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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묵상글 ( 사순 제2주일. - 희망과 절망, 절망과 희망의 예고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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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01 05:10
- 희망과 절망, 절망과 희망의 예고편
지난주 주님은 광야에서 혹독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타볼산에서 모습이 영광스럽게 바뀝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타볼산에서 내려가시어 해골산에 오르실 것이고,
거기서 십자가에 올라가 매달리셨다가 다시 저승에 내려가시지만
마침내는 하늘로 영광스럽게 오르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영광스러움과 비참함,
죽음과 생명을 오르내리시는 분이시고,
산으로 치면 골짜기를 건너 꼭대기로 오르시는 것이며,
인간의 산에서 내려와 골짜기를 지나 하느님의 산으로 오르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산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죽음의 심연이랄까 골짜기를 반드시 건너야 하는데 이 건너감을 파스카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건너가신 그 길을 우리도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데,
우린 오늘 베드로처럼 산 위에 계속 있겠다며 그 길을 가지 않거나
거쳐서 가지 않고 건너뛰어서 건너가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를 포함한 세 제자만 타볼산에 데리고 가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세 제자만 산에 머물라고
데리고 가신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
절망감 때문에 더 이상 길을 가려고 하지 않을 때
자기들이 먼저 본 산 위의 영광을 얘기하며 희망을 북돋우라고 하심입니다.
그러니까 타볼산의 변모를 세 제자만 본 것을 영화와 비교하면
본 편에 앞선 예고편을 세 제자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예고편을 본 사람은 두 가지 태도를 지닐 것입니다.
하나는 각오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입니다.
각오는 최악을 각오하는 것이요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인데
죽음을 반드시 거쳐 가야지 건너뛰어 갈 수 없음을 알고 각오하는 것입니다.
사실 최악을 각오할 때 악들이 선이 되고,
바닥을 치고 위로 오르듯 최악이 왔을 때
거기서 희망을 가지고 오를 수 있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생겨나고 시작되는 것입니다.
공이 바닥을 쳐야 위로 튀어 오르는 것처럼
희망도 절망이라는 바닥을 쳐야 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희망과 절망, 절망과 희망의 예고편을 미리 보여주신 것은
용감하게 바닥으로 내려가라고, 거기서부터 힘차게 치고 올라가라고
주님께서 세 제자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주신 친절한 서비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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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품고 가기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삶은 슬픔과 기쁨이 성사처럼 하나로 어우러진 신비로운 결합입니다. 그 모든 것이 거룩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탈출기: 자유를 향한 여정
품고 가기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2026년 2월 28일 토요일
랍비 샤론 브라우스(Rabbi Sharon Brous) 이야기는 광야에서 무엇을 지니고 가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묵상을 전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굶주림과 목마름,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적들의 공격 속에서도, 모세가 산 위에서 하느님의 손으로 새겨 받은 돌판을 담은 거룩한 언약궤를 메고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돌판은 사실 모세가 두 번째로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백성이 황금 송아지 앞에서 무의미하게 춤추는 모습을 보고 분노한 모세가 깨뜨린 첫 번째 돌판의 파편이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온전한 돌판과 부서진 돌판—둘 다 거룩한 것—이 언약궤 안에 나란히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제 남편 데이비드는 한 번은 3주간의 배낭여행을 감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등에 무거운 짐을 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몸소 배웠습니다. 여행 전, 그의 누이 파울렛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다 읽은 페이지는 찢어내어 불필요한 무게를 덜라'고 조언했을 때 우리는 웃어넘겼습니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자 배낭 끈이 제 어깨를 파고들었고, 저는 기꺼이 모든 불필요한 것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무겁고 깨진 돌판을 등에 지고 걸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의 교훈은 단지 그 파편들이 여전히 거룩함을 지녔다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온전한 돌판보다 더 귀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깨진 조각들은 상실과 실패, 분노와 구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얼마나 깊이 아프게 할 수 있는지를 일깨워 주며, 동시에 용서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 조각들은 우리처럼 불완전합니다. 모든 것이 얼마나 연약한지에 대한 영원한 기억이 됩니다.
거룩한 언약궤는 우리가 길러내고자 하는 마음의 모형입니다. 온전한 것과 깨진 것을 동시에 품어낼 만큼 넉넉한 그릇이지요. 둘을 분리해낼 방법은 없습니다. 삶은 슬픔과 기쁨이 성사처럼 하나로 엮인 신비이며, 그 모든 것이 거룩합니다.
References
Sharon Brous, The Amen Effect: Ancient Wisdom to Mend Our Broken Hearts and World (Avery, 2024), 98–9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lay Banks, untitled (detail), 2020, photo, US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광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곧 출애굽 자체의 거울이 됩니다—알 수 없는 것을 감수하며, 그 방황 속에서 우리는 자유와 하느님과의 더 깊은 친교로 이끄시는 조용하고도 충실한 현존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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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의 변모와 우리의 변모!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은 첫 세 복음서, 즉 공관복음서(마태 17장, 마르코 9장, 루카 9장)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직접적으로 이 사건을 전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라는 말씀으로 예수님 변모 사건을 증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변모를 목격한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라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변모 사건 때에 함께 있었던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변모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상징적 이야기로 보아야 할까요, 혹은 이를 목격한 세 제자의 영적 체험 정도로 이해해야 할까요?
사실 제자들도 당황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베드로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고 기록합니다.
교부들과 성서학자들은 이 사건을 맥락 속에서 읽으라고 권합니다. 하늘의 음성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인 세례 때에도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또한 구름이 덮였는데, 이는 구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표징(탈출 19,9; 레위 16,2 등)이었습니다. 따라서 변모는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사건입니다. 세례로 시작된 공생활과 부활의 영광이 한 순간에 드러난 사건인 것입니다.
세 복음서 모두에서 변모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수난을 예고하신 직후에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영광과 성공을 꿈꾸었는데, 스승의 고난과 죽음 예고는 충격과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은 더욱 큰 혼란을 주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체험을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태 17,4)라고 말하며 그 순간을 붙잡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침묵을 명하십니다. 이는 어떤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으며, 마음 깊은 곳에서 묵상하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 변모 사건을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하며, 이 세 가지 관점을 통합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먼저 이를 역사적 사건으로 보는 전통입니다. 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변모를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적 영광을 잠시 드러내셨다는 것이죠. 이는 수난과 십자가를 앞둔 제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기 위한 실제 체험이었다고 봅니다.
두번째로 상징적, 신학적 의미에서 보는 관점입니다. 동시에, 변모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난 것은 율법과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제자들의 영적 체험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깊은 기도와 신비 체험 속에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영적으로 ‘본’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즉, 역사적 사실 여부보다 제자들이 받은 계시적 체험에 초점을 맞춥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의미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상징과 영적 체험을 함께 담고 있는 신비로운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톨릭적 전통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체험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실제 사건인지, 상징인지, 내적 체험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역사와 상징과 영적 체험이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변모 사건 역시 그러한 신비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적 체험을 합니다.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하고 열려 있을 때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만이나 자만에 빠지지 말고,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고처럼 침묵 속에서 그 체험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조용히 자라납니다.
그리스도의 변모는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인에게도 의미 있는 계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신비, 동시에 제자들에게 주어진 위로와 희망의 체험입니다. 우리도 신앙 여정에서 때때로 주어지는 '빛나는 순간'을 겸손히 받아들이며, 그 체험이 우리를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인도하도록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삶에서 경험되는 시련과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이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변모는 우리에게 고난이 단순한 실패나 절망이 아니라, 영광으로 가는 길의 일부임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될 수 없듯, 우리의 삶에서도 시련은 은총과 영광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깊이 묵상하면서 확신 있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은, 이 신비가 단순히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묵상하며 받아들여야 할 체험이며, 또한 우리가 겪는 시련이나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의 눈으로 깊이 바라보라는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시련을 희망과 변모의 길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을 겪는 동안에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주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참 좋겠다고 했고, 죽더라도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했던 베드로와 예수님은 끝까지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뿐 아니라 모든 제자에게 예수님은 그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용서를 온 존재로 깊이 체험했던 그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위해 자신들을 투신했고 순교까지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유다마저도, 그가 비록 예수님을 팔아 넘겼지만 그가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돌아서고자 했다면,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용서를 받았을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의 여정에 그와 함께하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언젠가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삶 이후에 여기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파스카가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이 무한한 사랑의 힘을 받아들이는 이라면 이 사랑을 허투로 바라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내' 삶을 사랑으로 일구어 가는 데에 전심을 기울이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일과 '내' 새상적인 관심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자주(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으며 '내' 삶을 진정성 있게 완성해 줄 그 무언가, 혹은 그 누군가를 향해 우리 마음의 방향을 잡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 성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깨어 경계하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적인 것이 안주하며 잠자고 있는지를 깊이 바라보는 일이 바로 [의식 성찰]인 것입니다. 또한 이 의식성찰은 죄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선물과 그 선물이 주어지고 있음을 의식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침잠하는 가운데 주님의 눈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며 감사·슬픔·용서를 표현하고, 이후에 받을 은총을 청하는 것이 바로 의식 성찰의 핵심 요소인 것입니다.
사실 평소에는 이런 [의식 성찰]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 안에서도 반복하여 이런 의식 성찰의 수양을 하고자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노력에 힘을 보태 주실 것입니다. 아니 우리 안에서 우리가 계속 당신을 향하여 시선을 두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고,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참 인간이면서 동시에 참 하느님이심을 일깨워 줍니다. 참된 인간이 되고 싶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하느님을 알고 싶다면 역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단순한 제도나 기관이 아니라,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의 영광을 함께 나누는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입니다.
루돌프 오토는 그의 고전적인 신학 저서 [거룩의 의미]에서 종교의 근본은 우리의 일상적 이해와 삶을 압도하는 영적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러한 거룩함과의 만남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라틴어로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 표현합니다. 곧, 신성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로서 두려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는 의미에서 쓰는 표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두려움과 매혹의 신비)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그것을 가리기도 하고, 찾지 않음으로 인해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언제나 존재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하느님의 표징이 됩니다. 우리가 의식 성찰을 오늘날 우리의 삶이 곧 변모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누구나 변모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주님의 변모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변모되어야 합니다… … 하느님의 현현으로!
우리의 상상은 변모되어야 합니다… … 하느님의 모상으로!
우리의 청각은 변모되어야 합니다… … 하느님의 울림으로!
그러니 용기를 내어… … 주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삶의 주변적인 문제들 너머로, 육체적·정신적·영적·정서적 고난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주님께 더 가까이 오르는 영적 산에 올라 그분의 현존 안에서 변모의 기쁨을 함께 누립시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창세 12,1-3 참조)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지도를 주시지 않고, 오직 약속만을 주십니다.
변모는 곧 집착을 내려놓음입니다. 설명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닐 때 우선될 때 변모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과정은 순간의 반짝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우리의 정신을 세상쪽에서 하느님의 선(善)쪽으로 방향을 잡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제자됨에는 고난이 따름을 상기시킵니다. (2티모 1,8-10 참조)
우리의 참된 가치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서 비롯됩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변모의 빛이 우리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드러나게 하십니다!
우리 삶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내어줍니다.
우리 삶은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우리 삶은 훨씬 더 많은 희망을 품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내어 맡기며, 그분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입시다.
그리하여…
변모되고! 새롭게 되고! 초월하게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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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사순시기에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12,4). 그 길은 비록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길이지만,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주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길’에 우리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그런데, 사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길’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2티모 10)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환히 드러난 영광된 변모를 보여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 본래의 신적 초월성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사순의 길’이 어디로 향하여 가는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마태 16,21-28)를 하신 다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가올 수난으로 닥쳐올 절망과 위기를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니 이 ‘수난의 길’은 동시에 생명과 부활의 빛나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그러기에 내적 기쁨으로 차오르는 ‘은총의 길’이 됩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는 박노해 님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으로 ‘변모의 길’을 걸어갑니다. ‘길’이 되는 그리움으로 ‘부활의 길’, ‘영광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 ‘길을 가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름 속에서 들려주신 가르침입니다. 곧 신약의 ‘쉐마’입니다. ‘들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시켜주시면서, 그를 ‘따르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그를 따라 ‘변모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변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변모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곧 나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22). 그러면, 우리는 변모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마태 17,7)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의연히 변모의 길을 가라!’ 하십니다. 그러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위한 수난에 동참하고 새로운 변화의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 무디어지고 무관심해진 마음을 뉘우치고,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신뢰와 사랑, 배려와 존중을 심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당신이 거주하시는 초막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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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순 시기는 단순히 나쁜 습관을 하나 끊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길을 반복해서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모하십니다. 제자들은 그 장면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경험을 붙잡아 두지 말고, 다시 내려가 일상의 길을 걸으라고 하십니다. 변화는 산 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려온 뒤의 삶에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유신 장군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어느 날 김유신 장군의 말이 주인의 뜻과 달리 기생집으로 가 버립니다. 말이 나쁜 의도를 품어서가 아니라, 이전에 여러 번 다녔던 길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말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복된 길은 말의 몸에 새겨져 자동으로 작동합니다. 김유신은 그 모습을 보고 깨닫습니다. 문제는 말의 의지가 아니라, 이미 길든 경로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보다 훨씬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보다 더 쉽게 길드는 걸 봅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접하는 말, 영상, 정보, 분노와 두려움의 언어들은 어느 순간 우리 안에서 자동으로 작동합니다. 요즘의 컴퓨터 알고리즘이 그렇습니다. 내가 무엇을 자주 클릭했는지, 무엇에 오래 머물렀는지에 따라 다음에 보여 줄 것이 결정됩니다. 알고리즘은 판단하지 않지만, 반복을 기억합니다. 김유신의 말이 길을 기억했듯, 알고리즘은 우리의 선택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맺히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맺힌다.” 이 말씀은 도덕적인 훈계라기보다 삶의 구조에 대한 통찰입니다. 열매만 바꾸려고 애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바뀌지 않으면 열매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입력이 바뀌지 않으면 출력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순 시기는 바로 이 나무를 바라보는 시간, 이 삶의 구조를 다시 묻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한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꿈은 해몽이 중요하듯이, 신앙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거룩한 변모는 제자들에게 한 번의 감동적인 체험을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바꾸고, 생각의 틀을 바꾸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다시 설정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제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그분의 참된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변모는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방향의 변화입니다.
이 지점에서 성서를 읽는 세 가지 길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 읽는 방법입니다. 대부분의 성서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아무 비판 없이 문자 그대로만 적용할 때, 오히려 반인간적이고 반인륜적인 결론에 이를 위험도 있습니다. 둘째는 문학적 의미로 읽는 방법입니다. 역사비평을 통해 성경 저자의 집필 동기와 신학 사상, 그리고 그 시대의 문화적 한계와 약점을 함께 살펴볼 때, 우리는 근본주의적인 해석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영적인 의미로 읽는 방법입니다. 거룩한 독서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말씀이 오늘 나의 삶, 오늘 우리의 공동체에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묻게 됩니다.
이 세 가지 길이 함께 갈 때, 성경은 과거의 문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의 독자 또한 말씀이 가리키는 길을 살아가는 증인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성경 말씀은 개인과 공동체 안에서 살아 있는 말씀이 되고, 어둠을 밝히는 구원의 말씀이 됩니다. 사순 시기,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기를 바라기보다는, 어떤 나무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익숙해서 따라가던 길을 멈추고 말씀 안에서 새로운 길을 선택할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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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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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타볼산 정상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베드로 사도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던가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스승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말로만 듣던 이스라엘 민족의 대 영도자 모세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눈앞에 나타나, 그분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에 살고 분위기에 죽는 사람이었던 분, 급하고 충동적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갑작스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하고도 기상천외한 분위기 앞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멘탈 붕괴, ‘멘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찰나의 천상 체험으로 인해 무아지경에 빠진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베드로 사도는 비록 잠깐이지만 맛보고, 느끼고, 만끽한 천국 체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고, 여기 지금, 타볼 산 위에서, 광채로 빛나는 인물들 사이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하시는 말씀,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잠깐이지만 맛본 천상 체험을 뒤로하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짧게나마 천상을 체험한 사도들이 하산(下山)해보니, 무정하게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피곤한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고, 어제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인간 실존의 비참함은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아직 영광과 완성의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스승님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도래할 그 순간을 맞이하려면, 먼저 그분처럼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타볼 산 변모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신원과 정체를 핵심 제자들에게 뚜렷하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받는 외아들로서 머지않아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시겠지만,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반드시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것이며,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실 것이며 세세대대로 세상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세상은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겠지만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우리도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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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카오스토리 黃Dami 매일묵상 > -----10:00 추가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오 복음 17장 4절)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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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7,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제자들은 두려움에 엎드리지만
예수님께서는 다가오셔서 손을 대시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마라.”
초대 교부 성 예로니모는
하느님의 음성이 “느낌 좋은 체험”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 준다고 봅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명령은
기적의 빛을 소유하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며 길을 걷는 삶으로 들어가라는 부르심입니다.
변모의 산은 높지만
제자들은 곧 산 아래의 현실로 내려가야 합니다.
가난, 갈등, 상처, 오해…
돌봄이 필요한 자리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오늘 돌봄 주간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 주님은 “산 위에서만 빛나시는 분”이 아니라
산 아래로 함께 내려오시는 분이시다.
• “들어라”는 말은
내 판단을 앞세우지 말고
말씀을 먼저 기준으로 삼으라는 초대다.
돌봄이 어려운 이유는
대개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지쳐서,
또는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집착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로니모가 가리키는 길은 단순합니다.
오늘은 내 방식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
그 듣는 자리에서
한 사람을 살리는 작은 돌봄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피곤해
사랑이 메말라갈 때에도
당신의 말씀을 먼저 듣게 하소서.
산 위의 빛을 붙잡으려 하기보다
산 아래의 한 사람을 돌보도록
저를 다시 보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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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김준수 신부님.
몇 년 전 제가 살았던 양양 오상 영성원은 깊은 산은 아니지만, 산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설악산이 잘 보입니다. 예전에는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우면 산에 자주 올랐지만 이젠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굳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등산을 하신 분들은 산에 오르다 보면 흐트러진 마음을 되잡을 수 있고 뒤엉킨 생각의 실마리가 정리되는 체험을 하셨으리라 봅니다. 복잡한 세상에 얽매여 살다가 한 번쯤 높은 산에 올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과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밤낮 자기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지만, 모든 게 작고 멀리 보이면서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17,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에서 ‘산’이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이라고들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산 위의 삶(17,2-8)과 산 아래의 삶(17,9)으로 나누어집니다. 산 위의 삶은 예수님의 변모된 모습과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삶이었고, 산 아래의 삶은 예수님의 약속을 실행하는 삶으로 구분됩니다. 산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셨습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애졌다.”(17,1~2) 변모되신 예수님의 얼굴과 옷은 이 세상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 속에 빛나는 얼굴이며 모습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는”(17,3) 모습은 분명 비현실적인 광경이었으며 신적 영광의 거룩한 순간이었습니다. 마태오는 루카와 달리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 내용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미구에 있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암시하고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느껴집니다.
뜻밖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목격하고 체험한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놀라운 광경과 영광의 빛에 휩싸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예수님께 단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17,4)라고 간청합니다. 아마도 이 놀랍고 새로운 체험을 통해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역시 산 아래에서 겪어왔던 혼란과 고단한 삶을 깨끗이 잊게 해 주는 체험이었기에 그냥 여기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한평생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른 생각이었지만, 만일 우리 역시도 그런 광경을 목격한다면 동일하게 생각하고 표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을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떼미네. 』라는 양희은의 「한계령」의 노랫말처럼 산은 더 이상 산에 머물지 말고 우리가 떠나온 저 속세로 내려가라고 재촉합니다.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혼자만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갈망이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실제로 살아야 할 삶(=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와 삶)의 상태는 아니며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곡해한 베드로와 제자들의 욕심이었다고 봅니다. 나 혼자만의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에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 눌러앉고 싶은 욕망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데에 온 마음과 영혼을 집중하고 계시지만 베드로는 아직도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나 혼자만의 평화와 안락을 위한 시선에서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을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만드는 일이며 하느님을 자기만족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이기적인 삶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 순간 자기중심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있으며, 부활을 위해 겪어내야 할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만족과 안락 속에 주저앉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길을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위안과 위로는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잘 따라 걷기 위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선물에 마음을 빼앗기며, 선물을 주는 사람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유아적인 신앙을 갖는 사람이라면 어린아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안에 집착하고 평안에 몰두하기 마련입니다. 참된 평화란 어려움을 통해서 주어짐을 잘 모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 사랑에 힘입어 산에서 내려와 그분이 가신 십자가를 향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고, 십자가 짊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천할 때 그분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17,8) 이런 점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권고하듯이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1,8)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신앙이란 보는 것과 듣는 것만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며, 이 셋이 고루 균형을 이루어야만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철부지 같은 저 역시도 짧지 않은 사제와 수도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많은 들음과 봄 중에 저의 삶을 행동으로까지 변화시킨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밖엔 없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어려움인지는 알지만, 그 변화 속엔 분명 세상에선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넘실대고 있음을 알기에,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우리 역시 매일 매주 기도의 높은 산에 홀로 올라가 하느님의 얼굴을 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자신이라는 욕망이라는 틀에서, 안주의 틀에서 벗어나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 삶을, 그 길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당신 자애를 베푸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분명 생명을 얻고 더 얻을 것이며 영원히 그 생명 안에서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아멘”(시3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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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키엣 대주교님.
우리 모두의 파스카
산 위에서 예수님은 눈부시게 빛나셨습니다.
너무나 찬란한 영광의 빛에 베드로는 그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영광은 잠시 스쳐 가는 순간이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그 영광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 알려주십니다.
파스카(Pascha)란 어원적으로 ‘통과하다, 지나가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섯 번의 파스카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의 파스카
아브라함은 약속과 믿음을 따라 안정된 삶을 떠나 광야로 나갔습니다. 세상의 혈통을 떠나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는 이 길은 메시아의 혈통을 낳는 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모세의 파스카
모세는 이집트의 풍요와 안락함을 떠나 광야의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의 땅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간 이 길이 하느님의 백성을 세우는 길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엘리야의 파스카
엘리야는 아합 왕과 예언자들과 맞서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상을 떠나 참 하느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네 번째, 예수님의 파스카
십자가에서 부활로, 고난에서 영광으로 나아간 예수님의 파스카는 과거 모든 파스카를 완성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파스카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약속과 구원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징으로 앞으로 올 참된 구원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면 예수님의 파스카는 십자가와 부활로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신 영광의 파스카입니다.
다섯 번째 파스카, 이제 우리 모두의 파스카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미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동참하고 있으며 지금도 주님의 은총 안에서 그 파스카의 여정으로 끊임없이 초대받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이 파스카를 향한 작은 여정입니다.
흩어졌던 마음을 다시 모으고, 세상의 방향으로 기울어진 영혼을 돌이켜, 주님을 향해 다시 걸어가는 시간입니다. 이 작은 파스카를 통하여 우리는 부활의 빛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전체는 더 큰 파스카입니다.
세상의 집착을 떠나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유한한 삶을 지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거대한 과정입니다.
희생은 아픕니다.
끊임없는 인내는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서 빛나신 주님의 변모는 그 고통을 넘어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의 약속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도달할 목적지이며, 희망의 표지이며, 시험 중에 우리를 붙드는 힘입니다.
사순 시기를 충실히 살아가는 이는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여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내려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파스카이며, 우리 인생의 완성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는 지금 ‘파스카’의 여정 어느 부분에 서 있습니까?
2. 사순절에 나는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까?
3. 내 안의 옛 사람은 무엇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할 나의 참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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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조명연 신부님.
“저는 못생겼고 키도 작아요. 또 능력도 없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에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그 기준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는 것입니다. 생김새를 결정할 수 있는 세계 공인 기준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그 기준은 다름 아닌 자기가 만든 것이기에 구분 자체가 아주 애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동차를 사려는 사람이 있는데, 자전거와 가격 비교를 합니다. 자전거는 이 정도의 가격인데, 왜 자동차는 그렇게 비싸다고서 불평합니다. 이 비교는 제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 역시도 비교 자체가 의미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을 만나는 삶입니다. 이 길에서 어떤 비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에는 예수님과 함께 광야에서 유혹을 이기는 장면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순 제2주일에는 예수님을 따라 타볼산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산 위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인 사순시기에 왜 이런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실까요? 사순시기의 긴 터널을 통과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병의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수술 전, 의사 선생님께서 어떻게 수술할 것인지를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건강해질 것인지도 설명하십니다. 이때 마음에 커다란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미리 영광을 보여 줌으로써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 타볼산에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의 동생 요한이 함께 오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변모, 즉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지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영광의 자리가 너무 좋았나 봅니다. 베드로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다며 예수님께 말합니다.
하긴 예수님과 전교 여행을 하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니 이 영광의 자리와 비교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자리에 머물자고 했던 것입니다. 제1독서의 아브람은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창세 12,1)라는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납니다. 익숙한 고향과 가족을 떠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 안주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을 만나는 삶을 위해 떠났습니다.
우리도 다른 이의 삶과 비교하면서 지금의 편하고 쉬운 길만을 청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당장 떠나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목표를 정하거나 꿈을 꾸는 데 나이란 없다(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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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기도하라, 집착하지마라, 들어라, 일어나라, 떠나라”
“주님, 당신 얼굴을 찾고 있사오니,
그 얼굴 나에게서 감추지 마옵소서.”(시편27,9)
사순시기에 맞이하는 3월1일은 성 요셉 성월의 시작이자, 107주년째 삼일절이요 사순 제2주일입니다. 또 어제부터는 <장엄한 분노>라는 작전명하에 미국이 이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참으로 어수선한 국내외 상황입니다. 2026년 기도와 회개의 사순시기는 더욱 절박할 수 뿐이 없습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3.1절>입니다. 오늘은 1919년3월1일,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대한독립만세’와 더불어 민족의 자주독립을 세계에 선언한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국경일이자 법정공휴일입니다. 온겨레가 비폭력 만세운동으로 독립의지를 표출한 역사적 사건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가 된 날입니다. 3.1절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러 봅니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잊어버린 역사는 반복됩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3.1절이요, 독립국가로서 융성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해야 할 적기입니다. 3월을 맞이하는 다산 일력의 가르침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과 함께하다, 물들이고 싶거든 먼저 물들어라”, 노자 56장 말씀에 이어, “광이불요(光而不耀); 아름답게 빛나되 너무 번쩍거리지 마라”는 노자 58장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어지는 옛 현자의 두 말씀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야기되는 진리는 황금률이다. ‘나 자신을 대하는 것 같이 항상 타인을 헤아리라.”<다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논어>
이번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교황 레오14세의 우리의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진솔한 담화문 마지막 부분을 나눕니다.
“사순시기 공동의 여정에 하느님 말씀에 귀기울이고 가난한 이들과 땅의 부르짖음에 귀기울이는 것이 우리 공동체 삶의 일부가 되고, 단식이 진실한 참회의 바탕이 됩니다. 우리의 언어 사용도 아우르는 그러한 단식의 힘을 청합시다. 그리하여 상처주는 말이 줄어들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는 더 넓은 자리를 만들어 갑시다.
우리 공동체들이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리가 되고, 경청을 통하여 해방의 길들이 열리는 자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준비된 마음과 열정으로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데에 이바지합시다.”
이런 모두를 위해 우리의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가 더욱 절실합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 그대로 주님을 닮은 변모의 여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적절한 신비체험의 때를 아셨습니다.
바로 앞서 베드로는 멋진 주님 고백으로 극찬과 축복을 받았지만,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첫 예고를 만류하다 졸지에 사탄이 되고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아주 의기소침해진 이런 제자들 분위기에서 제자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주님 변모의 간접적 체험은 참으로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체험에도, 우리의 변모의 여정에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다섯 요소로 요약됩니다.
첫째, “기도하라!”입니다.
주님의 산위에서의 변모 일화는 공관복음에 다 나오는데, 루카복음만이 기도중에 신비로운 변모사건이 일어남을 보도합니다. 분명히 단언하건데 기도중에 일어났던 변모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외딴곳이나 산을 찾았을 때는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천은 아버지와의 깊은 관상적 일치를 이룬 기도였습니다. 사순시기 변모의 여정에 참으로 기도와 회개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깊은 기도의 열매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환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일치를 지향하는 항구하고 간절한, 한결같고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기도시간, 주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하면서 주님의 변모와 더불어 우리의 변모가 일어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둘째,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모든 것은 흐릅니다. 흐름은 생명의 원리입니다. 세상에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유일한 안식처 주님 안에 머무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오늘 베드로는 몰랐습니다. 해처럼 빛나는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한 베드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엉겁결의 고백에서 그의 독점욕과 집착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완전히 착각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하느님의 살아 있는 강같은 분들이 예수님이요 모세요 엘리야인데 이분들을 감옥같은 초막에 가둬둠은 어불성설입니다. 여기 요셉수도원 수도자들은 정주가 안주가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하느님을 향한 내적여정의 흐름중에 있습니다. 그래야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움을 삽니다.
셋째. “들어라!”입니다.
보다 못한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니다.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속에서 들려 오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구절로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미 예수님 세례때 말씀이 다시 반복되며 예수님의 신원을 다시 확인시킵니다. “들어라!” 평생 지니고 살 말씀입니다. 잘 듣기 위해 침묵이요 잘 들어야 겸손과 순종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말씀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이자 생명이요 빛입니다. 우릴 위로하고 치유하는 말씀이요, 정화하고 성화하는, 살아 있고 힘이 있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이래서 고백성사 보속으로 제가 즐겨 써드리는 <말씀처방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말씀의 경청입니다. 제자들의 배움의 여정에 필수 기본 조건이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입니다.
넷째, “일어나라!”입니다.
앞서의 하느님 아버지에 이어 그의 아들 예수님께서 친히 두려움에 주눅들어 오그라진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가 두려움이나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일어나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부활의 새생명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포위되어 살 수는 없습니다. 수없이 강조하지만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내어 일어나 새롭게 시작해야 영적탄력이나 영적감수성의 손상이 없습니다.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이라면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결코 신망애의 영적탄력이 떨어져선 안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뒤에는 “나다.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 말씀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버리고, 떠나, 따르라!”
막연히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목표와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떠남의 빛나는 모범이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 은총의 사순시기 주님을 따라 변모의 여정에 오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네 고행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세상의 모두가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떠나 주님을 따르는 내적여정, 변모의 여정에 오른, 또 하나의 아브라함인 우리 하나하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날마다 안주의 울안에서 벗어나 부단히 버리고 떠나 주님을 따라 주님의 제자답게, 세상의 복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의 누룩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변모의 여정에서 주님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까지 입조심 할 것을 단단히 당부하시는 주님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은총의 사순시기는 집중적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 시기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기도하라, 집착하지 마라, 들어라, 일어나라, 따르라” 핵심 사항의 준수를 명하십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우리를 변모시켜주십니다.
“주님, 우리가 당신께 바랐던 그대로
어여삐 여기심을 우리 위에 내리소서.”(시편33,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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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남몰래 지는 십자가의 위대함
우리는 십자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거의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운명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 하는 숙제 같은 짐처럼 여겨지는 것 같은 이미지입니다.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다 있을 겁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도 지는 것도 버거워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도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과연 어떤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일까요? 단순히 희생정신이 강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인간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한다고 할 때 그런 희생으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남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게 감히 상상이나 가는지요? 굿뉴스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의 묵상글이 올라옵니다. 이 신부님이 10여 년 전에 경남 고성 올리베따노 수도원에 계실 때 수도원 주위에 방갈로가 있는데 한 번은 방갈로에서 신부님과 면담성사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 다른 글에서도 언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 다른 건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신부님이 십자가를 진다의 원어적인 의미를 설명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품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과 면담 후에 저는 헬라 성경이 없어서 그냥 영어성경을 찾아봤습니다. 우리는 진다고 할 때의 국어 사전적인 의미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원어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십자가를 진다의 의미가 더 잘 피부에 와 닿을 수가 있을 겁니다. 품는 것이고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저를 선교한 자매님이 한 번은 제가 무슨 고민이 있어서 그분 가게에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베드로, 남자의 넒은 가슴으로 이해를 해줬으면 해요"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씩 이해가 잘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있을 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잘 떠올리기도 합니다. 인간 강만연이라는 작은 보잘것없는 이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을 생각해서 내 작은 가슴을 더 크게 펼쳐서 안아보자는 식으로 감싸안으려고 노력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그자리 신앙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년이 가도 이십년이 가도 신앙은 그자리에 있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원칙은 예수님은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자기 것은 자기가 지어야 하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군에서 저는 통신병을 했습니다. 행군이나 군 작전시에 저는 무전기를 메고 이동해야 합니다. 행군을 할 때 체력적으로 지쳐 처지는 동료가 있다면 무전기 무게만 해도 상당한데 어떤 경우는 그 동료의 군장을 앞으로 해서 메고 행군을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제가 짐을 나누어 지자고 해서 군장을 분산해 동료들과 함께 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유사시는 아니지만 이게 만약 전시라면 어떨까요? 전시에서는 군장이 바로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생명줄이 되는 것입니다. 군장 자체를 져 주는 게 남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묵상할 때 한 번씩 어쩌다가 군에서 행군을 할 때 이 경험을 떠올려 묵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고 나서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어느 누구 하나 생색을 내지 않습니다. 나도 힘든데 네 군장을 메고 같이 갔는데 고맙게 생각하라고 하는 말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이건 세상에서 말하는 선행이라는 개념도 아닙니다. 만약 전쟁의 상황이라면 전우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부가 일심동체이듯이 내가 살아야 전우도 살고 전우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과 싸우는 상황에서는 그래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이라는 적과 싸우는 용사입니다. 이때 세상이라는 적은 다른 게 아니라 세상 때문에 하늘나라를 볼 수 없게 하는 그런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푹 빠져 살게 되면 하늘나라를 꿈꿀 수 없게 되고 볼 생각조차도 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이런 현실에 있는 존재에 불과한 인생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적이 바로 우리가 견디고 이기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분명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어야 하는 게 맞지만 힘에 부쳐 지기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십자가를 나누어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왜 남의 십자가를 지느냐고 야단을 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건 위대한 사랑 실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잘 지었는지 여부에 따라 하늘나라에 잘 갈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잘 가지 못한다면 이 세상 표현으로 말하면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될 것입니다. 결국은 남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큰 희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부활은 자신의 십자가를 온전히 잘 지은 사람만이 잘 부활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남의 십자가까지 몸소 지고 사랑을 나눈 사람은 그가 부활하는 모습은 단순한 부활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표현하는 말처럼 '화려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부활이라도 다 같은 부활이 아닐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이왕 부활한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부활을 꿈꾸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일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도 잘 지고 가야 하겠지만 정말 예수님의 길을 잘 걷고 싶다면 힘에 부처 지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십자가를 잠시만이라도 대신 져 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된다면 그것도 생색을 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져 준다면 그 십자가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그 십자가를 대신 져 준 사람에게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 영광은 무궁한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십자가는 아주 힘든 십자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힘들고 상처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상처를 함께 나누고 같이 가슴 아파하고 서로 위로하며 사랑하는 것도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는 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품는 사람은 예수님을 가슴에 품는 사람과도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속에 예수님이 바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언젠가 우리가 가는 본향에서도 예수님을 잘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예수님은 그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에게 잘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럼 나중에 예수님을 많이 만난 사람은 예수님도 우리를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당연할 겁니다. 우리도 많이 만나고 하면 누군가를 잘 기억하듯이 예수님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결국은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는 사람은 다른 표현을 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잘 질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십자가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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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유혹의 함정
주님의 기도에 보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유혹의 특징이 있습니다. 유혹은 덫과 같습니다. 토끼와 같은 짐승이나 다른 작은 짐승을 잡기 위해 덫을 설치하는 모습을 보면 주변 환경을 최대한 위장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쉽게 덫에 잘 걸리게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로 유인하는 유혹에 잘 빠지는 경우가 있을 때 그 과정을 유심히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모든 유혹이 갖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치 그 유혹으로 인해 치르야할 대가를 잊게 하는 달콤한 마약 같은 게 있습니다. 바로 순간적인 쾌락입니다. 이 쾌락은 아주 짧습니다. 이 짧은 순간의 쾌락을 생각하면 그만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절치부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지만 그런 노력도 어떤 경우는 허사일 때도 있습니다. 노력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유혹을 잘 넘기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힘만큼 유혹이 당기는 힘 또한 반발력이 상호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마찰력과 같은 힘입니다. 저도 나약한 인간인지라 수도 없이 천주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죄의 유혹에 넘어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때로는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나면 자책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만 참고 인내했으면 됐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죄를 짓고 나면 바로 생각나는 게 고해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근데 어쩌겠습니까? 제가 유혹에 빠진 대가를 치르야 하기 때문에 가야 하는 곳입니다. 수많은 고민 끝에 우연히 알게 된 저만의 비법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느 정도 효험이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이걸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약간 아이러니한 내용이 있습니다.
유혹을 자연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어떤 의지를 통해서 저지를 하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그런 상태처럼 생각을 유연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유혹에 자발적으로 빠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유혹에 넘어갔을 때 항상 생각해야 할 게 있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마음속에서 강한 거부감 같은 걸 가지는 그 상황에서 유혹에 그만 넘어가 죄에 빠졌을 때 그때 허탈한 감정 이 두 느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잘 캐치하는 게 관건입니다. 이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잘 캐치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결과는 이런 걸 인식해야 합니다. 유혹에 빠져 넘어가 죄를 지었지만 실제 보면 그걸 이기지 못할 만큼 큰 유혹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역설적인데요 이걸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물론 의도적으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력하다 노력하다 안 됐을 경우를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유혹에 왜 빠지는지 그 함정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걸 알게 되면 유혹에 빠지게 하려고 어떻게 유혹이라는 놈이 유혹을 하게 되도 잘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서 외연을 확장하면 이런 결론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곳에서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더러움 속에 있어도 악에 물들기 쉬운 곳에 있어도 그 속에서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해 얻은 결실이 더 거룩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세상 의학이론인 면역학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의학적인 이론으로도 상당히 설득력 있는 내용입니다. 이게 신앙에도 적용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도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됐을 때 그 유혹이 주는 쾌락 때문에 유혹에 잘 이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 유혹의 쾌락도 정말 생각을 잘 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쾌락인데 그만 그 쾌락이 주는 순간 달콤한 유혹 때문에 영혼이 병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은 평생 싸워야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이겼다고 해서 완전히 이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또 다른 모습으로 얼마든지 다른 포장을 해서 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유혹에 이기는 저항력을 길러야 하고 면역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의 유혹에 빠져도 실망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면역력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나중에는 그 어떤 유혹에도 이길 수 있는 강한 영혼을 가지겠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걸 원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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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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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35 추가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마태 17,1-9).”
1)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히브 1,1-4).”
사도들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한 일은, 승천 후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체험한 일이고, 예수님이 지니신 ‘하느님 영광의 광채’를 ‘미리’ 체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 전에 미리 그것을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사도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의 ‘희망’이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 확실한 희망이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고, 예수님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인데, 제자들의 체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희망과 믿음을 우리에게 주는 증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그 희망이 있으니까 믿는 것이고, 사랑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희망이 없으면 믿어야 할 이유가 없고, 동시에 사랑도 힘을 잃게 됩니다.
2)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모든 신앙인의 희망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말은, 최후의 만찬 후에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에 연결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제자들이 체험한 일은, 예수님의 이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미리 체험한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다.’입니다.
‘영광을 보다.’는, ‘영광에 참여하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최고로 행복한’, 또는 ‘정말로 황홀한’ 생활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3)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중단시키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의 소망 자체는 훌륭한 것이지만,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말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하느님의 공식 선언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인들이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영광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행복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쪽의 인생과 저쪽의 인생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쪽에서 아무렇게나 막 살던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도 없습니다.>
9절의 ‘침묵 명령’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을 갖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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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카푸친작은형제회 – 형제들의 뜰 – 복음묵상나눔. 260301. ----- 13:55 추가
[가해 사순 제2주일]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카푸친작은형제회 | 한규호 안드레아 형제 (OFM.Cap)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복음서에 쓰인 위치로 보나 그 내용으로 보나 매우 뚜렷한 의도를 지니고 기록된 사건입니다. 먼저, 이 사건을 복음서 앞뒤 흐름과 함께 읽으면 바로 이전에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와 이를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편, 변모 사건 뒤에는 예수님께서 아이로부터 더러운 영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을 탓하는 장면과 두 번째 수난 예고가 이어집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제자들의 부족한 신앙 한가운데서, 그리고 임박하게 다가오는 그분 수난과 부활의 예고로 어우러지는 긴장 속에서 일어납니다.
본문 내용을 보면 복음서 저자의 의도는 더욱 분명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변모 사건이 하나의 단순한 시각적 장면으로 다가오지만, 유대인이었을 당시 독자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상징들을 즉각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마치 한국인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을 들으면 금방 우리나라를 금방 떠올리듯, 유대인들의 종교 문화에서 본문에 나타나는 높은 산, 빛나는 얼굴과 옷, 그들을 덮는 구름 등은 탈출기의 시나이 계약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들입니다. 즉, 저자는 이스라엘을 해방으로 이끌고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계약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모세처럼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새 계약의 구세주이시며,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율법과 예언서, 곧 성서 전체가 가리키는 메시아임을 보증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자들과 더불어 그들과 함께 복음서를 따라 읽어가는 우리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 이는 특히 장차 일어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신앙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변모’는 예수님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람은 변합니다. 나 자신만 봐도 예전보다 더 성숙해진 부분도 있는 반면에 순수했던 첫 마음을 잃거나 더 완고해진 자리도 많습니다. 이런 변화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속성이고, 또 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은 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변해갑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발 빠르게 변화해야 살아남는다고 말하지만, 되려 변하지 않는 것이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훨씬 가치 있고 중심되는 가치로 자리합니다. 김구 선생은 이를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이라 했습니다. 변치 않는 하나의 원칙으로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하고, 만변에 응하면서도 불변의 원칙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지만, 복음서가 드러내는 그분의 신성은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느님이셨던 그분의 본질입니다. 임금이 잠시 평복을 하고서 밖에 나간다 해도 그가 임금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듯이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든, 십자가를 지시든 당신이 하느님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눈에만 그분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고 나자렛 사람 예수로 보일 뿐입니다.
사순 시기의 결심이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은 아침저녁으로 변합니다. 어떤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나 신앙이 뜨겁게 타오를 때는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이 저절로 솟아납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 안 풀려 절망 속에 기가 꺾이거나 도무지 하느님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의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이처럼 날씨가 맑았다가 먹구름이 몰려오고 쉴새 없이 비가 내리다가도 다시 해가 뜨는 게 우리네 삶이지만, 구름에 가려져 있다고 해서 해가 없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밤이 되고 겨울이 온다 해도 태양이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언젠가는 날이 밝고 봄이 오듯이, 우리가 아무리 실패하고 어둠 속에 시련을 겪는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늘 같은 자리에 계시는 한 우리가 희망을 잃을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했던 베드로는 이내 곧 그분을 모른다고 배신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회개할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가 돌아갈 자리, 변함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모되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은 하나의 여정이며, 이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계약에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겪어야만 했던 무수한 실패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우리는 마침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변화’는 내가 특별해지거나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십자가와 무수한 넘어짐 속에서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되돌아가는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배반할 베드로를 위해 미리 기도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앞서 용서하셨습니다. 이처럼 이미 주어진 용서를 향해, 이미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죄와 나약함을 알고도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을 향해, 이제는 우리가 돌아설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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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1. 사순 제2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3:40 추가
마태 17,1-9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고, 아름다운 장소를 보면 거기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구원’이 바로 그런 대상이지요. 그러나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노력과 희생 없이 너무 쉽게 얻으려고 들면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부분에만 집착하다 길을 잃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당신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 영원히 머무르며 참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탐욕과 재물로 세상에 부실하게 지은 초막을 헐어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나야 합니다. 수고와 땀, 희생과 정성이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참된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독되는 성경 말씀은 우리가 걷는 신앙의 길이 ‘어떤’ 길이며, ‘어떻게’ 가야 하는 길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먼저 제1독서인 창세기에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우르’라는 번성한 도시에 자리를 잡고 친족들과 함께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던 그에게 하느님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당신이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지요. 아브람은 모든 것이 넉넉하게 갖춰진 편안하고 안정된 상황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너무나 어려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하느님의 명령에 매우 단순하도도 명확하게 반응합니다. 준비할 시간을 달라고 지체하거나, 왜 거기로 가야 하느냐고 이유를 묻지 않고 즉시 하느님께서 이르신 대로 따른 것이지요. 그런 그의 순명을 통해 아브람을 큰 민족이 되게 하고 그에게 복을 내리며 그의 이름을 널리 떨치게 하시려는, 그렇게 당신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따로 데리고 길을 떠나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모습이 거룩하게 변하신 채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모세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선구자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돌아가게 한 예언자입니다.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신다는 것은 예수님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영광스럽게 변모한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분께서 겪으시게 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결국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희망을 보여주시지요. 우리가 당신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거룩함에만 집착합니다. 그는 그전에도 이미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거부했던 적이 있지요. 좋은 결과는 얻으려고 하면서 과정은 생략하려고, 주님을 등에 업고 영광은 누리려고 하면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지는 않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상황에 안주하려고 듭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기들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는지,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당장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만 취하려고 드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주님과 온전히 일치될 수도, 그분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십니다. 애초에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이유가 그들을 힘들고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시키신 게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고 당신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셔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같은 것을 바라십니다. 전례가 주는 거룩하고 좋은 느낌에만 머무르려고 하지 말고, 내가 주님을 만나 느낀 그 기쁨을, 내가 신앙생활을 하며 발견한 그 희망을 행동과 삶으로 온 세상에 드러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으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자녀로 변화해가는 ‘변모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그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빛나는 구름 속에서 들려왔던 이 가르침을 통해서 말이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신원을 분명히 확인해주시면서,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당신 뜻에 순명하면 우리 또한 당신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단,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건 그저 귀로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지요. 자녀가 부모의 말을 행동으로 따라야 비로소 부모님 말씀을 제대로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그 말씀을 제대로 들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제대로 들은 그 말씀이 우리를 하느님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에 담긴 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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