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덕
배혜정
직장 동료들이 모이는 SNS에 언제부턴가 아이돌 그룹에 진심인 글이 많이 올라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들 같은 어린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굳이 용기 내어 글까지 쓰는 동료는 없었다. 엄마들이 가입하는 맘까페도 마찬가지다. 미혼 여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덕질은 이제 거대한 트렌드이고, 기혼 여성들의 새로운 놀이가 되었다.
이러한 시류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녀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던 커피숍 문이 닫히고 자유롭게 여행 다니기도 어려워지자, 온라인 네트워크를 타고 입덕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마치 트리 전구가 하나둘씩 켜지는 것처럼 반짝거리며 순식간에 번졌다. 달콤한 관계에 목마른 이들에게 드라마보다 더 리얼한 해방구가 덕질이다.
갑작스럽게 나에게 찾아온 큰 병은 차고 넘치는 시간을 내게 선물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여유를 부리는 참에 시대의 흐름을 따라 나도 덕후가 되어보기로 했다. 어디에 꽂히면 내내 그것만 하는 성격이라 무엇이든 신중하게 고민하고 시작하는 편인데, 어쩌면 이번만큼은 극약 처방이 필요했다.
요사이 인기 있는 연예인들에 대해 무지했으므로, 먼저 ‘입덕’이라 쓰고 검색부터 했다. 눈에 띄는 상대를 빠르게 골라 영상을 찾아보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켰다. 아이돌 그룹이라면 손사래부터 치던 나는, 잘생긴 이십 대 남자 아이돌의 미소와 달콤한 말에 마음을 맡겼다.
그러나 뭐든 급하게 시작하면 체하기 마련이다. 허전한 마음이 감추어지는 만큼 나의 일상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SNS 앱을 몽땅 설치하고 그의 등장을 알려주는 알람도 설정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검색했고, 자기 전까지 벌써 수차 본 라이브 팬미팅 방송을 다시 보면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반짝이는 미소와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팬 서비스에 감사하면서 나는 건강에 좋을 호르몬을 만들었다.
어느덧 사십 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달려가는 내가 이십 대 스타들에 눈이 멀어버린 건 이미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을 지나버린 탓일까…
벌써 한 달 동안 나의 스타는 라이브 방송을 켜지 않고 있다. 개인의 기분에 따른 선택이니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관계의 기다림에 지치기도 한다.
스타는 가끔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담은 사진을 투척하고, 팬들은 그 한 장의 사진에 감동하고 응원한다. 희생적인 응원과 지지를 기꺼이 쏟아붓는다. 연락이 뜸해도 상관없다고, 건강하게 꽃길만 걸으라고….
그러나 정작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쪽은 간절한 팬들이다. 실낱같은 쌍방향의 교류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이들도 있다. 내가 아는 그녀들은 매일 반복되는 잡무를 이겨내고 야근까지 감내하면서 번 월급을 콘서트 맨 앞줄의 티켓을 사기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어쩌면 빛나는 것들을 보면서, 보잘것없고 고단한 나의 삶을 잠시나마 잊는 게 몸과 마음 건강에 좋다.
그렇게 내 생에는 없는, 그들에게만 비추는 황홀한 스포트라이트를 멍하게 쳐다보는 사이 내 마음은 텅 비어간다. 젊고 앞날이 창창한 스타들의 생기에 끌려 그저 그들의 꿈을 따라서 꾼다. 그러나 이 한 방향의 순애보는 충분히 보상받지 못한다.
시계를 한참을 되돌려, 이십 대의 나는 나 외의 타인에게 할애할 열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빛내는 데에 온 마음과 시간을 쏟았다.
그러나 인생의 옵션쯤으로 생각하던 결혼이란 걸 한 후, 나는 남편과 아이에게 순애보가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삶의 중심을 타인인 남편과 아이에게 넘겨주는 일은 감당하기 힘든 혼란 속 여정이었다.
그렇게 너무 오랜 시간 나를 밀어두고 있었다. 애정으로 시작된 새로운 가족 속에서 나는 서서히 생기를 잃었고 허전함에 목말랐다. 사라져 버린 생기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 필요했다.
만약 일상 속 타인들과 쌍방향의 위로와 응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중심을 내어놓지 않아도 되는 덕후가 될 수도 있었을까. 그럴 타인이 없다면 나는 나를 향한 팬심을 가져보려고 한다.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써보려 한다.
나에게, 건강하게 꽃길만 걸으라고….
스타의 라이브 녹화방송을 켰다. 스타는 오늘도 자기 삶에 욕심을 부리며 성공에 대한 포부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달라고 보챈다. 나도 그의 빛나는 자기애를 따라 해보려 한다. 그가 가진 삶에 대한 열정과 선명한 자기애의 눈으로 내 삶을 비추어 본다.
묵은 바람들의 먼지를 털고 바랜 빛을 맞으며 희미해진 생기가 조금씩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