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8군무대,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다】
주한 미8군무대에 관한 많은 전설 중에는 잘못 알려진 내용들도 꽤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당시 8군무대에서 활동했던 연예인들의 수입 총액이 대한민국 수출액과 비슷했다는 이야기인데, 방송에서도 제가 몇 번 들은 적 있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자료들에도 거의 대부분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심지어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간한 K-Pop 관련 책자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터무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주한 미8군무대의 최전성기가 1963~1964년인데 이때 출연 연예인 수입의 총합이 120만 달러 정도였고 대한민국의 수출액이 처음 1억 달러를 돌파했던 해가 1964년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들을 사실 확인도 안하고 너도나도 복사, 갖다 붙이기를 해서 일어나는 부작용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군부대 주위에 형성된 기지촌에는 미군들이 일과가 끝나면 드나들던 클럽이 있었는데,그때그때 수요에따라 연주하는 밴드들이 이곳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특정 클럽에 전속된 하우스 밴드가 아니었다)
동두천,파주의 장파리,왜관 등이 대표적인 기지촌들이었고,
그중에서 서울의 이태원은 가장 물 좋은 마이너리그 무대였다.
특히 이태원의 로포클럽이란 곳은 전국에서 제일 큰 사병 클럽으로,미국의 도시 출신의 '놀 줄 아는'멋쟁이 사병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가장 최신곡으로 승부해야 했다.
미8군 무대는 1963~1964년이 전성기였다.
1966년 베트남 파병으로 미군이 빠져나가면서 국내 무대는 쇠퇴하고 연예인들도 베트남으로 진출했다.
미8군 무대는 일반인들이 거의 접할 수 없었던 폐쇄적인 장소였지만,여기에서 음악을 연마한 한국의 음악인들이 훗날 그 성과를 일반 무대에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대중음악은 판도가 뒤바뀌게 된다. 1961년 KBS TV와 민영방송 MBC라디오가 개국하면서 생겨난 방송 무대에 미8군 쇼 출신 음악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대중들은 그전까지 제한적으로 접하던 미국 스타일의 대중음악을 한국의 음악인들이 자체적으로 소화한 형태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미국 대중음악 스타일이 반영된 새로운 대중음악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노래는 최희준과 패티김으로 대표되는 스탠다드팝 스타일이 새롭고 세련된 노래로 각광받았고,춤으로는 트위스트가 무대를 점령했으며, 재즈음악에 탐닉하는 마니아들도 있었다.
젊은이들은 록음악이라는 어른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충격적인 음악에 빠져들었다.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는 기존의 트로트.신민요라는 전통 스타일과 스탠다드팝이라는 미국 스타일의 대중음악이 공존하면서 발전했다.
한국의 대중음악인들은 트로트와 신민요를 제외한 모든 장르의 어법을 미8군 무대를 통해 배우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미8군 무대는 해방 이후 거의 모든 한국 대중음악의 요람 구실을 하게 되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2차 대전 이후 미군 기지가 설치된 대만,필리핀,일본 등의 나라에서 미국 대중문화가 토착 문화를 밀어내고 우위를 점하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미8군무대 오디션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