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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봄 <<인터넷시대의 시창작론>>을 처음 간행했다. 이 책은 그 후 속편이다.
디지털 기술이 열어놓은 인터넷 세상은 넓고 깊게 세계 각국으로 거미줄처럼 퍼져나갔으며, 인간의 의식 세계 깊은 영역까지 인터넷의 그물망이 던져지고 있다. 이 놀랑둔 변화에 문학의 대응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인터넷 시대의 시창작론2>>를 새로 간행한다.
'시의 독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에 대한 응답이 <팬포엠>이다. 문학평론가 이성우 강사가 주도적으로 창안하고 추진한 것이다. 앞으로 인터넷상에서 시를 접속하여 시쓰기의 다양한 방법을 스스로 체험해 보는 새로운 접근방법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제1부
하이퍼텍스트와 시쓰기
제 1장
시의 독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오늘날 문학 종사자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감회는 그 많은 독자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당혹감이다.
인터넷혁명은 산업혁명이나 그 이전의 어떤 문화적 혁명보다 강력하고 절대적인 혁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시나 소설을 읽은 시간도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킬 시간의 여유도 없을 만큼 세상이 급박하게 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에게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오힐 시대착오적인 고집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가볍고 얇고 발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는 소설은 물론 시도 종전처럼 읽히지 않는다. 그많던 독자는 정말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은 모두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이주해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으로 변신했을 것이다.
최근 '문학의 이해' 수업시간에 필자는 두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다. 박목월의 시 <청 靑노루>를 다루면서 우선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반응에 놀라게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90년대 중반에 이 시에 대해 학생들은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계가 이미 자신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감동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 ㅅ 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청노루>전문
1960년대 이후 회화적인 구도를 가진 자연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어온 박목월의 시가 젊은 세대들에게 이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저자는 격세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시들은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를 담고 있거나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작품이었다. 물론 많ㅇ은 사람들에 의해 전통적인 서정시가 씌어지고 있었지만 그런 유의 시들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의 학샏들에게 박목월의 시를 다시 읽혀보니,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드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부정될 줄 알았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에 필자는 일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최근 학생들의 감각이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에서흥미를 느끼는 그들이 '청노루 정도의 표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활자문화 세대들의 종이책 독자들(다른의미에서의 구매자들)이 모두 전파문화의 사이버 세계로 들어가버린 것이라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적 코드가 컴퓨터 화면이나 영상 자막으로 구현되고 있는 세계는 활자문화가 요구하는 읽고 사색하는 노력을 강탈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매력적이고 화려한 것인가를 인정한다면 더 이상 독자들에게 책읽기를 요구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오늘날 2030세대를 길들이고 있는 것은 기술정보이며 컴퓨터 자판이지 백지의 여백에서 살아 움직이는 활자문화의 인문적 교양의 코드가 아니다. 디지털적 상황에서 시의 존재방식을 필자는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에서 다음 세 가지로 전망한 바 있다.
첫째, 거대 패러다임으로 대중들의 의식을 통합하고 지배하는 시적 사고는 분화되고, 소집단화할 것이다. 잘게 분화되어 때로는 작은 취미그룹으로 세분될 것이다. 유사한 기질과 취향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동질감을 공유하며 자기의 삶을 시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둘째, 출판매체가 활자문화에서 전파문화로 뒤바뀔 것이며, 새로운 기술개발에 의한 매체들을 적절히 사용할 때 그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사람들의 호응도 커질 것이다. (...시에 그림과 액자를 넣는 것들이라고 생각됨) 시를 주도하는 집단이나 이데올로기는 분화되겠지만, 시라는 예술양식은 시와 노래, 춤은 물론 다양한 매체를 종합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다.
셋째, 레고 게임과 같은 조립과 해체의 놀이 문화가 일부에서 퍼져나가있지만 시의 경향은 명상과관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예술적으로 드높이는 쪽으로 전개될 것이며 이러한 방향이 적절치 않을 때 많은 시들은 왜곡되고 불구화될 것이다. 특히 명사아과 사색의 시편들을 음악에 실어 노래로 유행시킬 수 있는 음유시인들이 등장할 것이며 , 그들은 아탈리의 표현대로 유목 문화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시와 소설은 물론 모든 예술의 존재방식은 필연적으로 격변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담론이 낡은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려고 할수록 그 기반이 되는 모래사장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독자들은 급격히 사라져 갈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문화적 첨단성은 우리로 하여금 2002년 6월의 월드컵 신화를 경험하게 했다.
식민지 해방이나 마르크시즘적 사회혁명은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공동체적 환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가 가상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현실과 가상은 뒤바뀌고 현실보다는 가상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의 독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가상의 현실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블랙홀 속에 탐닉하는 것이 오늘의 문학 수요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하는 문학 생산자가 있다면 그들은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출판업자들이 내세우는 구투의 상술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대략 9:1이나 8:2 정도로 소설 전공자들이 대학원을 메우고 있다.
시 전공자가 많았던 80년대와 비교해 보면 놀라운 역전이다. 학생들의 흥미가 이렇게 소설에 기운 것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에서 요구되는 서사적 담론이 그들의 관심을 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 시를 쓰기가 어려운가라고 질문하면 그들은 시를 쓸 것이 없다고 한다. 체험이 결여된 탓이다. 체험없는 소설은 SF적 상상력 주변을 배회하게 되겠지만, 체험 없는 시는 증류수와 같은 언어를 조작하거나 할 것이다. 괴테는 " 빵 한조각을 가지고 울면서 밤을 새워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아파트에서 컴퓨터로 이어지는 생활에서 무슨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왜 그러한가 생각해보면, 자기라는 존재가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상공간을 부유하듯 떠돌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만화경적 상황을 고려할 때 과연 시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나는 디지털 시대의 여러 매체들을 종합할 수 있는 시의 장르적 특징을 살려 시와 음악, 시와 무용, 시의 연구 등을 결합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시대는 중심이 없고 높낮이가 없이 동시다발적인 것이 특징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이 무너진 상황에서 활자문화시대의 엘리트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독단.폐쇄적 발상일 뿐이다.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음유시인이 출현한다면 대중적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폭밝적인 것이 될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김소월이 민요시인으로-본안은 그 명칭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불리면서 한국인의 20세기적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김소월과 대척점에 이상의 시가 있고, 김수영이나 김춘수 같은 시인은 관념의 세계를 파고 들어 그 나름의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래와 결합되지 않는 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견된다.
신경림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된 것<<동아일보>>, 2003.2.2은 그의 민요 찾기 운동이 밑거름이 되었을지도모른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정지용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노래로 불리어지는 <향수>와 <고향>과같은 시편들 때문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칼하다. 저항운동의 시대가 지나간 아음 이육사나 윤동주의 시가 서서히 독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음은 주목해보아야 할 사항이다.김소월에서 신경림으로 이어지는 노래시의 전통이 우리 시의 중요한 흐름을 되살리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어느 시대에서나 진정 잘된 시에 적절한 음악의 형식은 발견되어야 한다'는 김우창의 지적은 좀 더 깊이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적 공동체의 열망을 되살리고 그 지향점을 제시하는 길이다. 이는 20세기의 리얼리즘적 가치지향을 일부 이어받기도 하지만 또한 이를 부정하고 한 단계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어야 할 사항이다. 오늘날 시의 부재는, 예민한 감각은 살아 있지만 시적 바아향이 제대로 가늠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어서 그 어느것도 제대로 정립된 것이 없다.
독재권력의 타도라는 눈에 보이는 적이 제거된 다음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뼈 아픈 자기 부정의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 세계사의 중심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태평양에서 동아시아로 거대한 변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이 동북아시아에 중심적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할 때 우리는 또 다시 20세기적 굴욕을 감내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힘 겨루기는 이라크에서 북한에서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쟁점들을 스포츠로 분출시켜 준 것이 월드컵이다. 시청 앞 광장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리고 세계 각 곳에서 한민족은 20세기에 누적된 민족적 열등감의 찌꺼기를 떨쳐버리는 공동체적 환희를 체험한 바 있다. 단군이 개국하여 신시를 연 이후 한민족이 체험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그 체험은 엑스터시였다. 시가 할 수 없었던 그러나 시가 도달해야 하는 극치의 한 순간을 우리는 경험했던 것이다.
밀페된 시 의식에 갇여 정진분열증적 시가 거듭 복제되고 있다면, 시는 정신불안 징후의 몇몇 사람들의 자기 위안거리로 전락하고말 것이다. 시가 민족 공동체적 열망을 분출하는 첨단에 설 때 민중시대와는 전혀 다른 디지털 시대의 선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30세대를 체험이 결여된 세대라고 단언할 수 없다. 월드컵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어젠다를 내걸고 이를 성취시킨것은 그들이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민족의 꿈을 성취시킬 수 있는 세대일지도 모른다.
5060세대는 월드컵 경기장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이 붉은 상의를 입고 외치는 환호성에서 가슴이 철렁하는, 불안감을 레드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2030세대는 그런 감정의 찌꺼기가 없다.그 까닭에 진취적이지만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자신감은 5060세대의 참담한 자기희생으로 부터나온 것이다. 한국의 사고중심축에는 5060세대의 체험이 자리 잡고 있지만 디지털 시대의 첨단적인 도전은 2030세대의 무모한 자신감이 필수적 추동력이다. 그들이 우리를 추종하지 않능다고 해서 잘못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활자문화ㅏ와 전파문화 사이의 커다란 단절이 어쩌면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더 믄 도약대가 될 수도 있다.
1930년대 이상은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인 유리거울 앞에서 분열된 자아를 발견했다. 21세기 초 한국의 젊은 세대는 세계 최첨단 LCD 화면 앞에서 사이버세계의 화려한 불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녹슨 구리거울속에서 참회록을 써야했던 것이 식민지 시대의 윤동주였다면, 초대형 화면 앞에서 현실보다 더 가혹한 현실의 섬광을 홀린 듯한 눈으로 멍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오늘의 2030세대인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모든 옝술로부터 예술적인 것의 아우라를 빼앗아갔다. 원본보다 더 생생한 원본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논한 복제품과 원본 사이의 거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는 인간 존재의 유일 절대성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종교와 예술과 문화의 역사가 이를 전제로 성립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삶이 가상의공간에 저장되고 가상의 공간으로 사라지는 시대에 이르렀다. 머잖아 사이보그 인간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기술정보를 장악한 몇몇의 인간들에 의해 세상이 지배되는 때가 올지도모른다.
얼마 전 필자와의 한 대담에서 황동규는 "시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고 말한 바 있다. 예술은 부정적 탐욕적 인간에게 욕망의 긍정적 자기갱신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단거리 질주자처럼 질주해온 한국 경제가 성수대교와 같이 무너질 위험이 있거나 기술정보산업의 강국이라 자부하던 한국이 컴퓨터 바이러스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라는 것은 이러한 속도전의 취약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예가 될 것이다.
독서 행위는 이러한 속도감으로부터 한 발 비껴나서 침잠의 여유를 가져다주는 것이다.1980녕대의 시는 사회적 추동의 최첨단에 서 있었다. 지금사회적 최첨단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 있고, 프로그래머의 머리 속의 연상 작용에 있다.그러나 시를 읽고 시를 쓰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속도전은 기계적 인간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테크노피아의 사막에서 과연 인간적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사이버 세계로 사라진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디지털 세계의 뒤를 쫒는 말단의 소비자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 창출의 소프트웨어의 운용자로써 풍요로운 인간성에서 비롯되는 자기 성찰의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아마 조선문단 전체로도 이대로 3년이면 3년을 나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년 동안 퇴고를 해 놓는다면 그냥 나간 3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단이 될 것이다"라는, 1930년대 이태준이 그의 <<무서록(無序錄)>>에서 한 발언이다. '날림'공사는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
밀려드는 청탁서 때문에 쉴 새 없이 써내는 유망한 젊은 시인들에게 그리고컴 키보드를 두드리는 마비된 손을 가지고 스크린만 쳐다보는 마니아들에서 이태준의 이 발언을 되새겨 보라고 말하고 싶다. 사이버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사이버 중독자들은 더 할 나위가없다. 끝내 발 딛은 현실을 잃게 만드느는 컴퓨터 중독이 때로는 마약중독보다 더 심각하다는 경고는 결코 지나친 기우가 아닐 것이다.
모두가자기들의 주장만 떠들어대는 세상이란 필경 들뜨고 중독된 얼치기 세상임에 분명하다. 시나 소설이 그리고 다른 여타의 예술들이 이러한 중독의 치료제나 완충제가 되지 못한다면, 디지털 유토피아는 그 끔직한 얼굴로 인해 대면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쳐 20세기나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가혹한 신세계가 될 것이다. 물질의 풍요를 향해 치달리는 디지털 적 속도적이 인간을 온전히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2장
하이퍼 텍스트 시쓰기와 팬포엠 프로그램
인터넷의 기본원리인 하이퍼텍스트이 핵심은 각 문서 간의 연결, 곧 링크(link) 에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실을 때, 우리들은 단지 링크된 해당 항목을 클릭하면 된다.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이루어진 문서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사람이 만든 거대한 문서처럼 작동한다는 데 가장 큰 매력이 있다. 때문에 인터넷은 전 지구 차원의 거대한 공동문서이자 지식공동체라고 비유해서 말할 수 있다.
인터넷은 무한 용량의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삼아 사용자들의 요구에 실시간으로반응할 수 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정보의 수용에 머무르지 않고 양 방향으로 상호 소통하는 새로운 환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문학은 무엇보다 전통적 서사 구조와 작가. 독자의 위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전통적 플롯개념인 처음, 중간, 끝을 지닌 통일체를 지향한다. 여기서 작가 혹은 화자의 이야기(narrative) 는 스토리들의 시간적인 순서와는 상관없이 독자에게 선형적(linear)으로 전달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는 독자가 선택한 이야기가 마치 인터넷의 웹 사이트를 이리저리 이동할 때처럼 비선형적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독자들의 취향에 따라 주인공이 달라질 수 있고 전혀 다른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다. 독자들은 자신의 선택 나름으로 각기 다른 작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통해 텏트에서 저자의 권위를 빼앗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 미셸 푸코가 <저자란 무엇인가> 에서 바르트와는 시각을 달리하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처럼 무한한 담론 가능성을 세워 놓은 경우에 대하여 '근원적 저자'라는 유보사항을 달아 두었던 것은 벌써 한 세대 전의 일이다. 이제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디지털 환경 속에서 그들의 이론은 수정을 요구받는다. 디지털 기반의 텍스트는 바르트나 푸코가 대상으로 했던 문자 언어로서의 '원본'이라는 기존 개념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가상공간에서 저자와 독잔ㄴ 실시간으로 또한 양방향으로 소통함으로써 두문학적 주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때 저자는 자신의 텍스트를 끝없이 고쳐 쓸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저자와 다를 바 없지만, 지신의 텍스트를 인터넷에 개방하고 실시간으로 제시되는 독자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렴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저자와 명백히 다르다. 또한 독자들은 저자에게 끊임없이 고쳐 쓸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텍스트의 의미 구축 작업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서 분명 새로운 독자이다. 결국 인터넷에 접속해 하이퍼텍스트방식으로 시를 작성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아리스토텔레서 저편에서 새로운 형태의 시를 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팬포엠 기본 텍스트 2
어린아이의 굴렁쇠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최동호
어린아이는 자라서 끝내 어른이 되고
어른은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시작에서 끝으로 가고 다시 끝에서
시작에서 끝으로 가고 다시 끝에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등 굽은 굴렁쇠 바퀴
세월의 채찍을 힘차게 휘둘러라
굴렁쇠 굴리며 둑길을 달려라
새파란 풀 찰랑거리며 자라나는 길 언덕에
굴렁쇠 바퀴가 은빛 햇살을 뿌린다
민들레 피어나고, 꽃씨는 날아가고
바보는 침 흘리고, 아이들의
깨소금 웃음소리
환하게 낭랑한 세상에서
어른들은 마술사처럼 등근 도나쓰
담배연기를 만들어 빙그레 미소 짓고
물구나무선 아이들은
두 팔로 세상을 번쩍 들어 올린다
해는 다사롭게 오글거리며 빛나고
연두빛 노래바람 푸르게 출렁일 때
버들피리 부는 아이들은 둑길을 달리며
꽃처럼 자라난다
-<<공놀이 하는 달마>>, 민음사, 2002
시인이 말하는 창작배경
내가 초등학교 학생이던 1950년대 후반은 6.25 후의 궁핍과 혼란을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다. 1960년 4.19가 일어나는 현장을 수원중학교 1학년 때 맞이했다. 겨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커다란 알루미늄통에 무럭무럭 김이 오르는 녹두죽을 끓이고, 이를 배급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 또한 나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유년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로부터 30년 후 나는 아이오와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는데, 여기서넓고 넓은 옥수수밭을 보았고, 이 옥수수밭의 본 고향에 발 딛고 서자 나는 왜 이곳에 왔는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때 시작된 연작시가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이다.
물론 워즈워스 시에서 '어린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라는 구절을 읽은 바 있지만, 그 때 내 머리를 스쳐간 것은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는 순환적 발상이었다.
오늘날 흡연은 모든 곳에서 금기시되는 일이지만, 50년대 후반의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혼돈 속에서 어른들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담배연기와 같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었을 까 한다. 담배연기가 배고픔 그 자체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흡연을 통해 정신적 일탈과 해방감을 향유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는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마법의 세계를 열어주는 것일 터이며, 그 중에서 나의 머리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은 도나쓰 모양이 둥근 담배연기들이 고리를 지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두 팔로 세상을 번쩍 들어올린다는 것은 둥근 지구를 들어올린다는 뜻이며, 이 원환적 이미지의 중심에 어린아이들의 굴렁쇠 굴리기가 있다.
달마는 왜 동녹으로 왔는가, 달마 또한 굴렁쇠를 굴리는 어린아이가아닐까 라는 발상이 이 시를 쓰게 된 시적 배경이다. 달마가 굴리는 깨달음의 바퀴와 어린아이가 굴리는 굴렁쇠에서 반사되는 은빛 햇살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데 30여 년의 시간이걸렸고, '둥근 도나쓰'로 표상되는 어른들의 마법을 독자적으로 풀어내는 데 그만한 세월이 걸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 시인의길을 택한 나에게는 말할 수 없이 값진 일이었다.
환한 봄 햇살 낭랑하게 부서지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 아직도 내가 생의 축복과도 같은 행복감을 맛보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린아잇적에 실없어뵈는 어른의 눈을 대담하게 쳐다볼 수 있었던 이유가 '이담에 크면...' 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의 대항하는 눈길에 하릴없이 시선을 비켰던 사나이 또한 '이 자식이 크면 어떤 놈이 될 줄 누가 알겠어?' 하였던 것 아닐까. 나 이제 낫살 먹어서 옛날의 코흘리갯적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허허, 서정이 인하공전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를 듣고 다시 들어가자고 있구... 오디오에서는 아바의 노래가 여전히 경쾌하다.
팬포엠 기본 텍스트3
김밥 마는 여자
장만호
눈 내리는 수유 중앙 시장
가게마다 흰 김이 피어오르고
묽은 죽을 마시다 보았지, 김밥을 말다가
문득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
끈적이는 생애의 죽간(竹簡)과
그 위에 찍히 밥알 같은 방점들을,
저렇게 작은 뗏목이 싣고 나르는 어떤 가계(家系)를
한 모금 마시며 보았지
시큼한 단무지며 시금치며
색색의 야채들을 밥알의 끈기로 붙들어 놓고
붓꽃 같은 손이 열릴 때마다 필사되는
검은 두루마리, 이제는 하나가 된
그 단단한 밥알 속에서 피어오르는
삼색의 꽃들을
-현대문학, 2001,4
시인이 말하는 창작배경
1. 이를테면, 그때의 나는 세상을 스토킹하는 자였다. 안암에서 종암으로,ㅡ 미아리 대지극장에서 수유리 중앙시장으로, 마지막으로 북한산 밑 가오리까지가 내 서른 살 전후의 스토킹 행로였다. 그 길은 동시에 세상 삭람들로부터 내 발걸음의 속도만큼 게으르게 멀어졌던 셈이다.
2. 그 길을 나는 사구(沙丘)를 건너가는 낙타처럼 느리게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위에 시선을 찍어두곤 했다. 마치 나의 시선이 그것들에게 다가가 지문을 찍어놓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그러므로 그때의 모든 사람이 그때의 바람이, 극장을 나와 버스를 타고 떠나던 너의 뒷모습이 내 스토킹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것이다. 너는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3. 비 오는 날이면 반대로 무수한 빗방울들이나를 스토킹하기도 했다.수시로 내 창문을 두드리며 나늘 바라보는 빗방울들. 저 편재하는 시선들. 왜 욕망이 환유적인지, 그리하여 미끄러지고 흩어질 수 밖에 없는지를 알려주는 투명한 기표들. 창가에 착, 악착같이 달라붙은 저 빗방울들. 그러니 저 속에 어떤 기의가 들어갈 수 있겠는가?
4. 그때의 시 한 편.
조금은 높고 조금은 가볍게,
살고 싶었으나
어쩌면 이렇게 탑 주위를 돌며
세상을 풍경으로
바라보는
공중정원의 저녁
-<옥탑일기> 전문
그러므로 김밥 마는 여자는 미끄러지고 흩어지느느 내 욕망의 무수한 시선이 가 닿은 겨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이제 묽은 죽에 대해, 그리고 김밥에 대해 이야기하자.
5. 중학교 2학년 때 죽은 친구의 어머니는 풀빵장수였다. 밀가루르르 아주적게 넣고 물을 가능한 많이 넣어 굽던 풀빵에서는 정말 도배지에 바르는 풀냄새가났다.
'묽은 반죽'과 '묽은 죽'
묽은 죽,묽은 죽, 묽은 죽, 묽은....
자꾸 되뇌이다보면 물근 입안에 물이 고이는 것 같은데, 그래서 슬픈데, 비가 많이 오고, 큰물이 지던 여름날 친구는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죽었다. 그날 나는 울 수도 없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쓰며 울고 있다.
6. 그러므로 김밥 마는 여자와 풀빵 굽는 여자는 상동관계이다. 모든 어머니가 모든 아들에게 있어 같은 관계이듯.
7. 쌀이 환유적이라면, 밥은 은유적이다.
낱알들을 잘 씻어 고른 후 그것들을 어느 순간 끈기로 붙들어 매는 것은, 인접해 닜지만 인과관계가 없는 환유의 고리가 어느 순간 은유의 축에 붙들려 의미를 얻는 것과 별 반 다르지 않다. 순간 욕망은 형체를 갖고 우리는 밥을 먹는다.
그러므로 그 순간은 정말 문득 오게 될 것이다.
내가 눈 내리는 수유중앙시장에서 그녀를 본 것 처럼,
어떤 예고도 없이,
"문득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
8. 색색의 야채와 욕망들과 걱정들을 밥알의 끄닉로 붙들어 놓고, 꼭꼭 눌러서. 그 김밥에 어떤 곡절과 세목을 넣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린 김밥은 워낙 단단해서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잘 썰린 한 점의 김밥을 집어 먹는다. 욕망 혹은 삶의 내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