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디며 섬기는, 보상있는 신앙의 삶(데살로니가후서 1:3~9)
2024년 9월 15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살로니가후서 1:3~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삶은 한 마디로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견디며, 섬기고 또한 보상을 기대하는 신앙의 삶’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성경 전체에 주시는 말씀을 한 마디로 함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구약성경이 이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축소하고 축소한다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말씀에도 보면, 딱 이 말씀으로 수축이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 모델을 주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뭐하고, 무슨 요일에는 뭐 하고 하는 식으로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이 상태는 무엇인지,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성경을 통해 이미 다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주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것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모던 시티 라이프, 우리는 현재의 삶에선 신앙과 절충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이 그렇게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는 봅니다. 사실상 현대인들에게 주님의 요구하시는 모습으로 삶을 이끌어가도록 더 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절충한 상태이지, 지금이 온전한 상태라고 전혀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충된 상태가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하다 보면, 더 건전하고 더 의로운 곳으로 갈까요? 아닙니다. 점점 타락할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그때는 이렇게 했는데!?’ 하면서 자꾸 절충합니다. 불행하게도 점점 나쁜 것들은 잘 받아들이고, 거룩하고 귀한 것들을 받기를 주저하고 해서 자꾸 온전한 신앙의 삶에서 물러나고, 밑으로 하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몇 십 년간의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 주님 말씀대로 꼭 맞게 달려왔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을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 때문에, 우리 중 많은 영혼이 주님 나라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래도 말씀대로 달려왔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참으로 원컨대 우리 모두가 주님의 나라에 오라고 부름 받은 자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자들로서 나아가기 원합니다. 비록 여기서는 헷갈리지만 하나님은 하나도 헷갈리지 않으시고 그 영혼을 주시하고 계시며, 그 영혼이 어디 가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든지 어떤 역경이 있든지 다 그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런 영혼들이 오늘 우리 가운데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모르기 때문에 불안함이 있습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되는 거지?’ 합니다. 앞으로까지도 볼 것도 없이, 당장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건가?’ 싶습니다. 그런 불확실 속에 있는 우리에게 가끔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솔직담백하게 강력한 권고로 나누기 원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면 그 구원하실 사람들, 그의 음성에 응하여 나온 사람은 세상에서 백 번, 천 번 죽었다 깨어났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절대 구원됩니다. 절대로 천국 갈 자들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 모두에게 그런 확신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러한 부름에 합당한 삶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기도를 규칙적으로 잘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하는 것 등을 하나님의 부름의 잣대로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자기 심령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자, 그 자가 하나님이 부르신 자요, 택하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의로운 자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난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는데!?’ 하고 나온 자에 대해서는 아마 새로운 전제로 다시 한번 따져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나 죄인입니다.’ 하고 고개 푹 숙이고 온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 비율이 어떻게 될지 저는 모르지만, 그저 기분 좋게 상상해 보기로는 여기 있는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절대로 저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작정하고 있는 영혼들이기를 바래볼뿐입니다.
때로는 ‘나, 잘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의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영감이 부족해서 잘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해주는 것에 대해서 순종하고 따라온 것뿐이지, 하나님께서 어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다 알고 온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면서 따라온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머리가 조금 둔해도 됩니다. 오히려 그게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궤술이 뚫고 들어올 데가 없기 때문에 머리가 나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서는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우리 인생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영원한 나라에 우리가 이를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데려가십니다. 다만 그 길이 그리 순탄하진 않습니다. 모진 눈보라와 역경을 맞을 것입니다. 옷은 누더기처럼 여기 저기 뜯어져 있을 것입니다. 만화에서 보면 캐릭터가 모르고 폭탄을 주웠다가 폭탄이 빵 하고 터지면 캐릭터의 옷이 너덜너덜해지는데, 천국에 이른 우리 모습이 마치 그럴 것 같습니다. 폭탄을 맞은 것처럼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서 성한 곳이 없고 온 몸에 흙을 뒤집어 쓰고 몰골이 말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에 대해서 위기를 전혀 느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그의 생명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아무도 그에게서 구원을 빼앗지 못하도록 계속 그의 뒤를 따르시고, 앞에서는 이끄시면서 보호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록 겉으로 볼 때 옷은 다 해치고 지친 모습이지만, 그는 승전하는 주님같이 주의 성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나라에 말끔한 모습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 상처받고, 다 고생하고, 다 옷이 떨어지고, 다 때가 묻고, 다 상처투성이로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세상에서 영혼을 책임지고 구원하시는데, 그에게 명령을 줍니다. ‘내 교회, 섬겨라. 나를 섬겨라.’ “내가 언제 주님 섬겼습니까?” “네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할 때 사랑 베풀었지 않느냐? 그게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이렇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성도를 섬깁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보면, 우리가 성도를 섬긴다 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성도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니라(히브리서 6:10)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를 사랑한 것,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그가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한 행위에 대해서 모두 그가 기억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교회를 미워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삶의 성격이 무얼까요? 우리의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목사가 ‘다 자기 인생 포기하라’고 그러면 다들 그렇게 할까요? 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주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한 자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해서 그를 돕고, ‘여기는 그리스도의 교회다.’ 해서 돕는 자에 대해 하나님은 ‘저는 절대 상을 잃지 않으리라. 내가 반드시 보상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섬기면서 인생을 살 때 손해를 많이 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니 썩 마음에 들진 않는 직장을 엄청 어렵게 얻었지만, 인생이 힘듭니다. ‘억지로 버텨가고 있습니다. 뭘 나누어줄 여력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도 그렇고 힘도 없습니다. 의지도 없고.’ 그렇더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주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임무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주의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냥 사랑해주고, 교회가 잘 되도록, 덕으로 아름답게, 은혜롭게 세워지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 나는 쓰러지더라도 교회 세워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의 영원한 복을 위해서 나를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도울 필요 없습니다. 주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을 돕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돕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주의 교회를 위해서, 이미 부어주신 그 큰 은혜에 대해서 나는 평생 감사하면, 그가 불러주시고 세워주시는 곳에서 나는 그를 사랑할 뿐입니다. 내가 나를 챙기고, 내가 손해 안 보려고 버티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섬기다 보면 많은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거는 어떻게 하죠? ‘조금 눈치 있게 하자. 손해보지 않게 적당히 하자. 피차 손해는 나지 않게 절충해서 하자.’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치사합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적인 모습입니다. 크리스챤 라이크(Christian like). 교회에서도 나름대로 섬기고 해서 섬기는 모습은 있어도 사실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 것 말고, 참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저와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도 교회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돌보기보다는 차라리 감독을 돌보고 주의 교회를 돌봅니다.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저도 잘 아는데 주님은 모르시겠습니까? 그 자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자는 마음이 이미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주님 나라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찬답게 사는 것, 그것만으로는 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소용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 여기서 전체를 향해 ‘덤벼 봐! 덤벼 봐!’ 하는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이미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주님의 그 은혜 받았을 때에 나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나를 영원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삶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주님이 나를 초청해주시고 나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 합니다. 자기 인생, 여기서 끝난 것입니다. 주의 은혜받은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근데 그러면서 그 사람에게는 잃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손해를 봅니다. 물질도 손해, 시간도 손해 봅니다. 세상에서는 오해도 많이 받고, 미움받게 돼 있습니다. 이 세상과는 딱 마주치게 돼 있습니다. 세상과는 절대 같이 안 갑니다. 세상 생활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하고? 그렇게 안 됩니다. 세상에서는 오해도 많이 받고, 피도 많이 흘리게 됩니다.
그 다음에 원수가 가만히 있나요? 자꾸 건드립니다. 언젠가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가정이 풍지박산이 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좀 영리하게 해야 되겠다!’ 해서 신앙생활을 영리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영리하게 신앙생활 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은 요만큼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신앙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느라고 이 땅에서 잃은 것을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는 여기서 하늘나라에 합당하도록 힘을 써라. 너희에게 보상이 있다. 너희를 괴롭히는 자는 하나도 놔두지 않고 다 보응하리라.’
마태복음 25장 40절에는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라.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너희가 서로들 사랑해라.’ 하셨는데, 이 말씀이 율법을 다 커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사랑의 덕’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평생 그는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이제 드러내야 되는, 실천하는 영광스러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손해를 본 것에 대해서 그가 다 갚아주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딱 손해 본 그만큼만 갚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갚아주신다고 했습니다. ‘그의 풍성함을 따라 준다’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말씀에 보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니, 이것은 하나님의 기업을 잇게 하시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맡겨 두신 것이라. 니가 아무렇게 해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너를 위해 하나님이 간직하고 계신 것이다. 말세에는 너희가 여러 가지로 근심을 받을 것이다. 어려운 일들이 있을 것이고 시험이 있을 것인데, 당장은 근심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잘 견뎌내는 너희 믿음을 하나님이 가치 있게 보시고,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실 때 너희에게 참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라.’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 우리 교회에서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온 은사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그 다음 부분은 별로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 나도 무슨 은사가 있으면 좋겠다.’ 하고 설교를 끝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13장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 은사보다 더 큰 은사가 있으니, 제일 큰 은사가 있다. 바로 사랑이라. 모든 은사 중에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이것은 할래야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능력을 부어줘야 한다.[1]’라고 했습니다. 제일 큰 은사가 사랑입니다.
과거 전국적으로 우리나라가 은사를 강조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가슴 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장부터 7절까지 쭉 보면, 우리 교회는 전혀 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반대였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이것도 할 말없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할 말이 없습니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이것도 할 말없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조용히 해야 됩니다. “교만하지 아니하며…”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이것도, 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나 피해야 되겠습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부끄럽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정말 어떻게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7절까지 읽는데, 우리가 완전히 산산조각 납니다. 이제 우린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떠나시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성령이 소멸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신앙생활할 때 우리가 할 일은 계속 섬기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해서, 주의 쓰시는 사람 혹은 성락교인이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 대접한 자가 그 보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저 냉수 한잔 대접했을 뿐인데요? “그렇더라도 나는 너를 보상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의 일꾼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자를 잊지 않고 보상하시겠다는 내용은 마태복음, 마가복음에도 나오고, 히브리서에도 비슷한 맥락의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성경의 한 말씀도 절대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분은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손해 보더라도 주의 교회 섬기기로 된 자로서, 은혜받은 자로서, 천국의 시민권이 있는 자로서 오늘 여기에서 거룩한 임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서 우리 자신을 충분히 구원했습니다. 내가 없는 것을 구비하기 위한 준비를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으로 경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그 순간에 나에 대한 것들이 이미 다 구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남은 일은 사랑하기 위해서, 섬기기 위해 손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타락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속으로는 다 속이고 있는데.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고 심판하신다 그랬습니다. ‘언제는 행위로 한다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다만 미음도 없는 그런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도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그런 마음 없는 행동에 대해 보상하지도 않으시지만, 그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2].
또 멸망할 자는 교회에도 있어서 평생 교회를 괴롭힐 것입니다. 교회의 속 썩이는 사람은 계속 속 썩입니다. 이상하죠? 똑같은 사랑을 받았는데 이상하게 생각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릅니다. 저는 이거 이해 못하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역사하는 사단의 역사를 저는 이해 못합니다. 너무나 무섭기만 합니다. 교회를 괴롭히는 사람은 계속 끝까지 괴롭힙니다. 돌이키지 않더라고요. 제가 모든 사람을 다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큰 윤곽에서 볼 때 그런 예를 너무 많이 봤고, 바뀌는 예는 하나도 기억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한 것인데, 마음이 타락한 자는 절대 회복이 안 됩니다. 베드로후서 2장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저들은 상상을 초월한, 완전히 이성이 없는 짐승 같은 그런 악한 요소들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믿겠다고 등장은 하지만은, 나중에는 결국 배신한다. 이 사람은 차라리 예수를 몰랐다면, 아예 전도를 받지 않았다면 더 나을 것이다.[3]’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우리에게 자유가 온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에서 나온 말씀인데, 이것은 유대인의 상황에서 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뭘 잘해야 구원 는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로서 흠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데에 억압받지 말라. 자유가 이미 왔다.’ 했습니다. 마차가지로 우리도 우리에게 자유가 왔다면, 우리에게 구원이 왔다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섬긴다고 해서 옆에 성도를 바라보며 “아이고~ 예쁘세요~아이고, 아이고~짝짝꿍~”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사랑하기로 돼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사랑한다고 해서 내게 손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이에 대한 보상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은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신 주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못하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은 자기의 몸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얻어서 이제 미래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면 천국 갈 것을 생각하면서 그 자유와 은혜의 시간을 정욕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갈 5:13~14)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라디아서 5:13~14)
또 다른 성경에 보면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라.’라고도 했습니다.
우리 삶의 성격은 너무 분명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섬기는 자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것은 다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이미 충분히, 그렇게 해야 마땅할 만큼 충분하고도 넘는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평생 우리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땡큐! 땡큐! 땡큐!”를 외치고 살아도 충분치 않습니다.
‘묵묵히 사랑할 뿐이다. 너 자신을 챙기려 할 필요가 없다. 그런다고 네 영혼은 손해 보지 않는다. 너는 하늘을 가진 자고, 온 만물의 임금의 아들/딸이다. 너는 잃은 것이 없다.’ 구원에 대해서 헷갈리고, ‘진짜 기일까, 아닐까? 혹시 신앙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혹시 정말 구원이라는 것이 없다면, 손해는 보지 말아야 되는데.’ 하는 것은 사단의 생각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는 그 사실이 마음에 꽂혀 있는 사람에게 천국에 대한 의심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너저분하게 불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를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의 주인은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계산을 해서 ‘이렇게 하면 나한테 유리할까? 저렇게 하면 나 손해 볼까?’ 하지 않습니다. 주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니가 어찌하여 형제를 판단하며, 니가 어찌하여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으니,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기를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9~12) 했습니다. 주님이 각각에게 ‘너가 이렇게 했지? 너 저렇게 했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이 주님 앞에 가서 다 털어놔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주님을 속이고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주님께 다 얘기해야 됩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기회를 줬는데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님이 “너 사랑했니?” 물으실 때 “나 다 미워했는데요. 난 나만 살려고 그랬는데. 나 성도들 다 미워했고, 목사도 미워했습니다.” 하고 다 그분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난 물질 때문에, 세상의 것 욕심 내느라고 교회를 박살 내고, 거기서 부스러기를 좀 주어 먹으려고 그랬습니다.”
힘들어도 의를 지키라고, 참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 ‘팔복’에 대해 나오는데, 오늘 말씀의 전체를 소개하는 것 같은 웅장한 기분이 듭니다. 팔복의 마지막에 가서는 ‘네가 하나님을 섬기다 보니까, 선하고 착하게, 하나님처럼 그렇게 하다 보니까 다 손해보지 않느냐? 손해 하나도 안 본다. 너에게 핍박이 있고 너에게 어려움이 있느냐? 그건 너의 신앙의 선배들도 다 그렇게 했다. 내가 보낸 선지자들도 그랬었다. 그들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들은 상이 너무 많다. 큰 상을 너도 받을 것이다. 힘을 내라.’ 했습니다.
힘을 내는 우리 성도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나님께 마음 다하기시 바라겠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온 마음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마음 다해~ 주 알기 원하네~” 하는 찬양도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마음으로.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끝! 너희들은 말고~” 이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자는 사랑을 쏟습니다.
정말 처절하게 주의 교회를 사랑하는 그런 성도들을 보면 나도 떨립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좀 의롭지 않게, 부족하다고 보실까 봐 무섭습니다. 제가 그렇게 요구는 못하지만, 우리 모두 참으로 주님 하늘에 오르시고 버려진 우리들끼리, 남겨진 우리들끼리 하늘의 이 기업을 이어가야 될 궁리를 해야 되고, 계획을 해야 되고, 실현해 가야 되는데, 그것이 ‘우리’라고 여기고, 오늘부터 하늘에 속하여 하늘에 모든 투자를 하시고, 하늘을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우리가 주의 일을 하다가 손해보는 것에 대해서 아깝게 생각하고,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동안도 내게 있는 의미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큰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내 인생에 수백 번, 수천 번을 말할지라도 갚을 수 없는 그 사랑,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임무입니다. 의미입니다. 내게서 아름다운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라는 나의 삶 속에서의 실제적인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셔서, 거룩한 우리의 삶, 손해보지 않는 견디며 섬기는, 그러나 보상이 있는 신앙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들은 우리 모든 성도들 도와주시고, 우리 하나님 섬기는 우리 신앙이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아닌,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에 합당한 자세를 갖게 하시고, 어떠한 유익을 얻기 위해서 애쓰는 자가 아닌 이미 주신 그 행복과 영원한 약속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자,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자, 주의 보상을 기대하는, 섬김이 넉넉한 우리 성도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힘들고 인생이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영혼을 격려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고, 마음을 안심하도록 저들을 감동하여 주시옵소서. 멀고 차가운 하나님, 사람들에 대하여 인색한 하나님, 또 까다로운 하나님이 아닌, 사랑이 많으시고 또 감정을 함께 나누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주시고 또 도와주신 우리 하나님인 것을 확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1~7)
[2]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3]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9~14)
[출처] 20240915 견디며 섬기는, 보상있는 신앙의 삶(데살로니가후서 1:3~9)_주일연합_김성현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