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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주일 [하나님의 부르심 : 회피할 수 없는 주권]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셨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구속과 새삶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축복이다.
우리를 그렇게 부르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여, 영원히 보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배경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다.
[구속받은 것을 구원 여정의 완성으로 보는 오해]
그런데, 구속받은 것을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신앙의 궁극적 목적을 마쳤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을 택했기 때문에, 자기가 택한 행동을 부풀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자기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많은 공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실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 준비된 하나님의 품으로 와서, 그에게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 이후부터, 진짜 행함이 있는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택한 것도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셨다.
자기가 예수를 영접한 것을 과도하게 의롭게 여기는 것은 그리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택하시고, 앞으로 구원받은 이후에 살 삶의 기회를 부어주셨다.
[복음의 이치를 몰라 구원의 삶을 잘못 이해한 듯]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믿었다.
이전 시대 사람들은 복음의 이치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잘 배우지 못했다.
복음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충 이해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지식적으로 엉성한 구조를 갖고, 나머지를 임의로 채웠다.
그런 가운데,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듣고, 구속을 완성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발생한 사건은 구속이다.
이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앙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 나머지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본질이 있는데도, 그것을 버리고, 오히려 필요치 않은 다른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신자의 의무, 책임, 윤리, 이런 것은 하나의 선택사항으로 본다.
가르치기는 하지만,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거룩한 삶의 기회를 놓쳐 버린다.
우리에게는 기회이면서도, 실제 복음이 요구하는 성도의 삶의 참된 모습인데, 이것을 방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옛날의 삶을 계속 이어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사실만 있지, 구원의 효력은 없다.
[거룩한 삶 속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신다.
구속받은 것과 구속된 자로서 가져야 할 부르심의 삶에 들어가는 것.
구속받은 것은 처음 예수 믿을 때, 발생한다.
그러나, 구속받은 자에게 주신 삶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 삶안으로 들어가야, 복음의 디자인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게 된다.
구속은 구원인데, 사람을 살려 놓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제 살아난 자에게 죽지 않는 삶을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죽고 말 것이다.
복음은 진짜 생명을 얻고, 영생을 하게 하는 것이다.
히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위의 구절은 앞이 펼쳐진 삶이 시작하는 구도가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새삶이 놓여 있는 것이다.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의 양육과 영혼보전의 책임]
교회가 바로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돕는 장치다.
새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이다.
교회를 떠나서는 그 삶을 살기 어렵다.
누구든지 구속받은 자는 교회에 속하게 하여, 교회에게 주어진 온 우주적 사명을 협력하여 해 나간다.
힘을 다해서 섬기게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양육받는 일이 계속 진행된다.
말씀은 명령이다.
고정되어 있을 때는 말씀이지만, 실행될 때는 명령이다.
우리는 말씀 없이는 살 수 없다.
좌로 우로 가라고 명하여서, 그에 따라 움직일 때, 그 영혼은 생명이 유지된다.
그렇게 하여 영생을 살게 된다.
회복된 생명은 자기가 훈련하여 순종하므로, 원래 있어야 했던 메카니즘대로 성질을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계속 성도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도록 제공하여 돕는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진 삶은 거룩한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계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경은 벌거벗은 수치를 감추도록 흰옷을 입으라고 했다.
모든 성도는 교회라는 틀 안에서 주님의 신부다.
신부가 결혼할 때가 되었으니, 이제는 빛나고 깨끗한 옷을 입도록 하셨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결혼할 날까지 짧은 기간이지만, 거룩하게 자기를 준비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할 일이다.
[신분은 합당한 역할이 따를 때 인정된다]
이렇게 될 때, 신분이 주어진다.
하늘에 올라갈 때, 갖고 있을 신분이 미리 주어져서, 이미 신분의 변화는 갖게 되지만, 그 신분은 합당한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한다.
누구든지 어떤 신분이 있다.
그 신분에 맞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책임을 맡고도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 신분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다.
신분에는 책임이 따른다.
신분은 과시용이 아니라, 책임이 있는 것이다.
신분과 비슷하게 우리는 권리도 있다.
시민으로서 권리도 있고, 책임도 있다.
누구나 어딘가 조직에 속해 있다.
사회, 회사, 취미단체, 이런 곳에 법이 있다.
그 법은 그 신분에 해당하는 사람이 역할을 하기 기대한다.
인간사회는 그런 것이 없이는 운영되지 않는다.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단체든 환영하지 않는다.
자기 신분을 유지할 수 없다.
어느 단체든 소속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일정 기간 열심히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에서만 교회의 질서를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많이 있다.
교회를 작게 여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어느 단체든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일원으로서 신분에 합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신분에 대한 책임을 길게 말씀드렸다.
우리는 교회 본질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성도라고 해서, 자유안으로 들어왔으니,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많고, 중요한 행실의 의무가 주어진다.
거룩한 삶을 훌륭히 이어가기 바란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본문의 말씀에 '그러므로'라는 말이 나온다.
앞에 나온 전체 내용을 보고, 이제는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다.
엡1-3장까지는 진리를 다루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에 대해서 길게 다루었다.
죽었던 우리를 살리고, 그리스도처럼 하늘에 올리시는 놀라운 복.
우리 정체를 이제 알았다.
우리는 제3의 인류다.
유대인도 아니지만, 이방인도 아닌 교회, 그리스도인이다.
영원한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동역자로서, 함께 후사된 자.
엄청난 지위에 이르렀다.
이것을 이론으로 배웠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실천할지 가르친다.
자기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는 해야할 구체적인 일을 명령으로 배우게 된다.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믿어야 할 것을 배웠고, 이제는 행해야 할 것을 배운다.
그래서, 명한다고 말한다.
교리는 나쁜 단어가 아니다. 교리주의가 나쁜 것이지, 교리는 신학적 원칙, 이치, 진리를 말하는 일반 단어다.
이제 이치로만 배운 것을 실제로 전환하는 지점이 여기다.
그 앞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늘의 복으로 복을 주셨는지 나열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위치에 합당하도록 삶을 만들어야 한다.
엡4장 이후부터는 마땅히 우리가 할 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첫발을 디딛는다.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렇게 말하는 자는 감옥에 있었다. 감옥에 있는 자가 이렇게 담대히 말하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다.
꼼짝 못하고, 주가 하라는 대로 하고 한다.
감옥에 있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부끄러운 것이다.
실패한 사람이 왜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잡힌 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부끄러워하거나, 어색해하거나 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성경에는 권한다고 되어있는데, 문맥에서 볼 때, 강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빌며 구하듯이 굉장히 강한 감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명령하거나, 강제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다.
제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받고, 따르도록 구하고 있다.
싫으면 말든가 하는 식이 아니라, 간절히 애원한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것은 종말론적 최후의 날을 준비하는 암시가 들어있다.
물론 강단에서도 목회하는 자들의 심정을 갖고 말한다.
목회자 중에 정직하지 않은 자도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계시를 받은 자이지만, 그도 목회자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통해, 성도들을 살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는 성도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인도한다.
제발 이렇게 하라.
성도들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할 것을 포기하는 자는 목회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로 기어히 이끌어야 한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너희를 살리신 분이 너희를 부르셨다.
성도를 인도하는 것이 산고다.
[너희를 살리신 이가 또한 부르셨다]
성도들의 행복이 조금 제한되더라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로 이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단어가 반복된다. 강조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왕이 자기 권한에 따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정의로운 권리다.
살전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가장 높으신 이(창조주)가 부른다.
왜 부르시는가.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으로 부르시는 그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다.
하늘에 데려가시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결단이 있어야겠지만,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이 계셨다.
아버지가 불러주셔야 하고, 아버지가 부른 자를 이제 그리스도께서 살리신다.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 패턴은 하다보니, 신기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면 내가 예수를 선택하면 되겠네.
아니다. 신기하게도 아무도 택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택함받은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택함이 먼저다.
우리가 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택하신 것이다.
요15:!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가 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과실을 맺는다.
첫째, 하나님께서 신자를 부르시는 것은 구원하기 위한 부름이다.
둘째, 크신 이가 주권적으로 부르신 것이다.
당연히 그의 주권이면서, 주도권도 그에게 있다.
셋째, 효험있는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
우리는 하겠다고 하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고 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분의 신적 특성이 그렇다.
효험있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후회가 없으시다.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그가 부르셨다면, 반드시 해 낼자를 부르신다.
그러므로, 택함이 있다면, 절대 지켜야 할 것이다.
그가 택하셨다는 것을 너희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악행을 하는 자도 있다.
악행을 하는 자는 아마도 애초에 구속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기만 한 자였을 수도 있다.
우리는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택할 수도 없다.
부르셨기 때문에, 여기 있고, 내일의 소망이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부르시지 않으면, 하나님께 자동적으로 나갈 수 없다.
본성이 하나님과 원수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기 위해, 아들을 보내주셨다.
그러니까, 마치 전단지 뿌리듯이, 낭비하듯 생각한다.
그것은 단편만 본 것이다.
아들을 보내셨을 뿐 아니라, 잃은 자를 찾으시려는 것이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의 사랑을 부으시고, 잃은 자를 찾아 자기 것으로 취하신다.
하나님은 구원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택한 자를 구원하신 후에 부르신다.
우리의 부르심은 하늘의 부르심이다.
우리 자의로 결정해서 다가간 것이 아니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영어 찬송에 보면 high calling 이라는 말이 많이 있다.
하늘의 부르심, 거룩함 안으로 부르시는 부르심.
충실한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따를 것을 작정한다.
기대에 부응하는 자가 되기 원하기 때문이다.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기대에 맞추는 것을 말한다.
마땅히 기대되는 가치를 해내야 한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가 가진 위치에 맞게 살아야 한다.
살전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왜 합당하게 행하게 하려는가.
하늘에 가게 하시려고.
주께 합당히 행하게 하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며, 인도하신다.
[삶의 방식이 기대에 맞아야]
합당하게 행한다. 신약성경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주와 함께 걷는다.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한다.
행한다, 산다, 걷는다. 같은 것을 말한다.
한두번 행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표현으로 행한다고 간단하게 나오지만, 삶을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와 사망 가운데서 살았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제 우리는 예수 가운데서 행한다.
부르신 것은 신자들의 삶의 범위 안으로 불러 들이신 것이다.
[주권에 의해 부르심]
그분은 주권으로 부르신다.
마땅히 부르실 분이 부르신다.
엡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주권으로 부르시고, 그가 주도권을 갖고 계시다.
그가 친히 이끄시고, 반드시 효험이 있다.
부름 자체가 엄청 큰 것이므로, 그 부름은 반드시 결과가 있다.
이 세상 일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결과가 나온다.
찬188 만세반석 열리니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그가 피를 흘리신 것이 내게 효험이 되어서, 그가 계획하신 일이 절대 이루어진다.
그가 부르신 것은 효험있는 일이다.
그가 택한 자를 부르시고, 부른 자를 의롭다고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현재완료형으로 되어있지만, 미래를 말한다.
그가 주도가 되어 인도하시는데, 필요한 것은 인간의 반응이다.
하나님의 주도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마땅히 따라야 한다.
그가 부르신 삶에 대해서, 받을 것인지, 아닐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엡1:3,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가 부르셨기 때문에, 열려있다.
그가 강제로 끄는 것이 아니라, 부르셨다.
이치적으로 거절할 수 있다.
부르심에 들어가면, 순종할 것을 결단해야 한다.
책임을 질 것을 결단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령한 복으로 부어주시고, 이끄시는 것은 이미 택한 자를 불러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울은 책임이 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호소한다.
엡1-3장까지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너희가 이런 복을 받고도, 안할 것인가, 부르심에 응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려주셨는데,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 하시고, 하늘의 임무를 주셨다.
교회에 엄청난 임무를 주셔서,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그 사랑을 나타내도록, 그래서, 하늘의 천사들도 인정하도록 하려 하신다.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데, 우리가 선봉장으로 그 역할을 하도록 책임을 주셨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다음주부터 할 것이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아멘하라.
합당하게 행하는 교회되자.
우리가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안하겠다고 하는 것과 힘을 다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주께서 제공하신 새삶을 훌륭하게 만들어가기 바란다.
교회는 순종을 배우는 곳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거룩한 삶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신앙의 삶을 만들기 바란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로 여기 와 있습니다.
내 참 모습과 비교할 수 없는 내 지위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불러주신 새 삶 가운데 들어가, 책임을 성실하게 다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합니다.
적어도 내 노력을 합당히 보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명예를 부끄럽게 하지 말고, 높여드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