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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창세기 2:18~25 둘이 한 몸을 1.06.45 2007.8.1
26.08.30(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는 나머지 모든 천하만물을 다 창조하신 다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왜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셨는가?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므로 사람이 어떤 삶을 살기를 기원하셨는지 지난 시간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너희들 아무 데서나 살아라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위해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너 혼자 에덴 동산을 찾아가거라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에덴 동산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에덴으로 인도해 가기 원하시는 것이죠.
에덴 동산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잃어버렸던 실낙원했던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덴을 회복한다고 하는 것은 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지난 시간에 함께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을 결혼시켜 주시는 가정을 이루게 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
누가 판단하시기에 좋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판단하시기에 우리는 늘 우리가 판단해서 좋고 나쁜 것을 따집니다.
그런데 신앙은 뭔가 하나님 판단 기준에 좋은가 하나님 판단 기준에 좋지 않는가 그것이 신앙인 것이죠.
그 판단 기준을 어떻게 갖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갖게 됩니다.
따라서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말씀이 채워져 있지 않고서는 결국은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호 불호의 기준이 나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단 말이죠.
문제는 내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은 늘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다를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개역 성경은 독처하는 것이 이랬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좋지않다고 하셨습니다.
나쁘다고 하신 게 아니죠. 좋지 않다는 거여요. 그러니까 사람이 혼자 사는 것 나는 여자인데 남자인데 나는 독신으로 혼자 살아 나쁜 거 아니죠. 그것도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판단에는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거여요.
그게 바로 남자와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는 거라고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줘 주십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도 좋지만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는 게 왜 더 좋겠는가?
우리 창세기 1장에서 한번 확인했던 적이 있죠.
창세기 1장 27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남자만 창조하신 것도 아니고 여자만 창조하신 것도 아니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하나님은 모성과 부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라고 우리가 배웠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남성성을 가진 남자와 여성성을 가진 여자가 한데 어우러져 삶으로 해서 그 두 양성이 한데 조화를 이루므로 우리는 모성과 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삶 속에 더불어 회복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누가 지어요. 내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내가 누구를 만나서 결혼을 했던 그건 내가 선택한 것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결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결혼의 동기도 하나님 결혼의 목적도 하나님 결혼 과정에서 결혼이 계속되도록 하는 모든 원천도 하나님이세요.
사람들은 내가 좋아서 내가 결혼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생각은 늘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좋았는데 어제 좋았던 것이 오늘 증오의 원인이 되기도 해요.
어제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은 보기도 싫어지는 것이 있단 말이죠. 결혼하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면서 결혼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가 상대를 다 알아서 결혼한다는 착각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저 남자 다 안다는 거예요.
내가 저 여자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이제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큰 착각이죠.
결혼은 상대를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해서 한 지붕 밑에 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상대를 알기 시작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내 부모님도 내가 내 부모님을 평생 모시고 살면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몸으로 낳은 자식인데도 내 자식에게 저런 부분이 있구나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단 말이죠.
어떻게 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남의 부모 슬하에서 살던 남인데 어떻게 내가 다 알고 결혼하겠습니까? 그런데 알아서 결혼한다고 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거죠.
실은 모르고 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하는거죠.
결혼해서부터 비로소 상대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 결혼이기 때문에 결혼하고 보면 내가 상상치도 못한 모습이 상대에게 있는 게 보여요.
아 내 남편이 이런 사람이구나 내 아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그때 내가 결혼의 주체가 되면 싫으면 돌아서면 그만이어요
하나님이 그 결혼의 주체가 됐을 때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에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서로가 조화를 이루어 가는 가운데에 다른 점이 함께 동화되고 서로의 모난 부분이 서로 갈아지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아름다운 형상이 회복되어 가는 것이죠.
결혼은 시작도 과정도 끝도 하나님이 주체이실 때에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죠.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든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역할이고 남자는 여자의 도움 없이는 못 사는 존재인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밝혀주셨습니다.
돕는 배필의 의미에 대해서는 24절을 볼 때 또 다시 더 상세하게 살펴보십시다.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사람만 흙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과 온갖 새들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차이가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죠 그죠 똑같이 흙으로 되었는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기 당신을 호흡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뭐가 되는 거예요.
짐승 같은 사람이 되는 거죠. 공식이 그렇잖아요. 짐승 이꼴 흙 사람 이꼴 흙 플러스 생긴데 생기만 빼버리면 사람 이꼴 짐승이 된단 말이죠.
그래서 가끔 아이 짐승 같은 사람 이런 표현을 하는데 사람을 보고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짐승이 모독감을 느낀다고 그랬죠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생기를 빼면요 인간은 짐승 같은 것이 아니라 훨씬 못합니다.
10:43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짐승의 세계는 강간이 없답니다. 짐승들은 대량 살상무기를 만들지 않아요. 짐승들은 개미처럼 정말 곤충 미물이 아니고는 1년씩 먹을 것 싸놓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 먹을 걸로 족해요. 우리가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가지 않으면 동물이나 곤충보다도 자식을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식을 되게 크게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뱀은 두꺼비를 먹으면 죽는답니다. 그런데도 두꺼비가 알을 베면 뱀이 자기를 잡아먹지 않을 수 없도록 그 앞에서 약을 올립니다.
그럼 뱀은 내가 저거 먹으면 죽는 줄 아는데도 약이 올라서 먹는다고 그래요.
왜 두꺼비는 자진해서 그렇게 자살하는가?
그 암 두꺼비 뱃속에 있는 알은 뱀의 뱃속에서 부화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에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사랑해서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히면서까지 자기 자식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할 그런 어머니가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간다는 게 뭐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그죠 성령님의 핏속에서 이 말씀을 쫓아서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지 아니하면 짐승 같은 사람은 고사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짐승보다 못한 삶을 일평생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죠.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갔으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는데 그 이름을 어떻게 짓나 보시려고 보시려고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단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맡겨놓고 그냥 네 마음대로 하라 내버려 두시지 않는단 말이죠.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여기에 쓰여있는 히브리말이 라아라고 하는 용어가 동사가 쓰여 있는데, 이건 단순히 그냥 뭐 한번 본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요 주목한다. 주시한다. 관찰한다. 숙고한다.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주시하시고 주목하시고 관찰하시는 분이세요.
이 사실을 알면 우리가 함부로 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창세기 6장 5절 말씀이에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우리는 때로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한가 하나님은 뭐하시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다 보셔요
창세기 6장에서 이 세상이 악할 뿐임을 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물로 심판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윗의 고백입니다.
시편 139편 12절 말씀이에요.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뭘 봅니다. 사실은 빛이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죠. 내 눈앞만 볼 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는 빛과 어둠의 구별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여러분 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겠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빛과 어둠이 구별이 없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자기 구중궁궐 속에 남의 여자를 데려다 놓고 잤거든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신다고 생각했으면 그런 짓 했겠습니까?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런 죄를 짓고 처절하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나서 다윗이 깨달은 것이 하나님 앞에는 흑암과 빛의 구별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내가 은밀하게 한 것도 한 것도 그분은 다 보셨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있죠. 그죠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셨다 진리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그보다 더 위로가 되고 그보다 더 큰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정말 진리를 쫓아 살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불이익도 당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없이여김도 당하고 내가 이렇게 산다고 해서 누가 알아줄까 내가 어리석은 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는 거예요.
내가 다 안다는 겁니다.
네가 얼마나 진실되게 살아가려는지 내가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는 빛과 흑암의 구별이 없다라고 하는 그 다윗의 시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139편 1절에서 4절이에요.
여호아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나이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얼마나 진리의 길을 쫓으려고 하는지 주님 아신다는 거예요.
내가 이제 밤에 어떤 자리에 눕고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지 얼마나 바른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지 주님께서 아신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행하려고 하는 나의 행위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라아 보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오늘도 진리를 쫓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때가 되면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내 삶을 그분이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책임져 주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살아계신 분 아니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분을 믿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벳세다 벌판에서 예수님께서 남자 장정만 5천 명을 먹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지 않습니까?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그때는 이미 해가 졌잖아요. 그죠 해가 져서 뭘 밥을 먹으러 갈 수도 없고 빵을 사올 수도 없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거든요.
다 끝나고 나면 이제 밤이 됐겠죠. 그죠 사람들은 흩어져 가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20:2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홀로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죠.
마가복음 6장 48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가는 그들이 풍랑을 만나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밤 사경은 지금 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에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보시고 갈릴리 바다를 걸어서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하고 환영한 거 아니죠. 뭐라 그랬습니까? 귀신이 온다고 다 겁에 질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셔요
내니 두려워 마라 내니 두려워 마라
내가 지금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어도 우리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향해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마라 그러면 여러분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이시므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시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나를 보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24시간 나를 보고 계시는 그분을 내가 보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내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 앞에 서 계시는 그분을 볼 수 있는 영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겠죠.
어떻게 하면 그 영안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면 하나님의 생기 속에 살면 말씀 속에 깨어있으면 영이신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거죠.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시는데 아담이 이름을 참 잘 지어요. 그저 보고 이거는 코끼리 이거는 호랑이 이건 고양이 아주 이름을 탁탁 지었단 말이죠.
히브리말로 이름을 샘(sham)이라고 그러는데요. 그 샘(sham)이라고 하는 말 자체는 단순히 외양의 호칭이라는 말이 아니라 본질의 호칭이라는 말이에요. 본질의 호칭
여러분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양화진이 합정동이에요. 합정동 합정동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아십니까? 합칠 합 자에다가 우물 정 자예요. 그래서 이 동네 물이 많습니다.
그 우리 홍보관 짓는데 지하실 파는 공사 지하실 공사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까? 그 물이 많이 나기 때문에 그와 같은 토양 속에서도 아무 문제 없이 짓기 위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죠
누가 합정동이라고 지었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토양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 지었습니다. 그죠
사람들이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비로소 불렀더라 그 에노스의 이름의 뜻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에노스 단순한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이 그때 생긴 것이죠.
여러분 무엇의 이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의 본질을 내가 깨달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는데 아담이 모든 생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지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것의 본질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신 것을 의미하죠.
죄가 뭡니까? 사탄의 유혹이 뭡니까? 본질을 못 보게 하는 겁니다. 아담은 분명히 본질을 보고 이름을 짓던 사람인데 사탄이 가서 유혹하지 않습니까?
사탄의 유혹을 받고 나니 여자가 먼저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요.
그 선악과가 아무리 먹기 좋아 보이고 보기 좋아 보여도 선악과의 본질은 뭡니까? 죽음이에요.
그 본질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본질을 못 받습니다. 알고 있던 건데 사탄의 유혹을 받고 나니까 본질이 안 보여요. 그래서 여자가 먹고 남자에게 줬죠 남자도 먹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 열매를 먹으면 네가 죽는다 그 본질이 죽음인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들었던 장본인은 아담이란 말이죠. 그런데도 아담은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는 의미를 또 하나 깨닫게 되죠.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외양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죠.
여러분 부정 부패 비리 불의 이런 이야기가 우리 주위에 바닥에 많지 않습니까?
누가 부정하고 누가 불의를 저지릅니까?
누가 비리를 범해요. 뭔가 쉽게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쉽게 얻으려는 사람들이 그런 비리를 저지릅니다.
그런데 그 비리와 부정과 불의의 본질은 뭐예요?
그것은 결국 죄입니다. 결국은 뿌린 대로 거두게 돼요. 하나님께서는 결코 간과하시지 않는단 말이죠.
따라서 아무리 아름답게 보여도 그 본질이 죄요 죽음이라면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되고 아무리 고통스러워 보여도 그 본질이 선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우리는 울면서도 씨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20절입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이제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서 여자를 만들어 주시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신부감을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여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뒤에 가서 보시겠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그저 갈빗대 하나 빼시고 전지전능하시니까 안 아프게 해주시고 이제 너 봐라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예쁜 네 아내를 만든다 잘 봐라 보여주실수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안 보여주셨습니다.
깊이 잠들게 하시고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여자를 만드셨어요.
그래서 여러분 남자들은요
여자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여자의 숨겨진 능력을 남자들은 평소에 몰라요. 여자 자신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세요. 남자가 밖에 나가서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부도나고 어디 피신했다 아니면 혹은 몸이 구금되었다. 누가 수습해요 여자가 합니다.
여자가 여자가 어디에 나가서 무슨 뭐 사채 빌려 쓰고 뭐 돈놀이 하다가 폭삭 망했다. 대부분 남자들은 수습 못 하죠.
가정이 정말 깨워질 때는 여자들이 버텨내요 말하자면 여자는 한 가정을 지키는 하나님의 히든 카드입니다. 평소에는 남자도 모르고 여자도 몰라요.
30:46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르게 해두셨을까?
나중에 가서 살펴보시겠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시지 않습니까? 여자가 자기에게 얼마나 능력이 많은지를 알면 교만해지겠죠. 그죠 자기 선을 넘어서겠죠.
그래서 위기의 순간이 아니고는 모르도록 하나님께서 하셨고 왜 남자도 모르게 하실까요? 여자에게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알면 남자 가운데에는 애당초 처음부터 여자 의존적으로 살려는 사람이 아마 생길 겁니다.
남자가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아니하면 여자에 의해서 가정은 꾸려질 수 있죠.
그러나 그 가정 속에서 자라는 자녀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사회인으로서의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남자는 남자로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게끔 남자도 여자의 깊은 능력을 알지 못하게 하시죠.
그러나 가정의 위기가 오면 여자들이 나서서 다 해결을 해요.
21절
남자가 깊이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셨는데 그 여자도 흙으로 지으시면 되잖아요.
아니면 여자니까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보석으로 지어주시던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음 받은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는 어떤 존재여요. 여자에게 남자는 자기 생명의 근원입니다.
여러분 여자가 결혼할 때 내 남편을 아 하나님께서 내게 짝지어 주셨고 내 생명의 근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결혼하면 삶이 달라질 수 있겠죠. 그죠
에베소서 5장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우리가 주님께 복종하듯이 복종해라
왜 우리가 주님께 복종해요.
그분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 있으니까 복종해라 남편을 네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복종해라
뼈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탱의 기능이죠. 만약에 지금 제 등에 등뼈가 하나 또 없다면 제가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문어처럼 이렇게 주저앉아 있겠죠. 뼈는 지탱입니다.
두 번째 기능은 보호죠
뼈가 속에 있는 장기들을 다 보호해 줍니다. 그런데 갈빗대가 보호해주는 게 뭐예요? 제일 중요한 심장입니다.
만약 이 갈비뼈가 없으면 우리 심장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심장을 보호하는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는 자기 심장입니다. 내 생명이에요.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8절에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나 아닌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왜 내 아내는 내 생명이니까. 만약에 결혼하는 남자가 나와 결혼하는 여자는 바로 내 생명이야 내가 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내 생명을 사랑하고 지키는 거야 이것을 깨닫고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면 그 삶이 달라지겠죠.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기에도 부부가 살아가는데 우리가 절대적으로 알아야 될 참 귀중한 메세지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에게 가셔서 아담아 아담아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좋은 배필을 만들어 뒀어 아담을 데리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자를 남자에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 방향이 중요합니다. 결혼은 여자가 남자한테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에요.
여자 결혼은 여자가 남자에게 가서 그 집 사람이 되는 거여요. 요즘은 여자들이 남자를 데리고 갑니다. 제가 새 신자반 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여자들이 결혼해서 신랑 형제지간을 끊어놔요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전부 친정에서 놀기 때문에 신랑의 형제지간은 다 끊어지는 겁니다. 뭘 깊이 생각할 건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가 내 남편을 데리고 친정 가서 놀면 난 편하겠죠. 그죠 내 자식은 어떻게 할까요?
내 자식도 처가 집 가서 놀겠죠.
그러면 세대마다 단절됩니다.
인간의 역사는 쇠사슬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고리여요. 아브라함의 고리에 이삭이 묶이고 이삭의 고리에 야곱이 묶이고 야곱의 고리에 유다가 묶이듯이 계속 고리가 묶여 가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모든 세대가 다 처갓집에 가서 놀아보셔요 전부 다 단절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부부가 되게 하셨다고 하면 그 할아버지에서부터 아버지를 이어서 손자 증손자 계속 연결이 될 때 한 혈연 공동체 속에 속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그 속에 일어나지 않겠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다르게 이야기하면 뭐예요?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손자의 하나님이잖아요.
그것은 남편의 가계를 따라갈 때에만 그 혈연관계가 계속됩니다. 세대마다 처갓집으로만 가면 다 끊어지잖아요.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가셨어요.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여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우리 성경에는 번역이 안 됐는데요. 그 다음에 이것을 또 있습니다.
이것을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히브리말로 조트인데 이는 그러니까 디스 영어로 디스 이것 아담이 세 번을 반복했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것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 의해서 취하였으니 이것을 여자라 부르리라
하나님께서 여자를 데리고 오셨을 때 얼마나 아담이 감격했으면 이것을 이것을 이것을 세 번을 반복했겠습니까?
내 살중의 살이고 뼈 중에 뼈다 내 생명이니까 그러면서 본래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이 이름 짓는 거잖아요.
즉석에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본래 아담 이름은 아담이잖아요. 그죠 근데 아담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사람 아담은 그 첫 번째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보통 명사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해요. 우리가 다 아담이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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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아담이 여자를 보고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음 즉 여자라 하리라 히브리말로 남자는 잇쉬고 여자는 잇샤라고 합니다.
그런데 잇쉬라고 하는 이 말 뜻 속에 남편이라는 말도 있고 잇샤라고 하는 말 뜻 속에 아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아내와 여자가 완전히 틀리지않아요. 여자지만 처녀도 있을 수 있고 아내가 된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남자지만 남편인 사람도 있고 총각일 수도 있는데 히브리말은 잇시가 남자도 되고 남편도 되고 잇사는 여자도 되고 아내도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부르리라 이걸 다르게 번역하면 남편에게서 취하였은즉 아내라 부르리라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아담은 여자가 탁 오는 순간에 아 아내가 되면 더 좋은 사람 하나님께서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삶 같이 사는 삶 그것을 알고 지금 잇사라는 이름을 지어준 거죠.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또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로 가지 않습니까? 방향은 여자가 남자에게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래 남자가 잘 왔구나 여기에서 우리 부모님하고 편안하게 잘 살아라 그게 아니라 남자는 자기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돼 그리고 이제는 내 갈빗대 내 생명인 이 여자의 울타리가 되어 줘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 이 순간에 아담에게 부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담의 부모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나중에 부모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미리 지금 가르쳐 주시는 거죠.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의 혼수감은 굉장히 성의껏 준비해줘요 그러면서 자식을 독립시켜주지 못해서 자식 인생에 부모 스스로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거꾸로 내가 아들이에요. 내가 결혼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결혼하는 날로부터 부모로부터 나는 정신적으로 독립해야 돼 너 부모를 떠나라 남자에게 이것은 반드시 형편도 안 되는데 무리하게 분가하라 그런 의미 아니죠.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같이 살 수 있지만 적어도 결혼한 이상은 이제는 그 여자의 남편으로서 새로 일구어진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라는 겁니다.
어떤 자매님이 이런 상담을 했습니다.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가 조건을 여러 가지를 걸었는데
첫 번째 조건이 우리 부모님에게 절대 잘해라 첫 번째 조건이라는 거예요.
나머지 조건들이 쭉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매님이 말하자면 결정을 못하는 거죠. 못하고 저한테 물어서 제가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이 자매가 그 남자의 부모 보고 시집 갈라면 가도 좋겠다.
그러나 남자가 첫 번째 조건이 우리 부모에게 잘해라 라고 하면 그 남자를 남편으로 평생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좀 회의가 든다 내 생각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여자가 왜 시부모를 모셔요 내 남편의 사랑 때문입니다.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내 남편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모시는 거지 결혼할 때부터 너 내 부모 잘 모셔 그건 결혼하는 것 아니죠. 많은 아들들이 이 부분을 잘못해요.
그래서 자기를 보고 평생을 자기에게 맡기기 위해서 온 여인을 지켜주는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잘못해서 여러 사람이 괴로움을 겪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요 저는 결혼하고 나서 그 달부터 생활비를 전부 제 처를 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결혼하기 전에는 제가 생활비를 다 어머님을 드리잖아요.
거기에는 어머님 용돈도 다 포함돼 있죠. 그죠 그런데 결혼한 날부터 제가 제 처에게 생활비를 다 주고 처로 하여금 어머님께 용돈을 드리게 했습니다.
평생 그러시지 않다가 어머님께서 갑자기 젊은 며느리한테 용돈 받으실라면 자존심 상하시겠죠. 그죠 그러나 처음부터 이제 저 사람이 들어와서 나는 저 사람의 남편으로서 이제 어머님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합니다. 어머님에게 보여드리는 거죠.
그래서 어머님이 서운한 게 있으셔도 빨리 극복하실 수 있었던 것이죠. 모든 남자는 내 아내에게 시부모를 모시는 의무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내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내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면 내 아내는 내 부모에게 잘 할 수밖에 없단 말이죠.
남자가 부모를 떠나거라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라
결혼은 둘이서 한 몸을 이루는 거다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두 사람이 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새 신자반 때 말씀드렸죠
한 인간의 일생을 크게 결혼과 관련해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시기는 자기 혼자 한 인생 자기 한 인생 사는 거예요. 결혼하기 전에는 홀로 자기 인생 사는 겁니다. 가족하고 살아도 그저 가족과 살 뿐이지 내 인생 사는 거예요.
결혼하면 남자와 여자 둘이서 한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남편이든 아내든 한 사람이 먼저 떠나잖아요.
그러면 남아 있는 사람이 혼자 두 인생을 사는 겁니다. 먼저 간 사람의 생까지 자기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한 인생 둘이서 한 인생 홀로 두 인생
결혼은 뭔가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한 인생을 사는 기간입니다. 그것을 잘 살아야 한 사람이 떠난 뒤에 홀로 두 인생도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럼 어떻게 두 사람이 한 인생을 잘 살 수 있겠는가 돕고 겸손하게 도움을 받음으로 가능해진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돕고 도움 속에서만 둘이서 한 인생을 살 수 있어요.
그러면 남자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남자 혼자서 자기 인생을 완성할 수 있으면 절대로 여자를 돕는 배필로 안 주시겠죠.
하나님께서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만들어주셨다고 하는 것은 남자는 자기 혼자서는 자기 인생을 완성할 수 없는 존재 여자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그 인생이 아름답게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돕는 배필이 단순히 손발의 도움이 아니라는 걸 이제 아시겠죠. 그죠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마는 한 뭐 10년 전만 해도 남자가 주로 여자한테 도움을 받는다면 손발의 도움이죠.
50:31
그런데 손발의 도움은 돈만 줘도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아내로부터 받는 도움은 그야말로 인생의 반려자로서의 도움입니다.
내 인생의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바둑도 옆에서 보는 사람이 훨씬 훈수군이 더 깊은 수를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남편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아내에게 주셨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밖에 남자들 만나서 술 먹으면서 아무리 얘기해도 해답이 없는 것이 내가 내 아내와 의논할 때 깜짝깜짝 놀라는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돕는 배필로 내 아내를 주셨기 때문에 그렇다면 여러분 내가 일평생 내 아내의 도움을 겸손하게 구함으로 주님께 주신 우리 가정을 잘 이끌어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 전제조건이 뭐겠어요.
아내와 이야기하기 하는 시간이 많아야 됩니다. 헬라말로 돕는 배필을 히브리어 원형으로 에제르 네게드라고 한다고 그랬습니다.
에제르라고 하는 것은 돕는다 네게드는 배필이라는 말인데요. 이 네게드 배필이라는 말 본래 뜻이 뭐냐 하면 마주 본다는 얘기입니다.
서로 눈동자를 마주 보는 거야. 서로 마주 봐야 내 이야기를 하고 도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마주보지 아니하면 뭘 도와줄 수 있겠어요.
손발의 도움 이외에 무슨 인생의 도움이 가능하겠느냐 말이죠. 그래서 남자들은 내가 부족한 존재이고 내 아내를 통해서 인생이 완성될 수 있다는 걸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매일 10분이든 5분이든 15분이든 아내와 마주 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그냥 일상 대화를 나눌 뿐인데 그 속에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움이 있음을 알고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죠.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를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남자를 도와서 남자의 인생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여자가 자기를 도와서 자기 인생을 완성시키는 겁니다.
별개가 아니란 말이죠.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남자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을 수 있죠. 그죠 그러나 그 선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거예요.
똑똑한 여자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남성 위에서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분들이 있습니
그분의 능력으로 그 과정이 경제적으로 더 윤택해질 수는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여자 남자 위에 있는 여자 밑에 그런 구조의 부모 밑에서 크는 자식들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들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에제르 네게드는 돕는 배필인데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그랬죠 첫째는 돕는 상대라는 말이 있고 그 말을 번역하면 두 번째는 돕는 반대자라는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돕는 것은 처음에는 돕는 상대가 되는 겁니다. 예스 하고 돕는 거여요. 내 남편이 진리를 쫓기 위해서 내가 거짓말하면 100원 벌 수 있는 것을 50원으로 우리 만족하자 라고 할 때 예스 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이 세상의 방법을 쫓기보다 그리스도의 방법을 쫓으려고 할 때 예스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남편을 돕는 것은 돕는 반대자가 되는 겁니다. 노할 때 노해야 됩니다.
내 남편이 신앙 양심을 저버리고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려고 할 때 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남편을 지키는 길이고 결국 나를 지키는 길이잖아요.
제가 한번 그 한국 공직자들 부인 모임이 있어서 몇 년 전 얘기입니다마는 거기에 가서 이런 얘기를 한번 했습니다. 다 크리스찬 모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공직자들 부인이 자기 남편 봉급 액수 모르는가 자기 남편이 공직자로서 한 달에 정직하게 집에 가져올 수 있는 액수가 얼마인지 모르는가 다 알지 않는가
그때 크리스찬인 내 남편 공직자가 가져올 수 없는 금액을 가져오면 여자가 왜 노 안 하느냐 그래서 어느 날 모 공직자하고 신문에 비리가 터지면 그 남편만 망신당하나요? 아니잖아요. 아내 자식 손자 다 망신당합니다.
예스할 때 예스하고 노할 때 노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말씀 위에 선 지혜로운 여자가 되어야죠 이것이 돕는 아내이고 그 도움을 받는 남편이고 그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 때 정말 생명의 가정이 되는 것이죠.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벌거벗었는데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숨길 게 없는 거죠. 내가 숨기는 것이 있을 때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저는 아직도 부부가 딴 주머니 차는 경우를 참 이해를 잘 못하겠습니다
근래에는 핸드폰이 이게 보편화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내가 남편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안 될 메시지가 있어서 파탄을 맞는 가정들이 더러 있습니다.
여러분 내 휴대전화에 내 아내가 봐서는 안 되는 문자가 들어있다. 이거 둘이 한 몸 아니잖아요. 둘이 두 몸 사는 거 아닙니까
내 서랍 속에 내 남편이 보면 안 되는 게 들어 있다. 이거 문제 있는 거잖아요.
내 주머니에 내 남편 내 아내가 전혀 모르는 돈이 내 속에 들어있다. 이 문제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한 평생을 신뢰하는 둘이 한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결론을 맺으십시다.
자 우리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책 이름을 창세기라고 불러요
창세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기록이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 배울 때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히브리말로 창세기의 책 제목은 제일 첫 마디 브레시드라는 것 태초에 초기에 처음에 그게 창세기 제목이에요.
본래 근데 이걸 번역하면서 창세기라고 번역했는데 창세기는 창세기 1장에서 끝났습니다. 그 다음은 뭐죠 제가 보건데 창세기는 창세기가 아니라 창 가정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역사의 기록이에요.
천하만물을 다 지으신 뒤에 제일 먼저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만드셨죠 그들이 범죄했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온 세상의 죄를 반영케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 과정을 택하셔서 인간의 중시조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또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불러서 역사하셨나요? 아닙니다.
아브라함 가정을 부르셨습니다.
가정을 부르시고 가정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 기록이 창세기예요. 창 가정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자로서 우리의 가정을 창 가정 바르게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 그래요 한 국가와 사회의 기본 단위가 가정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가정들이 모여서 사회가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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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 건강하면 그 국가는 건강한 나라이고 아무리 국부를 자랑해도 각 가정에 병들어 있으면 그 나라는 결국 허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이 가정을 바르게 일구어 나가는 데 있어서 남편과 아내 결혼은 핵심이란 말이죠. 가장 중요하단 말이죠.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일 경우에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고 자기 삶에서 무엇을 적용하고 깨달아야 되겠는가
가령 여자일 경우에 결혼 대상자를 찾을 때에 어떤 기준을 갖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여자는 돕는 배필이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내 인생이 완성돼요.
경력 좋고 학력 좋고 사회적인 백그라운드가 다 좋아 좋은 신랑 만나서 덕 보려고 결혼하면 평생 고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내가 도와줘서 상대에게 없는 부분을 내가 보완해 주어서 함께 완성될 수 있는 남자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남편과 더불어 결혼하는 남편과 더불어 둘이서 정말 평생 한 몸을 이루는 행복한 삶을 살 겁니다.
남자는 어떤 여자를 볼 수 있어야 될까요? 대개 보면 남자들이 똑똑하고 예쁜 여자들 원해요. 또 부모들이 그렇게 결혼시키죠 똑똑하고 예쁜 것 참 좋습니다. 그렇죠
더 중요한 건 지혜로운 여자라야됩니다 똑똑하고 예쁜데 지혜가 없으면요 돕는 배필이 안 됩니다. 위에 올라가요 그래서 평생 괴롭습니다.
똑똑하고 잘 낳고 모든 면에서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남편을 돕는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됩니다.
그 때 돕고 도움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인생을 평생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결혼한 사람이면 지금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 삶에 어떤 교훈을 얻어야 되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부터 서로 마주 보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이 시간에 솔직하게 여러분들 속으로 한번 대답해 보세요. 남편하고 아내하고 하루에 몇 분 마주보고 이야기합니까?
그렇게 해서 둘이 한 인생을 살아지겠습니까?
여러분 부부가 정말 필요한 건 나이 들어서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부부가 둘이 한 몸으로 한 인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야 되는데 서로 마주 보지 않는 마주 보는 훈련을 하지 아니했을 때 정말 부부가 필요할 때 나이 들어서 따로 놉니다.
생각도 달라졌죠 힘이 다르죠 관심 다르죠
문제가 있게 되는 거죠.
아무쪼록 여러분들이 결혼을 하셨든지 하시지 않았든지 간에 오늘 이 말씀 속에서 각자 깨달을 것을 깨달으시고 그것을 여러분들의 삶 속에 적용시킴으로 여러분들의 가정을 말씀 안에서 아름답게 창 가정해가는 귀한 계기를 마련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창세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기록은 창세기 1장에서 끝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신 창세기 2장의 내용을 저희들이 공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세우셨고 또 노아의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역사를 펼치셨고 아브라함의 과정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주님 우리의 가정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건강할 때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우리 국가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믿음의 남편이 되게 하시고 믿음의 아내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믿음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믿음의 어머니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할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믿음의 할머니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식구들이 서로 마주 보게 하시고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특별히 남편과 아내는 마주 보는 시간이 매일매일 더 길어지므로 둘이서 아름다운 한 인생을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정이 창 가정기부터 시작해서 출애굽기를 거쳐 복음서로 이어지는 생명의 역사가 매일매일 일어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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