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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효재마리아(수풀)
김범연 미카엘 신부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사야 55,10-11 마태오 6,7-15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상에는 사실 수많은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들은 모두 사람이 지은 기도이지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기도만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인간이시며 하느님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는 단 하나,
오늘 복음에 나온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8가지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선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1.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주님의 기도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처음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고 하느님께서는 주님 즉, 우리의 주인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이 말은 우리를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이끌어 올리심을 뜻합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뜻을 따르는 것과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구절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입니다.‘
거룩히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사전을 찾아보면 ‘거룩하다’는 ‘성스럽고 위대하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다라는 말의 원전을 찾아보면 거룩하다는 말은 ‘다르다’,
‘분리되다’라는 말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일반적인 것들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속된 우리들의 삶과 세상과 구별된 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구별된다는 것은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맹세나 선언을 할 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두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두고는 맹세하거나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가 거론 할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이고
그 이름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 구절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천국 즉,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나라가
오시기를 청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느님의 사랑안에 머무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기를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4. 그리고 네 번째 구절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 그곳은 바로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하늘나라처럼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땅도 하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5. 다섯 번째 구절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입니다.
우리 인간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육신의 굶주림을 채워야 하지만
또한 영혼의 굶주림도 채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은 우리 육신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양식이기도 하지만 우리 영혼을 유지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5. 여섯 번째 구절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입니다.
용서는 잘못한 일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잘못을 하였다면
그 대상인 사람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상처를 준 사람도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도 상처를 받으실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밖에 없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이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상처 준 사람이 상처 받은 사람에게 용서를
청함으로써 그 일들은 마무리되어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받으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7. 일곱 번째 구절은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유혹과 마주치게 됩니다. 특히 이 유혹은 교묘해서 우리들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건드리며 우리를 죄악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유혹을 우리는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은 숨길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우리를 붙잡고 멀리 끌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좋은 일이라도 그 일이 우리가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유혹이 될 것입니다.
8. 여덟 번째 구절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입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아무리 피해가려고 해도
죄를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죄에 빠져 있을 때에도 우리를 구해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가장 필요한 것들만을 모아놓은 기도입니다. 또한 이 기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알려주신 유일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오늘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그 뜻을 새롭게 이해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김범연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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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사야 55,10-11 마태오 6,7-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구약의 시편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임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 섭리와 사랑을 찬미하면서 또 한편으로 시편의 저자들은 주저리주저리 삶에서 겪는
순간들을 하느님께 아뢰며 도움을 청하며 기도합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생활 중에 하느님께 세련되지 못한 서툰 마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골격을 이루고 있던 토라 중에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율법은
고대 근동의 대표적인 하무라비 법전의 틀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 십계명은 크게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본분과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을
분리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십계명의 내용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도리와 인간에 대한
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의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 형식적인 빈 말의 기도에 대해서
조심하라 일러주시며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십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긴 기도를 경계하라 이르시고 아무도 안 보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는 종교지도자들의 자선과 기도에 대해 경계하라고 하시며 가르쳐 주신 배경과는 다르게
루카 복음사가는 제자 중에 하나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루카 복음 11장 2절-4절)라고 청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도는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의 분위기로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하나의 기도형태를 가르쳐 준 것으로 추측합니다.
주님의 기도 시작부터 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가요?’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1)
우리 문화에서는 ‘우리 아버지’가 자연스러운 데 비해 유대인들과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이 기도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 구원의 공동체를 위한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창세기에 기반을 둔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친근감 있게
‘우리 아버지’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기도도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9-10) 2)
기도의 두 번째 부분에서 인간에게 중요한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에 대한 청원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그냥 먹고사는 일반 양식이 아니라 ‘매일. 날마다’라는 부사와 , ‘일용할’이라는
형용사를 ‘빵’이라는 단어에 붙여서 특별하고 제한된 의미를 부여하신다.3)
예수님께서 우리가 사실 힘들기는 해도 이웃의 잘못에 대해 용서하도록 많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청하라고 하십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4)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2-13)5)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는 보통 기도라고 하면
청원기도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아름다운 기도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듯, 매일 양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 힘겨워 하는 것은 용서는 하고 싶은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용서는커녕 분한 마음에 상대를 저주하고 싶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용서에 이력이 나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용서도 그때 그때 우리가 부족하니까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 하지요. 용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용서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 틈새만 있으면 주님께서 용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어도 주님의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매일매일 겸손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매일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의 이름과 뜻이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가 용기를 내어 용서할 수 있도록 어떤 유혹에서도 어떤 악에도
사로잡히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 Πάτερ ἡμῶν)’은 사실 우리 정서에는 낯설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 우리는 ‘우리 엄마’, ‘우리 언니.’ 우리 동네‘, ’우리 본당’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영어권에서는 ‘우리’가 없고 ‘my father’, ‘my mother’라는 표현이 당연하다.
‘네 것’과 ‘내 것’으로 구분하는 문화의 차이를 갖는다.
구약의 유대인에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Αββα ὁ πατήρ)’하고(로마 8,15)” 외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에서(마태 26,39), ‘나의 아버지(파테르 무 Πάτερ μου)’라고 불렀고,
또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마태 27,46)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람어 ’eli, ‘eli’ 그리스어 Θεέ μου θεέ μου)‘라고 시편 22,2 기도를 바치신다.
2)
첫 번째 이 부분의 기도는 주님 일생의 가장 중요한 소임인 ‘당신의 이름(토 호노마 수 τὸ ὄνομά σου)’이
거룩하게 빛나시기를, ‘당신의 나라 (ἡ βασιλεία σου)’가 오시기를,
그리고 ‘당신의 뜻 (τὸ θέλημά σου)’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다.
3)
좀 더 빵에 대한 구절을 풀어보자면 “‘오늘(세메론 σήμερον/부사)’, ‘일용할
(톤 에피우시온 τὸν ἐπιούσιον/형용사)’, ‘우리의 빵(톤 아르톤 헤몬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을’ 저희에게
주소서.”(6,11)
‘오늘’과 ‘일용할’이라는 단어는 그날의 빵을 가리킨다. 하느님께 욕심내지 말고 매일 먹고
살 수 있는 빵을 청하라는 뜻이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의 양식인 만나를 내려주시며 당부하신다.
“너희는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여라. 그래서 그들은 아침마다, 제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였다.”(탈출 16,16.21) 욕심을 내고 만나를 더 거두면 해가 뜨거워지면 녹아버리고
구더기기 꾀었다. 예수님께서도 욕심을 내지 말고 하느님을 굳게 믿는
가난하고 정직한 마음을 주문하신다.
4)
이 문장은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직역하자면 “저희가 ‘저희의 잘못한 이들에게
(토이스 오페이레타이스 헤몬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용서를 한 것처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을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번역한다.
자칫 잘못 번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했으니, [당연히 그 결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세요.’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것보다는 주님께서 이웃에게 너그러운 마음, 늘 용서해야 하는 마음을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한다.’(마태 19,22)라고 베드로에게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만 탈렌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 매정하게 구는 종의 비유 끝에
“너희가 넘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9,35),
또한주님의 기도’를 마감 하시며 주님께서 ‘용서’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마태 6,14-15)
5)
“저희를 유혹으로 (에이스 페이라스몬 εἰς πειρασμόν) 인도하지 마시고, 그러나 저희를
‘악으로 부터(아포 투 포네루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구하소서.”
유혹과 악의 세력에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청하라고 하십니다.
유혹을 원하는 사람도 없고 또 악의 세력 앞에 힘 있는 사람으로 행세할 수 없다.
유혹은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하듯이, 교만하고 우쭐거리는 마음을 갖게 하고
또 보기에 달콤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담과 하와에게는 죽음이 오듯, 인간에게는
결국 파멸을 가져 온다. 악의 세력은 마귀가 ‘군단’이라고 말했듯이
그 세력은 대단하다.
그 앞에서 마찬가지로 교만하지 말고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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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충희 신부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이사야 55,10-11 마태오 6,7-15
주님의 기도
테르툴리아노 교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주님의 기도를 일컬어
‘복음의 요약’이라 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 6장 9-13절과 루카 복음 11장 2-4절에
실려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태오 복음서의 긴 형태에 따라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마태오 복음의 기도문에는 하느님에 관한 청원 세 가지와 우리에 관한 청원 네 가지가 나옵니다.
하느님에 관한 청원 세 가지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 관한 청원 네 가지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도 용서하듯이 우리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좇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신앙인이 되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과 이웃을 보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 관한 청원에 나오는 ‘유혹’은 하느님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려는 유혹,
일용할 양식을 혼자만 차지하려는 유혹, 불목하라고 부추기는 악마의 유혹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는 어떤 모임을 시작하기 위한 ‘신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형식적으로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원주교구 류충희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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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효재마리아(수풀)