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벗들은 누구일까
<글쓰기 마라톤 16차>
수필: 이 남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고산 윤선도의 시조 「오우가」는 이 담담한 선언으로 문을 연다. 시인은 사람의 이름 대신 자연을 불러 자리에 앉힌다. 벗을 헤아려 보라 하니, 손가락 끝에 꼽히는 것은 돌과 물,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저 멀리 뜬 달이다. 모두 입이 없으나 제 자리를 지키는 존재들이다. 이 고요한 초대는 시 전체의 숨결을 단숨에 결정짓는다.
문득 「오우가」를 읽다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의 벗들은 누구일까.’
시조는 짧으나 그 안에는 머물 수 있는 여백이 깊다. 윤선도의 벗들은 화려하게 자신을 뽐내지 않는다. 돌은 그저 묵묵히 앉아 있고, 물은 쉼 없이 흐르며, 송죽은 바람을 맞고, 달은 밤마다 어둠을 비춘다. 그들은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무심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신뢰의 증거가 된다. 시인은 아마도 사람에게서 얻지 못한 평온을 이들의 정적 속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이 시조의 진정한 매력은 자연을 객관적인 풍경으로 두지 않고, 자신과의 거리를 지워버리는 데 있다. 돌은 단순한 광물이 아니고, 물은 흘러가는 배경이 아니다. 시인은 이들에게 ‘벗’이라는 이름을 허락한다. 벗이란 곁에 두되 소유하지 않으며, 구태여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존재다. 고산은 자연을 그런 인격적 관계로 끌어올린다.
시조 속의 물은 멈추지 않는다. 흐르면서도 탁해지지 않고, 소리를 내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물의 성정은 시인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세상의 부침에 밀려나 물러났을지언정, 흐름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 말없이 제 길을 가는 담담함이 이 시조의 단단한 밑바탕을 이룬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계절이라는 혹독한 시험대 위에 서 있다. 눈보라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고, 강풍에도 꺾이지 않는다. 시인은 그들에게서 '변하지 않는 마음의 형상'을 본다. 세상의 말은 아침저녁으로 바뀌고 사람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지만, 이 나무들은 수백 년을 같은 빛깔로 서 있다. 그것은 굳건한 절개를 넘어, 생을 대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처럼 보인다.
마지막 벗인 달은 가장 멀리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운 존재다. 손에 잡히지 않으나 늘 등 뒤를 비춘다. 낮에는 자신을 낮추어 숨어 있다가, 밤이 오면 조용히 위로의 빛을 건넨다. 윤선도는 달을 통해 '존재함'의 참된 의미를 묻는다. 드러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구원이 되는 존재를 말이다.
글을 읽다 보면 새삼 ‘벗’의 정의를 다시 묻게 된다. 자주 얼굴을 마주해야 벗일까, 수많은 대화가 오가야 벗일까. 고산은 말이 없는 것,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들을 벗이라 부른다. 그 관계에는 서운함도 오해도 끼어들 틈이 없다. 오직 '함께 있음'이라는 본질만 남는다.
결국 「오우가」는 세상을 등진 은둔의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너무 깊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시인이 선택한 가장 따뜻한 거리두기다. 자연을 벗 삼음으로써 그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세상을 저주하지 않을 힘을 얻는다. 그저 조용히 자기 자신을 지키는 쪽을 택했을 뿐이다.
다시 한번 나에게 묻는다. 나의 벗들은 누구일까. 시를 덮고 나면 곁에 있는 돌과 나무, 밤하늘의 달이 문득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채우려 애쓰기보다, 이미 내 곁을 지키고 있던 침묵의 존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진다.
벗은 많지 않아도 좋다. 그저 단단하고, 맑으며, 변하지 않으면 된다. 윤선도는 그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리를 이 시조 한 수에 온전히 심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