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상은 奴婢(노비)였다*
* 奴 사내종 노, 婢계집종 비*
조선의 노비는 세계사적으로 가장
잔인한 최악의 노예였다.
조선은 자국민(동포)을 노예로
활용한 유일한 국가(민족)였다.
로마 등 다른 나라는 정복전쟁을
통해 이민족을 노비로 삼았다.
인도도 자국민을 노비로 활용하나
다민족 국가로 동족을 종(노비)으로
하지는 않았다.
※조선 노비(노예)의 특징※
노동력 착취 도구로 인신을 구속하고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인 소유물
(물건)로 취급.
고려말 조선개국 초 3~4%정도였던
노비가 세종대왕 때 부터 증가하여
조선 패망시에는 전국민의 30~40%
가 노비였다 함.
*증가 이유*
세종대왕의 포플리즘 :
세종이 사대부의 충성을 얻기 위해
一賤卽賤(일천즉천: 부모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제 시행 및
賜牌奴婢(사패노비:왕이 하사한 노비)
로 노비 수 급증
세종의 아들(광평,영응대군 등)들
에게 1만명의 노비를 하사했고,
또 관노비도 대폭 늘어주었다 함.
한명회(3천명), 임사홍(5천명) 등
많은 양반이 사노비를 거느렸다 함.
대한제국 때 서울의 인구 분포는
[양반16%, 노비54%, 양민30%]
이며 전국적으로 노비의 숫자는 30
~ 40%였다 함.
*一賤卽賤(일천즉천)제의 폐단*
한 번 천하면 바로 천해진다는 말
뜻과 같이 부모 중 한사람이 노비
이면 자손 대대손손 노비 임.
세수재원, 병역자원 고갈(부족)로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대처 미흡.
[ 노비는 주인에게 충성하지,
국가에는 충성하지 않음.]
전 국민의 1/3 이상이 노비였던 그
노비들이 소멸된 이유
1909년 대한제국 통감부 관료인
일본인 '이데 마사이치' 주도하에 공포
시행 된 民籍法(민적접)의 영향.
신분제 철폐로 노비도 성명, 출생,
본적 등이 기록 관리된 호적을 가짐
특히 이름이 없었던 여자가 이름을
가짐은 획기적 사건 임.
1904년 조선호적 기준: 592만명
1909년 민적법시행 후: 1,293만명
{약 7백만명이 호적을 새로이 취득
하게됨에 따라 숫자가 크게 늠}
민적법은 신분제폐지, 자유재산인정,
개인의 사적자유인정 등의 기틀 마련.
침략자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 민적법
제정 시행함은 통탄스러운 일이나,
양반 기득권에 매몰된 당시의 위정자
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었음
을 부정 할 수 없으리라.
타인에 의거 매스가 가해졌기에
변혁이 되었으리라.
※모두가 성씨와 족보를 가짐.※
일제 강점기(1910~1945) 최대의
호황 사업이 族譜(족보) 사업이었다.
성씨가 없는 노비나 소작농인 평민들
은 그들의 주인이었거나 지주에게
사례하고 그들의 姓氏(성씨)를 사서
족보에 올리고 새로 만들었던 것은
불편한 진실이고 사실이다.
우리들의 증고조 이상의 할아버지가
門中(문중)과 족보를 애지중지했던
것은 노비였던 자신에 대한 자기 부정
(조상이 노비였던 사실 부정)이라
여겨진다.
내 조상이 노비였음이 유추되는 사유
내 핏속엔 노비 근성이 있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라고 한다.
이는 자기 포장이요 자기 과시이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공자 맹자를 공부
하여 그것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
아치가 된 사람들이다.
그 사상의 근간은 선비정신이다.
{선비정신 ; 원활한 인간관계, 개인의
도덕성 수양, 오륜과 효와 충 등의
유교적 가치관 정립으로 정의로운
삶을 지향 }
선비들은 비록 겉과 속이 다른 表裏
不同(표리부동)하고 이중적 성격
소유자 일지라도 겉으로라도 체면을
중시했고 의리와 지조를 지키려는
양심은 가지고 있어 하늘을 두려워 할
줄 알았다.
노예근성은 주체성 결여로 附和雷動(부화뇌동)하거나,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는 强弱弱强(강약약강) 형의 류형으로 양아치라 할 수 있다.
나도 젊은날 음식점이나 샵에 가서는
종사자에게 하대하는 등의 군림하고
우쭐했던 옹졸함이 있었던 나에게도
노비의 피가 흘르고 있음이 분명하며,
지금 70세인 나의 기억속 나의 할아
버지가 유별나게 족보와 문종 일을
최우선시 했음으로 미뤄보아 그 무렵
성씨와 족보를 갖었으리라 짐작된다.
혹 우리 회원님들에게도 强弱(강약)
弱强(약강)이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면, 외람되오나 자신의 핏줄을 성찰
해보시길...
또 저항 정신 및 반항 의식이 잠재
되었음은 反日(반일) 감정 못지 않게
양반(지주)에게 핍박 받아온 설음의
표출인 줄 모른다.
임진왜란 때 궁궐을 불태운 것과 쉬이
침략자의 앞잡이가 된 민중도 그 의식
에는 양반등의 지배층으로부터 받아
온 노비의 불만이 폭발한 것일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들추워봄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리라.
우리 모두는 단군으로부터 280촌 내
친척이요 형제라고 합니다.
모두가 평등하니 빈부와 지위고하를 따지지 말고 동등하게 대하길 다짐해 봅니다.
첫댓글 노비가 이렇게 많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