.
책 표지엔 ‘지역별로 보는 제사상 차리는 법’이라고 써있다.
책을 뒤적거리며 제사상 위의 과일을 이리저리 옮겨놓는 정혜.
(점프)
책을 보며 싸인 펜으로 지방을 쓴다.
(점프)
탁자 뒤쪽에 지방을 올리고 향을 피운다.
향이 피워 오르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천천히 절을 한다.
담배를 하나 물고 불을 붙여 제사상 끝에 올려놓는다.
엄마 (소리, 긴 한숨) 휴....
60. 정혜의 아파트 / 엄마의 방 (낮) - 기억
정혜가 뒤를 돌아본다.
그녀의 엄마가 (생전의 모습으로) 탁자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다.
정혜 응?
엄마, 창 쪽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정혜 왠 한숨.
엄마 몰라. 그냥... 네 뒷모습을 보니까. 갑자기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정혜 무슨 소리야, 그게.
엄마 ....
정혜 내가 뭐가 안쓰럽다는 건데, 엄만.
엄마, 잠시 말이 없다가 시선을 창 쪽으로 둔 채
엄마 ...너, 괜찮지?
정혜 응?
엄마 괜찮은 거지?
정혜 나 참, 갑자기 왜 그래.
엄마 (시선을 돌린 채 말이 없다) ...
정혜 엄마.
엄마, 대꾸 없이 처연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본다.
엄마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에서 재가 툭 떨어진다.
61. 정혜의 아파트 / 엄마의 방 (밤)
제사상 끝에 놓인 담배의 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제사상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정혜, 손 끝에 물을 묻혀 바닥에 떨어진 재를 치우고 는 반쯤 타버린 담배를 입에 물고 바닥에 눕는다.
담배를 한모금 들이키고 마른 기침을 한다.
정혜,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감는다.
62. 병원 / 입원실 (밤) -기억
입원실 침대 곁의 보호자용 침대에 앉아 볼륨을 죽인 TV에 시선을 두고 있는 정혜,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산소 호흡기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던 엄마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만진다.
정혜 어? 일어났네, 엄마.
초췌한 얼굴의 엄마가 정혜를 올려다보고 있다.
63. 병원 복도 (밤) -기억
복도를 달려 간호사실로 가는 정혜.
당직 간호사가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있다가 정혜를 돌아본다.
정혜 저, 엄마가 방금 의식이 돌아왔거든요. 천오백일호실이요. 빨리 좀...
간호사 (사무적인 얼굴로 담담하게) 알았으니까 가 계셔요.
간호사,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린다.
64. 병원 / 입원실 (밤) - 기억
병실로 돌아온 정혜, 침대 곁으로 다가가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푸석푸석하고, 눈에 띄게 많아진 흰 머리.
잠시 눈을 감았던 엄마가 다시 눈을 뜨고 정혜를 바라본다.
엄마 (힘겨운 목소리로) 있잖아... (산소호흡기를 떼며) 알고 싶어.
정혜 잠깐만. 힘드니까 말하지마. (산소호흡기를 다시 대려하는데)
엄마 내가... 너한테 좋은 엄마였어?
정혜 무슨 소리야, 그게.
엄마 (뭐라 말하려다가 멈추고,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며) ...응?
정혜 조금 이따가 얘기하고. 간호사 금방 올 거거든.
엄마 너... 힘들 때 많았지. 그렇지? 왜... 너 힘들 때마다 나한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아?
정혜 ....
엄마 (울먹이며) 나, 엄마잖아. 엄마한텐, 뭐든지 얘기할 수 있잖아.
정혜, 그만 하라는 듯이 손을 가져가 엄마의 입에 대고 잠시 있다가 엄마의 뺨을 어루만진다. 정혜를 바라보던 엄마의 야윈 얼굴이 어색하게 미소를 보이다가 이내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떨어져 내린다.
65. 정혜의 아파트 / 엄마의 방 (밤)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는 정혜.
그녀가 들고 있는 담배 끝에서 재가 떨어진다.
정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66. 병원 / 휴게실 (낮) - 기억
냉장고에서 보호자용 반찬 그릇을 꺼내 정리하고 있는 정혜.
갑자기 복도가 시끄러워지고 간호사가 급히 달려온다.
간호사 빨리 와봐요. 빨리요. (하고는 다시 뛰어간다)
정혜, 돌아선 채로 멍하게 서있는데 복도 쪽에서 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소리는 점차 격렬하게 들려오는데...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서 움직이지 못하는 정혜.
67. 화장장 관망실 (아침) - 기억
운구가 화장장 소각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유리를 통해 지켜보는 사람들.
그들 중앙에, 머리를 묶고 흰 상복을 입고 서있는 정혜가 보인다.
그녀의 곁에서 고모가 서럽게 울고 있다.
정혜는 슬프기보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게 서있을 뿐이다.
고모 (울먹이며) 언니... (곁에 있던 정혜를 붙들고) 넌 네 엄마 떠나는데... 눈물 도 안나니? 에휴... 불쌍한 사람... (더 크게 흐느끼며) 언니... 언니...
직원 (소리) 여기, 누가 상주예요?
남자의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정혜.
직원 잠깐 이리 좀 와 봐요.
직원은 정혜를 데리고 구석으로 가서 장례 절차에 대해 얘기해준다.
신부 복장을 한 남자가 사람들과 기도를 시작하고 있다.
신부 오늘 우리는 정호와 구원의 불길로 이 육신을 불살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 리는...
고모의 서러운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신도인 아주머니가 곁에 서있다가 고모에게 면박을 준다.
여자 기도하는데 곡하는 거 아니에요! 그만!
고모 (울먹이며) 아니 가슴이 아픈데, 아파서 울지도 못해요? 그런 법이 어딨 어?
남자 아참. 고모가 그러면 어떡해요? 소리 좀 지르지 말고 점잖게...
고모 니네들은 감정도 없냐? 응? (다시 울면서) 울 오빠 보고 싶어서 따라 간거 요. 딸 하나 덩그러니 놓고 가면 오빠, 언니 제사는 누가 모셔요, 언니. 그 렇게 가면 어떡해...
남자 (난감하게 바라보며) 아, 참...
고모의 넋두리는 계속되고 신부의 기도 소리도 함께 뒤엉켜간다.
정혜는 화장장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창 밖을 본다.
정원 한 쪽 벤치 주변에 몇몇 남자들이 모여있다.
그들 사이에서 (씬 56의 홍보물 사진에서 보였던) 고모부가 조문객들과 점잖게 인 사를 나누고 있다.
68. 아파트 단지 (아침)
노상 시장을 지나가는 정혜.
잠시 야채 가게 앞에 멈춰 서서 아주머니로부터 우편물을 받아들고 다시 버스정류 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69. 마을 버스 (아침)
출근길의 버스 안.
우편취급소 근처 정거장에 멈춰 선다.
출구로 나가 내리려던 정혜,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 뒤로 서있는 - 작가인 듯한 - 남자를 본다.
두 사람, 서로 의식하며 어색하게 스쳐 지나간다.
70. 우편취급소 부근 / 거리 (아침)
버스 정류장 옆 사거리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정혜.
소녀 (소리) 저, 잠깐만요.
정혜가 돌아보자 십대 후반의 소녀가 뒤에 서있다.
소녀 도에 대해서 설명을 좀 드리려는데요. 1분만 시간 내주실래요?
정혜 아. 저기.... (망설이면서) 지금 출근을 해야되서요.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고 함께 서있던 사람들이 횡단 보도를 건넌다.
소녀 (애처롭게 정혜를 바라보며) 잠깐이면 되거든요. 도에 대해서 들어는 보 셨죠?
정혜,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는데 소녀는 계속해서 설명을 늘어놓는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어버린다.
뿌리치지 못하고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서있는 정혜.
71. 호프집 (저녁)
정혜와 동료 1,2, 생맥주를 놓고 앉아 TV에 시선을 두고 있다.
TV 뉴스에선 사회적으로 자살율이 증가하고있다는 보도를 하고 있는데...
동료 2 참들 독해... 어떻게 자살을 할 수 있을까.
동료 1 그러면. 살기 힘든데 별 수 없는거지.
동료 2 빌딩에서 뛰어내리고 손목 긋고, 뭐 그런 거 말고 아프지 않으면서 자살할 수 있는 방법 없나?
동료 1 (심드렁하게) 그런 방법 알게 되면, 나도 좀 알려줘. (담배를 꺼내 문다)
정혜 (동료 1을 보며) 어? 담배 안피지 않아?
동료 1 (담배에 불을 붙이고) 끊은 지 5년만에 다시 핀다.
동료 2 왜에?
동료 1 몰라. (연기를 한모금 내쉬고) 그냥. 괜히 속상해서.
아주머니 (지나가다가) 아, 치킨 다 식었겠네. 손도 안댔잖아. 뎁혀줘?
동료 1 (정혜와 동료 2를 보며) 데워달랄까? 난 오늘 별로 안땡기는데.
모두들 고개를 가로 젓는다.
동료 1 (정혜에게) 가져가든지. 니네 고양이 주면 좋아하겠다. 싸주세요, 아주머 니.
아주머니 (다가와서 주방으로 치킨 접시를 들고 가며) 그러니까 빼싹들 곯아가지 고... 팔뚝들이 그게 뭐야. 완전히 새다리야 새다리...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있던 - 씬 24의 - 아저씨, 술에 만취한 목소리로
아저씨 주모! 버드와이저... 원모어 바틀.
아주머니 (혀를 차며) 지금 몇 신데 초저녁부터 술은 꼴아가지고... 아 그만 마셔!
아저씨 이거 할 줄 안다 나.... (하며 머리 위에 병을 올려놓는 시늉을 한다)
정혜와 두 동료, 여전히 TV에 시선을 두고 있다.
정혜 (동료 1에게) 이쪽으로 내쉬어봐.
동료 1 뭘?
정혜 담배 연기.
동료 1 ...왜? (하며 연기를 정혜 쪽으로 풋 내쉰다)
정혜 (담배 연기를 맡으며) 난 옆에서 오는 담배 연기가 이상하게 좋드라구.
피고 싶은 건 아닌데.
동료 2 진짜 특이하다, 언니. (하며 다시 TV로 시선을 돌린다)
동료 1, 정혜를 보며 하여튼...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는다.
72. 정혜의 아파트 / 부엌 (밤)
정혜, 싱크대 앞에 서서 전자레인지로 데운 치킨을 정성스럽게 찢고 있다.
갑자기 헉, 하고 놀라는 정혜.
밑을 내려다보니 고양이가 정혜의 발 주변을 돌며 자신의 털을 문지르고 애정 표시 를 하고 있다.
치킨이 담긴 접시를 바닥에 놓자마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고양이.
인써트 A-6. 우편취급소 앞 길 (낮)
창을 통해 보이는 소장의 모습.
담배를 물고 서성이며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73. 중학교 운동장 (낮)
쉬는 시간을 알리는 차임 벨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오는 오후.
벤치에 앉아 있는 정혜.
발 뒤꿈치에 일회용 밴드를 붙이고 있다.
그녀가 벗어놓은 구두는 홈 쇼핑에서 산, 새 것이다.
정혜, 업무용 슬리퍼를 신고 새 구두는 쇼핑백에 넣는다.
74. 우편취급소 안 (아침)
우편 취급소의 일상적인 풍경.
소장과 이주사는 커피 자판기 앞에서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고, 단골 여직원은 우 편물을 카운터 위에 놓고 동료 1과 수다를 떤다.
어디선가 선거 연설이 마이크 소리로 울려온다.
정혜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보면 - 작가인 듯한 - 남자가 봉투를 카운터에 내 민다. 봉투를 받아든 정혜, 소인을 찍고 바구니에 넣은 후 남자에게 영수증을 내민 다.
75. 우편 취급소 앞 길 (아침)
작가인 듯한 - 남자가 거리를 걸어간다.
먼발치 뒤에서 정혜가 그를 따라 뛰어간다.
정혜 저, 잠깐만요.
남자가 뒤를 돌아보고 멈춰 선다.
남자 ...예.
정혜 저기...
정혜, 한동안 망설인다.
남자 뭐 잘못 된거라도...
정혜 아니, 그게 아니구요.
남자 ....
정혜 오늘 저녁 저희 집에 오셔서... 같이 식사하지 않으실래요?
남자는 놀란 듯이 정혜를 바라보며 말이 없다.
정혜 (할말을 떠올리다가) 그냥 저, 집에 고양이가 있는데... 혹시 좋아하시면,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한다.
남자 정말 고마운데요... 제가 사실은 지금 원고 마감 땜에 너무 지쳐있어서...
며칠 밤을 새웠거든요.
정혜, 갑자기 낭패스러운 기분에 얼굴이 붉어진다.
정혜 아, 네...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돌아서는데)
남자 (소리) 저기, 가겠습니다.
정혜, 남자를 돌아본다.
남자 갈게요.
76. 슈퍼 마켙 (낮)
사람들로 북적이는 현대식 슈퍼 마켙.
카트를 밀면서 장을 보고 있는 정혜.
한 손에는 요리 레시피를 적은 종이를 들고, 익숙하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건들 을 살핀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카트 속에 음식 재료들이 하나씩 늘어간다.
77. 정혜의 아파트 / 부엌 (낮)
정혜, 저녁상을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갖은 양념으로 잡채를 버무리는 정혜의 손.
맛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하는 정혜.
(점프)
후라이팬에서 하얀 연기를 내며 타버리는 고등어.
정혜, 당황하며 후라이팬을 가스레인지에서 들어낸다.
(점프)
시계를 보며 이마의 땀을 닦는 정혜.
바쁜 정혜를 따라다니며 발 밑에서 놀고 있는 고양이.
(점프)
가스불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전골 냄비.
78. 아파트 복도 / 옆 집 현관 앞 (저녁 무렵)
현관문이 열리고 옆 집 여자가 고개를 내민다.
여자 (표정 없이) ...왜요?
정혜 정말 죄송한데요. 이거... 갈비찜인데, 맛이 뭐가 부족한지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여자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면 정혜가 손에 갈비찜이 담긴 작은 그릇을 들고 있다.
순간 재밌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 숟가락을 받아들고 맛을 본다.
안쪽에서 강아지 짓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 (잠시 생각하다가) 맛술 넣었어요?
정혜 예.
여자 조금 더 넣어보시구요. 미원도 조금 더 넣으세요.
정혜 예, 감사합니다.
여자, 다시 무표정하게 문을 닫고 들어간다.
인써트 A-7. 아파트 앞 길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길에 가로등이 켜진다.
승용차 한대가 주차 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고 있다.
79. 정혜의 아파트 / 부엌 (저녁)
부엌 싱크대에 기대어 서서 벽시계를 바라보는 정혜.
시계가 막 8시 반을 넘어서고 있다.
(점프)
정혜, 가스 레인지 앞에 서서 식어버린 전골 냄비를 열고 들여다 본 후 다시 가스 불을 켠다.
80. 정혜의 아파트 / 베란다 (늦은 저녁)
정혜, 베란다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늦은 밤, 텅 빈 거리에 노란 나트륨 가로등이 외롭게 서있다.
그녀의 마른 기침 소리가 공허하게 울린다.
81. 정혜의 아파트 / 부엌, 거실 (밤)
탁자 앞 의자에 앉아있는 정혜, 탁자 위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본다.
(점프)
정혜, 설거지를 하고 있다.
정혜 (갑자기) 아...
놀라며 얼굴을 찡그리고는 발 밑을 본다.
고양이가 같이 놀자는 듯 그녀의 발을 물고는 멋쩍은 듯이 앉아 있다.
(점프)
부엌 불을 끄는 정혜.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는다.
TV가 작은 소리를 내며 켜져 있다.
정혜, 리모콘을 들고 TV를 끈 다음 소파에 눕는다.
고양이가 부엌 쪽에서 정혜를 바라본다.
정혜, 누운 채 고양이와 마주 보다가 이리와, 하듯이 손으로 부른다.
고양이는 움직임 없이 정혜를 보다가 그냥 그 자리에 누워버린다.
82. 우편취급소 (낮)
또 다른, 평범한 우편취급소의 일상.
정혜, 서류철을 들고 바닥에 놓인 우편 자루와 바구니들을 하나씩 체크한다.
정혜 (동료 1에게) 바구니 좀 신청해줄래?
동료 1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알았어.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신수동 인데요.
초등학교 아이들이 동료 2 앞에서 떠들고 있다.
아이 1 어어? 9집 나왔단 말이에요.
동료 2 안나왔다니까 그러네. (다른 손님에게 우편번호부를 건네며) 죄송하지만 우편번호 좀 찾아서 써주실래요?
아이 2 인터넷에 나왔다고 떠있다니까요.
동료 2 내일 모레 와. 응? 혹시 다 팔려도, 내가 니네 꺼만 꼭 남겨둘게.
아이 1 아이씨. 나왔다는데...
출입구 옆 탁자에는 소장이 한 남자 손님 의 소포 상자를 대신 묶어주며 이주사와 이야기를 한다.
이주사 언제 퇴원이야?
소장 한... 다음 주쯤.
이주사 괜찮은거야, 뭐야. (커피를 마신다)
소장 의사들 맨날 하는 얘기 있잖아. 절대 안정. (손님에게) 여기 이렇게 둘러서 테이프 붙이세요.
이주사 (커피를 마시고 얼굴을 찡그리며)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달어.
단골 여직원이 들어와 카운터에 우편물을 놓고 작은 소포 상자를 따로 내민다.
동료 1 (작은 소포 상자를 보며) 뭐야 이건?
여직원 요거 따로 특급. (자기가 직접 저울에 올리며) ...사천 팔백원이네.
동료 1 선물이구나? (이름과 주소를 보며) 누구야?
여직원 우리 사장님꺼다, 사장님.
동료 2 (창 밖을 보며) 딱지 뗘요, 딱지.
이주사 뭐? (창 밖을 보고) 에이 참. (커피를 소장에게 주고 뛰어나간다)
83. 우편취급소 부근 / 거리 (저녁 무렵)
퇴근 길.
거리로 나선 정혜와 동료 1, 2.
동료 1, 2가 정혜에게 손을 흔들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건널목에 홀로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정혜.
문득 길 건너편 인도에 서있는 - 작가인 듯한 - 남자를 본다.
남자는 정혜를 보고 어색하게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는데, 정혜는 못 본 척 시 선을 다른 곳에 둔다. 흘깃 남자 쪽을 보면, 남자가 손짓으로 자기가 건너가겠다는 표시를 하고 있는데...
정혜, 잠시 서있다가 신호가 바뀌자 갑자기 그 옆 정류장에 막 정차한 버스로 뛰어 간다.
84. 마을 버스 (저녁 무렵)
버스에 올라탄 정혜.
창가 좌석에 걸터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정혜의 뒤, 차 유리를 통해 건널목을 건너며 버스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 다.
다음 정류장 안내 방송이 흐르자 정혜, 정차벨을 누른다.
85. 거리 (저녁 무렵)
버스에서 내린 정혜.
다시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점프)
중학교 담 옆을 지나고 있는 정혜.
철망 울타리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며 걸어가다가 학교 운동장 쪽을 응시하며 걸음을 멈춘다.
인써트 B-5. 중학교 교정 (낮) - 기억
(프롤로그의 연결)
교복을 입은 어린 정혜, 어두운 표정으로 운동장에 서서 교문 쪽으로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문득 정혜 쪽을 돌아보는 엄마, 다시 되돌아온다.
엄마 (정혜 앞에 다가와서 다정하게) 괜찮아. 가자, 집에. (미소지어 보인다)
엄마, 정혜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86. 호프집 (저녁)
동료들과 함께 오던 호프집.
계산대 앞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정혜, TV에 시선을 두고 있다.
화면에 보여지는 브레인 서바이버.
주인 아주머니가 포장된 치킨을 들고 와 정혜의 테이블 위에 놔둔다.
아주머니 (TV에 시선을 두며) ...팔. 칠?
TV 화면에 나오는 정답은 9, 7 이다.
맞고, 틀린 사람들로 요란한 모습이 TV 안에서 계속 비춰지고...
아주머니 에? 언제 구가 있었냐? (정혜에게) 땅콩 좀 더 줄까?
정혜 아니요. 됐어요.
아주머니 천천히 마시고 가요. (하곤 계속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걸어간다)
정혜, 병을 들어 남은 맥주를 잔에 따른다.
구석 테이블에는 여러 명의 남녀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다들 말이 많고 상당히
시끄럽다.
뭔가 안좋은 일이 있는 듯 고성이 간간이 오고 간다.
갑자기 누군가 주먹으로 탁자를 퍽, 내리쳐서 컵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박살난다.
정혜, 흠칫 놀라며 그들 쪽을 돌아본다.
한 남자가 일어서서 반대 편 남자를 노려보고 있다.
애써 외면하려고 다시 시선을 TV로 돌리는 정혜.
아주머니 (놀라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며) 뭐야 이게. 왜들 그래.
다시 고성이 오가다가 와장창 하는 소리.
남자 두 사람이 뒤엉키고 주변 친구들이 말리고... 아수라장이다.
아주머니 싸울려면 나가서 싸워! 남의 가게에서 이게 뭐여?
친구들, 두 남자를 떼어놓으려 안간힘이고 옆에 있던 여자는 말리다가 울기까지 한 다.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둘 중 한 남자가 친구 몇 사람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면 서 싸움은 중단되고, 그 소동 사이에 호프집 안에 남겨진 다른 한 남자가 정혜의 앞자리에 앉아있게 된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리둥절한 정혜.
남자, 울분을 삭히려는 듯이 크게 숨을 쉬고는 정혜가 마시고 있던 맥주 잔을 다짜 고짜 가져가 들이킨다. 싸움을 말리던 다른 친구가 급히 계산을 하고는 다가와 정 혜 앞에 앉아있던 남자의 팔을 잡아끈다.
친구 야, 일어나 임마. 왜 남의 자리에 앉아 있어. 나가자.
남자 잠깐만. 잠깐 기다려 봐. 한잔 만 더 하고. (정혜를 보며) 괜찮죠?
친구 (정혜에게) 미안해요. 많이 취했거든요. (남자에게) 가자니까.
남자 아, 씨발. (팔을 뿌리치며) 너나 가.
친구 미치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난 몰라. 네 마음대로 해. (주인 아주머니에게) 아줌마, 이 자식 말이에요. 경찰을 부르든지 그러세요.
남자 그래. 경찰 불러. (맥주를 들이킨다)
친구 (나가다가 돌아서서 남자에게) 너, 그렇게 살지 말아라. 응?
남자 너나 잘 해, 새끼야.
아주머니 그냥들 가버리면 어떡해! 저 총각 데리고 가야지!
친구, 진저리를 치며 그냥 나가버린다.
남자 (혼잣말로) 그래. 가라, 가. 좆나게 재수 없는 것들...
정혜 (남자를 바라보며) ....
남자 (정혜의 시선을 의식하고) 아이, 미안합니다. (한숨 길게 쉬고) ...괜찮죠?
아주머니 괜찮긴 뭐가 괜찮어! (정혜에게) 미안해. 오늘은 우리 언니가 그냥 가야겠 네. 돈 안받을테니까 그냥 가요.
남자 딱. 딱 맥주 한 병만 먹고 나갈게요. 응? 아줌마... 좀 봐주라.
아주머니 (언성이 더 높아지며) 보자보자 하니까 이 사람이...
아주머니, 남자를 노려보다가 계산대로 가서 전화를 든다.
정혜 아주머니.
아주머니 응? (하며 정혜를 보다가 전화에) 파출소죠? 여보세요. (소리를 듣다가)
이거 왜 전화를 안받아... (하며 정혜를 보는데)
정혜 그냥요... 맥주 한 병만 더 주세요.
87. 호프집 앞 (밤)
정혜가 치킨 봉투를 들고 호프집을 나선다.
아주머니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오늘 미안해 정말. (들어가며) 에이, 이게 무슨 봉변이야...
정혜, 돌아서서 가려는데 길 한쪽 인도에 걸터앉아있는 남자(앞 씬의)의 모습이 보 인다. 커다란 등산용 배낭에 기댄 채, 술이 과한 듯 휘청거리는 남자.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남자를 바라보는 정혜.
88. 모텔 방 (밤)
조악한 인테리어의 모텔 방.
바닥에 서로 떨어져 앉아있는 정혜와 남자.
낡은 선풍기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고, 남자의 곁에 빈 맥주캔이 두 세개 찌그 러져 있다.
술기운에 흐느적거리면서도 계속 뭔가 지껄이고 있는 남자.
남자 치악산, 치악산... 가봤어요?
정혜 아뇨.
남자 그.... 참. 인생 헛사셨구만. (사이) 거기 내 친구가 하는 산장이 있는데.
내 친구가... 그 뭐지? 대기업 다니다가 때려치고 산에 갔는데.
사과나무를 심었어. 사과나무. 맞아 참. (갑자기 배낭을 뒤진다)
남자, 배낭에서 사과가 든 봉투를 꺼내 놓는다.
(점프)
남자, 등산용 칼로 사과를 깎고 있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위태위태 하다.
정혜 (불안하게 보고 있다가)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남자 (아니라는 듯이 손을 저으며) 내가. 내가 말이야. 깎는 거 하난 확실해요. 봐봐요. 봐. 이게 껍질이 끊어지지 않게 말이지...
정혜 그러다 손 다치면...
남자 손? (자기 손을 펴보며) 손 다쳐봤자지 뭐. ...안그래요? (칼을 처들며) 내 가 사실은 (손목 긋는 시늉을 하며) 탁, 하고 잘라버릴려고 그랬거든?
정혜, 흠칫 놀란다.
남자 (흐트러진 눈으로 정혜를 보다가) 놀랬구나. 그렇죠. 놀랬죠?
정혜 ....
남자 에이. 내가. 내가 취한 놈처럼 보여요? 그래요?
정혜 아니요.
남자 사실 취했어 뭘. 아주 많-이.
(점프)
남자, 남은 맥주를 들이키고 캔을 손으로 찌그려뜨린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혜.
남자 ...가요?
정혜 (남자를 내려다보며) 화장실에요.
남자 (두리번거리며) 지금 몇 시지?
정혜, 손목을 보는데 자신도 시계가 없다.
남자 아니다. 아냐. ...누가. 어떤 인간이 그랬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안본다 구.
89. 모텔 방 / 욕실 (밤)
세면대에 물을 틀고 변기에 걸터앉는 정혜.
길게 한숨을 내쉰다.
인써트 B-6. 정혜의 옛 집 (낮) - 기억
정혜가 어렸을 때 살던 아담한 개인 주택.
한 여름 매미 소리.
욕실에서 나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며 복도를 걸어가는 어린 정혜.
정혜, 복도 끝에 서서 거실 쪽을 흘깃 본다.
거실엔 엄마와 고모, 고모부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 욕실의 정혜.
일어서서 세면대 물을 잠그고 거울을 본다.
인써트 B-7. 정혜의 옛 집 / 정혜의 방 (낮) - 기억
정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선풍기를 틀고 침대에 눕는다.
엄마 (소리) 좀 있어. 고모랑 목욕 갔다 올게.
현재. 욕실.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여는데 남자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멈칫 하고 문 뒤에 서있는 정혜.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다.
남자 (소리) 네가 그러면 내가 어떡해야 되는 건데. 응? ...너 죽으면. 끝나는 거 야? 그러면 편해질 거 같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울먹이며) 하지마. 하지 마... 네가 그런 소리하면 난... (말을 잇지 못하고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정혜의 시선으로, 고개를 떨구며 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하는 남자가 보인다.
그런 그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는 정혜.
90. 모텔 방 (밤)
정혜가 남자의 곁에 조용히 다가와 선다.
남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손을 뻗어 남자의 머리를 살며시 만져주는 정혜.
인써트 B-8. 정혜의 옛 집 / 정혜의 방 (낮) - 기억
침대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는 어린 정혜.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고 보면 침대 끝에 앉아있는 남자의 실루엣.
현재. 모텔 방.
남자의 소리는 조금씩 더 서럽게 들려온다.
정혜, 천천히 침대에 앉아 남자를 등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는다.
인써트 B-9. 정혜의 옛 집 / 정혜의 방 (낮) - 기억
고통스런 표정의 어린 정혜.
정혜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남자의 불쾌한 이미지들.
정혜,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써보지만 역부족이다.
침대 구석으로 얼굴이 묻혀버린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한줄기 흘러내린다.
현재. 모텔 방.
남자의 서글픈 소리는 조금씩 커졌다가 작아지고를 반복한다.
그를 달래듯이 뒤에서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는 정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인써트 B-10. 정혜의 옛 집 / 정혜의 방 (낮) - 기억
비틀어진 정혜의 시선으로.
바닥으로 흘러 흐트러져있는 침대 시트.
조금씩 소음을 내며 회전하는 선풍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엷은 햇빛.
현재. 모텔 방.
(시간 경과)
침대에 누워 있는 정혜와 남자.
남자는 울다가 지친 듯 옆으로 누워 잠이 들어있고, 정혜가 그의 뒤에서 어깨를 감싸 안고있다.
정혜, 남자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는다.
(점프)
바닥을 정리하는 정혜.
캔과 사과 등을 봉투에 담아 휴지통에 넣고 자신의 가방을 들려다가 문득 쟁반 옆 에 놓인 등산용 칼을 물끄러미 본다.
정혜, 침대에 자고 있는 남자를 돌아보고는 손수건을 꺼내 칼을 싸서 자신의 가방 에 넣고 나간다.
91. 모텔 앞 거리 (늦은 밤)
모텔을 나와 거리를 걷고 있는 정혜.
먼발치로 새벽 옷시장 건물의 거대한 네온들이 보인다.
92. 동대문 시장 (늦은 밤)
활기에 찬 시장 거리.
정혜, 노점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다니며 한가롭게 구경을 한다.
(점프)
악세사리를 파는 노점 앞에 서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귀걸이를 이것저것 집어 들고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노점에 비치된 작은 거울에 대고 살펴보는 정혜.
(점프)
노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떡볶이를 먹고 있는 정혜
갑자기 들리는 ■■삼천원, 삼천원■■ 소리에 떡볶이를 찍어먹던 이쑤시개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정혜.
그녀의 목에는 방금 산 듯한 은목걸이도 하나 걸려 있다.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
93. 아파트 단지 (새벽 녘)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지하 통로로 내려가는 정혜. 노상 시장 입구에 멈춰 선다.
일찍부터 백열 전구를 밝히고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몇몇 가게들.
작고 야윈 체구로 포장을 걷어내며 힘겨워하는 야채 가게 아주머니.
그 모습이 서글프게만 보이는데...
94. 정혜의 아파트 / 거실 (이른 새벽)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있는 정혜.
창 밖으로 어스름하게 새벽이 밝아온다.
정혜, 고개를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인써트 A-8. 정혜의 아파트 / 부엌 (이른 새벽)
잘게 찢어놓은 치킨을 맛있게 먹고 있는 고양이.
95. 정혜의 아파트 / 엄마의 방 (새벽)
화장대 앞에 앉은 채 엄마의 방을 둘러보는 정혜.
서랍을 열고 브러시를 꺼내 머리를 빗다가 멈추곤 브러시를 유심히 본다.
듬성듬성 엉켜있는 흰머리.
흰머리를 한올한올 풀어 화장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정혜.
인써트 B-11. 병원 / 입원실 (낮)
병색이 짙은 엄마가 침대에 앉아 있고, 정혜가 곁에서 머리를 빗겨 주고 있다.
두 모녀의 다정한, 마지막 모습이다.
현재. 엄마의 방.
책꽂이에서 스케치북을 꺼내는 정혜.
96. 정혜의 아파트 / 거실 (새벽)
정혜, 스케치북을 자신의 가방에 넣는다.
(점프)
자신이 하고 있던 은목걸이를 벗어 고양이의 목에 둘러준다.
97. 아파트 앞 길 (새벽)
품에 고양이를 안고 아파트를 나선 정혜, 화단 쪽으로 걸어간다.
그녀가 처음 고양이를 보았던 자리 앞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놓는다.
봉투에서 고양이 사료를 잔뜩 꺼내 화단 여기저기에 쌓아놓는다.
고양이가 정혜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정혜, 일어서서 잠시 보다가 뒤돌아서 걸어간다.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서는 정혜, 마음이 아픈 듯 눈을 감는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정혜 ...미안해.
98. 고급 빌라 단지 앞 (이른 아침)
한적한 빌라촌 길을 따라 걷다가 어느 경비실로 다가가는 정혜.
차단기가 내려진 입구의 경비실 창으로 경비가 고개를 내밀고 정혜를 본다.
정혜, 경비에게 뭔가를 묻는다.
(두 사람의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
99. 체육 공원 (이른 아침)
육상 트랙과 잔디 축구장이 있는 현대적인 시민 공원.
트랙 사이드의 스탠드에 앉아있는 정혜.
조기 축구를 하러 모인 사람들이 축구장 중앙에 모여 몸을 풀고 있고, 트랙에는 서 너 명이 조깅이나 경보를 하고 있다.
트랙을 돌던 사람들 중에 먼발치로 고모부의 모습이 보인다.
땀을 흘리며 트랙을 뛰고 있던 고모부, 문득 정혜를 보고 속도를 늦춘다.
(점프)
스탠드 뒤편. 한적한 산책로의 벤치에 앉아있는 고모부.
정혜가 천천히 걸어온다.
고모부에게 다가온 정혜, 말없이 고모부가 앉아있는 벤치 한 쪽 끝에 앉는다.
두 사람, 모두 정면을 응시한 채 잠시 말이 없다.
고모부, 뭔가 얘기하려는 듯 하다가 그만 둔다.
정혜,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한동안 선 채로 망설이던 정혜, 벤치를 돌아 고모부의 뒤로 간다.
가방에 손을 넣고 뭔가를 꺼내려던 정혜, 잠시 멈추고 고모부의 뒷모습을 본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손을 모은 채 움직임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고모 부. 그를 바라보던 정혜, 시선을 돌린다.
밝아오는 하늘 밑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황량한 바람 소리.
평화로운 공원의 전경.
가방 속에서 조금씩 떨려오던 정혜의 손.
풍경에 고정되어있던 정혜의 시선이 다시 돌아오고.
백에서 나온 정혜의 손에 등산용 칼이 쥐어져 있다.
칼을 싸고 있던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져 바람에 밀려간다.
천천히, 그러나 극도로 흔들리는 정혜의 표정.
(점프)
고모부를 뒤로하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정혜.
발을 헛디디며 중심을 잃고 칼을 놓친다.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칼을 줍다가 아! 하고 다시 칼을 놓친다.
(점프)
휴지통에 버려지는 칼.
그 뒤편 멀리, 벤치에 굳은 듯이 앉아있는 고모부가 보인다.
100. 체육 공원 / 화장실 (이른 아침)
공원 화장실의 세면대 앞.
정혜, 흐르는 수돗물에 손을 대고 있다.
손가락에서 - 칼에 베인 듯 - 피가 스며나온다.
물을 잠그고 거울을 보는 정혜. 애써 담담한 표정인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당황한 정혜,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다시 물을 틀어 천천히 세수를 하다가 한모금 물을 마시는데 목에 걸린 듯이 기침을 한다.
한동안 기침을 하다가 멈추는 정혜,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는다.
큭,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정혜.
한숨을 크게 쉬어보고 감정을 억누르며 이성을 찾으려 해보지만, 한꺼번에 터져나 온 슬픔을 막을 길 없다.
화장실 안에 조그맣게 울려 퍼지는 정혜의 울음 소리.
오랜 시간, 표출되지 못했던 그녀의 모든 감정이, 그녀의 작은 흐느낌에 실려 토해 내진다.
101. 거리 (아침)
출근길의, 활기찬 거리.
정혜가 거리를 천천히 걸어간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모든 것을 비워버린 듯한 초연한 표정이다.
그녀의 곁으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자동차들이 스쳐 지나간다.
한동안 느리게 걷다가 멈춰 서는 정혜.
102. 아파트 단지 / 버스 정류장 (아침)
마을 버스에서 급히 내리는 정혜.
아파트 단지 쪽으로 뛰어간다.
103. 아파트 단지 (아침)
아파트 단지를 지나 코너를 돌아 뛰어가는 정혜.
104. 아파트 앞 길 (아침)
고양이를 놔주었던 화단 쪽으로 달려가는 정혜.
허리를 낮추고 이리저리 나뭇가지를 헤쳐가며 애타게 고양이를 찾는다.
(점프)
다른 화단 쪽에서도 찾아보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정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낙심한다.
남자 (소리) 저...
남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정혜.
그녀의 뒤에 서있는 - 작가인 듯한 - 남자.
남자 일하시는 데 갔더니 안나오셨다구 그래서...
정혜, 당황하는 표정으로 일어선다.
남자 (뒷머리를 긁적이며 우물쭈물하다가) 그날은요... 정말 미안했어요.
알람을 맞춰놓고 잠깐 잠이 들었었는데...그만...
(멋쩍게 웃으며) 제가...한번 잠이 들면 완전 기절하는 스타일이어서...
정혜, 남자의 시선을 피한 채 대꾸 없이 서있다.
남자 저 혹시...괜찮으시다면...
어색하게 마주 서있는 두 사람 모두 시선을 어디 두어야할지 모르고 있다.
극도로 긴 침묵이 흐르고.
남자 .....정혜씨.
정혜,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채 표정을 바꿔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그렇게, 흔들리는 정혜의 표정에서 암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