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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천국을 앞당겨 사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건설하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루카 복음 사가가 장엄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밤을 꼬박 새우시며 기도하시는데, 기도의 지향은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지근거리에서 협조할 12사도의 선발이었습니다.
새벽녘 동이 서서히 틀 무렵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둘러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열두 사람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십니다. 이름이 불린 사람은 이게 웬 가문의 영광이냐 하며 감지덕지한 얼굴로 네! 하고 외치며 뛰어나갔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와 함께 산을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평지에 서시니, 방금 불림받은 열두 사도가 그분을 에워싸며 보위하고 있었습니다. 그 둘레에는 더 많은 제자들의 무리가 비장한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분의 명성을 듣고 몰려온 수많은 사람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으며, 그 누구도 차별대우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들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생명의 말씀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환자들은 치유받고 악령들린 사람들은 자유로워졌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로 그곳이 천국이요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공유하며, 감사와 찬미가 끊이지 않는 그 장소를 통해 사람들은 천국을 미리 앞당겨 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이 공동체의 중심이 자리잡고 있는지요? 이 시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인 목자를 중심으로 구성원 모두가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있으며 서로 일치하고 있는가요? 우리 공동체의 거룩하고 성숙하고 희망에 찬 분위기가 너무 좋아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는지요?
지난 부활 성야 미사 때가 기억납니다. 피정에 참석하신 전국 각지에서 오신 교우들, 동네 주민들, 근처 청소년 시설 아이들, 협력자들로 성당이 가득찼 습니다. 주례자 석에 앉아서 보니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했습니다.
이 첩첩산중 외진 곳까지 기꺼이 찾아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다양한 측면의 도전으로 큰 위기 앞에 놓인 우리 교회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확신했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사목자들과 구성원 모두가 합심해서 교회 문턱을 대폭 낮추고, 진심 어린 환대의 영성을 매일 실천하고, 매일 흥미진진하고 살맛 나는 공동체를 건설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할 것입니다. 대체 저 공동체는 비결이 뭘까? 고민할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올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년
복음: 루카 6,12-19
배우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오늘은 열혈당원 시몬과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시몬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혹은 나병에 걸렸다가 치유되어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다 타대오는 예수님의 사촌으로 알페오의 야고보와 형제지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여러 다른 환경에서 살던 이들의 스승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전에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신중하게 뽑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는 당신을 팔아먹을 가리옷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머물 열정이 있는 사람들 기준으로 당신 제자를 뽑으셨던 것 같습니다.
교토 대학 영장류연구소의 학자들은 어린 침팬지가 어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어미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미에게 몇 개의 색에 각각 반응하는 일본어 글자를 알아보도록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빨간색은 ‘ㄱ’, 노란색은 ‘ㄴ’ 식으로 연상하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색을 보여주었을 때 그 색에 상응하는 글자의 스위치를 누르면 그 보상으로 동전이 나오도록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어미 침팬지는 그 동전으로 자동판매기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과일을 뽑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미 침팬지가 새끼 침팬지를 안고 있었습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 침팬지가 하는 행동을 보고 혼자 색과 글을 스스로 터득하여 어미가 없을 때 그 기계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글자를 맞추고는 동전을 받아 어미가 한 것처럼 자판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과일을 뽑아먹었습니다.
어미가 자녀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새끼는 그저 어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따라서 배운 것입니다.
[참조: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 ‘제7장: 생각이 있는 부모 노릇’, 브루스 립튼]
누군가와 함께 머문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배우고 싶어지고 배우고 싶어지면 그 배우고 싶어지는 대상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들을 뽑는 기준은 자신과 오래 머물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기준으로 제자들을 뽑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리옷 유다는 조금 다른 의도로 머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영화를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들어와서도 예수님과 같은 스승 앞에서는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유다는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머물려는 의지가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배우지 못합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를 사랑하였기에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면 배우고 싶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용하고 싶어집니다.
가리옷 유다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닮을 수 없었습니다.
경제, 정치, 스포츠, 연예 등 어떤 분야에서건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반드시 그가 사랑했던 스승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나지는 못해도 적어도 동경하며 닮으려고 한 스승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승이 없으면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자녀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비방하는 그 존경받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닮고 싶은 스승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현재 은퇴하고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빌 앤 멀린다’ 자선 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워런 버핏도 수십조 원을 그 단체에 기부하였습니다.
빌 게이츠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설립한 이 재단은 아프리카의 물 부족과 질병을 없애기 위해 인분을 처리하는 장치를 개발하여 시공해주고 있습니다.
식수로 마시는 강에 인분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 그것으로 마시는 물까지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세계 제1의 부자가 미래 삶의 환경을 위해 변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이런 루머도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가 인구수를 줄이려고 일부러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사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누가 빌 게이츠를 닮으려고 할까요?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이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재벌들의 모델이자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싫어하는 부자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그런 분들을 비방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루머로 그들을 본받으려 하는 이들에게 스승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예는 간디나 마더 데레사에게도 적용됩니다.
간디는 어린아이를 성추행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의해 폄하되고 있고, 마더 데레사도 아이들을 학대하고 팔아넘겼다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도 미신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객관적인 행위들은 분명 우리가 모두 본받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루머들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그들을 본받으려는 이들에게는 치명타입니다.
증명되지도 않은 내용을 퍼뜨리며 인간이 그렇게 닮아야 할 세상의 스승들을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미래를 위해 좋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그런 스승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폄하되는 가장 대표적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엔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기는 이들보다 어리석은 사기꾼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누구도 닮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가리옷 유다와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승을 찾고 스승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
닮고 싶은 어떤 스승도 가지지 않는 것은 조금도 나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사랑한 스승이 곧 미래의 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사랑할 스승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 서울대교구
군인에게 ‘훈련’은 매우 중요합니다. “훈련에서 흘린 땀 한 방울은 전투에서 흘릴 피 한 방울과 같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가장 힘든 훈련 가운데 하나가 유격훈련입니다. 높은 곳을 오르고 내려오며, 기구를 타고 계곡을 건너고, 흔들리는 출렁다리에 의지해 장애물을 통과합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조교들은 훈련병들에게 ‘PT 체조’를 시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습니다. 열 번을 하라고 하면 아홉 번째까지는 구호를 외치지만, 마지막 열 번째에는 구호를 외치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마지막 구호를 외치면 모두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힘든 과정이지만, 이를 통해 훈련병들은 서로에게 집중하고 함께 호흡하며 일치와 단합을 배웁니다. 저도 용인에서 안양까지 행군하며 유격훈련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심 운동인 ‘꾸르실료’의 체험도 영적인 유격훈련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3박 4일 동안 신앙인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봉사자들은 체험자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교육에 참여하도록 세심하게 돕습니다.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체험자들이 앞날을 계산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자신을 내려놓고 공동체를 신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평소 바쁘다는 이유로 미루었던 기도를 충분히 하도록 돕고, 그룹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나누며 일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체험을 시작한 분들도 다섯 시간이 넘는 기도를 잘 마쳤다고 합니다. 남은 시간 동안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꾸르실료의 과정은 때로 힘들고 낯설게 느껴지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라는 말처럼 말씀과 기도와 형제애가 조금씩 마음을 적십니다. 그렇게 3박 4일의 체험을 마치면 체험자들은 유격훈련을 끝낸 훈련병처럼 환하게 웃으며 기쁨과 감격을 간직하게 됩니다. 육체의 훈련이 위기의 순간에 군인을 지켜 준다면, 영적인 훈련은 유혹과 시련의 순간에 우리의 믿음을 지켜 줍니다. 예전에는 “서울에서는 눈을 뜨고도 코를 베어 간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악의 세력도 우리가 방심하는 틈을 노립니다.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하고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어느새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참된 신앙의 길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도 1992년에 꾸르실료를 체험했으니 어느덧 34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도 예수님의 영적 훈련을 받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뒤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열혈당원’이라고 불린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도 있었습니다. 시몬은 민족의 해방을 꿈꾸던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유다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질문했던 제자입니다. 두 사람은 성격도 생각도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한 공동체 안으로 부르셨고, 함께 걷고 듣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훈련은 자신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건물이 튼튼해지려면 돌 하나하나가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제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PT 체조에서 한 사람의 실수가 모두에게 영향을 주듯이, 신앙 공동체에서도 나의 말과 행동은 이웃에게 영향을 줍니다. 반대로 한 사람의 기도와 희생, 따뜻한 격려는 공동체 전체를 굳건하게 세웁니다. 꾸르실료 체험의 목적도 특별한 감동을 얻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삶의 모퉁잇돌로 모시고,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며, 가정과 본당과 세상 안에서 복음의 사도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훈련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꾸르실료 체험이 끝났다고 모든 과정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미사와 기도, 말씀과 봉사, 용서와 나눔을 통하여 우리는 매일 주님의 제자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시몬과 유다 사도는 이름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우리도 화려한 성과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충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일치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굳게 결합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꾸르실료 체험자들이 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기쁨과 감격을 안고 세상으로 돌아와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떤 자매님께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 자매가 아무 이유 없이 자기 인생을 판단하고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매는 마음이 너무 아팠고, 자기 삶이 점점 망가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특히 더 힘든 것은,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과 달리 그 자매는 너무나 잘 사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일 때, 힘들게 하는 사람을 향한 가장 현명한 복수는 무엇일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을 때, 흔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박탈감마저 느끼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향해 숱한 부정의 말과 감정을 던져내도,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하게 나 자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최고의 복수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이것이 쉽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바람대로 제대로 못 사는 길을 걷는 것이 쉽고, 나를 편하게 하는 길일까요? 아마 묵묵하게 나 자신으로 남아 사는 것만큼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길이 나를 위한 것일까요? 이 당연한 것을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 우리입니다. 어떤 나 자신이 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바로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뜻에 맞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장면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사도들을 뽑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 중에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조금 이상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사람을 뽑기도 하셨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시몬을 떠올려보았으면 합니다. 복음에 시몬은 열혈 당원으로 나와 있습니다. 극단적 민족주의 무장 집단 출신입니다. 그렇다면 마태오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마태오는 로마 제국의 세금을 걷었던 세리 출신으로 동족의 배신자 소리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이 둘은 삶이 완전히 달라 서로 원수지간처럼 가까울 수 없는 관계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둘 다 사도로 뽑으십니다. 그것도 충동적으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워 기도하시며 뽑은 제자들입니다.
교회가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인간적인 이념, 정체성을 뛰어넘는 화해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평지로 가신 것처럼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과의 일치,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그에 반해 평지는 고통받는 이의 삶의 자리입니다. 즉, 자기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념이나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랑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를 만들도록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하느님 뜻으로 무장한 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고통은 사랑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을 확장한다(칼릴 지브란)
※김건태 루카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시몬과 유다(타대오) 사도
오늘 우리는 열두 사도 가운데 두 분, 성 시몬과 유다 사도를 기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두 사도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시몬을 ‘열혈당원’으로 소개하는 정도입니다(마태 10,4; 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열혈당원은 로마 제국과 그 동조자들에게 무력으로라도 대항해서 유다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믿고 행동하던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유다는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의 사도 명단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명시되고 있으나(루카 6,16),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는 유다 대신 타대오가 언급됩니다(마르 3,18; 마태 10,3). 이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한 사람이 유다식 이름과 그리스식 이름을 동시에 갖는 일이 흔했습니다. 따라서 유다(Judas)의 그리스식 이름이 타대우스(Thaddaeus)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유다는 자연스럽게 ‘유다 타대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서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시몬은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유다 타대오와 함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했고, 두 분 모두 페르시아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에서 이교도의 사제와 예언자들과 논쟁하다가 그들의 신상을 무너뜨려 처형되었는데, 시몬은 십자가형이나 톱으로 몸이 잘려 순교했고, 유다 타대오는 창에 찔리거나 도끼로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전승에 따라 8세기 이후 10월 28일 같은 날에 이 두 사도를 기념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밤을 새워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 가운데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십니다. 루카 복음이 특별히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하나는 중대한 사건이나 결정 앞에서 늘 기도로 시작하시는 모습입니다. 요르단강 세례, 베드로의 신앙고백, 거룩한 변모, 주님의 기도, 겟세마니 동산, 십자가상 죽음의 시간 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먼저 밤을 새워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만큼 사도 선택이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늘 곁에 두시어,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직접 두 귀로 듣게 하고, 당신의 행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하십니다. 바로 이들이 당신의 뒤를 이어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본 것을 전하며, 지상 교회를 맡아 구원사업을 이어나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 양성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예수님의 최대 역점 사업이 제자 양성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뽑아 세우신 사도들은 출신과 성격과 직업이 매우 다양한, 얼핏 보기에 우리와 별반 큰 차이가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당신 교회의 큰 기둥으로 키워내셨다는 사실 앞에서, 스승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확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펼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이 바로 제자 양성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오늘 특별히 기념하는 두 사도, 시몬과 유다를 포함한 당신의 모든 사도를 위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부족한 우리를 하느님 나라 건설에 꼭 필요한 일꾼으로 만들어 나가시리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힘껏 봉사하는, 보람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0.28.수.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사람만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어
사랑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사도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의 삶은 성공의 삶이 아니라
충실함의 삶이며 가난한 마음의
삶입니다.
그 시작은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도적 사랑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낮아지는 삶이며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사도들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자리였습니다.
서로 다른 불완전함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는
사도적 공동체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품는
사도적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도들의 삶은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복음: 루카 6,12-19: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1. 두 사도의 기억
오늘 교회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를 기린다. 시몬은 “열성 당원”(Ζηλωτής)이라 불리며, 유다 율법에 철저하고 민족적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불리며,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하고 질문한 사도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기질과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주님의 사도로 함께 불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 됨을 이루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2. 예수님의 선택과 제자 공동체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다고 전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행정적 결정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 거룩한 행위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시기 전에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이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음을 보여준다.”(In Matthaeum Homiliae, PG 57, 269)
사도들은 특별히 뛰어난 자격이나 학문적 준비로 뽑힌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강조합니다: “주님은 완전한 이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들을 부르시어 완전하게 만드셨다.”(Sermo 340, 1) 따라서 제자의 사명은 인간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한다.
3. 사도의 본분: 배우고, 따르고, 닮는 것
‘제자’(disciplus)란 곧 배우는 사람을 뜻한다. 사도들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배우는 사람들이었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며 점차 스승을 닮아갔다. 공의회 문헌 사목 헌장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자라나도록 협력한다.”(사목 38) 결국 사도 됨은 단순한 직책이 아니라, 스승과 함께 살아가며 “그분처럼 되는 것”(1요한 3,2)을 목표로 하는 삶이다.
4. 오늘 우리에게 주는 초대
열두 사도는 흠 없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변화될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믿음을 키우며, 그분을 닮아 살아가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도가 된다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다. 그분을 닮으려는 이에게서만 진정한 선포가 흘러나온다.”(Enarrationes in Psalmos, 44,23)
5. 결론과 기도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의 모범은,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 분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 복음을 전한 제자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도직 교령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사도직에 참여한다. 이는 교회의 생명과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데서 드러난다.”(Apostolicam Actuositatem, 3)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택된 자들’로서 제자의 길을 살아가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말씀을 배우고, 사랑으로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미사 안에서, 우리 각자가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처럼 닮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은총을 청해야겠다.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 -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사도(제자:예수를 따름)
다르지만 함께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사도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다양성을 일치로 바꾸고
세상의 낮은 자리에서 그분의 뜻을
삶으로 드러내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며 신뢰를 쌓았듯이
오늘날 사도인 우리 모두와도
영원히 깨지지 않는 ‘신뢰’를 쌓으십니다.
오늘날 이러한 ‘신뢰’는
교회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되었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는 ‘신뢰’라는
단단한 기둥이 서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가 깨지면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하듯이
‘신뢰’가 사라진 교회는 빛을 잃고
주님이 사라진 빈 건물만 남을 것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전주교구
※카톡 신부님 - 굿뉴스
복음말씀
제1독서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