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와 남사당패의 탄생지 청룡사
안성의 불교 유적 답사 이야기는 계속 진행된다. 사방에 퍼져 있는 안성의 문화재를 전부 보려면 발품을 꽤나 팔아야 하지만 풍성한 안성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안성 시내로 돌아가던 도중 석남사라는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을 도는 순간, 건너편에 심상치 않아 보이는 처마가 아른거린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건축물인 것 같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이 남아있는 조선 초기의 관아 건물로 알려진 안성객사는 안성시내가 아닌 보개면의 외딴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객사와 관아 건물은 고을을 다스리는 중심 건물로서 보통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는 게 상식이다. 안성객사도 원래는 안성 시내에 있다가 1995년 해체 수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욺겨졌다고 한다. 주변의 안성 향토사료관과 함께 이곳을 안성의 문화타운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임을 알 수 있었지만 사료관 문은 굳게 잠겨 들어갈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안성객사의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해본다. 한눈에 봐도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인상적인 안성객사는 정면에는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집인 정청이 있고, 양옆엔 팔작지붕 집이 나란히 서 있었다. 고려와 조선의 양식이 결합된 좀처럼 보기 힘든 건물 스타일이었다.
실제로도 학계의 주목을 받는 건물이고, 건물의 전체적인 이음새와 인상도 훌륭하지만 그에 비해 안성에서의 대접은 썩 훌륭하지 않은 것 같다. 만약 안성객사가 시내 한복판에 자리했으면 안성의 기존 관광지와 연계하여 괜찮은 시너지 효과를 낼 것 같았는데 그 점이 아쉽다.
이제 방향을 서운산 자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안성의 눈여겨볼 특징 중의 하나가 산골짜기마다 자리한 저수지다. 본래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현재는 안성시민을 비롯해 많은 관광객들이 자연을 즐기기 위해 찾거나 낚시를 즐기기 위해 오기도 한다.
이번 목적지 석남사로 향해 들어가는 길 초입에는 역시 마둔 저수지를 옆에 끼고돌아 들어가야 한다. 저수지는 큰 규모가 아니었지만 수많은 강태공들로 북적거린다. 그래도 물이 주는 시원한 풍경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호수를 넘으면 바로 서운산의 울창한 산세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 가운데엔 자연휴양림이 있어 누구나 예약만 하면 자연의 품 안에서 하룻밤을 알차게 보낼 수 있다(현재는 코로나 격리시설로 사용을 위해 폐쇄 중). 그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고 옆의 산길을 따라 석남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한때는 동명의 울산 석남사보다 덜 알려졌고, 아는 사람만 찾는 명소였지만 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이 풍등을 날리는 장면이 여기서 촬영되면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앞마당이 있는 다른 절들과 달리 지세를 따라 석축을 쌓고 단마다 건물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색다르다. 그 덕분에 비슷한 구조의 영주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바라다보는 전망이 아름답다.
여러 전각이 있지만 가장 끝쪽의 대웅전과 바로 밑단에 위치한 영산전에 아무래도 눈이 가게 된다. 영산전이 팔작지붕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데 반해 대웅전은 맞배지붕의 단아한 느낌으로 대조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둘 다 조선 후기의 건축물인데 석남사의 맨 위에서 바라보는 그 조화로운 모습이 산수화의 한 장면인 듯 고요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마 이런 경치 덕분에 석남사가 유명해진 듯싶었다.
정갈한 가람의 석남사를 뒤로 하고 안성 불교 탐방의 마지막 목적지인 청룡사로 향한다. 서운산 자락의 북쪽 계곡에 석남사가 자리하고 있다면 그 남쪽 계곡에는 청룡사가 존재한다. 서운산의 높이가 547미터 밖에 되진 않지만 안성의 진산(眞山)인 만큼 그 계곡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산을 앞에 두고 길을 꽤 돌아서 남쪽으로 넘어가야만 한다. 그 초입에는 포도로 유명한 서운면을 지나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 명성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던 안성포도다. 현재는 안성을 넘어 천안의 입장, 성거지역까지 포도밭이 뻗어 있고, 전국 각지에 유명한 포도 산지가 꽤나 많다.
그래도 나지막한 포도나무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청룡사의 초입인 청룡 저수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청룡사는 이 저수지를 지나면 바로 들어갈 수 있지만 청룡사 하면 바로 남사당패가 탄생한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청룡사로 가던 길을 방향을 틀어 오른쪽 언덕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자그마한 사당이 보인다. 이 사당이 바로 여성 출신으로 남사당패를 이끄는 꼭두쇠의 지위에 올라 대원군에게 옥관자를 수여받았던 그 바우덕이의 사당이다. 단 한 칸의 작은 규모로 만들어진 사당은 최근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고, 그 한편에는 바우덕이의 동상이 서 있었다.
청룡사, 나아가 안성을 언급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그녀다. 바우덕이의 일생은 구체적인 자료 형태로 전하지 않고, 구전으로만 알려져 사람마다 뜻이 분분하다.
본명은 김암덕으로 바위 암의 바우에 덕이를 붙여 바우덕이라 불리었다. 1853년 안성 청룡사 근처에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5살의 어린 나이에 남사당 패에 맡겨지며 성장했다. 박우덕이는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15살에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미모는 물론 소고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마침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하고 있었고, 동원된 장정들을 위로하기 위해 남사당패를 서울로 불러오게 했다. 이때 바우덕이는 경복궁에서 소고와 선소리로 뛰어난 공연을 펼쳤고, 그 명성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이후 경기도 일대를 순회하는 공연을 펼쳤지만 유명함이 독이 되었던 걸까? 유랑생활은 바우덕이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쳐 22살의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청룡사에서 머지않은 곳에 바우덕이의 묘가 있고, 사당도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안성맞춤 바우덕이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학자에 따라서 바우덕이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남사당 패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손색없다고 본다.
바우덕이가 다시금 재조명되어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청룡사 경내로 들어왔다. 고려시대에 창건했고, 공민왕 시기의 고승 나옹선사가 이름을 청룡사로 고치고 크게 중창했다고 알려진 절이다.
확실히 안성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 아닐까 생각했다. 청룡사의 대웅전이 조선 후기의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어서 나름 기대를 가지고 청룡사로 찾아왔건만 현재 대웅전은 가림막을 씌운 채 해채 보수공사 중이었다.
원래 답사는 조금씩 아쉬움이 있어야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준다. 안성을 대표하는 명찰 청룡사, 석남사, 칠장사를 둘러보며 그 절에 얽힌 인물들과 이야기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각기 개성 다른 독특함이 인상에 남는다. 이제 안성의 다른 이야기를 찾으러 떠나보자.
운민 역사기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