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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다(1)
출 4:18-31
18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27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28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출 4:18-31 /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가서 말하였다. `애굽에 있는 내 피붙이에게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드로는 모세에게 걱정 말고 잘 다녀오라고 말하였다.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어서 애굽으로 돌아가거라. 너를 죽이려고 찾던 자들이 다 죽었다.' 20) 그래서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났다. 그의 손에는 하나님께서 들고 다니라고 말씀하셨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바로 앞에서 온갖 이적을 다 보여라. 내가 너에게 이적을 보일 능력을 주지 않았느냐? 하지만 네가 그렇게 이적을 보인다 해도 바로가 내 백성을 순순히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의 마음을 굳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2) 그때 너는 바로에게 일러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23) 내 아들을 풀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고 내가 분명히 네게 일렀건만 네가 풀어 주지 않으니 내가 네 맏아들을 죽여 버리리라.' 24) [모세의 아들이 할례받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하룻 밤을 묵으려고 하였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죽이려고 하셨다. 25) 그래서 십보라가 얼른 날카로운 차돌을 집어 들고 그것으로 자기 아들의 음경 끝 포피를 베어내서는 모세의 발에 갖다 대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참으로 나와 피로 맺어진 남편이에요.' 26)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 주셨다. 십보라가 `피로 맺어진 남편'이라 한 말은 할례를 가리킨 것이었다. 27) [모세와 아론이 겨레 앞에 서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셨다. `빈들에 가서 모세를 맞이하여라.' 그래서 아론은 하나님의 산으로 가서 모세를 만나 입맞추어 인사하였다. 28) 모세가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아론에게 이야기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이야기와 이러저러한 이적도 보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아론에게 자세히 말하였다. 29) 모세와 아론은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3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아론이 그대로 전달하고 모세가 백성 앞에서 이적을 보이자 31) 백성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아보시고 말할 수 없이 고난당하고 있는 모습도 일일이 다 살펴보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숙여 경배하였다.
모세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가던 중에 할례를 행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아론을 만나 그와 함께 애굽으로 갑니다.
나로 가게 하소서(18-20) 모세는 장인 이드로를 찾아가 애굽에 있는 동족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남자는 국력과 생산력의 중요한 요인이었기에 그 지역을 떠날 때 족장의 허락이 필요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가 이드로의 허락을 받고 떠나려 할 때 애굽에서 그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려 주셨으며, 모세는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애굽을 향해 떠납니다.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21-23)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하라고 하면서도, 그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바로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며 장자인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보내주도록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만약에 거절하면 바로의 아들, 장자가 죽을 것이라는 말도 하라고 하였습니다. 장자의 죽음에 대한 말씀은 후에 성취되었습니다(출 12:29).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24-26) 모세와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가다가 대상들이 이용하던 한 숙소에 머물렀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이때 그의 아내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할례를 행하고, 그 아들의 포피를 모세의 발 앞에 두었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주셨습니다. 여기서 ‘놓아주다’라는 말은 ‘치료하다’(라파)라는 뜻입니다. 또한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끝부분의 표피를 자르는 의식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으로서, 모세가 죽음의 위기를 겪은 것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27-31)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맞으라고 하셨으며 이에 그들이 만나 서로 입을 맞추며,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하신 모든 말씀과 이적들을 아론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애굽에 내려간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 앞에서 이적을 행하였고,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믿었으며 여호와께 머리를 숙여 경배하였습니다.
적용: 모세는 애굽으로 가던 중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때 십보라의 지혜로운 대처로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구하고, 주께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합시다.
삶의 요소들은 바뀌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이것들과 우리의 관계다. - 몰리바스-
모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어 갈 수 있을 만큼 성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모든 상황과 신앙 성숙이 한순간에 변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자라남의 과정이 필요하고, 자라남의 과정마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지팡이
출 4:17-20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지팡이”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지팡이”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제게 가장 강하게 다가왔던 뉴스는 국회의원 선거 소식이 아닌, 바로 챨톤 헤스턴이 별세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제 얼굴 중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게 있죠? 어디입니까? 바로 코 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제 코가 챨톤 헤스턴 코를 닮았다고 말했답니다. 어디, 그래 보입니까? 제 코가 더 낳죠? 죄송합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저는 외국 영화배우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챨톤 헤스턴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중학생 때 아버지와 함께 대한극장에 가서 ‘십계’라는 영화를 봤을 때의 그 감격을 잊지를 못합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그 장면은 어린 제게는 커다란 전율로 다가왔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영화에서 홍해바다를 가를 바로 그 때에 모세는 커다란 지팡이를 사용했었습니다. 제겐 그 지팡이가 얼마나 대단해 보이던지...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이 지팡이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는 어느 날 호렙산 기슭을 지나다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놀랍게도 타지 아니하는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구경하러 갔다가 불꽃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명령을 받은 모세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라고 대답했고,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지팡이를 던졌는데 놀랍게도 뱀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그 꼬리를 다시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두려움 속에서도 뱀의 꼬리를 다시 잡는 순간, 뱀은 다시금 지팡이로 변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또한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과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두려워하고 낙심하기까지 합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모세처럼 ‘못합니다.’ ‘안됩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늘 지니고 있었던 지팡이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모세처럼 우리가 평소에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지팡이를 통해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며 삶을 개척하고 승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이러한 요지로 말씀을 증거 할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 감화시켜 주사 모세처럼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째로, 내 손에 있으면 그냥 지팡이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내 손에 있으면 그냥 지팡이입니다.” 다같이 2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40여 년 간 모세가 의지하고 사용했던 지팡이는 그냥 평범한 지팡이였습니다. 양을 치기 위해 양들을 인도하고, 양들을 공격하는 짐승들을 쫓아내는데 사용했으며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데 사용했던 평범한 지팡이였고 모세의 손때가 묻어있는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가지고 쓸 수 있는 것이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질문에 단순히 지팡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이루고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손에서 시작한다면 그것은 평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벨탑이 최초로 인간의 위대한 토목공사요 대단한 작품이지만, 그것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기에 오히려 사람들을 혼잡 시키는 실패의 도구밖에는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골리앗이 들고 있는 대단한 창은 아무나 들 수 없는 무기였고, 또한 그 무기가 사람을 치는데 사용될 때에는 아무도 이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무기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골리앗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에 다윗의 손에 들린 작은 물매 돌을 결단코 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손에는 과연 무엇이 들려있습니까?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그것이 무슨 목적으로 쓰여 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것이요 내 목적으로 쓰여 지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평범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냥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담긴 평범한 작은 도시락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으로 시작되고 사람에 의해서 추진되는 일들은 놀라운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으셔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의 지팡이를 하나님께서 땅에 던지라고 하신 뜻과 교훈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져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 일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분별할 줄 아는 영적분별력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손에 잡히면 기적의 지팡이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 손에 잡히면 기적의 지팡이입니다.” 다같이 17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
여러분? 이 지팡이는 이제 단순한 지팡이가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므로 이제 이 지팡이는 하나님 손에 잡힌 기적의 지팡이요, 능력을 발하는 이적의 지팡이, 사탄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뀌는 순간,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후로 모세가 든 지팡이를 모세의 지팡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팡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기에 그 지팡이를 들었을 때에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반석을 쳤을 때에 샘이 솟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이끌어 내는 기적의 지팡이가 되었으며 그 지팡이를 들고 기도할 때에 아말렉 군대가 격파되는 승리의 지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부터는 여러분이 소유한 모든 것 즉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생활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내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잡혀진 하나님의 것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은 전에는 살인자요 광포자요 남을 괴롭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능자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힌바 되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요, 전도자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하는 자, 감사하는 자, 주의 사역을 완성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남은 빵이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손에 잡히자, 한 끼 식사가 아닌 3년 동안 기근을 해결하는 축복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또한,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하인의 손에 있던 물이 예수님의 말씀에 사로 잡히자 가장 좋은 포도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손에 있는 다섯 개의 보리떡이 예수님의 손에 잡히자 오천 명이 먹는 기적의 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몸과 마음, 물질과 시간을 우리 주님께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이 드린 것이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단순한 결과가 아닌, 놀라우신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진 하나님의 지팡이! 여러분? 그 지팡이는 모세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잡혀진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지팡이를 통해 출애굽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기적의 지팡이가 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은 물론이요,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 손에 온전히 붙잡힌바 되기를 소망하는 주의 택한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입니다.” 다같이 20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모세의 삶은 허무한 인생에서 영원한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마른 풀과 같아서 바람이 한 번 불면 그 있었던 흔적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사실 사람이 죽어 백 년만 지나면, 그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가 과거에 그 곳에 살았던 것을 기억해주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벚꽃이 피어 그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어서 얼마나 보기에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아름다운 벚꽃도 소나기라도 한 차례 떨어지고 나면 힘없이 떨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이처럼 실로 우리 인생도 허무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무상’ 사실 역사에서 사라져 간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 다 마른 풀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지고야 말았습니다.
5백 년 전, 1천 년 전에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게 살았어도, 우리는 지금, 그들의 삶과 이름과 업적을, 거의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세는 다릅니다. 3천 4백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여비를 들여서라도 애굽과 시내광야에 가서 모세의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읽으며 모세의 삶을 본받으려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인생만큼은 들풀처럼, 바람에 날려 허무하게 흩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모세처럼 허무한 인생을 결코 허무하지 않게 살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시편 103편 15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은 정말이지 들풀에 불과하지만, 그 미천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정 영원한 생명, 영원한 의미, 영원한 가치를 지니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할 절대적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그 분의 말씀 또한 영원하므로 그 영원한 말씀을 지키고 사는 우리들의 삶 역시 영원해 질 줄로 믿습니다. 결단코 들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왜입니까? 모세가 바로 그런 삶의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의 손에는 언제나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설교 모두에 잠깐 보여드렸던 동영상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찰톤 헤스턴이 주연했던 영화 ‘십계’를 보면, 모세의 손에는, 언제든지 그의 키만큼이나 크고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하는 기다란 지팡이가 쥐어져있습니다.
온갖 기적을 행할 지팡이라면, 영화에서처럼, 그 정도로는 신비하게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 터키 이스탄불의 박물관에 가면, 모세가 사용했던 지팡이,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쳤던 칼, 세례 요한의 유물(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 이스탄불은 1453년까지 1천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동방교회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임을 감안하면, 그 유물들이 거기에 있을 법도 합니다. 그 박물관에서 소장되어있는 지팡이가 꼭 진짜가 아니더라도, 모세 시대의 목동들이 사용했던 지팡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사진 게시)
그렇습니다. 그 곳에 전시된 지팡이의 모습은 제겐 너무나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길이는 약 1미터, 굵기도 영화처럼 굵거나 멋있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지팡이라기보다는, 막대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지냈던 미디안 광야를 오늘날 실제로 찾아가 보면 그곳에는 찰턴 헤스턴의 지팡이를 만들 만한 굵기의 나무가 전혀 없습니다. 황량한 광야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광야에서 주운 나무막대기로 만든 지팡이는, 보기에 굵고 거창한 그런 지팡이가 전혀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광야를 지나가던 중 갑자기 버스가 광야 한 복판에 멈추어 섰습니다. 알고 봤더니 목자들이 광야에서 양떼들에게 풀을 먹이고 있으므로, 한 번 내려서 살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자가 풀을 먹이는 장면을 연상할 때 우리는 종종 시편 23편 말씀을 떠올립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런데 제가 목도한 모습은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황량한 벌판에 듬성듬성 풀이 자라고 있었으며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쓴 누리끼리한 양들이 보기에도 너무 초라하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제 마음을 안타깝게 했던 것은 목자들이 들고 있었던 지팡이였습니다. 상상 속에서 보던 그런 지팡이가 아닌 별 볼일 없는 짜리몽땅한 1미터 남짓 되는 평범한 막대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지팡이’(히브리어 맛태) 또한 본래 ‘가지, 막대기’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스탄불의 박물관에 있는 가늘고 짧은 모세의 지팡이(막대기)가 찰턴 헤스턴의 영화에 나오는 지팡이보다는 사실에 더 가깝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옛날 모세 역시, 지팡이가 아닌 막대기를 들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볼품없는 막대기로 기적을 행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 또한 매우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은, 왜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만나가 비처럼 쏟아지게 하는 그 극적인 기적을, 그 볼품없는 막대기로 행하도록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그 볼품없는 마른막대기가 모세가 가진 유일한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처가살이를 해 온 모세는 자기 재산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가 치는 양도, 집도 모두 장인소유였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그저 모세가 지나다니다가 광야에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는 그 나뭇가지를 꺾어서 다듬어 만든 정말이지 볼품없는 막대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막대기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막대기는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그 막대기는 다름 아닌 모세 자신을 의미했습니다.
그가 애굽 왕궁에서 배운 모든 지식과 학문이 처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자기를 내려놓고, 깨어진 후에, 스스로 마른 막대기처럼 되었을 때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20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서 행동하는 순간부터 성경은,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순종하는 순간부터 그 마른막대기 같던 모세 자신이 하나님의 지팡이로 격상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잠시 잠깐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애굽에 도착한 모세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80세 노인이, 초라한 빈털터리 몰골을 한 채로, 손에는 마른막대기 한 개 달랑 들고 서 있습니다. 한 민족을 해방시키는 해방자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몰골은, 보기에 민망함을 뛰어 넘어서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초라한 몰골의 노인이, 별볼일 없는 마른막대기로 나일 강을 쳤을 때에 나일 강은 피로 변했습니다. 그 볼품없는 마른막대기를 내밀었을 때에, 폭 32km의 홍해 바다가 쫘악 갈라졌습니다. 그 마른막대기로 반석을 쳤을 때에 생수가 강물처럼 솟아났습니다.
여러분? 마른 막대기에서 과연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그 막대기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모세처럼 마른막대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아니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우리가 지닌 것이 비록 마른막대기 하나 밖에 없다 할지라도, 지금 우리가 비록 모세처럼 마른막대기 만도 못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놀라운 능력의 도구, ‘하나님의 지팡이’ 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마른막대기가 상징하는 것은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이, 그 마른막대기처럼, 전혀 쓸모없는 존재였습니다. 광야 귀퉁이 어디에서나 발견되어지는 흔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른막대기와 같던 모세가 자신의 여생을, 자신의 중심을, 자신의 온몸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에,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 마른막대기를 들어 쓰시고, 하나님 구원의 새 역사를 그 막대기를 통해서 이 땅에 펼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능력있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3천4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의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모세를 영원한 지도자로 따르며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에게 무엇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세상의 것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볼품없는 마른막대기와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내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그 마른막대기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머리의 지식으로 기적을 행하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입의 말로 기적을 행하라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네 손에 들려있는 양치기용 지팡이로 기적을 행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모세가 그 지팡이를 사용할 때마다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모세의 마른 막대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회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탄만 하고서, 내게 지금 없는 것만을 주십사고 주님께 갈구했던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지금 있는 것이 마른막대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감사치 못하고, 내게 지금 없는 것만 바라보고 불평했던 우리들의 무지와 세상적 가치관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그런 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지닌 것이 비록 볼품없는 마른막대기 하나라 할지라도 그 막대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눈이 보이면... 하나님께 드리고, 귀가 들리면... 하나님께 드리고, 손발이 움직이면... 하나님께 드리고, 사지백체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마른막대기와 같은 내 삶을 통해서 이 시대를 위한 당신 구원의 기사와 표적이 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나를 하나님의 지팡이로 받아 주옵소서!’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모세의 이 기도 소리가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원기도가 되어 하나님의 지팡이로 온전히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습니다.’ ‘나는 진정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이렇게 당당히 외치며 세상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언약의 표시
츌 4:18-31 / 이동휘 목사
1. B.C.1530 년경, 당대 최고의 강대국 애굽의 왕자로 군림했던 모세가 동족 히브리인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모래밭에 파묻은 사건이 폭로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피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미디안의 목자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어 약 40년간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나이 80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소명의 말씀입니다.
(출3:1-10)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렇게 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능력과 권능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애굽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출4:16-17)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모세는 애굽으로 떠나기 앞서 장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출4:18)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애굽에서 도피한 지난 40년 동안, 자신이 애굽 사람을 죽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일가족이 몰살당했을 수 있었고, 수많은 동족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예감 등으로 인해 모세는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 동족들과 고난을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탈북자들 가운데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내부의 비밀을 처음 공개했고, 그것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대한민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기여를 했다.’는 면에서 대한민국을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보훈증서를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훈장을 받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동유럽 유학생들, 외교관이나 체육인, 공작원 출신들 그리고 정치범 출신들이 탈북내지는 망명하자 그 성분 좋고 머리 좋은 청년들이 목숨 걸고 대한민국으로 갔다는 자체가 큰 충격이었고 그로 인해 북한 엘리트층의 동요는 아주 심각했다고 합니다. 외교관 ‘1호’로 망명한 고영환씨는 처음으로 김정일의 ‘기쁨조’ 실태를 폭로하면서 김정일 체제를 흔들었고, 유도 영웅 김창수씨도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는 북한의 스포츠 실태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습니다. 정치범수용소 출신인 안혁씨도 베일에 감춰진 정치범수용소를 전 세계에 알렸고 이 역시 북한 내부는 물론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충격이 컸던 만큼 북한에 남은 가족들은 처절한 보복을 당했습니다. 인민군 총정치국 고위 간부였던 유학생 조승군씨의 부친은 자살했고 가족은 모두 수용소로 추방당했습니다. 고영환씨의 가족은 연로한 부모들까지 모두 요덕수용소에 끌려갔고, 수용소를 폭로한 안혁씨의 가족은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다른 가족들도 모두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은 이런 가족들 때문에 평생 죄인의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인민을 수없이 굶겨 죽이고 정치범수용소에서 수십만명을 학살한 김정일 정권에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처절하게 싸운 사람이 있다면 바로 황장엽씨였습니다. 그의 직계 친척 150명이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고 1500여명의 지인이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추방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세 역시 자신의 애굽인 살해 사건과 도피로 인해 자신의 친척들과 동족들의 안위(安危)가 극히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40년 전 당시 자신의 사건으로 인해 고난당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과연 살아 있는지 여부를 알고자 애굽에 가려고 했을 때 그의 장인 이드로는 단지 모세가 골육지친에 대한 정(情)을 잊지 못하여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고있다고 생각하여 평안히 가라며 인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4:19)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애굽으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지만, 그리고 정작 장인에게 작별 인사를 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떨칠 수는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는 말씀으로 그를 안심시키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독려하신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습니다. 양을 치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불리우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러 왔다고 말할 때 만일 그들이 나를 믿지 않으며 내 말도 듣지 않고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입니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땅이 던져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것을 땅에 던졌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 앞에서 피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저 뱀의 꼬리를 잡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손을 내밀어 그 뱀을 잡으니 다시 그것이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에게 나타난 사실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니라.”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손을 품이 넣었다가 꺼내 보니 그 손이 문둥병에 걸려 눈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 보니 손이 전과 같이 정상대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처음 기적에 관심을 갖지 않을지라도 두 번째 기적은 믿을 것이니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이것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니라.’(출4:1-8, 17) 모세가 애굽에 가기를 두려워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 ‘지팡이’와 자신의 ‘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팡이’로 부르며 그 지팡이를 손에 잡은 것입니다. 본래 모세가 양떼를 치던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해서 애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처자식들을 나귀에 태우고 떠나는데, 손에는 단지 양을 치던 그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만을 잡았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하나님의 지팡이’만을 가지고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민족의 해방을 가로막는 애굽 왕 바로의 모든 세력은 그 지팡이 앞에 굴복되어질 것’을 예견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팡이’만을 손에 잡고 애굽으로 출발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네가 애굽에 돌아가면 내가 너에게 보여 준 기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할 것이니 그가 백성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니라. 그때 너는 바로에게 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일러 주어라. 이스라엘은 내 맏아들이니라.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놓아 주어 그가 나를 섬길 수 있게 하라고 했는데도 너는 거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 맏아들을 죽이겠노라.”(출4:21-23)
2.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한 지도자로 세워 모든 것을 준비하게 하여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식솔들을 거느리고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십보라가 재빨리 날카로운 돌을 주워 자기 아들의 포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참으로 당신은 나에게 피의 남편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살려 주셨는데 그때 십보라가 ‘피의 남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할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기 위해 지도자로 모세를 세우시고 모든 것을 준비하게 하여 애굽으로 출발하게 하시고 무슨 이유로 모세를 죽이려 하셨겠습니까? 이유는 모세가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고 맺은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창12:1-3)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는 말씀으로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이 100세가 다 되도록 자식이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17:4-8)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다음과 같은 언약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17:9-14입니다.
(창17:9-14)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을 ‘할례받은 민족’이라 부르며 이방인들과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1) 첫째로 ‘할례’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the sign of the covenant)입니다. 누구든지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대로 그 언약의 자손이 되어 언약에 포함된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갈3:6-9) 그러므로 할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의 표시입니다. 2) 둘째로 할례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순종할 것을 표시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3) 셋째로 할례는 언약을 맺은 백성과 언약을 받지 못한 이방사람을 구별하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훗날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17:26)...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할례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영원히 기억해서 지켜야 할 표시입니다.(엡1:3-6) 더 나아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택된 백성임을 영원히 기억해서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할례받은 백성은 이방 사람과 구별되어 성결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언약을 배반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과 무관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가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세운 지도자일지라도 그를 죽이려 하시자 그의 아내 십보라가 재빨리 그 뜻을 깨닫고 날카로운 돌칼로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 때 할례를 받은 아들은 둘째 아들 엘리에셀인데 애굽으로 가는 여행 중 낳은 아들로 생후 8일이 지났음에도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여행 중이라는 생각에 할례 의식을 잠시 소흘히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나서기 전에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하나님과의 언약,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십보라는 아들들을 데리고 미디안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고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모세가 그의 처와 더불어 두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던 중 아들의 할례 문제로 인해 하나님에 의해 죽을 뻔한 위험을 당하자(출4:24-26), 다시 그들을 장인 이드로에게 보낸 것입니다. 즉 자신의 생명에 대한 위험을 당한 모세는 그의 처와 아들들의 생명마저 염려한 나머지 그들을 안전한 처가로 되돌려 보내었던 것입니다.
(출18:1-4)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으니라.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3.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렇게 육체적인 할례를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할례 의식을 행하게 하신 그 참뜻을 깨닫지 못하고 할례 행위 자체로서 아브라함의 특권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점차 할례의 의미가 타락하게 되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할례의 참뜻을 따라 살라는 경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10:12-16입니다.
(신10:12-16)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아무리 육체적인 할례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지 아니하면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육체적인 할례에 그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진정한 할례받은 민족,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음의 가죽을 베라’는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경고했습니다. 예레미야4:3-4입니다.
(렘4:3-4)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형식적으로 회개하지 말고 ‘묵은 땅을 갈아 엎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에 파종하듯’, 우상숭배와 온갖 부정부패 등 악행을 회개와 순종이라는 쟁기로 갈아서 완전히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는’ 진정한 할례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한 육체적인 할례 의식만으로는 언약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육체적인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그 마음과 생활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으며 언약의 축복에서 제외될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4.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시인 ‘할례’가 그 의미가 변질되고 타락하게 되었을 때, 율법을 완성하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육체적 할례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고 할례의 참된 의미와 축복을 ‘세례’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구약의 할례에 대해 이렇게 그 참된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할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보내신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롬2:25-29)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축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15:5)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창15: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러므로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는 또한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만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가졌던 믿음, 하나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롬4:9-13)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3:6-9을 보겠습니다.
(갈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신은 비록 유대인으로서 육체적인 할례를 받았지만 그 보다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할례를 두고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했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골로새서2:11-12입니다.
(골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사셨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침례)식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하여 예수와 함께 자신을 물속에 장사지내는 것을, 물에서 나오는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해 옛 사람은 물속에 장사되었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예수와 함께 새 사람이 되어 다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옛 사람, 죄인은 세상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아났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죄인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탄이 소유를 주장할 수 없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예수 믿는 여러분을 예수 십자가의 피값주고 산 것이라고 말합니다.(롬6:3-5)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5. 예수 믿고 세례받으심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녀되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 믿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할례받은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지라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행함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습니다.(약2:19,26) 성도 여러분의 할례, 세례가 효력을 나타내어 약속받은 언약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행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고전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사도 바울이 성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성도 여러분의 세례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옛 사람의 생활을 갈아엎으시고,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고 날마다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팡이를 잡으라
출애굽기 4:18-20, 히브리서 9:3-5 / 이성희 목사
영국의 작가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는 뉴에이지 소설이라는 비난도 듣지만 아이들에게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하는 요술입니다. ‘해리 포터’에는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상상의 동물인 유니콘 털에, 불사조 꼬리 깃털에, 용의 심장으로 만든 강력한 마법을 가진 지팡이입니다. 해리의 지팡이는 호랑가시나무와 불사조의 깃털로 된 28cm의 지팡입니다. 마법의 지팡이는 어린이 공상 소설에 반드시 등장합니다. 지팡이는 마법과 요술 등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동서양의 일반적 의식이며 전통입니다.
지팡이는 가늘고 긴 손에 지닐 수 있는 도구로서 사람의 다리 길이입니다. 지팡이는 나무, 상아 혹은 금속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지팡이의 용도는 다양합니다. 어르신들의 보장구로 집고 다니는 도구입니다. 등산용 지팡이는 산에 오르고 내릴 때 다리를 보호해 주는 도구입니다. 스키를 탈 때도 지팡이는 균형을 잡고 스키를 타고 눈 위를 내려올 때 필요한 도구입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지팡이는 길을 갈 때 필요한 도구입니다. 특히 목자에게 지팡이란 필수적인 도구로 목자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이 지팡이입니다.
시편 23:4에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합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장비이며 동시에 무기입니다. ‘지팡이’는 히브리말로 ‘미쉬에네트’로서 양들을 인도하기 위한 장비입니다. ‘막대기’는 ‘쉐베트’로서 일종의 무기이며 공격하는 맹수를 방어하는 도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팡이는 인도하는 장비로서 하나님의 방향, 의도, 예비, 지시대로 이끌기 위한 도구입니다.
‘신의 지팡이’(Rods from God)라는 가공할만한 무기가 있습니다. 1980년대에 개발하다 인공위성의 무기화 금지로 개발이 중단된 무기입니다. ‘궤도상 질량 폭격무기’로 불리는 이 무기는 텅스텐다발을 우주에 쏘아올린 다음 지정한 좌표로 이동하여 투하하는 무기입니다. 이 무기가 개발에 성공하였다면 3초 만에 핵무기와 방불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를 ‘신의 지팡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신의 지팡이라면 대량 살상할 만큼 위력 있는 힘을 의미하는 가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팡이를 그렇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동안 희귀한 혈액병으로 고생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반드시 매일 신선한 염소젖을 마셔야 했습니다. 어느 날 부족의 왕이 리빙스턴의 염소를 보고 마음에 들어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부족의 관습에 따르면 부족민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원하면 왕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왕에게 그 염소를 빼앗겼습니다. 왕은 리빙스턴의 호의에 감사하여 지팡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염소젖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이라며 탄식하였습니다. 그 때 리빙스턴의 하인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왕께서 주신 게 무언지 모르십니까? 그것은 왕의 홀로서 이 부족 내에서 원하시는 것이면 모두 주인님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징표입니다.” 지팡이는 우리 왕이신 하나님의 홀(규)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애급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애급으로 가기 싫어하는 모세를 억지로 보내십니다. 모세가 애급으로 갈 때는 손에 지팡이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도구였습니다. 우리도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꼭 잡고 가므로 지팡이를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내 지팡이는 내가 준비해야 합니다.
출애급기 4:20에는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합니다. 이 지팡이는 하나님이 만들어 모세에게 쥐어준 지팡이가 아닙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모세 스스로가 만든 것입니다.
출애급기 4:2에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지팡이는 모세가 만든 것입니다. 이 지팡이는 목자로서 모세의 전부이며 정체성입니다. 이 지팡이는 모세의 손에 들려 있던 유일한 것입니다.
지팡이는 귀하지도 비싸지도 않은 단순한 목자의 도구입니다. 지팡이란 목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도구이며, 목자는 누구나 가져야 하는 도구입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자기 키에 맞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 몸무게에 맞게 만들어야 합니다. 손에 맞게 만들어야 좋은 도구가 됩니다. 자기에게 잘 맞는 지팡이를 만들어야 승리의 도구가 됩니다.
자기 도구는 자기가 가져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은 자기가 세워야 합니다. 자기 달란트는 자기가 개발해야 합니다. 자기의 지팡이는 자기가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지팡이를 내가 쓸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팡이로 내가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태도와 습관은 상황에 따라 형성 된다고 합니다. 환경에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국 자기가 만든 것이고 자기의 책임입니다. “사람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가별 국민소득, 교육수준, 평균수명, 유아사망률 등을 종합 평가하여 발표한 순위를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인간개발지수’ 세계 26위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기개발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개발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성품의 개발입니다.
자기개발이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바르게 개발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 은혜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달란트비유’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자기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한 사람과 자기 달란트를 폐기하고 숨긴 사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맡기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사람과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사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의도는 달란트의 양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기 달란트를 잘 개발하고 활용하고 있느냐 라는 것에 주인의 관심이 있고 자기 달란트를 잘 개발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번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공자의 논어 ‘공야장편’(公冶長篇)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자에게는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자공이란 뛰어난 제자가 있었습니다. 사실은 제자 가운데 안회라는 제자가 훨씬 똑똑하지만 아는 척하지 않는 제자였습니다. 하루는 공자가 자공에게 “너는 너와 안회 중 누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자공은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공의 대답에 공자는 흐뭇해하였습니다. 머리가 좋고 똑똑한 제자가 아니라 자기개발에 열중하는 제자가 최고의 제자입니다. 자기개발은 철저하게 자기의 몫입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의 이름에 항상 처음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할 때 베드로는 항상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대답하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리더십은 예수님이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수제자라고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개발하고 자신을 세우는 자를 하나님은 쓰십니다.
나폴레옹은 5피트 2인치의 키에 코르시카라는 시골 출신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 영웅은 죽을 때조차도 “유럽 대륙을 진격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잠들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기 지팡이를 잘 만든 위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9:4에는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의 지팡이를 자신의 생명처럼 보존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생명처럼 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지팡이를 버리지 말고, 잘 간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달란트를 최대한 극대화하여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내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해야 합니다.
출애급기 4:20에는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더 이상 모세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언제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호렙산에 올라온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손에 지팡이가 있다고 하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잡은 지팡이를 던지게 하셨고 모세는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순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낮아지는 순간입니다. 흔히 말하는 모세의 ‘영점’(Ground zero)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모세입니다. 손에 마지막 하나 남은 지팡이마저 빼앗으실 때 하나님은 오히려 모세를 높이시고,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낮출 때, 하나님은 나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 있지만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린 똑같은 지팡이지만 이제는 주인이 모세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모세의 직업, 기술, 능력, 경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셨을 때에 모세의 40년 목자로서의 모든 것을 다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것을 버릴 때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십니다.
자신의 기술이나 경력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 지팡이를 버려야 하나님의 지팡이를 주십니다. 모세도 자신의 지팡이를 버렸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모세의 손에 들려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5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합니다. 잃으면 얻고, 버리면 주시고, 죽으면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세상의 진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얻어야 얻고, 버리면 없어지고, 죽으면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버리는 사람에게 주시고, 잃는 자에게 더 많이 얻게 하시고, 죽는 자를 다시 살게 하십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주님, 제가 얼마나 자주, 어느 부분에서 자신을 버려야 합니까?” “항상 매 순간마다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너 자신을 버려라.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것에서 너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몽땅 다 버려야 온전히 새로 얻습니다.
이사야의 마지막 자존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입술입니다. 입술을 버렸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고 하시며 그를 보내십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자존심을 고기잡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부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질 때에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을 하나님 앞에 던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를 새롭게 공급하십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시지만 우리 손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주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빈손을 보시면 주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내 지팡이를 아끼지 말고 던져 빈손이 되어야 하나님의 기적의 지팡이를 얻습니다.
루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업이 끝나자 시계를 던져 버리고 “이제 내 시간을 갖게 되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시계를 던져야 시간을 얻습니다.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을 버려야 가장 소중한 것을 얻습니다. 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하는 시계를 버려야 합니다. 내게 가장 소중해 보이는 것을 버려 보세요. 그러면 그 때 가장 값진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 내 삶이 온전히 들어있는 것을 버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재능과 기술과 잠재력을 다 주님 앞에 던져버리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출애급기 4:17에는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고 합니다. 모세가 던진 지팡이를 다시 잡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이적을 행하라고하십니다. 던진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이미 변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나일강 하수를 치니 모든 물이 피가 되었습니다(출7장). 이 지팡이로 강 위에 펴니 개구리가 강위로 올라와서 온 천지를 덮었습니다(출8장). 이 지팡이를 흔드니 동풍에 메뚜기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출8장). 이 지팡이로 뇌성과 우박을 만들었습니다(출9장). 이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니 이가 되었습니다(출10장). 이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물이 나왔습니다(출17장). 모세의 보잘 것 없는 지팡이가 하나님의 권능의 지팡이로 변한 것입니다.
출애급기 17:9에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된 모세의 지팡이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금도 살게 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버리지 않고 바꿀 수 없고, 죽지 않고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것을 버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주십니다. 쓸모없는 내 것을 버리면 기적을 베푸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것으로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결 론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성공을 거둔 후에 공산정권은 군대에서 계급을 폐지하였습니다. 장교들에게 사병들과 똑같이 숙소를 청소하게 하고, 사병들과 함께 줄을 서게 하고, 같은 식당에서 사병들과 함께 식사하게 하였습니다. 장교들은 장교로서의 특권은 물론 호칭까지 잃어버렸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장교의 조직이 산산이 허물어졌습니다. 이런 일은 세계 군대 역사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 결과 장교들의 품행이 저하되고 사병들과 똑같이 하잘것없는 행동을 하였고, 명예심이나 책임감을 갖지 않은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장교와 사병의 질서가 깨어져 결국 군대의 역할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교들을 다시 원대 복귀하여 장교로서의 권리를 누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중요한 존재로 인식될 때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면 자기의 일도 소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인식이란 철저하게 자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지팡이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지팡이만 가지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자기 지팡이를 던져야 합니다. 자기 지팡이를 아무데나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의 주인인 하나님 앞에 던져야 합니다. 그 때 자기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내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화될 때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변화된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져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소유하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기적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라
출 4:18-31 / 피영민 목사
서 론
모세의 120년 생애는 각각 40년씩 3단계로 전개된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40년, 1단계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어 애굽의 모든 학문을 익히는 시기였습니다. 이로인해 그는 모세오경을 기록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지성적인 훈련을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2단계 40년은 여러모로 괴로운 훈련이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영광도 빼앗기고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일개 목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대로 나는 망했구나!”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두 번째 40년의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광야의 지리를 익히고, 방향감각을 기르고, 기후 변화를 잘 예측할 수 있어야 200만 명이 넘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르게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인생이 후퇴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결코 후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세의 인생 80년은 모두 훈련의 시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훈련이 빛을 발하게 된 클라이맥스가 모세의 인생 후반부 40년, 3단계였습니다. 모세는 후반부 40년 동안 하나님의 계시를 수납하는 ‘계시의 수납자’가 됩니다. 모세오경을 기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예표하는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이는 아주 복되고 영광스러운 단계였습니다. 비록 나이가 들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생에 광명한 앞길을 열어주시니 훌륭한 삶의 단계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이 어떠했든 앞으로 우리 삶의 단계는 더욱 복되고 더욱 영광스러운 빛이 비취는 단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4장에는 모세의 마지막 40년, 더 나은 인생의 단계와 더 큰 도약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시키신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인생이 앞으로 더 복되고 영광스러운 단계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섯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자신의 무능함을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하라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참으로 무능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있어도 별 것 아니고, 없어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은 능력이 많으나 적으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게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는 비록 무력해 보이고, 무능하다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앞길은 활짝 열릴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해서 사는 사람의 인생은 광명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출애굽기 4장 1절에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합리적인 변명이었습니다. “제가 40년 전에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며, 나는 그럴만한 권위도, 능력도 없습니다.” 모세의 변명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이 변명에 대해 하나님의 재치있는 대답은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였습니다. 이에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필요한 능력과 권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모세에게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만한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팡이와 모세의 손’입니다. 지팡이와 손이 무슨 능력이 되고 무슨 권세가 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 지팡이와 손을 쓰시면 권세가 되고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것으로 세 가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지팡이를 던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지팡이를 던지자 뱀으로 변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이미 광야에서 많은 뱀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뱀을 잡을 때는 절대로 꼬리를 잡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해서 꼬리를 잡았더니 뱀이 다시 지팡이로 변했습니다.
당시 뱀은 바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상징하는 동물이 봉황이고,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 용이듯이 뱀은 애굽의 바로를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로의 권력이 세상 최고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내가 네 뒤에 있으니 단숨에 제압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둘째는 손을 가슴 품에 넣었다가 빼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어넣었더니 손이 하얗게 변하여 심각한 문둥병이 발하게 되었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품에 넣었더니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질병도 있을 것이고, 위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나의 지배를 받는 것이기에 걱정하지 말고 가라”는 의미였습니다.
셋째는 나일강의 하수를 취하여 육지에 부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피가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곳에 ‘나일러스’라는 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일강물을 피로 변하게 만든 것은 “이 세상 신이라고 불리는 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는 존재들이고, 모세를 해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세 가지 기적을 보여주신 이유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이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팡이와 손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던졌다가 잡으면 되고, 손도 넣었다 빼면 되고, 물은 부어버리면 됩니다. 모세는 이제부터 자기의 무능함에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주목하여 인생의 영광스러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약한 사람입니까? 그는 몸에 병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바울을 보며 자기 병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뭘 저렇게까지 설치느냐고 빈정댔을지도 모릅니다.
거기다 바울은 언변이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설교도 시원찮은데 당신이 사도 맞느냐?”며 그를 멸시하였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약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약할 때 더욱 큰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강한 척하고 강한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내게 더욱 유익한 일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마틴 로이드 존스라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설교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로이드 존스를 부목사로 키운 담임목사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조지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꽤 규모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았지만, 해당 교회 장로 12명이 캠벨 몰간의 설교를 듣고 점수를 매긴 후, 이 사람은 우리 교회에 합당하지 않은 무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청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설교 능력이 계발되었고, 1904년 그의 나이 42세가 되었을 때, 젊은 시절 청빙을 받았던 교회보다 훨씬 규모가 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목회를 하게 되는 강해설교의 대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임자로 로이드 존스를 세웠습니다. 로이드 존스도 훌륭한 설교자였지만, 캠벨 몰간 역시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캠벨 몰간도 젊었을 때 교회의 청빙을 받았다가 무능하다는 이유로 떨어진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노력하면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받는 것이 은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Gift)는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받는 것은 임금입니다. 은사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은혜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을 때는 이미 감당할 능력 또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이 우리의 노력을 통해 계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력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모세에게 손과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지팡이를 쓰시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위대한 지도자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장사를 하든지, 예술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우리의 직업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명을 주셨을 때에는 그것을 잘 할 수 있도록 능력도 이미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능력으로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고 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계발되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고, 다음 인생의 단계가 영광스러운 단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능합니다. 그러나 무능하다고 우리의 인생이 복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무능해도 얼마든지 복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Ⅱ. 남들보다 잘하는 탁월함보다 사명에 대한 충실함이 더욱 중요하다
남들보다 잘하는 탁월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탁월함보다 충실함이 더욱 필요합니다. 출애굽기 4장 10절에 모세는 하나님께 또 다른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남보다 말을 잘하는 웅변의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00만 명을 대상으로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 웅변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드디어 화를 내셨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 4:12).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출 4:15).
이처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의 탁월한 웅변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충성스럽게 전달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를 크게 할 것도 없고, 그저 네 입에 주는 말을 그대로 전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대로만 하면 되는데 왜 그것을 자꾸 못한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탁월함이 부족할 수는 있지만, 충실함은 얼마든지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탁월함이 아니라 충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영계(靈界)를 주름잡을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졸업하기만 하면 엄청나게 교회를 부흥 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탁월하고 능력이 있는 것보다 충성스럽고 성실하게 목회를 준비한 사람의 앞길을 열어주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능력을 요구하시지 않고, 충성을 요구하셨습니다.
Ⅲ. 인간관계를 바르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야곱과 모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라반의 두 명의 딸을 아내로 삼고 자식도 12명이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외삼촌과 갈등이 생기자 처자식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하였습니다. 외삼촌이지만 장인이기도 한 라반에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자 라반이 화가 나서 야곱을 혼내주려 쫓아갔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선악 간에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야곱과 화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야곱과 달랐습니다. 그는 장인 이드로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습니다. 모세가 장인에게 가서 하나님이 나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셨으니 가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는 내 백성들이 생존하였는지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장인에게 모두 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 가보려고 한다고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장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고 허락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인간관계도 바르게 정리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앞길이 아름답게 열리려면 인간관계로 인해 막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일했지만, 아무런 인사 한 마디 없이 그냥 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그들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인간관계의 매듭을 바르게 정리하지 못하는 삶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연애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부부도 함께 살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의 다음 인생의 단계가 절대로 광명한 단계가 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바르게 인간관계를 정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Ⅳ. 작은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작은 일과 큰 일이 주어졌을 때, 작은 일은 소홀히 여기면서 큰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작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이 큰 일도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와 작별하고 아내와 자녀들을 나귀에 태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애굽으로 갔는데,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에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숙소에서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애굽으로 가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중간에 죽이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그 즉시 원인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차돌을 취해 날카롭게 갈아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모세가 아내인 십보라에게 계속해서 할례행할 것을 요구했지만, 굳이 피를 흘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던 십보라가 이제야 할례를 행한 후에 고백한 말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렇게 작은 일 하나라도 반드시 순종할 것을 원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0~11절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의 표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징을 소홀히 여겼던 것입니다. 아내 십보라의 주장에 설득을 당한 셈입니다. 그러니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할례행할 것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문제를 크게 보시고 모세의 목숨을 취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하나님 여호와는 작은 일에도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임을 철저히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공군들이 조종하는 비행기는 한 대가 수백억을 호가합니다. 그런데 그 중 폭격기 같은 것은 수천억이 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떨어지면 조종사도 죽고 비행기도 박살나서 못 쓰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통 나사 하나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해서 그런 일들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모두 작은 일 하나를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을 해야 그 다음 단계에 많은 것을 맡게 되는 복된 단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맡고 있는 직분이 어떤 것이든지 작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욱 큰 일도 맡기시고 큰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Ⅴ.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전진하는 담대한 자세가 필요하다.
“80세가 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바로를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4장 23절에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어려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출 4:23). 바로에게 가서 내 메시지를 전하는데 “네 장자를 죽이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여러분, 당시 바로는 애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 앞에 가서 “나의 하나님이 너의 맏아들을 죽일 것이라”고 말하면 모세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잘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없이 용기 있게 나아갑니다. 80세가 된 노인이 네 맏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배척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4장 31절에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배척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훈련을 잘 받아 인생의 마지막 40년을 참으로 복된 인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결 론
지금까지 우리 인생이 어떤 삶이었든지 간에 앞으로는 우리의 생애가 더 복된 단계로 나아갈 줄 믿습니다. 성도의 인생은 광명한 해가 돋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삿 5:31). 광명한 해가 솟아오르는데 어떻게 어두워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단계가 점점 좋아지려면 “아이고!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한가?”, “아이고! 나는 왜 권위가 없는가?”, “아이고! 나는 못하겠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가 두렵다고만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단계를 영광스러운 단계로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앞으로 내가 맞이하게 될 인생의 단계는 광명한 해가 돋는 것 같다고 선포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소망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
출 4:18-26 / 박봉수 목사
토마스 카알라일이란 분이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인생길을 걷다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약자는 그 일에 걸려 넘어져 인생에 큰 낭패를 겪지만, 강자는 그 일을 디딤판으로 삼아 인생에 큰 도약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자와 강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인생길에서 만나는 어려운 일을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약자는 똑 같은 어려운 일을 만나서 그것이 자기 인생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데 비해서 강자는 그것을 자기 인생의 디딤돌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아! 큰일 났다!”고 가슴 깊은 곳에서 절규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해 진 뒤 어두움이 몰려오듯이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약자는 밀려오는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일이 걸림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강자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일이 디딤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약자와 강자의 차이는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밀려드는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처리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다를까요 왜 약자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데 강자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믿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약자는 믿음이 연약해서 두려움이 밀려들 때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결국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강자는 두려움이 밀려들 때 믿음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서 결국 두려움을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과 두려움의 관계는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습니다. 옛날 호롱불을 키고 살 때 불을 켜도 여전히 방안 가득 어두움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와 형광등을 켜면 방안 구석구석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이 굳건하면 두려움은 극복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믿음이 연약하면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그 위세를 떨칩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선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신념은 “나는 할 수 있다”라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 잠재력이 있고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사고를 버리고 적극적인 사고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신념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방 사실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은 바로 신앙입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은 참된 신앙 그 신앙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수 1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세를 뒤 이어 중차대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여호수아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곧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코 “너는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 41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과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강대국의 위협에 시달리며 두려워 떨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저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고 인생의 어려움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나이 80에 뜻밖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도무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라고 거절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무려 네 차례나 하나님께 거절했습니다. 모세가 아직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면서 모세에게 믿음을 세워 가십니다. 연약한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십니다. 제일 먼저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가 정령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동의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내가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굳게 믿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다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순종하고 애굽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제 출애굽의 대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애굽으로 떠나는 모세 일행의 모습을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다른 여행 때와 다른 차이는 한 가지 뿐입니다.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모세가 잡았던 하나님의 지팡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본문 앞부분을 보면 4;17절에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양을 칠 때 늘 들고 다니던 그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늘 들고 다니던 그 지팡이를 다시 잡고 애굽으로 갔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한 것입니다. 물론 재질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흔하디흔한 광야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런 지팡이입니다. 또한 기능이 달라진 것도 아닙니다. 로봇처럼 자기 스스로 길을 찾아간다든지 빛이 나와서 어두운 길을 밝혀준다든지 하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서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 그 약속이 이 지팡이 위에 얹혀진 것입니다. 이제 모세가 이 지팡이를 잡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모세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똑 같은 지팡이이지만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의 아주 특별한 만남을 가진 뒤에 그동안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지팡이를 들게 될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을 들고 놀라운 능력을 행하고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 것처럼 오해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남다른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특별한 무엇인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직업도 새 직업을 갖게 되고, 상황도 달라지게 되고,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러나 모세가 전에 들었던 지팡이를 다시 들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때문에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 그 약속이 덧입혀진 것 그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업하던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주어지면 그 사업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피아노치던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주어지면 그 피아노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주어지면 그 공부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시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위대한 일을 하고 있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하거나 나 혼자하면 그것은 여전히 모세의 지팡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일일 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으려면
모세는 자기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가끔 재미삼아 마술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술사들은 결국 눈속임을 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술사들은 때로는 희한한 주문을 외웁니다. 콧기름을 바르기도 합니다. 기합을 넣기도 합니다. 물론 다 속임수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했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모세가 한 일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오늘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줄 것입니다.
1. 자기의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출 4;2-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가 그냥 잡고 있었다면 그 지팡이는 여전히 모세의 지팡이로 남았을 것입니다. 순종하면서 던졌을 때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는 모세에게 있어서 생계의 뿌리입니다. 그 지팡이 때문에 먹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는 모세에게 있어서 존재 이유입니다. 자기가 지난 40년 저 지팡이 잡고 살아왔고 지금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유도 저 지팡이를 잡고자 함입니다. 그 지팡이는 모세에게 있어서 삶의 보람이요 기쁨입니다. 그 지팡이를 들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열매도 얻어 기쁨도 누립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을 땅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기하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지팡이 때문에 먹고 살았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 때문에 지금 살고 있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 때문에 보람과 기쁨을 누린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 때문에 내가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 때문에 보람과 기쁨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명하십니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 그것 때문에 먹고 산다는 생각, 그것 때문에 존재한다는 생각, 그것 때문에 보람과 기쁨을 누린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화시켜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십니다.
2. 뱀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뱀이 됐습니다. 4;3을 보면 모세가 그 뱀을 피했습니다.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손을 내밀어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순종하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뱀은 당시 바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왕관 한 복판에 코브라 뱀을 세워놓았습니다. 애굽 왕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창 3;15 이후 이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탄의 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피하지 말고 잡으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꼬리를 잡으라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뱀을 잡을 때는 머리 목 부분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돌아서서 물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코브라 꼬리를 잡으면 그대로 돌아서서 공격합니다.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고 꼬리를 잡으라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 바로 앞에 담대하게 선 것입니다. 사탄과 정면 승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꼬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지팡이는 더 이상 과거의 모세의 지팡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능력의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앞에 다가선 뱀을 두려워 피하지 말라”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뱀의 꼬리를 잡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대적 앞에 담대하게 설 때 사탄과 정면 승부를 벌일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애굽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이제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핑계 대며 버티던 것에서 돌아서서 애굽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때 비로소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 이 때 다시 돌아서서 미디안 자기 집으로 갔다면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이 때 다시 그 지팡이를 들고 양치는 일을 했다면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사명을 위해 사용할 때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하나님의 지팡이는 더 이상 능력을 나타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팡이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 바로 앞에 설 때 그 지팡이를 잡고 섰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로 땅을 치니 땅의 티끌이 이가 되었고, 하늘을 향하여 그 지팡이를 들자 뇌성과 우박이 쳤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앞에 섰을 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 밀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모세가 르비딤 산 위에 올랐을 때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위에 섰습니다. 저가 손을 들고 기도할 때 아말렉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려면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으시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라
출 4:18-26 / 2003.09.05 / 조재진 목사
우리는 늘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가슴에 와 닿고, 우리 영혼을 터치하고, 또 말씀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삶의 변화란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변화된 삶을 살려면 순종이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해 지는 것,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이런 축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기 위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이 아브라함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편견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생각과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지 않는 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가족과 조국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편견을 버리고 자기가 선호하던 것을 바꾸어야 하기도 했지요. 또 어떤 이들은 자기가 추구했던 이상과 소원을 포기해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우리가 있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조정이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성경에 보면 서로 비교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두 사람 다 부자입니다. 한 사람은 누가복음18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계명은 어려서부터 잘 지켰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그러나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한 거지요. 그러다가 슬그머니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에게로 자신의 인생을 조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기의 부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자청년이 실패한 것은 자기의 삶을 주님에게로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너무 만나고 싶어서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오실 때 뽕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삭개오를 향해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합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오자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로 조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똑같은 부자였지만 부자 청년은 영생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삶을 주님께로 조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삶을 주님에게로 조정합니다. 그 결과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서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 생활을 오래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삶을 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 그렇게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로 조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삶을 조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면서도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세례를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세례문답을 할 때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니까 심각하게 고민을 합니다. 그러더니 세례식을 있는 그 다음 주일에 그만 교회에 안나왔습니다. 삶을 조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지요. 반면 제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 함께 교회를 섬겼던 장로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권사로 있을 때까지 등산을 너무 좋아해서 주일예배는 많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서 삶을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등산을 포기한 것이지요.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하고 비로소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지식으로 이해하고 가슴에 와닿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삶을 조정하는 것을 잘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서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그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해야 했습니다. 그냥 미디안 광야에 머물러 양을 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는 일에 순종하기 위해 그는 애굽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바로 앞에 서야 합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가 있고, 자기를 죽이려고 찾는 바로가 있는 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으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자 모세가 어떻게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해 나갑니까?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먼저 본문 18절에 보면 그는 장인 이드로에게로 가서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장인에게 말할 때 ‘노예상태에 있는 내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 형제들이 생존해 있는지 보러간다고 말합니다. 아마 모세의 마음속에는 그가 받은 소명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 체험한 놀라운 일들이 그에게 있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큰 임무는 여전히 그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모세의 이런 마음을 그대로 읽고 있다는 듯이 그에게 놀라운 말씀을 주었습니다. 19절을 함께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다’는 말은 참 놀라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이 뭐가 중요한가?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애굽으로 가는 모세에게 약점 잡힐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40년 전에 저질렀던 살인사건입니다. 과거의 상처, 믿음 없이 행하다가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만약 내가 애굽에 갔을 때 누군가가 나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살인자라고 몰아붙인다면 어떻게 견딜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삶을 조정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모세를 염려하게 하고 불안하게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그 문제를 가지고 너를 참소할 자는 애굽에 단 한명도 없다’ 지금 하나님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는 모세에게 마치 의의 두루마기를 입혀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40년이 지나 공소시효가 끝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순히 시간만 오래 지났다고 해서 과거의 죄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보시고 모세의 죄를 가려 주셨습니다.
요즘 장 상 총리서리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정가의 핫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아직 인사 청문회가 시작도 안됐는데 한나라 당에서는 벌써 아들문제, 학력문제를 들추어내면서 흠집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과거의 숨겨둔 부끄러운 것이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장상총리서리가 총리직을 수행하기가 그렇게 만만치 않게 보입니다. 아마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신변을 잘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장관은 과거의 허물이 드러나서 장관직을 임명받고는 며칠만이 그만 두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부끄러운 부분이 드러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집이 두 채 있으면 빨리 처분해야 하고, 국적문제도, 아들 병역문제도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치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정치할 사람이 없으니까 상관없겠지요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인사 청문회는 없지만 악한 사단이 주의 일을 하려는 주의 종들의 과거의 상처, 과거의 허물을 들고 나서서는 정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과거의 일이 올무가 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의 과거, 모세의 허물을 씻어주시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참소하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기도의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난 허물을 가려 주시고 덮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습니까? 더 이상 지나간 과거의 허물과 죄악을 매여 있지 말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조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두 번째 우리가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20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여기에 보면 우리의 눈에 확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양떼를 치던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습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지팡이입니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토프카피 박물관에 ‘모세의 지팡이’가 소장되어 있답니다. 길이가 1m 남짓하고 조금 굵은 나무 막대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박물관에 있는 막대기가 모세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미디안광야에서 자랄 수 있는 나뭇가지를 생각해본다면 아마 그 정도의 크기의 막대기가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그렇게 볼품없는 모세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보잘 것 없는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까?
출애굽기 4장 전반부에 보면 소명 받은 모세가 주저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 입니다.” “그것을 땅에 던져라”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지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말합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라” 말씀대로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통해 모세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팡이는 모세 자신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과거에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의 힘과 자기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뱀처럼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뱀의 꼬리를 잡자 다시 지팡이가 되었지요, 마치 이것처럼 실패한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내 목적을 위해서 지식을 사용하면 그것은 나의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 지식을 드렸을 때, 그 지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 재능을 하나님께 드려보십시오 그러면 그 재능은 하나님의 재능이 됩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몸, 성전이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최고의 살인은 나의 은사, 나의 가능성, 나의 달란트에 죽음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냥 내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차입니다. 그냥 내 것입니다. 내 재능, 내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른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성경에 보면 모세의 지팡이는 이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볼품없는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이 지팡이를 내밀자 홍해가 갈라집니다. 이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보십시오 여기 “네 손에 준 이적”이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지팡이를 잡고 행할 하나님을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가 기적의 도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돌아볼 때 자신은 볼품없는 막대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나이 80세가 된 몸으로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볼품없는 막대기와 같은 자신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 속으로 자신의 삶을 던졌을 때 그는 더 이상 볼품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되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 나의 만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어린이가 한 사람밖에 먹을 수 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주님께 드렸을 때,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의 도시락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마른 막대기와 같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맡기는 일대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 인생을 조정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그 분에게 우리의 삶을 드리고 더 이상 마른 막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크기의 일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4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애굽땅으로 가고 있는 도중에 이상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향하여 가는 모세를 죽이시려고 했을까요? 성경 중에서 해석하기 참 난해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뭔가를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말씀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일을 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한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다가 웃사와 아효가 죽은 ‘베레스 웃사’의 사건입니다. 이 말씀도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오는데 갑자기 제사장 둘이 죽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큰 나라를 만들어 나가면서 잘나가는 다윗에게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주시기 원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도 말씀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열심을 낸다는 것도,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도 다 말씀 안에서 행하여 져야 합니다. 병고치는 것도 중요하고, 능력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그 아내 십보라가 재빨리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차돌을 취하여 아들의 양피를 베어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당신은 내게 피남편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십보라가 지체 없이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왜 모세가 자녀들을 낳고서도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자신이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하여 살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자녀들에게 믿음의 교육을 제대로 안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아내 십보라도 할례를 우습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를 건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모세를 막아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앞에 나오는 22-23절 말씀과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면서 바로에게 선포할 중요한 메시지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다. 네가 불순종하여 내 아들을 내어보내지 않으면, 바로야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장자로 택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장자를 내보내지 않고 불순종하는 바로의 아들, 장자는 죽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해방될 것입니다. 반면 바로의 장자는 죽을 것입니다. 똑같이 애굽에 죽음이 임했는데 어떻게 바로의 장자는 죽고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습니다. 두 백성의 운명이 나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애굽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삼은 것은 언약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오래전에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표시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은 반드시 그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언약의 백성, 하나님의 장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할례는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대강 생각한 것입니다. 양피를 베에 피를 흘리는 할례의식을 소중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아내 십보라가 할례를 하잖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남편 모세를 보니까 실패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받은 할례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그들은 하잖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데 사람들은 하잖게 여기는 것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부분을 건드린 것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 할례를 그냥 잊고 지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은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하잖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세가 할례를 그냥 지나쳤듯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예배가 그렇습니다. 요즘 주 5일 근무제가 되면서 주일예배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안그래도 주일 예배드리는 것을 대강 생각하는데 주 5일 근무제가 되면 어떻게 되겠냐? 라고 걱정합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매주 반복되는 예배이고, 한 달에 한번 성찬식하고 십일조는 누구나 하는 것이고 기도도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같습니까? 전도하는 일이 하잖는 일처럼 느껴집니까? 세상과 다르게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들은 하잖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날 모세를 막아선 것처럼 여러분들을 막아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로 삶을 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로 조정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까?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확신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른 막대기 같은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삶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사용되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