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치면 후회만 남을 공부
거년빈미시빈(去年貧未是貧)
금년빈시시빈(今年貧始是貧)
거년빈무탁추지지(去年貧無卓錐之地)
금년빈추야무(今年貧錐也無)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비로소 진짜 가난이네.
작년 가난은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 가난은 송곳조차 없어졌구나.
오늘은 을미년 하안거 해제일입니다.
대중은 각자 본분상(本分上)에서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이제 3개월 동안 공부한 살림살이를 점검(點檢)해 볼 시간입니다. 대중은 철저히 가난해졌습니까?
화두가 독로(獨露)하여 대의단(大疑團)이 타파되어서
탐·진·치 삼독과 일체 번뇌 망상이 다 떨어져 나가서 텅텅 비어 한 물건도 없어져야
‘반분의 득(半分之得)’이 있다 할 것입니다.
떨치고 떨쳐서 이 몸과 이 마음마저 다 떨쳐버려서 떨쳐버렸다는 생각마저 떨쳐버려서
천하의 가난뱅이가 되어야 진정한 공부인(工夫人)이라 할 것입니다.
철저한 가난을 체득한 자라야 염라노자의 밥값 계산에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산영우(潙山靈祐) 선사가 하루는 제자인 향엄지한(香嚴智閑)에게 물었다.
“그대는 백장 화상의 처소에 살면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했다고 하던데
이는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이해력이 뛰어났기 때문인 줄 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생사(生死)의 근본이다. 부모가 낳기 전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천하의 대강백 출신인 향엄 스님은 이 질문에 그만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방으로 되돌아와 평소에 보았던 모든 책을 뒤져가며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끝내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림의 떡은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하는구나.” 하였다.
그런 뒤로 향엄 스님은 여러 번 위산 스님에게 그 답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위산 스님은 말하였다.
“만일 그대에게 말해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를 욕하게 될 것이다.
내가 설명하는 것은 내일일 뿐 결코 그대의 수행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향엄은 마침내 평소에 보았던 책들을 태워버리면서 다짐하였다.
“금생에는 더 이상 불법을 배우지 않고 이제부터는 그저 멀리 떠돌아다니면서
얻어먹는 밥 중노릇이나 하면서 이 몸뚱이나 좀 편하게 지내리라.”
눈물을 흘리면서 위산을 하직하고 곧바로 남양(南陽) 지방을 지나다가
남양혜충(南陽慧忠) 국사의 탑을 참배하고는 마침내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하루는 마당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기왓장 한 조각을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딱’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활연대오(豁然大悟)하게 되었다.
향엄 선사는 거처로 돌아와 목욕재계하고 멀리 계시는 위산 스님께 절을 올리고는 말하였다.
“스승님의 큰 자비여! 부모의 은혜보다 더 크도다.
만일 그때 저에게 설명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 깨달음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같이 게송을 읊조렸다.
일격망소지 갱불가수야(一擊忘所知 更不假修冶)
동용양고로 불타초연기(動容揚古路 不墮憔然機)
처처무종적 성색외위의(處處無從跡 聲色外威儀)
제방달도자 함언상상기(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한번 부딪치는데 아는바 모두 잊으니 다시 애써 더 닦을 것 없구나.
일상생활에 옛길이 드러나니 초췌한 처지에 빠질 일 없어라.
곳곳이 자취가 없으니 빛과 소리 밖의 위의(威儀)로다.
제방의 도를 아는 이들이 모두가 최상의 근기라 하리.
위산 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 말하였다. “향엄 수좌가 드디어 깨쳤구나!”
이때 향엄의 사형인 앙산혜적(仰山慧寂)이 말하였다.
“제가 다시 한번 점검해 보겠습니다. 사제인 향엄 스님을 만나 스승님이 사제의 오도송을 칭찬하시던데,
그대가 다시 한번 읊어보게나.” 향엄이 일전의 게송을 읊었다.
그런데 이 게송을 들은 사형 앙산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제는 여래선(如來禪)은 깨쳤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깨닫지 못했네.”
이에 향엄 스님이 다시 게송을 읊었다.
아유일기 순목시이(我有一機 瞬目視伊)
약인불회 별환사미(若人不會 別喚沙彌)
나에게 한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짝여 그에게 보였다가
만약에 알아채지 못한다면 따로 사미를 부르리라.
이 게송을 듣고 향엄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앙산이 돌아와 위산 선사에게 고하기를
“스님, 기뻐하십시오.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깨쳤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가난은 번뇌 망념이 다 떨어져 나간 수행의 경지를 표현한 말이지만,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난은 수행 가풍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곁들어 말씀드립니다.
옛말에 “배고프고 추워야 도 닦는 마음이 일어난다. (飢寒發道心)”고 하였습니다.
송광사 구산 스님께서도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 한다는 법문을 자주 하셨습니다.
발심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서양에서는 ‘자발적 가난’이란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부자로 풍요롭게 살 수 있지만, 일부러 가난하게 근검절약하며 정신적이 삶을 추구해 간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자본주의 폐해가 극에 달한 지금에 와서야 ‘자발적 가난’이라는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 부처님은 2500년 전에 이미 ‘청빈(淸貧)’의 가풍을 세우셨습니다.
청빈이란 굳이 요즘 말로 하면 ‘맑은 가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가난해져야 하고,
맑은 가난인 청빈 가풍이 갖추어져야만 제대로 수행 가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신빈미시빈 심빈시시빈(身貧未是貧 心貧始是貧)
신빈능수도 명위빈도인(身貧能修道 名爲貧道人)
몸이 가난한 것은 가난이 아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진실로 가난한 것이다.
몸이 가난해도 능히 도를 닦는다면 이름하여 청빈한 도인이라 하리라.
오늘 해제를 맞이한 총림의 대중들이여!
운수납자(雲水衲子)란 떨어진 납의(衲衣)를 입고 걸망 하나에 지팡이 하나 짚고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아다니며 오로지 화두(話頭) 하나 챙기는 수행자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아무 상관 없이 묵묵히 수행해가는 납자가 돼야 합니다.
옛날 선사 스님께서 강조하시던 ‘최잔고목(摧殘枯木)’이란 말이 있습니다.
최잔고목의한림 기도봉춘불변심(摧殘枯木依寒林 幾度逢春不變心)
초객우지유불고 영인나득고추심(樵客遇之猶不顧 郢人那得苦推尋)
부러져 꺾인 나뭇가지 찬 숲에 의지하니 봄이 와도 요 모양 요 꼴,
나무꾼도 그대로 내버려두는데 목수가 가져간들 무엇에 쓰겠는가?
이 게송은 마조 도일의 제자인 대매법상(大梅法常)의 게송인데,
법상 선사는 깊은 산속 외진 산꼭대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토굴에서
평생을 어렵고 가난하게 수행한 공부인 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최잔고목’이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모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수행자란 누가 알아준다고 공부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공부하지 않는 그런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말없이 이 공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마음 자세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최잔고목과 같이 되어서야 참으로 공부를 지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납자들은 옳고 그름, 칭찬과 비방,
가지고 못 가짐에 상관없이 오로지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원효대사도 말씀하시기를
“아무도 막지 않는 천당에(無妨天堂)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少往至者)
삼독번뇌(三毒煩惱)로 재물을 삼기 때문이며(爲自家財),
유혹이 없는 악도(無誘惡道)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은 것은(多往入者)
몸뚱이 편하게 하려고 오욕락으로(四蛇五欲) 마음의 보배를 삼기 때문(爲忘心寶)”이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로부터 수행자의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가난은 수행자를 수행자답게 만들어주는 보약입니다.
오늘이 해제라고 하지만 도를 성취하는 그 날이 진정한 해제 날인 것입니다.
해제했다고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항상 언제 어디서나 열심히 정진하는 납자가 되어야 합니다.
화두를 타파하여 확철대오(廓撤大悟)하는 그날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음을 다잡아 애써 정진하는 참 수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이르기를
“밖으로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外息諸緣),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으며(內心無喘),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心如墻壁), 가히 도에 들어갈 수 있다(可以入道)”라고 하였습니다.
육근(六根) 육진(六塵) 경계에서 놀아나 밖으로 복잡한 인연을 만들지 말고,
안으로 공연히 헐떡 증을 내어 망집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이,
수행해서 결정코 확철대오(廓撤大悟)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심이 철석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온몸과 온 목숨을 바쳐 한번 죽어야 크게 살아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덕이 ‘현애살수(懸崖撒手)’가 기특한 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
수한야냉어난멱(水寒夜冷魚難覓)
유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족히 기이한 일이 아니다.
매달린 벼랑에서 손을 놓아버릴 수 있어야 대장부다.
물은 차고 밤은 냉랭한데 고기는 찾을 수 없으니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현애살수’란 천 길 낭떠러지에서 나무에 매달린 손을 뿌리친다는 말입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進一步)”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결제 때도 목숨 바쳐 공부하지 않고, 해제 때도 목숨 바쳐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느 세월에 생사를 해탈하여 중생을 구제하겠습니까. 모든 일은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공부도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때를 놓치면 후회할 일만 남습니다.
백계천방지위신(百計千方只爲身)
부지시신진중진(不知是身塵中塵)
막언백발무언어(莫言白髮無言語)
차시황천전어인(此是黃泉傳語人)
백계천방이 오직 이 몸을 위한 것
이 몸은 티끌 가운데 티끌인 줄 알지 못함이로다.
백발이 말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이것이 황천객이 전하는 말이로다.
- 해인총림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