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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란 자가 교화될 수 없는 경상도란 글을 썼다고 한다. 오래 전에 쓴 모양인데 난 이제야 봤다. 대표가 그런 광어눈깔 망발이나 뿜으니 서프가 그 어떤 시궁창인지는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거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시각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굳이 교화 불가능한 지역을 꼽으라면 다름아닌 전라도를 콰악 찍어 주는 것이 100번은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자 가장 많은 625 참전 용사를 낳은 곳 경상도가, 조국과 민족에 악마의 저주를 가져 온 북한에 핵볕하지 않으면 수구꼴통으로 부르는 언어도단 반역질에 반대하는 경상도가, 세계 최악의 빈민 거지국가로부터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건설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적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일구었다 할 경상도가,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가장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경상도민이, 대체 뭘 그리 잘못했기에 교화불가능한 괴이한 종자라고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 건데?
물론 경상도가 지지하는 현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나라당의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한다는 지적이라면 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 문제일 뿐이고 역시 핵심은 대한민국에 대한 근본적 인식과 시각인 것이다. 미흡한 부분에 대한 개선이 아니라 애시당초 불의와 더러운 반민족이 건설한 있을 수 없는 국가라고 근본부터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짓거리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봐 주어야 하겠는가.
북한은 그나마 친일청산했으니 정통성이 있었다고? 고난의 행군 어쩌고 지 꼴리는대로 통치하다 수백만 굶겨 죽이고 625 일으켜 300만 쳐죽였던 김일성 따위, 조국은 원시시대로 돌리고 민족을 한없는 대립과 갈등으로 몰아 넣었으며 오히려 일본은 패전의 굴레에서 구원한 메시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진성 친일파 김일성 이상의 반민족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는가 말이다. 꼬투리를 잡고 욕을 퍼부으려면 한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진정 교화 불가능한, 동토의 땅으로 남아 있는 유일의 지역이 있다면 이는 바로 전라도이다. 대한민국사 부정파의 75%를 차지하며, 초록은 동색이라고 같은 대한민국사 부정파인 북한과 종북세력의 등덜미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유일의 반국가 지역이자 알만 한 독립운동가 단 한 사람 낳지 못한 주제에 주딩이만 열면 친일 운운하며 대한민국 똥칠에 발광하는 가장 파렴치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교화될 수 없는 집단이란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전라도를 가지고 한 번 이야기를 해 보겠다. 지역감정? 웃기지 마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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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신상철의 글
교화될 수 없는 집단 - 경상도 바로보기 [1]
'단순무식함의 본질'을 알아야 해법이 보인다
언젠가 한번은 파헤쳐보려고 했습니다.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때면 때마다 맞닥뜨리게 되는 황망한 상황을 접할 때마다 ‘이 인간들은 왜 이런 것일까’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불편함과 함께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만드는 원천 - 그들의 ‘텅빈 뇌’를 한번 해부해 보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한번 보기라도 하게… 그 난해한 원인을 밝혀내고자 하는 욕구는 거의 평생을 경상도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경상도에서 배우고 경상도 사람과 결혼해서 아직도 경상도에 살고 있는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의무요, 시대적 사명이라는 중압감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기실, 사회인이 될 때까지는 그닥 별 불편함 없이 살았습니다. 좋은 친구들, 좋은 사람들… 살아오며 만나고 사귄 사람들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만 유난히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제가 느끼기에 경상도 사람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의사표시 분명하고, 의리있고, 인정많고, 화끈하고, 한번 맺은 정 끈끈히 이어가는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매우 불편함으로 그리고 불쾌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명절날 한해 한 두 번 볼까말까한 가족 친지가 한자리에 모여 정겨운 시간을 나누다가도 어떤 특별한 주제로 빠지게 되면 여지없이 그 불편함과 불쾌감은 주파수의 파장에 따라 증폭되고 결국 증오심에 이르기까지 감정이 격해지는 걸 느끼곤 하였습니다. 도대체 이 개 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독재의 망령이 서슬 퍼렇게 살아 설치던 긴긴 시절에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총으로 찬탈한 경상도 정권의 대를 이은 횡포속에서도 경상도민의 의식수준은 분명 지금과 달랐던 기억입니다. 고딩시절.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어 찍소리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어른들도 친구들도 모두 쉬쉬하는 가운데 독재정권의 횡포에 대해, 그들의 패악질에 대해, 그것이 옳지 않음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고 분노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민주세상을 경험하고서도 오늘날 보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요? 이게 도무지 연결되지 않았고 그 상관관계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 자체가 여간 난해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평생 경상도에서 살았던 사람이 이럴진대 경상도와 연이 닿지 않는 분들이 느끼시는 황망함은 오죽하랴 싶습니다.
간단히 한 가지 문제만 짚어 봐도 그렇습니다. 예로부터 경상도는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정신과 전통을 가진 곳으로 이해되어왔습니다. 물론 광주 항쟁과 신의주 의거 등 전국으로 확대시키면 민족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경상도가 유별났던 것은 경상도에서 들고 일어나면 정권이 바뀌거나 치명타를 입을 정도로 끝장을 봤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1946년 10월 미군정 영역인 대구 지역에서 일제 강점기 지배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미군정과 미군정 지지세력에 대한 대규모 유혈 항쟁이었던 ‘대구 10.1사건’(좌익이 주도했다는 이유로 아직도 ‘10.1 대구폭동’으로 불리는 것이 한계), 마산에서 촉발된 3.15 부정선거와 4.19의거, 부산.마산 중심의 ‘부마항쟁’ 그리고 그 외 민주 항쟁에서 보여준 경상도민의 역량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다면 말이지요. 지금 경상도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꼴은 도대체 뭐냐라는 것이고, 이 연결고리를 풀어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의식, 민주의식 뿐만아니라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정의감까지 가졌던 사람들이 지금에 와서 보이고 있는 태도와 말과 의식구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요.
경상도의 Major Code는 ‘단순무식함’
바로 그것이 해답이요 Key라고 생각합니다. ‘단순무식함’ 그 외에 어떤 고차원적인 분석이나 해설도 경상도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논리(論理)가 거의 통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연역적, 귀납적 설명이 전혀 먹히질 않는, 참으로 괴이하고 특이한 종족입니다. 그래서 괴담을 즐기는 고담도시를 만들고 그 속에 살아도 별로 불편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적 불편함, 이지적 불쾌감, 그런 단어는 그들의 뇌에 별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A는 B고, B는 C이니, A와 C는 이렇게 관련된다’ 라는 설명을 그들에겐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의 ‘단순함’은 그 정도 긴 말을 끝까지 들을 만큼 인내심이 강하지 못하고, 그들의 ‘무식함’은 그 정도 논리를 연관 지을 만큼 사고력이 받쳐주질 않습니다. 이것은 저를 포함한 그들 영남 종족의 두뇌 능력이나 IQ 혹은 지적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근거 없는 맹목적 비난에 불과할테니 말입니다. 문제는 지배환경입니다. 그들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는 고정적 관념이 그에 상응하지 않는 이론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고착화된 사고의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단순함’과 그 ‘무식함’이 오묘하게 결합된 우라질레이숀들은 그 논리를 차분히 설명하는 도중에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마~ 마~ 고마해라~ 내사 마~ 무신 말인지 하나~도 모리겠꼬~ 나는 정치도 모리고~ 갱제도 관심업꼬~ 어쨌든~ 갸~는 빨갱이라~카이 싫고, 쟈~는 몬해묵껬다~카이 싫고~ 야~는 사람들이 젤 낫다~카이 나는 무조건 야~를 찍을끼다~” 그걸로 끝입니다. 표현의 방법만 조금 다를 뿐, 거의 이 수준의 샘플에서 별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나마, 눈 멀어 찍어놓고 보니 사기당한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자신의 손가락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질만큼 진화한 종족들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슬쩍 감춘 채 변명하듯 둘러댑니다.
“마~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오데있노~ 이왕 대통령 시켜줏으니께네~ 함 맡겨주고~ 그라고.. 쪼매씩 나아지고 있다~카이 함 기다리봐야 안되긋나~” 겨우 그 정도가 변명을 위해 발굴해 낸 논리입니다. 참으로 이중적이고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철저한 이중잣대와 ‘쪽팔린다’는 이유로 자신의 과오를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 지적 천박함.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적 단어가 바로 ‘~카이’ 인데, 이것을 수도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해석하자면 ‘(남들이 혹은 누군가가)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니~’라는 뜻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화법의 본질은 실제로 누구로부터 주워 들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거리의 대명사처럼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비판적인 속성 - 단순무식이 낳은 산물, '무대뽀'
자신의 생각이나 고민은 공란이고, 외부로부터 주워들은 내용을 ‘무대뽀’로 자신의 생각에 채워넣는, 그들의 단순무식함을 만족시키는 재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럴듯한 소리, 자극적인 소리, 감정에 기대는 소리, 자신의 이기심과 이익에 도움이 될 것 같이 느껴지는(피상적이라도) 그런 달콤한 소리 등이 우선입니다. 이러한 악성 바이러스는 누가 어떻게 생산해 낼까요. 그것은 쓰레기 언론의 쓰레기 헤드타이틀, 그리고 저급한 정치인들의 한탕주의식 저속한 발언등과 같이 자극적이고, 배설적이고, 묻지마 괴담수준의 표현과 발언의 영향이 매우 큽니다. 그런 부류의 언어들이 단순무식의 코드와 친화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경상도식 단순무식함은 기사를 꼼꼼히 읽으며 판단할만큼 인내심이 길지 못하고, 실체적 배경, 즉 진실이 무엇인지 여기저기 검색하고 찾아 비교할 만큼 이지적이지 못합니다. 따라서 쓰레기 헤드타이틀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길어야 서브타이틀 정도가 데코레이션되어 있다가 그와 관련된 주제만 나왔다하면 이미 들어찬 고정메뉴를 앵무새처럼 외고 또 외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듣고 머리 끄덕이며 감염된 또 다른 단순무식은 ‘누가 그렇다 카데~’하며 그것을 또 다시 무대뽀로 전파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런 종족들은 거의 교화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교화하려는 노력은 거의 실효성이 없다고 보면 틀리지 않고, 대부분 시간낭비라는 자괴감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면 포기해야 할까요? 해법은 없는 것일까요? 포기해야 할만큼 해법이 없다면 이 글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면관계상, (할 말이 많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진단에 대한 분석과 해법 제시는 2편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정 교화될 수 없는 집단- 전라도 바로 보기 [1]
'간교함의 본질'을 알아야 해법이 보인다
언젠가 한번은 파헤쳐보려고 했습니다. 한 번 두 번도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때면 때마다 맞닥뜨리게 되는 황망한 상황을 접할 때마다 ‘이 전라도 인간들은 왜 이런 것일까’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불편함과 함께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만드는 원천 - 그들의 ‘야비한 심성’을 한번 해부해 보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한번 보기라도 하게… 그 난해한 원인을 밝혀내고자 하는 욕구는 한없는 대립과 갈등의 대한민국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국민의 피할 수 없는 의무요, 시대적 사명이라는 중압감으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기실, 사회인이 될 때까지는 그닥 별 불편함 없이 살았습니다. 주위에 몇몇 있는 전라도 사람들, 개젓같은 것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런대로 참으면 참을만 했습니다. 그러나 선거 때만 되면 전국 유일의 노랑, 주황 물결만 칠해지는 이 희한한 동네, 아니 인터넷 도입 후에는 허구헌 날 한시도 쉬지 않고 대한민국과 경상도에 패악질을 연발하는 이 어거지 깽깽이만도 못한 집단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625 직후에는 그렇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전주예수병원에서 기생충 1063마리를 안고 죽은 여자애가 나오던 1960년대에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이 박정희와 겨루던 71년에도 전라도민의 의식수준은 분명 지금과 달랐던 기억입니다. 고딩시절. 박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만들고 포항제철 세운다고 할 때 부유층 유람길 만드니 시기상조니, 패악질하던 김대중의 돼처먹지 못한 악다구니 반대를 위한 반대질에, 그 옳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혀를 차는 전라도인들도 분명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300만의 사상자와 500만의 난민을 낳고 조국을 원시시대로 돌린 북한 집단에게 조공하고 핵볕하지 않으면 수구꼴통이라 패악질하는 오늘의 반국가 반역질의 뻔뻔함은 대체 무엇인가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경험한 자랑스런 국민으로서, 그 무슨 민족의 태양이 건설했다는 북한과 비교해 평균 수명이 10년 이상 벌어졌고 삶의 질은 비교할 수조차 없음에도, 오직 대한민국 똥칠과 박정희 똥칠이 유일한 목숨줄인양 발악에 발악질을 거듭하는 전라도의 현 실정은 도대체 뭘까요? 알만 한 독립운동가 단 한 명 낳지 못한 주제에 더러운 주딩이만 열면 친일 운운하며 대한민국 건국과 건설사 난도질에 목숨거는 저들의 추악한 본질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요? 이게 도무지 연결되지 않았고 그 상관관계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 자체가 여간 난해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간단히 한 가지 문제만 짚어 봐도 그렇습니다. 예로부터 전라도는 민주화 전통을 가진 곳이라 떠들어 왔습니다. 광주사태가 그랬고 최근의 촛불시위가 그 점을 여지없이 잘 보여 줬다고 자기네는 자평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그렇다면 말이지요. 지금 전라도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꼴은 도대체 뭐냐라는 것이고, 이 연결고리를 풀어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의식, 민주의식 뿐만아니라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정의감까지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지금 보이고 있는 태도와 말과 의식구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요.
전라도의 Major Code는 ‘간사교활하게 남탓하기’
전라도는 50년대 이전부터 간사하다거나 교활하다거나 뒤통수를 친다는 평가를 전국적으로 받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해답이요 대한민국의 분열을 밝히는 절대적 Key입니다. 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간사교활함’ 그 외에 어떤 고차원적인 분석이나 해설도 전라도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정직이 거의 통하지 않습니다. 개만도 못한 거지요. 평생을 단 한 번도 거짓말 해 본 적이 없다는 김대중의 말도 여기서는 성경 구절 이상의 진실로 통합니다. 한마디로 연역적, 귀납적 설명이 전혀 먹히질 않는, 참으로 괴이하고 특이한 종족입니다. 그래서 괴담을 즐기는 라쿤도시를 만들고 강간, 아동실종, 아동성범죄, 절도 기타 종합범죄세트 단연 1위 광주에 살아도 별 불편함을 모르고, 오히려 타지역을 고담이라 매도하는 파렴치한 짓거리를 유감 없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도덕적 불편함, 양심적 불쾌감, 그런 단어는 그들의 뇌에 별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A는 B고, B는 C이니, A는 C를 등쳐 먹어서는 안된다’ 라는 설명을 그들에겐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의 ‘야비함’은 그 정도 그 말을 끝까지 믿을 만큼 순수하지 못하고, 그들의 ‘교활함’은 그 정도 신뢰를 연관 지을 만큼 정직하질 못합니다. 이것은 전라도민의 심성이나 도덕적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근거 없는 맹목적 비난에 불과할테니 말입니다. 문제는 지배환경입니다. 천년을 지배해 온 풍토와 그들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는 고정적 관념이 정직과 믿음을 중요시하는 이론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고착화된 사고의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야비함’과 그 ‘교활함’이 오묘하게 결합된 우라질레이숀들은 그 관계를 차분히 설명하는 도중에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흐미~ 입다무쇼 잉~ 모든 거슨 개쌍도 탓이고 우리는 억울허게 차별 받았응께 잉~ 누가 뭐래도 우리 슨상님은 천년에 한 번 나올 성군이었고 잉~ 등신 같은 쥐박이가 무슨 대통령따위라 헐 수 있것소 잉~ 우리가 무조건 허벌나게 민주당 찍어부는 거야말로 하늘같은 슨상님의 뜻을 지키는 것이제라 잉~ ” 그걸로 끝입니다. 표현의 방법만 조금 다를 뿐, 거의 이 수준의 샘플에서 별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나마, 눈 멀어 찍어놓고 보니 사기당한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자신의 손가락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질만큼 진화한 종족들도, 자신의 부끄러움을 슬쩍 감춘 채 변명하듯 둘러댑니다. “아따, 대통령 아들치고 돈 안 받아 묵은 넘 오데 있더랑가 잉~ 슨상님이 노태우헌티 20억 받아 묵었다 헌들 그 정도 묵었으면 양반이제~ 잉~ 우찌 슨상님을 나쁘게 말헐 수 있것소 잉~~ 북에 돈보내서 핵만들었다 허지만 결국 우린 동족 아니겠어라 잉~~?? 또 거 전라도덕에 민주화 해왔으닝께 잉~~ 그걸 몰라 주면 확 대갈 쳐 불고 싶제 잉~~ ” 겨우 그 정도가 변명을 위해 발굴해 낸 논리입니다. 참으로 이중적이고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조국을 악마의 저주로 밀어 넣은 북한은 예뻐 죽는 것들이 더 가까이 있는 동족 전두환은 어째 사랑할 수 없을까요? 철저한 이중잣대와 ‘우리가 천년을 더러운 인성으로 차별받은 거 인정하면 다 죽는다’는 이유로 오직 경상도만 죽어라 물고 늘어지려고 하는 내면적 파렴치함.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정직한 고백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적 단어가 바로 ‘~잉’ 인데, 이것을 수도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해석하자면 ‘(남들이 혹은 누군가로부터) 스리슬쩍 동의를 도둑질한다’는 뜻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화법의 본질은 실제로 동의할 건덕지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책임을 면하기 위한 궁색한 자기합리화의 대명사처럼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양심적인 속성 - 야비교활이 낳은 산물, '경상도 탓과 대한민국 똥칠하기'
자신의 고통은 무조건 부당한 것이고, 타인을 속여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그들의 야비교활함을 만족시키는 재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럴듯한 소리, 자극적인 소리, 감정에 기대는 소리, 자신의 이기심과 이익에 도움이 될 것 같이 느껴지는(피상적이라도) 그런 달콤한 소리 등이 우선입니다. 자,, 전라도는 천년을 그 인성이 더럽다며 차별받아 왔습니다. 이게 오늘의 대한민국의 갈등과 분열을 일으킨 핵이요 축입니다. 이 문제를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전라도의 인성문제야말로 대한민국의 갈등과 분열을 불러온 만악의 근원입니다. 전라도는 천년을 내려 온 이 차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에 한 번은 전라도의 집권을 염원하며 들고 일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랬고, 이게 다름아닌 바로 518입니다. 무슨 순수한 민주화운동, 그딴 거 절대 아닙니다. 전라도는 625 참전율이 전국 최악이었고 그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초창기 대한민국 권력구조에서 배제되게 됩니다. 여기에 천년을 내려 온 그 인성에 대한 전국적 혐오와 차별이 더해져 전라도민을 극도의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전라도인은 외지에서 방도 얻지 못하고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50년대에도 전국이 전라도에게 하숙조차 주기 싫어했다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는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 1874년 파리에서 출판된 프랑스 신부 샤를르 달레의 <조선교회사 서론>에서도 <전라도에는 양반이 적다 그 주민들은 다른 조선사람들로부터, 버릇없고 위선적이며 자기들의 이익만 구하고 덕만 볼 수 있다면 언제고 가장 타기할 만한 배반행위도 서슴지 않고 할 사람들이라고 간주되고 있다>며 전라도의 배신의 근성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겨우 30~40년 전에 집권한 경상도나 박정희와는 도저히 연결할래야 연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라도는 모든 탓을 경상도에 돌리고 미쳐 발광을 하며 그간의 기적을 일으킨 대한민국 건국과 건설사를 모조리 부정하는 짓거리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진보란 건 별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사를 불의와 부정과 반민족으로 점철된 더러운 역사라고 보는 것들이 꼴같잖게 진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대한민국 건국과 건설을 기적의 역사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쪽은 보수라 불립니다. 전라도가 받은 차별이 부당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차별한 대한민국이 이상한 집단이 되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정상으로 두고 욕처먹던 전라도가 정의가 될 도리는 없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알만 한 독립운동가 눈 씻고 찾을 수 없는 한반도 유일의 지역임에도 독립운동가 가장 많은 영남을 친일의 집단으로 매도하는 파렴치한 짓거리마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불의했고 세상이 부정했기에 정의로운 우리가 차별받았다>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비 바이러스는 누가 어떻게 생산해 낼까요. 그것은 한겨레, 경향, MBC 같은 쓰레기 언론의 대한민국 똥칠하기, 박정희 반대자들의 영남정권 탓하기, 그리고 저급한 정치인들의 한풀이식 전라도 피해자 발언과 같이 자극적이고, 배설적이고, 일단은 야비하게라도 살고 보자는 수준의 표현과 발언의 영향이 매우 큽니다. 그런 부류의 언어들이 야비교활의 코드와 친화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약무호남시무국가 따위 어이없는 사기질까지 동원해 전라도 금칠과 박정희 똥칠에 발광했던 김대중의 탓도 너무나 컸고, 무엇보다 전라도와 코드가 맞는 종북집단의 음험하고 교활한 전라도 편들기도 상승작용을 더하고 있습니다. 전라도식 야비교활함은 전라도가 천년을 차별받아 온 것이 바로 자신들의 탓임을 인정할 만큼 솔직하지 못하고, 실체적 배경, 즉 그들이 차별받은 진실이 무엇인지 여기저기 검색하고 찾아 비교할 만큼 정직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쓰레기 선동 타이틀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길어야 서브타이틀 정도가 데코레이션되어 있다가 그와 관련된 주제만 나왔다하면 이미 들어찬 고정메뉴를 앵무새처럼 외고 또 외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남정권의 마타도어 때문에 인성 더러운 놈으로 전국적으로 차별받고 살았다> 이게 소위 전라도 한이란 것의 핵심인데, 따지고 보면 참말 어이 없는 개소리입니다. 전라도 인성 차별은 최소한 천년을 이어 온 문제였음이 너무나 명명백백하거든요. 물론 그것을 듣고 머리 끄덕이며 감염된 또 다른 야비교활은 <슨상님도 이 문제가 박정희 정권 탓이라 했지라 잉~>하며 그것을 또 다시 교활하게 전파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런 종족들은 거의 교화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교화하려는 노력은 거의 실효성이 없다고 보면 틀리지 않고, 대부분 시간낭비라는 자괴감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면 포기해야 할까요? 해법은 없는 것일까요? 포기해야 할만큼 해법이 없다면 이 글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면관계상, (할 말이 많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진단에 대한 분석과 해법 제시는 2편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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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될 수 없는 집단 - 경상도 바로보기 [2]
경상도 사람들이 마음을 열면… 바로 당신입니다
앞 편의 글( ☞ 1편 보러가기 )에서 경상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탓에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몇몇 분들이 까칠한 댓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서프에 즐겨 접속하시는 분들은 알바 아닌 담에야 심정적으로 공감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이미 알에서 깨어나신 분들이고 조각난 껍질을 바라보면 같은 생각을 가지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영남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글을 쓰기 어려웠을 겁니다. 지역 싸움만 부추기는 꼴이 되었을 테니 말이지요. 제가 어릴 때 동네 아이들과 싸우면 잘못이 있든 없든 늘 저만 직싸게 패시던 어머님이 못내 서운했는데 그 마음을 이해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더군요. 모두가 그런 마음이면 갈등도 줄어들고 치유도 빠르겠지요. 이글을 보시는 영남 분들이 계시면 함께 노력하십시다. ‘씨바, 우리가 남 되자’ 운동부터 시작해야 그나마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댓글을 주신 어떤 분들께서는 'YS의 3당 합당'을 말씀하십니다. 그로부터 영남 민주세력은 초토화되었다는 말씀이시겠지요. 틀린 말 아닙니다. YS는 영남민주세력을 통째로 팔아먹은 위인입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을 YS에 두기보다는 ‘YS 현상’ 또한 ‘단순무식의 범주 안에 있는 현상의 하나’라는 것이 본질일 테지요.
단순무식의 산 증인 - YS
YS가, (한때 우리가 잠시 속았듯이), ‘민주적 사고와 역사의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면 지금처럼 돌연변이 같은 모습으로 끊임없는 삽질을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 줄이기 좀체 힘든 속성처럼 민주와 평화의 옷에 익숙한 사람은 절대 거꾸로 돌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쉽사리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허상이었거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짓의 탈을 썼던 것이지요. 그런 부류가 YS이고, 김문수가 그렇고, 이재오, 오세훈, 이명박, 심재철이 그렇습니다. 이들이 민주를 외쳤다는 말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었다는 말처럼 황당한 개그입니다. 그들이 했다는 학생운동은 분명 ‘그것이 왠지 폼 나 보였기 때문’이지 그들 머리 속에 민주의식이 들어서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변절’이라는 말조차 그들에겐 과분한 단어이지요. 잠시 탈을 빌려 쓴 그들은 변절이랄 것도 없이 본질이 그랬으니까요.
YS의 이후 행보를 보면서도, 민주지도자 시절의 투쟁과 단식 그리고 독재와 맞서 싸웠던 배짱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민주화 투쟁으로 보였습니다. 민주지도자로 보였던 것도 맞구요.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는 허물 벗은 알몸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그 추한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왜? 단순무식하니까.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와 같은 실적이 약간의 체면치레가 되긴 했지만, YS는 자신이 대통령 되려는 목적 하나 때문에 민주를 팔아먹고, 개념 없는 쓰레기들과 호가호위하다 결국 말년에 환란을 초래해 국가를 파탄지경에 몰아넣고서도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비루한 전직 대통령일 뿐입니다. 만약 그가 호언장담했듯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이 맞다면 지금 쥐새끼가 판치는 세상이 오지 않았어야 하는 거고 더구나 쥐새끼를 옹호하지는 말아야 하는 거지요. 그는 호랑이를 잡겠다며 들어가서는 스스로 여우로 전락하고 들쥐떼들과 오랜 동거 끝에 쥐새끼를 낳았을 뿐입니다.
YS 그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할 즈음, ‘아~ 내가 참말로 잘 몬해따… 모든 민주 동지, 후배 여러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라는 참회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기대난망이긴 하지만, 저는 그가 어느 순간 스스로 깨쳐서 진심으로 속죄하고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음 세상으로 가시길 소망해 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어떤 훌륭한 인품이 나서서 예의를 갖추고 미려한 언어나 설득력 있는 글로 그에게 참회를 구하는 조언을 한다 해도, YS 그는 절대로 듣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화를 낼 것입니다. 왜?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아무 이유없이 싫으니까. 그게 단순무식한 자의 오만입니다. 따라서 차라리, 그가 어느 날 어디에선가 그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글을 발견하고, 그 스스로 조용히 그의 과거를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 고통의 홍역을 겪은 후, 거듭 깨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릅니다. 본의아니게 YS가 모델이 되긴 했습니다만, 바로 이러한 경상도 사람들의 내면과 속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지금 이후 말씀드릴 내용입니다.
무대뽀는 절대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왜? 무대뽀니까. 고집과 무대뽀는 다릅니다. 고집이든 아집이든 그것은 논리적인 설명으로 설득될 수 있는 여지가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무대뽀는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아니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는 것을 ‘무대뽀’라고 부른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심심풀이 삼아 잠시 ‘무대뽀’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무대뽀’의 어원은 일본어 ‘無鐵砲’로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하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鐵砲(철포, 일본식 발음은 ‘뎃뽀’)는 일본말로 소총을 뜻한다. 그러므로 無鐵砲란 흔히 하는 말로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총도 안 가지고 간다”라는 뜻이다.
잠시, 이번의 글에서 제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운다고 모두 폐암에 걸리는 것이 아님에도 ‘담배를 피우면 반드시 폐암에 걸린다’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것처럼, 경상도 분들이라고 모두 형편무인지경인 분들이 아닐 터인데 그렇게 전제하고 글을 쓰고 있는 점 이해 바랍니다. 무대뽀, 즉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총도 안 가지고 나가는 것’이 건망증에 걸린 어느 군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대책이 없다는 거죠. 황당한 거죠. 무지한 거고, 무모한 겁니다.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니 기승전결이 온전할 리가 없습니다. ‘논리 없음’입니다.
경상도 군인이 총도 없이 달려나가는 과정을 상상해 보면 이렇지 싶습니다. ‘뭐시라꼬~ 느 덜 방금 뭐라켓노~ 일로 온나~ 직이삘끼다~ 안오나? 조타 내가 갈끼다~’라며, 맨손으로 팔 걷고 주먹 쳐들고 마구 달려가는 그 모습입니다. 그게 무대뽀입니다. 그러면 총 맞아 죽기 딱 십상이지만, 죽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달려가기도 합니다. 그게 경상도의 기질이고 성깔인데, 유사한 사례로 ‘못 먹어도 Go’가 있습니다.
단순무식함의 미학
경상도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쪽팔리는 것’입니다. 요즘은 거의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그 단어의 유래가 경상도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단어를 가장 많이 썼던 지역이 경상도이지 싶습니다. 경상도 기질은 '왠지 쭈굴스럽고’ ‘쪽팔리는’짓은 죽어도 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려 하지도 않습니다. 과거 데모할 때 최루탄 가라앉고 나면 돌멩이 들고 덩그러니 남았다가 잡혀간 애들 중 경상도 애들이 젤 많았다는 우스갯소리도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닐 겁니다. ‘쪽팔리구로~ 우째 도망가노’ 그게 경상도 기질입니다.
그 기질을 보면 분명 사나이다운 데가 많습니다. 보리 문댕이 둘이 길에서 만나 반갑게 얘기하는 걸 서울사람이 보면 싸우는 걸로 오해할 만큼 목소리 크고 말이 투박하지만, 정에 약하고 한번 준 정 잘 거두어 들이지 못하는 성격이 경상도 기질입니다. 그러다가 한번 틀어지면 끝장을 볼 만큼 다혈질이기도 하구요. 이런 성격과 기질이 복합적으로 만들어 내는 결과물 중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유형이 ‘우리가 남이가'이기도 하고, 한번 보기 시작한 쓰레기 신문 잘 바꾸지 못하는 속성,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자기 생각 없이 묻지마 지지 하는 것, 틀린 줄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지가 옳다고 우기는… 그런 모습들일 수 있습니다.
경상도 기질을 이해하는 것 - 그 뒤에 해법이 숨어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들을 엮어서 생각해 보면, 왜 설득하는 것보다 스스로 변하길 기대하는 것의 차라리 확률이 높은지 조금은 감이 잡히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모든, 형제든, 친구든, 지인이든, 직장 동료든 절대로 경상도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해서 변화시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한 솥 밥 먹는 가족이라도 손톱도 안 들어가기 일쑤고, 고생만 하다가 외려 떡실신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오랜 시간, 마음을 투자하기를 권합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꾸준하고 일관성 있게 마음을 주어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신뢰를 획득하고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절마는 진짜 믿을 수 있다. 조은 놈이다’라는 판단을 해 줄 때까지는 설득이든 교화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턱없는 소리를 해도 잘 들어주고 그냥 웃어주고 끄덕여 주는 게 낫습니다. 섣불리 끼어들어 뭔가 한 수 가르쳐 주듯 논리를 펼치면 오히려 역효과 납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누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지가 누군데, 지가 진데, 쪽팔리거든요. 그런 경우 잘못하면 싸움으로 비화하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어느 순간 훼까닥~ 하여 완전 황당한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가 ‘무대뽀의 진수’를 맛보는 기회이기도 합니다만….
아주 조금씩만 보따리를 열어서, 상대가 궁금하게 만드십시오. 그래서 물어오기 시작하면 절반의 성공입니다. 그리고 해주고 싶은 말이 열 가지라도 한 가지만 말해주고 그걸로 그치십시오. 열 가지 말하려고 하면 열 번째까지 가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가르치려 든다 생각 들면 ‘됐다~ 고마해라’가 튀어나오고, 뻘쭘해지고 재방송까지 시간 오래갑니다.
특별히 경상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없이 차분하게 잘 들어주고 입이 무거운 그런 사람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상대가 궁금해 하는 범위 내에서, 상대의 인내심이 견딜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보따리를 하나씩 풀라는 것입니다. 이후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을 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읽을 만한 꺼리를 슬쩍 전해주고 다음 기회를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궁금해 하도록 만들고 스스로 찾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면 거의 독학해도 되는 단계로 가는 겁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남한테 가르침 받는 것은 죽어라 싫어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깨친 것에 대해서는 강한 자부심과 함께 고집스럽게 맹신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한 끈적끈적한 인간관계를 나눈 끝에 사람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생기면 ‘니는 내가 학~시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인께네~ 니가 그래 말하는 거 보이~ 니 말이 맞는 것 같다~' 단계까지 발전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인정이 많고, 한번 주기 시작한 정 잘 거두어 들이지 않는 성격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부터가 마음이 열리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 모두를 꿋꿋이 실천하셨던 분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
우리는 자신이 떨어질 줄 알면서 부산이라는 동토에 민주당 깃발을 꼽고 수도 없이 두들기며 목소리 높여 외쳤던 노무현 대통령님의 모습을 한없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닌, 그분의 끊임없는 도전을 신비에 가까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께서 부산에 쏟아 부었던 그 열정을 그저 불굴의 의지 수준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사실은 대통령님의 그 모습 안에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모든 해답이 들어 있었는데 말이지요. 대통령님 스스로 경상도 기질을 가진 경상도 사람이었기에, 경상도 사람들의 정서와 다를 수 있는 생각을 경상도 사람들에게 펼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무모한 일인지 아셨기에, 경상도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진정성을 담아 두 번, 세 번, 네 번 다가가는 것만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하셨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진정성을 경상도 사람들 마음에 심어주지 못하면 절대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만약 자신의 진솔한 마음이 경상도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면 반드시 그 벽을 넘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으셨기에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오랜 시간과 열정을 담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분명한 것은, 경상도 사람들이 입으로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평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쪽팔리게 여겨지니까) 노무현을 찍겠다고 떠들지는 않았지만, 선택을 해야 하는 그날 그 순간, 자신의 마음을 바보처럼 두들겨댔던 노무현을 떠올리며 그 이름 석 자 뒤에 빨간 도장을 꾸욱 눌렀던 경상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을 열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이 바로 그분입니다.
진정 교화될 수 없는 집단 - 전라도 바로보기 [2]
전라도가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 오면… 바로 당신입니다
앞 편의 글( ☞ 1편 보러가기 )에서 전라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탓에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몇몇 분들이 까칠한 댓글을 주셨습니다 blah-blah-blah... 제가 전라도인이 아니라도 이런 글을 쓰기는 아주 쉽습니다.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따위가 절대 아니니까요 blah-blah-blah... 이글을 보시는 호남 분들이 계시면 함께 노력하십시다. ‘씨바, 우리도 남탓하지 말자’ 운동부터 시작해야 그나마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댓글을 주신 어떤 분들께서는 'DJ의 87년 분당'을 말씀하십니다. 그로부터 극한의 지역분열과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이겠지요.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DJ는 87년 대선당시 너무나 파렴치하게 4자 필승론을 외치며 전라, 충청, 경북, 경남을 가르는 전략으로 국가를 사분오열시켰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두고두고 그에게 부메랑으로 작용했으며, 그는 86년 국민의 직선제 개헌 투쟁의 산물을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아 노태우에 당선을 헌납한 추악한 1등 공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을 DJ에 두기보다는 ‘DJ 현상’ 또한 ‘야비교활의 범주 안에 있는 현상의 하나’라는 것이 본질일 테지요.
야비교활의 산 증인 - DJ
DJ가, (전라도는 오늘도 광신하지만), ‘최소한도의 양심이라도 소유한 인물’이었다면 죽기 직전까지도 돌연변이 같은 모습으로 끊임없는 삽질을 반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문수, 이재오, 오세훈, 심재철 등은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이라도 보였습니다. DJ가 민주투사였다는 말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었다는 말처럼 황당한 개그입니다. 그가 했다는 그 무슨 민주화운동은 분명 오직 하나, <전라도 천년의 한풀이>와 그를 위해 필수불가결했던 <전라도 집권운동>이었지 그 머리 속에 민주의식 따위가 들어서가 아닙니다. 민주는 명분이었을 뿐입니다. 그의 주된 목표는 그저 전라도 집권운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파렴치’라는 말조차 그에겐 과분한 단어이지요. 민주투사의 탈을 빌려 쓴 그는 파렴치랄 것도 없이 본질이 한없이 추악하고 더러우니까요.
DJ의 평생의 행보를 보면서도, 그래도 민주투사였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민주화 투쟁으로 보였습니다. 민주지도자처럼 포장했던 것도 맞구요.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는 반국가질, 영남정권 탓하기의 허물 벗은 알몸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그 추한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줄도 몰랐습니다. 왜? 야비교활하니까.
DJ는 71년 경선 당시 김영삼의 깨끗한 승복과 쿨한 축하를 둔탁하게 뒤통수 후려치고 87년 상황이 불리하자 경선을 거부하고 당을 깨 버리는 희대의 개만도 못한 짓을 벌인 자입니다. 정계은퇴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복귀한 97년에는 금융시장의 이상 징후를 발견한 김영삼이 "금융개혁법안", "노동개혁법안"을 통과시키려할 때 우리 노동자 다 죽인다며 결사반대하고 IMF를 불러 오는 커다란 단초를 제공했지만, 집권 후에는 눈물 질질짜면서 "여러분 일단 살고 봐야 합니다" 라며 김영삼이 통과시키려 했던 구조조정 법안과 정리해고 법안을 더욱 개악하여 시행했던 파렴치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DJ가 전라도 한풀이 하나를 위해 대한민국을 똥칠하는 데 목숨걸고 살았고, 친인척 관리에 그렇게 자신했으나 개념 없는 쓰레기들과 호가호위하다 결국 말년에 홍삼트리오는 줄줄이 감옥에 가고 77살 처먹은 처남은 17세 여고생과 원조교제질이나 하고, 스스로가 전범의 자식 앞에 꿇어 엎어져 5억불을 상납하며 국가의식을 파탄지경에 몰아넣고서도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비루한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가 호언장담했듯이 순수한 민주투사였다면 625 때 조국을 지키신 분들이란 말만 나와도 수구꼴통이라 악담을 퍼붓는 어이 없는 반국가 풍조가 전라도를 근본으로 퍼지지 않았어야 하고, 이명박이 독재자가 맞다면 그를 쥐새끼라 부르고 죽으면 떡돌린다고 방송에까지 떠드는 사악한 광쥐스트가 세상에 나올 수도 없어야 했지요. 그는 민주화 운동을 팔아 먹고 전라도 천년의 인성차별을 영호남의 지역감정으로 치환하는데 목숨을 걸었을 뿐이며, 피해의식에 쩔은 전라도민을 대리해 사악하게 대한민국에 똥칠하고 대한민국의 국가의식을 난도질하고 모든 것을 박정희 탓하는데 신명을 바치고 살았던 더러운 인물일 뿐입니다.
DJ 그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할 즈음, <아~ 내가 참말로 잘못했구마이라 잉~~… 모든 국민 여러분들에게 용서를 구해 부러요~잉~~>하는 참회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수 있기를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기대했을까요. 기대난망이긴 했습니다만, 저는 그가 어느 순간 스스로 깨쳐서 진심으로 속죄하고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음 세상으로 떠나길 바랬는데 역시나 결과는 마지막 순간까지 박정권의 살해 음모로 다친 허벅지를 알아 달라는 따위 저질 선동밖에 보여 준 게 없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어떤 훌륭한 인품이 나서서 예의를 갖추고 미려한 언어나 설득력 있는 글로 그에게 참회를 구하는 조언을 했더라 해도, DJ는 절대로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화를 냈을 것입니다. 왜?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아무 이유없이 싫으니까. 그게 야비교활한 자의 자기합리화의 덫이란 것입니다. 본의아니게 DJ가 모델이 되긴 했습니다만, 바로 이러한 전라도 사람들의 내면과 속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지금 이후 말씀드릴 내용입니다.
야비교활은 절대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왜? 야비교활이니까. 본인이 옳은 것과 자기합리화는 완전히 다릅니다. 고집이든 아집이든 그것은 논리적인 설명으로 설득될 수 있는 여지가 어느 정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야비한 자기합리화는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아니 논리적으로 설득되지 않는 것을 ‘야비교활’이라고 부른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심심풀이 삼아 잠시 전라도가 50년대에 불렸던 ‘하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하와이’의 어원은 전라도 군인들이 잔대가리 박터지게 굴리고 탈영병 제일 많았던 미국의 하와이출신 병정들과 닮았기에 붙은 별명이라고 합니다(http://blog.naver.com/arpfmd35/93429937). 이 말이 파다하게 번졌던 1950년대를 뼈저리게 겪고 살았던 전라도 출신 시인 유엽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제 이승만 대통령이 자기를 지지하지 않고 김구를 지지하는 전라도민에게 내뱉은 말이라고 인터넷에 와전되어 있습니다. 참말 하와이스러운 자기합리화 등짝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라도인은 무엇이든 이렇게 자기 유리하게 갖다 붙이고 집단적으로 퍼뜨리는 일에 신이 부여한 재주를 가진 종족입니다.
잠시, 이번의 글에서 제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운다고 모두 폐암에 걸리는 것이 아님에도 ‘담배를 피우면 반드시 폐암에 걸린다’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것처럼, 전라도 분들이라고 모두 형편무인지경인 분들이 아닐 터인데 그렇게 전제하고 글을 쓰고 있는 점 이해 바랍니다.
하와이, 즉 ‘잔대가리 추하게 굴리고 탈영병 가장 많은 종자들’이 영리한 군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참으로 가증스럽다는 거죠. 황당한 거죠. 교활한 거고, 야비한 겁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니 기승전결이 온전할 리가 없습니다. ‘그저 나밖에 모름’입니다.
전라도 군인이 하와이라 불린 과정을 상상해 보면 이렇지 싶습니다. <뭐시라야~ 느덜 방금 뭐라 했어야~ 나가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라야~~~ 나~는 목숨걸고 탈영을 하면 했지 그렇게는 못하지라 잉~~ 아암만~~~>하며, 병영 담장을 넘어 마구 달려가는 그 모습입니다. 그게 하와이입니다. 그러다 총 맞아 죽기 딱 십상이지만, 죽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달려가기도 합니다. 그게 전라도의 기질이고 성깔인데, 유사한 명칭으로 ‘전라도 개똥쇠’가 있습니다.
야비교활의 미학
전라도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전국적으로 욕처먹는 것입니다. 인간성 더럽다고 타지역에서 방도 못 얻고 직장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걸 전라도인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전라도나 자신들 조상의 인간성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거 인정하는 순간에, 전라도인으로서 겪어야 할 고통스러운 삶을 너무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목숨~ 누구든 물고 늘어져 꿋꿋하게 보존하자>
그게 전라도 기질입니다. 그 기질을 보면 분명 질긴 생명력이 엿보입니다. 깽깽이들만 모여서 소곤닥거리고 호남향우회 지겹게 만들어대면 타지역민은 못마땅하지만 그게 질긴 생명력을 이어 온 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번 틀어지면 끝장을 볼 만큼 속꼬인 구석이 있기도 하구요. 이런 성격과 기질이 복합적으로 만들어 내는 결과물 중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유형이 ‘우리 전라도는 한몸이다'이기도 하고, 한번 보기 시작한 쓰레기 신문 절대 맹신하는 속성,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자기 생각 없이 무조건 경상도 탓하는 것, 틀린 줄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지가 옳다고 우기는… 그런 모습들일 수 있습니다.
전라도 기질을 이해하는 것 - 그 뒤에 해법이 숨어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들을 엮어서 생각해 보면, 왜 설득하는 것보다 스스로 변하길 기대하는 것의 차라리 확률이 높은지 조금은 감이 잡히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모든, 형제든, 친구든, 지인이든, 직장 동료든 절대로 전라도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해서 변화시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한 솥 밥 먹는 가족이라도 손톱도 안 들어가기 일쑤고, 고생만 하다가 외려 떡실신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저는 홍어를 같이 먹는 방법을 권합니다. 그게 효과적입니다. 꾸준하고 일관성 있게 물씬물씬 악취를 견디며 홍어를 먹고 전라도에 호감을 가진 듯이 보여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 치는 진짜 믿을 수 있다. 홍어를 좋아하는 놈이다>라는 판단을 해 줄 때까지는 설득이든 교화든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턱없는 소리를 해도 잘 들어주고 그냥 웃어주고 홍어나 꾸역꾸역 먹어 주는 게 낫습니다.
섣불리 끼어들어 뭔가 한 수 가르쳐 주듯 논리를 펼치면 오히려 역효과 납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자신들 인성 문제로 천년을 차별받았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제일 아픈 부분이거든요. 지가 누군데, 지가 바로 그 전라도민인데, 바로 죽는 거거든요. 그런 경우 잘못하면 싸움으로 비화하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어느 순간 훼까닥~ 하여 완전 황당한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가 ‘하와이의 진수’를 맛보는 기회이기도 합니다만….
아주 조금씩만 보따리를 열어서, 상대가 정말 그런가?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드십시오. 그래서 물어오기 시작하면 절반의 성공입니다. 그리고 해주고 싶은 말이 열 가지라도 한 가지만 말해주고 그걸로 그치십시오. 열 가지 말하려고 하면 열 번째까지 가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가르치려 든다 생각 들면 ‘고마 해부러~~’가 눈 부라리며 튀어나오고, 뻘쭘해지고 재방송 한 번 못해보고 골로 가는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전라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없이 차분하게 잘 들어주고 입이 무거운 그런 사람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갖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상대가 궁금해 하는 범위 내에서, 상대의 인내심이 견딜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보따리를 하나씩 풀라는 것입니다. 이후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을 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읽을 만한 꺼리를 슬쩍 전해주거나 이런 사이트(http://blog.naver.com/arpfmd35/101287212)를 슬쩍 보여 주고 다음 기회를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들이 불편하게 외면하고 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접하게 하는 겁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천년의 인성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지만 명백한 증거 앞에서는 흔들리는 모습도 보입니다. 사실 전라도는 자기네가 차별받은 것이 오직 타지역인이 이상했기 때문이겠는가 하는 의구심도 함께 품고 살거든요. 무엇보다 주위 전라도인들을 보면서, 솔직히 전라도놈들이 문제있다는 거 본인들이 가장 잘 느끼고 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광주 범죄율이 그저 종합세트로 1등이겠습니까? 아니거든요. 그렇게 조금씩 깨닫게 하는 거지요. 전라도에 대한 천년의 인성 차별과 이에 대한 전라도의 어이 없는 남탓하기가 오늘날 전라도의 패악질, 반국가질, 대한민국 갈등과 분열을 낳아 버린 이 어처구니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러한 끈적끈적한 홍어를 같이 먹은 끝에 사람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생기면 ‘나는 너가 허벌~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인께로~ 너가 그리 말하는 거 보니께~ 그런 것도 같다~' 단계까지 발전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인정이 많고, 동족이라 생각되면 끈끈하게 챙겨주는 성격 때문입니다. 사실 그때부터가 마음이 열리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전라도 사람들이 어느 순간 남탓과 대한민국 똥칠을 그치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 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지역에나 나쁜 넘은 있으니, 문제있는 전라도놈을 미워하는 것은 괜찮으나 모든 전라도놈을 싸잡아 욕하지는 마시라는 정도의 합리적 요구에 그쳐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라도가 기적을 일으킨 대한민국의 번영의 열매는 잘도 따먹으면서도 조국에 욕질만 퍼붓다가 어느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사 긍정파로 돌아 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전라도에 대한 천년의 비난에 박정희 탓, 경상도 욕질을 더는 얼토당토 않게 끌어 들이지 않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대한민국의 미래는 열리는 겁니다.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지역갈등 해결의 단초도 비로소 트이는 것입니다. 단결과 화합을 통해 세계로 뻗어가는 대한민국의 창창한 미래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보란 허울로 위장한, 실상은 대한민국사 부정파에 불과한 악질 반대한민국 세력의 75%가 한반도에서 사라진다는 의미이니까요. 중도적 비판과 건전한 개혁과 진정한 진보가 가능한 대한민국이 되는 겁니다. 종북 떨거지들이 티비까지 나와 거들먹거리며 625는 통일 전쟁이었고 맥아더 동상은 폭파해야 한다는 등 있을 수 없는 반국가질마저 허연 이빨 드러내고 사악하게 씹어대는 짓거리가 더이상은 가능할 수 없는 대한민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당신이 바로 우리가 갈망하는 위대한 전라도인입니다. 그런 당신이 참된 민주시민인 것입니다. 그런 당신이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는 진정 위대한 전라도민인 것입니다.
그런 애국적 전라도민이 많아지시기를 바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